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 제14대 선조(宣祖) 이야기     2015.8.17.월요일.맑음

선조;하성군(河城君) 이 균

생졸; 1552.11.26∼1608.3.16(55세)

재위기간 ;1567∼1608.41년

능호; 목릉(穆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가계도;

    부;

    모;

      처; 의인왕후 박씨(박응순의 딸)

           인목왕후 김씨(김제남의 딸);

                 생졸;(1584~1632)

                 1602년 음력7월13일,선조가 김제남 딸을 계비로 맞이한 인목대비이다.

                 당시 선조의 나이 51세, 인목대비의 나이 19세였다.

              영창대군

              정명공주;

                 선조와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이한 열 달 후인 1603년음력5월19일 정릉동 행궁에서 정명공주

                 가 태어났다.인목대비의 측근 내인이 썼을 것으로 추정하는 '계축일기'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

                 게 전한다.

                '계묘년(1603년) 왕비께서 공주를 낳으셨다.왕자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 소식이 잘못 전달되어

                 대군 아기씨가 태어났다고 전해졌다.실망한 유자신(광해군의 장인)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공주마마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제야 반색하며 축하 예물을 올렸다.

                 얼마나 왕비마마를 미워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정명공주가 태어난 지 3년 후인 1606년(선조 39) 영창대군(, 1606~1614)이 태어났

                 다. 55세의 늦은 나이에 적장자를 얻은 선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빈 김씨

                 소생인 광해군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선조가 언제 자신을 내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왕위 계승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1608년 선조는 즉위한 지 41년 되던 해에 승하했다. 영창대군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였으므로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잘 돌봐 달                    라는 유명()을 남겼다.     














































              

광해군은 34세의 나이에 제15대 왕으로 즉위했다. 광해군은 선조가 살아 있을 때와는 달리 영창














































  대군을 본체만체했다. 하지만 정명공주는 받들어 올렸다. [계축일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하루는 대군이 ‘대전 형님(광해군)이 보고 싶다.’라고 보채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나란히 인사시켰다. 상감은 정명공주에게 ‘이리 와 보라.’라며 만져 보기도 하고 ‘참 영민하고 예쁘구나.’라고 칭찬하기도 했으나, 대군에게는 말도 붙이지 않고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대군이 어려워하자 인목대비께서 ‘너도 상감 앞으로 가 보거라.’라고 일러 주셨다. 대군이 일어나 임금 앞에 가서 섰지만 여전히 본 체도 아니 하시니 대군이 나가서 울음을 터뜨리셨다. ‘대전 형님이 누님은 귀여워하시고 나는 본 체도 아니 하시니 나도 누님처럼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무슨 일로 사내아이가 되었는고.’라며 종일 우시니 불쌍하시어 차마 볼 수가 없더라.

1614년 2월 영창대군은 역모를 꾸몄다는 ‘7서의 옥’에 연루되어 외할아버지 김제남의 뒤를 이어 처형당했다.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광해군은 자식이면서도 친자식을 죽인 원수였다. 두 사람은 한 궁궐 안에서 함께 지낼 수 없었다. 1615년(광해군 7년) 4월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두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광해군은 1618년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격하한 후 경운궁에 유폐했다. 경운궁(옛 정릉동 행궁)은 광해군이 있던 창덕궁의 서쪽에 있어 서궁이라고도 불렸는데, 인목대비를 후궁으로 낮추면서 그녀의 궁호도 ‘서궁’으로 정해졌다. ‘서궁’은 경운궁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창덕궁 서쪽에 있는 후궁’을 의미하게 됐다. 광해군은 ‘서궁’ 인목대비가 있는 서궁 주변에 높은 담장을 쌓고 초소를 두어 무관에게 감시하도록 했다.

정명공주도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었고, ‘공주의 봉급과 혼인은 옹주의 예에 의한다.’라는 폐비절목()에 따라 옹주로 강등되었다. 폐비절목의 규정은 예외적인 조항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실상 서인()으로 강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절망에 빠진 인목대비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은 딸 정명공주뿐이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공주의 소식을 물어올라치면 “이미 죽었다.”라며 둘러댔다.

정명공주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남자가 쓰기에도 힘에 부친다는 한석봉의 필법을 수련하는 데 정진했다. 정명공주는 서궁에 유폐된 동안 ‘화정’을 비롯한 많은 서예 작품을 썼다. 모녀가 처한 비극적 상황은 정명공주를 조선 최고의 여류 서예 작가 반열에 올려놓는 바탕이 되었다.

