□ 황진이(黃眞伊) 2015.04.05.일요일.흐림
황진이; 조선 중기의 시인,기녀,작가,서예가,음악가,무희
생졸; 1506?-1567년?
이름; 다른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은 명월(明月)
중종,명종(16세기초,중순경) 활동했던 기생으로,
중종 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의 서녀로 태어났으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시와 그림,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은일사들과도 어울렸다.
성리학적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이런 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도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뛰어난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신분 특성상 황진이라는 이름이 정사에 등장하지는 않으며, 여러 야사들을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이 전해 내려온다. 성리학 지식도 해박하였으며, 학자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다가 실패했다고도 한다.
서경덕,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도 불렸으며,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박연폭포시' 등이 있다.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언급이 금기시 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황진이의 정확한 출생년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506년 전후로 추정된다. 그녀는 개성에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녀였다. 아버지는 황씨 성을 가진 양반으로 일설에는 진사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기생 또는 천민 출신으로 누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진현금'(陳玄琴)이라고 불리던 시각 장애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일설에는 시각장애인인 평민의 딸로 태어났다는 전설도 있다.
그녀가 살던 장단군 입우물 고개에는 1945년 광복 당시까지도 약수가 나왔다고 한다.
황진이는 조선의 신분제인 종모법에 따라, 아버지가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천출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황진이라는 이름 자체도 본명이 아닌 것으로 추측하는데,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본명이 ‘황진’이고 접미사 ‘-이’가 붙은 이름이 전해 내려 온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은 옛 조선 여성들의 이름에 그 근거를 둔다.
그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 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운 것으로 봐서는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여덟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 때 벌써 웬만한
한문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어머니는 기생 또는 천인 출신으로, 서녀 출신임을 비관하여 스스로 기녀가 되었다고 한다. 어려서 교방(敎坊)의 동기(童妓)로서 기녀가 되어 대성하였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어느 날 당대의 명사인 송공(宋公)의 대부인(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가창과 미모가 아름다워 유명해졌다. 이때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명나라 등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기녀가 된지 수년 안에 그녀의 재주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그녀의 명성은 한성과 전국 팔도에까지 회자화되었다. 시와 글씨, 그림, 서예에 두루 능하였다.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 성리학과 고전 지식 역시 해박하였다. 한편으로는 당대의 명사, 한량들과 교류하며 시문 등을 주고받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한번은 왕족인 벽계수를 유혹하는가 하면 당대의 고관대작들을 유혹하거나 망신을 주기도 했다. 또,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승려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다.
당대의 석학의 한사람이던 서경덕을 유혹하는 것은 실패하였으나 그의 인품에 탄복, 서경덕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 그에게서 당시를 배웠다고 한다.
황진이의 여러 시조들은 문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어 고전 한국 문학의 일부로 인정되며, 교과서에도 실리는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성리학자 화담 서경덕과의 사랑 등으로도 유명하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거나 교류하였으며, 남녀간의 애정에 대한 내용을 시와 그림으로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유실되었으나 몇 수의 시가 현재 전한다. 뛰어난 시, 그림, 글씨 재주와 함께 성리학과 고전에도 능하였으며 뛰어난 미모를 갖추어 유명하였으며,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렸다.
용모가 출중하고 노래, 춤, 악기, 한시 등에 두루 능했기 때문에 당시 선비들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와 당대의 내로라 하는 선비들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남게 되었다.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으나 나이 들면서 한 남자를 의지 하고 싶은 마음에 벽계수를 사랑하기도 했으나 사랑이 이루어 지지 못하고 크게 상처를 받고 방황을 했다고 한다. 벽계수와 사랑을 이루지 못함에 슬픈 세월을 보내며 방랑을 하다가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당시 벽계수라는 인물은 왕손으로써 세종의 손자 영해군파 길안도정(吉安都正) 의(義)의 다섯쩨 아들인 이종숙으로 알려진다. 이종숙은 1508년생으로 인종조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풍류에 능하여 황진이 명성을 듣고 찾아가 놀기는 했으나 그와 가정은 이룰 수없어 황진이의 사랑을 거절하고 떠났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다가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3]
이사종과 헤어지고 다시 개성으로 되돌아왔으나 지족선사를 잊지 못해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황진이의 재방문에도 수행중이던 지족은 요지부동이었고, 지족암에서 끄떡없이 앉아 있는 지족에게 다가가 꽃을 꽂고 수행 중이던 지족의 무릎을 베고 잠을 청하기도 하고, 말도 걸어 보았지만 지족선사는 그대로였다. "지족! 그대 같은 큰 위선 덩어린 없을 거요!" 황진이의 지적에 놀란 지족은 다시 무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다시 암자로 찾아가 황진이가 지족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한참 뒤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끼고 지족이 그를 깨우니 지족이 덤덤한 웃음으로 말을 건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족선사와의 관계도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떠나게 된다.