[화정]은 글자 하나의 사방이 각각 73cm나 되는 대작이다. 연약한 여성의 체력으로 이런 글씨를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술사가로부터도 타고난 명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문한()은 부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라는 유교적 습속 때문에 정명공주는 자신의 작품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이 때문에 정명공주가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하다는 사실은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화정]은 정명공주가 죽은 후 막내아들 홍만회(, 1643~1709)가 물려받았다. 홍만회는 혹시라도 [화정]이 사라질까 두려워 여러 벌의 탁본을 떠서 친인척과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 주었는데, 그들 중 남구만(, 1629~1711)에게는 발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조선 후기의 문장가이자 서화가인 남구만은 저서 [약천집(藥泉集)]에서 정명공주의 필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공주의 막내 아드님인 무주군이 공주가 서궁에 계실 때 쓰신 ‘화정’이라는 두 대자를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는 선비(, 돌아가신 어머니)의 필적입니다. 선비께서 평소 겸손해 하신 뜻을 지킨다면 남에게 보일 필요가 없겠으나 자손들이 선비를 사모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은 우환의 즈음에 쓴 것이고 화려한 날에 쓴 것이 아님을 밝혀 주십시오.” 

이에 나는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주는 안으로는 밝으시지만 밖으로는 감추고, 재능이 있으시지만 그 명예를 사양하여 심덕의 온전함이 일부분만 나타났소. 공주의 글씨를 받들어 보니 마치 선조 대왕의 필법에서 나온 듯하오. 필적의 기상이 웅건할 뿐만 아니라 온화하면서도 두터워 규중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소. 그 필법에서 심획()을 얻었고, 그 성정에서 감동하는 교화를 얻었으니 가문이 엄숙하고 화목한 바 없이 그러하겠소.”- [약천집] 27권, 신사년 (1710년, 숙종 27년)




































































































            공빈 김씨; 선조에게 총애를 받던 공빈 김씨는 둘째아들 광해군을 낳고 2년 후인 1577년에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해군(이진); 생졸;1574(선조7년)-1609(광해1년)

                  임해군은 1572년(선조5년) 8월14일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공빈 김씨는 둘째아들 광해군을 낳고 나서 2년 후인 1577년에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임해군은 1585년 4월 17일 허명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이태응을 낳았으나 출가하여

                  (법명;일연선사) 종실에서는 양자로 선조의 후궁 정빈 홍씨 소생의 경창군(이주) 자식들인

                  창원군(이준)과 양녕군(이경)을 받아들였다.

                  1592년(선조 25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신들은 피란 계획을 세우고 선조에게

                  둘째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삼으라고 주청했지만 윤허를 받지 못한다.

                  몽진을 결심한 선조는 사고 뭉치였던  두사람 중 맏아들인 임해군에게 함경도 지방에 가서

                  근왕병을 모으게 하고, 여섯째 아들 순화군에게는 강원도 지방으로 내보냈다. 

                  왜군 선봉대가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영변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를 행하고 광해군에게 국사를 일부 위임(분조)했다.    

                  광해군의 공적에 비해 임해군의 처신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들은 파견지에서도 행패를 부리고 잦은 말썽을 일으켜 백성들의 원망을 들었다.

                  근왕병을 모집하기는커녕 술에 취하여 기생들과 놀아나고 민가를 약탈하는 등 타고난 못된

                  성정을 마음껏 발휘했던 것이다.

                  임해군은 왜군을 피해 강원도를 빠져나온 순화군과 합류한 뒤 경성으로 갔다가 회령부 아전

                  출신으로 현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국세필 일당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국경인은 두 왕자와 수행원인 김귀영,황정욱,황혁(최고의 문인 황정욱의 아들이며,순화군의

                  장인)을 왜군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진다.

                  얼마 후, 임해군과 순화군은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수복되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교섭이 진행되는 와중에 다행히 풀려났다.

                  선조 사후 명나라 조정에서 광해군의 책봉을 미루고 사신을 파견하자 임해군은 자신이 임금이


                  될 수도 있다는 망상을 품었다.스스로 자기 무덤을 팠던 우부에 불과했다.


                  9월에 가서야 의주의 행재소에서 선조는 두 아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594년(선조 27년),선조는 윤근수를 명나라에 파견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주청했으나

                  명나라 맏아들 임해군을 구실로 고명을 거부하면서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다섯 차례나 종용했다. 

                  당시 황제 신종은 정귀비에게 얻은 주상순을 염두에 두고 장자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조선의 광해군을 세자로 승인해주면 신종이 주상락 대신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하려 할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일본군의 철수로 한양이 수복되자 명나라의 요청으로 설치된 군무사의 업무를 주관

                  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군대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했다.

                  광해군이 차기 왕의 주자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 무렵 임해군의 존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신히 석방된 그는 폭음과 난행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전란 중에 만난 성천 기생을 한양에 데려와 수년 동안 동거하는 등 방종을 멈추지 않았다.

                  1600년(선조33년),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46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선조는 2년 뒤 51세의 늦은 나이에 김제남의 19세 된 딸을 계비로 맞아들였다.


                  1602년,국혼이 진행 중이던 그 시기에 전 주부 소충한을 궁궐 담장 밖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간원에서는 왕자가 살인을 했으니 법에 따라 조사하여 벌하라고

                  간하였으나 선조는 들은 체 만 체 자신의 혼인에 대한 문제만을 처결함으로써 신료들의 조롱을

                  받았다.3년 뒤인 1606년1월,인목왕후로 부터 적통의 왕자 영창대군을 얻었다.
                  1607년10월. 쇠약해진 선조가 광해군에게 전위 하겠다고 밝히고,대리청정이라도 하라고

                  지시했다.그러나 영창대군을 후원하던 소북의 영수 유영경이 그 내용을 숨겼다.

                 1608년1월,전 참판 정인홍이 광해군에게 전위하라는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전위하면 문제가 생길수도 있다며 망설였다.

                 그것은 적통인 영창대군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죽음이 임박해지자 어린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린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렸다.영의정이었던 유영경은 이 선위교서조차 감추었다가 대북파 정인홍에 의해 발각

                 되어 그를 치죄하는 과정에서 선조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으로 후사를 삼고 수렴청정을 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인목대비는 선조의 유명에 따라 광해군으로 보위를 잇게 했다.


                 1608년2월2일,34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고,영흥 부원군 이호민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국왕 책봉을

                 청하였으나 명나라는  엄일괴와 만애민을 보내 광해군의 세자 책봉 과정에 대해 조사하게 했다.

                 임해군을 빌미로 조선을 압박하려는 뜻이었다.

                 명나라의 뜻을 감지한 조선 조정에서는 엄청난 양의 은을 모아 사신에게 안겨주었다.

                 명나라의 두 사람은 임해군을 면담한 뒤 신료들에게 그를 박대하지 말라고 형식적으로 종용


                 하고 돌아갔다.그때부터 명나라의 환관들은 한몫을 챙기기 위해 너도나도 사신을 자원했다.

                 1608년2월,장령 윤양,지평 민덕남 헌납 윤효선,정언 이사경 등이 어전에서 임해군의 치죄를

                 간청했다.임해군이 광해군이 즉위한 해부터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임해군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 기자헌,이흥로 등을 처단하라고 진언

                 했고,홍문관에서도 차자를 올려 임해군의 사형을 독촉했다.

                 임해군을 진도에 안치했고,곧 강화도 교동현으로 이배했다. 

                 이후 광해군이 그의 처리를 계속 미루자 실세였던 이이첨이 은밀히 임해군의 사사를 도모했다.

                 당시 임해군이 갇혀있던 민가는 사방이 막혀 있었는데 관비 하나가 구멍을 통해 안으로 음식을


                 넣어주고 있었다.그해 5월 3일 교동 현감 이직의 명을 받은 수문장 이정표가 관비를 시켜 독살

                 하려 했지만 그녀가 거부하자 직접 안으로 들어가 임해군의 목을 졸라 죽였다.

                 그의 나이 36세였다.보고된 사인은 병사였다.

                 인조반정 이후 살아남은 관비를 통해 임해군의 죽음에 대한 실상을 알게 되었다.


                 부인 허씨가 관을 열어보니 피부가 살아 있을 때와 똑같았는데,목에 새끼줄을 감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623년, 인조는 임해군을 복권시켰다.

 

               광해군

            인빈 김씨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원종)

                   인헌황후 구씨(구사맹의 딸)

                       인조; 16대

                       능원대군

                       능창대군

                의창군

                정신옹주,정해옹주,정숙옹주,정안옹주,정휘옹주(5명)

            순빈 김씨

                 순화군; 임진왜란 당시 임해군과 함께 포로가 되었던 순화군은 순빈 김씨 소생으로 선조의 
                            여섯째 자식으로 평민과 노비들을 마구 죽였는데 해마다  희생자가 10여 명에 달했다.