한편 황진이는 당대의 은둔학자인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는 서경덕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녀의 사망 일자와 정확한 사망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죽기 전에 나 때문에 천하의 남자들이 자정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동문 밖 개울가에 시체를 두어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하여 주시오"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황진이의 유언에 따라 그대로 하였는데 한 남자가 거두어 장사 지냈다는 전설도 전한다.
1567년 무렵을 전후해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대부의 위선에 대한 조소와 미모로 남성을 유혹한 것 등이 문제시되면서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과 사대부에 대한 모욕적인 행실 등이 문제시되어 언급이 금기시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일설에는 그가 죽은 뒤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일부러 들판에 버려졌다는 전승까지 누군가에 의해 유포되기도 했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구정현 판교동(현재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판교리)에 있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이나 풍류장에서 지어졌고, 또한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했다. 황진이 사후 음란하다는 이유로 사대부들에게 지탄을 받았고, 사대부들에 대한 조롱과 풍자, 유혹 등의 행실이 문제시되어 언급이 금기, 기피되었다. 그러나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시 재주와 학식,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었으므로 그에 대한 일화가 구전을 통해 많이 전해졌다.
그의 작품들 역시 그가 음란함의 상징으로 몰렸고, 전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사라졌으며, 남은 작품들 또한 사대부에 대한 조롱과 풍자 등이 문제시되어 제대로 보전되지 못하여 대부분 인멸, 실전되었다. 그의 시와 작품들 중 일부는 '청구영언'과 '해동가요', '동국시선', '가곡원류' '대동풍아' 등의 문헌에 전하고 있다.
또한 금계필담과 어유야담 등에도 그에 대한 일화가 일부 전해져 내려왔다.
그가 지은 작품으로는 한시로 박연폭포시, 영초월시, 등만월대회고 등이 전하고 있으며,
시조 작품으로는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언제 신의 없어, 산은 산이로되,어져 내일이여 등이 있다.
항간의 소세양 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랑과 황진이의 극진한 이별의 시를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극작가 양인자씨가 황진이와는 전혀 관계없이 본인이 창작한 시 라는 것을 티비에서 밝힌바 있다.
황진이’는 실존 인물로 보입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참 많습니다. 천한 기생의 이야기가 어찌 이렇게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역사에 기록되었을까요. 그의 삶을 추적해 가는 일은 역사가 무엇인가 다시 깨우치게 되는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녀의 삶은 왕조실록으로 재구성된 과거가 얼마나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는지 여실히 보여 줍니다.
『어우야담』 등의 기록에 의하면 기녀 황진이가 인연을 맺은 사람으로는, 수십 년 면벽수련으로 유명한 고승 지족선사, 대학자 화담(花潭) ‘서경덕’, 판서 ‘소세양’, 왕족 벽계수 ‘이종숙’, 선전관 ‘이사종’, 재상의 아들 ‘이생’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들은 실존 인물이긴 하지만 ‘황진이’와의 애정 행각이 실재했는지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야담으로 전해지다가 기록된 바에 근거했을 뿐입니다. 그녀의 작품이 언급될 때 그 창작 배경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인물들이 언급되었는데 황진이가 유명한 기생이었으며 개경 유수로 임명된 ‘임재’가 ‘황진이’를 위한 헌시를 지었다가 파면당한 사실이 있는 걸 보면 황진이가 실존 인물이며 그녀가 당대 내로라하는 인물들과 연분을 맺은 사건들이 실재했을 개연성이 큽니다. 개경 유수 관직이면 지금의 광역시장에 해당하니 지금의 장관에 해당하는 고위직 판서와 친분이 있었다는 야담도 전혀 황당한 얘기라고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유명한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의 ‘벽계수’가 ‘황진이’의 속치마에 시를 쓰는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벽계(碧溪)라는 말은 ‘맑디맑은 시냇물’이라는 뜻으로 이런 뜻의 호를 쓴 이로 벽계도정(‘도정’은 관직명) ‘이종숙’이 ‘황진이’가 유혹하려 했던 벽계수임을 추측케 하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토록 고결했던 벽계수마저 꼬임에 넘어갈 수밖에 없을 만큼 ‘황진이’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유영(徐有英 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과 구수훈(具樹勳 영조 때 무신)의 「이순록(二旬錄)」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황진이』의 ‘벽계수’가 세종의 증손자인 벽계도정 ‘이종숙’이라는 실존인물이며 고고한 그가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야’라는 시조창을 듣고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질 만큼 ‘황진이’에게 매료되었다는 일화가 거의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황진이’가 살았던 때는 조선 중종 때로 16세기 무렵입니다. 그런데 영조 때라 하면 18세기이니 2,300년 뒤의 기록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겠나,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실존 인물 ‘벽계도정’과 ‘황진이’가 살았던 시대가 같고 가사(歌辭) ‘면앙정가’의 작가로 유명한 ‘송순’이 개성유수를 지낼 때 ‘황진이’와 시(詩)와 술(酒)로 교유(交遊)했다고 전해오니 영화에서 개성 유수가 ‘황진이’더러 왕손인 ‘벽계’를 유혹해 보라고 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법하다고 생각합니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ㅣ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수여 간들 엇더리.
출전 『청구영언』
‘이종숙’의 호 ‘벽계(碧溪)’에 자신의 기명(妓名) ‘명월’을 붙여 이렇게 즉흥시를 써낼 정도이니 ‘황진이’의 문학적 재능은 놀랍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네가 아무리 고아(高雅, 높고 우아하다)하다고 자부할지라도 나의 미모(明月)에 안 넘어갈 수 있겠느냐는 호기로운 노래가 어찌나 절창인지 이 정도로 재색(才色, 재능과 미모)을 겸비했다면 제 아무리 벽계라도 아니 넘어갈 수 없었겠지요. 이렇듯 ‘황진이’는 당시 사대부의 위선을 통쾌하게 풍자하면서 그의 문학은 널리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대부들이 황진이 문학의 깊이를 인정하는 만큼 그녀는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우습게 알았고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한 이는 소리꾼 ‘이사종’이었다고 합니다. 『어우야담』에서는 ‘서화담’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 소리를 듣고 당대 최고의 명창 ‘이사종’임을 단번에 알아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은 만나자마자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를 그리워하는 황진이의 시조를 보면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안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영화 『황진이』에서는 ‘진이’가 이토록 사랑한 이가 ‘이사종’이 아니라 자기 집 종이었던 ‘놈이’로 그리고 있는데 ‘서화담’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놈이’의 화적패가 관가의 창고에서 훔쳐낸 곡물을 마음 사람들한테 풀어놓아 마을이 온통 축제 판이 된 모습을 목격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어우야담』은 예능인으로서의 동질감이 두 사람을 깊이 사랑하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영화 『황진이』는 천한 신분이면서 신분사회에 대한 강한 반감이라는 계급적 동질성이 ‘진이’와 ‘놈이’를 생사를 넘나드는 깊은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천한 신분인 기생으로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교유하며 그 작품이 후대에 길이 남아 전해지는 일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놀랍고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인물의 존재 자체가 그 시대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역사는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가 보여준다면 그만큼 위대한 역사 서술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시대에나 추한 세속에 영합하지 않고 홀로 고결한 기품을 잃지 않은 정신적 귀감은 있게 마련인데 ‘황진이’가 살았던 시대를 대표하는 청빈한 학자로 화담 ‘서경덕’이 바로 그런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경덕’은 하급 무사의 아들로 집이 가난하여 서당에서 한자 공부를 한 이후로는 줄곧 독학을 하여 그만한 학문의 경지에 올랐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 만한 그의 제자로는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있습니다. 선조 때 영의정까지 오른 ‘반순’도 그의 제자라고 합니다. 독학해서 이룬 학문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기에 그의 제자들 중에 이렇듯 명망가가 많은가요.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서경덕’ 학문의 깊이를 인정했다고 하니 놀라울 뿐입니다. 조선 성리학은 당쟁의 영향도 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자학과 양명학이 사상적으로 대립 경쟁한 측면이 있습니다. ‘퇴계’가 주리론의 학맥의 대표적인 학자이고 ‘율곡’이 주기론의 학맥을 대표적인 학자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화담 서경덕’을 조선 성리학 주기론 학맥의 시조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고 하니 ‘서화담’ 학문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대단한 학자가 ‘황진이’와 썸씽(something)이 있었다고 합니다. ‘썸씽’이라고 하니 둘 사이의 무슨 치정(癡情)을 먼저 떠올린다면 말한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화담 선생이 절세가인(絶世佳人) ‘황진이’와 밤새워 대화하면서 도학자로서의 기품에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황진이’는 감동하게 되고 그를 존경하여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분 사이에 오간 시조는 정다우면서 맑기가 한량없습니다. 도학의 깊이를 측량키 어려운 선생께서도 ‘진이’를 대하는 마음이 분홍빛으로 물들기도 했던 모양인데 그 모습이 오히려 그 분의 학문을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끔 합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화담’ 선생이 이렇듯 체면을 개의치 않고 순정을 표현하니 그 마음이 너무나 아름다워요. 그에 대한 ‘진이’의 답가는 사제 간의 격의를 일부러 들까부는 듯 염치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말투가 스승의 파격에 재치 있게 화답하는 듯하여,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야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난 닢 소래야 낸들 어이 하리오.
'임꺽정' 을 쓴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의 [황진이]에서는 진이를 사모하다 죽은 남자가 이웃집 총각이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야사에서는 이웃집 종놈이라고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홍석중의 작품에서 황진이가 종놈 '놈이'에게 정조를 바친 대목은 전해 오는 야담을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진이가 파혼을 당하면서 자신이 실제로는 종년 ‘현금’의 소생이며 아비의 추잡한 욕망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연유로 스스로 신분의 허울을 벗어던지는 것으로 그려낸 것은 ‘황진이’의 화류계 투신에 대해 설득력 있는 사연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황진이의 생모가 ‘현금’이라고 전하는 기록이 있고 홍석중의 [황진이]는 황진사가 부인의 몸종 ‘현금’을 건드려 진이를 낳은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홍석중의 『황진이』와 최인호의 『황진이』를 비교해 보는 일은 흥미롭습니다. 홍석중(『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은 북한의 문인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내포한 작품으로 ‘황진이’를 그리고 있으며 최인호가 쓴 『황진이』는 에로티시즘을 표방했다고 할 수 있으니 두 작품은 상당한 정도 대척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인호의 ‘진이’는 서울 양반 댁과 혼담이 오가는 중 이웃의 갖바치가 자기 때문에 상사병으로 죽어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속치마를 벗어 관에 씌우는 기행을 했다 하여 파혼당하고 기생이 되었으며 벽계수와 사랑에 빠졌으나 버림을 받고 무능한 선비 ‘이생’과 전국을 떠돌다가 결국 사당패에게 팔리고 마는 것으로 그리고 있고 홍석중은 진이가 자신의 출생 내력을 알고 양반 귀족의 허위에 환멸을 느껴 기생이 되고 그녀를 흠모한 종놈 ‘놈이’와 남녀의 정을 통하며 나중에 역적 무리에 가담하였다가 참살당한 ‘놈이’의 시신을 수습하고 걸인처럼 세상을 떠도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최인호의 작품은 ‘86년 배창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고 홍석중의 작품은 장윤현 감독에 의해 ’07년에 영화로 발표되었습니다.『어우야담』에서는 ‘황진이’가 ‘이생’과 남루한 차림새로 금강산 기행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최인호의 작품이 이 기록을 더 충실하게 반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담 기록이다 보니 명백한 사실(事實)임이 입증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사실이라는 게 입증이 될 수 있는 것인가요. 형광등은 매우 빠른 속도로 깜박거리고 있는 게 사실인데 인간의 눈으로는 그걸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파리는 사실대로 감각한다는군요.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밖에 없고 우리 눈은 파리 만도 못할 수 있으니 팩트만 운운하는 게 허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가 무엇입니까. 절대 객관적인 팩트가 가능한가요? 뿐만 아니라 진실(眞實)하지 않은 사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생각하면 역사가 무엇인지 궁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이'의 연인이 '놈이'였는지 '이생'이었는지 밝히는 일보다 '진이'의 아픔에 공감하는 게 더 진실한 일 아닐까요.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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