                            순빈 김씨가 세상을 떠난 뒤 빈전의 여막에서 어미를 모시던 궁녀를 대낮에 겁탈하기

                            까지 했다. 선조는 중벌을 면하게 하고 유배형으로 대신했다. 
                            유배지인 수원에서도 관원과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그를 가택연금에 처했다. 그로 인해 순화군은 1607년 18세의

                            나이로 중풍에 걸려 죽었다.


            정빈 민씨

                 인성군,인흥군,정인옹주,정선옹주,정근옹주

            정빈 홍씨

                 경창군(이준)

                   창원군(이준); 임해군의 양자로 입적

                   양녕군(이경); 임해군의 양자로 입적

                 정정옹주

            온빈 한씨

                 흥안군; 광해군15년 1623년3월13일의 인조반정 이후 7월에는 대북파의 기자헌,유몽인 등은

                            인조반정 때 김유,이귀 등이 역모 가담을 요청했으나 거절하였고,반정 후에 인조가

                            등용할 때 불렀으나 가지 않아 이들을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지정한 장소에서만

                            머물도록 한 형벌인 중도부처 한 사건이 있었다.

                            동년 10월에는 선조의 10번째 아들인 흥안군은 성품이 활달,호협하여 엉뚱한 짓을

                            잘하였다,황현,이유림등이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등의 역모가 있었다.

                            1624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그들과 내통하여 역모하였다는 설이 있어 대간이 주청

                            하여 남쪽에다 안치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난을 피해 왕과 함께 공주로

                            가던 중 도망하여 이괄의 군중으로 들어갔다.
                            이괄의 반란군이 서울에 입성하자,이괄은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관군과의 싸움을

                            벌렸으나 패하게 되자 소천으로 내려가 숨었다가 현감 안사성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도원수 심기원 등에게 살해되었다.

                 경평군,영성군,정화옹주. 

 

  선조는 중종의 서손,

  제12대 인종과 제13대 명종의 이복 조카다.

  아버지 덕흥대원군 이초는 인종과 명종의 이복 형제다.

  선조는 아버지 덕흥대원군 이초와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아들로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며,명종의 사랑을 받았고,

  1567년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즉위하였고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이기도 하다.

 

                                               -덕흥대원군 묘-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이황과 이이,유일,조식,성운 등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 일으키고자 힘을 다하였다.그 밖에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에게 벼슬을 높여 관직을 내리는 등 억울

하게 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伸寃)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南袞)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또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 등을 죽인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 등을

삭훈하였다.

1567.8~1568년까지 이복 숙모 인순왕후 심씨가 섭정

1568년부터 1608까지 친정

1575년(선조 8)  사림의 김효원·심의겸을 각각 중심 인물로 하는 당쟁을 벌여 동인·서인으로 분당되어

 

   이이의 양파 조정에도 시끄러워졌다.

1583년,1587년 2회에 걸쳐 이탕개가 주동이 된 야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가 함락되었다.신립(申砬)과

   신상절 등을 시켜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시켰다.

1591년 세자 책봉 문제로 집권한 동인도 서인에 대한 논죄 문제로 남북으로 다시 분열되었다.이로써 당쟁에

    휘말렸고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다.

1590년 일본의 동태가 수상하여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일본에 파견해 그 곳 동향을 살펴오게

    하였으나,다음 해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진을 필두로 왜군이 침략한 지 보름 만에 서울도 위급하게 되자 개성으로 몽진,평양,의주로 피난하는

    고급사(告急使)를 명나라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세자 광해군에게 의병과 군량 확보에 몰두하도록

    하였고,의병이 봉기해 적의 후방을 위협했고 무기력 했던 관군도 전력을 가다듬어 각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이순신등 수군이 제해권을 완전 장악했고, 명나라 원군이 와서 우리 관군과 함께 빼앗겼던

    평양성을 수복하였다.권율의 행주대첩으로 적의 사기가 꺾여 1593년 4월에 강화를 조건으로 한성에서

    철수하여 남으로 퇴각하자,10월 선조가 환도하였다.

1593년  훈련도감을 설치,군사 훈련을 강화시키고 투항해 온 왜군에게 조총 쏘는 방법과 탄환 만드는 기술

    을 관군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을 격퇴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군공을 세운

    자는 신분에 따라 응분의 논공(論功)을 시행하는 등 비상책을 강구하였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되고

    명나라 원군이 오랜 기간 머물게 되어 군량미 조달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군공을 세운 자나 납속을 한 자는 논공을 할 때,주로 공명첩()이나 실직()을 주었으므로 하층 신분을 가진

    자가 양반으로 격상되는 일이 많아져 조선 후기 신분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심지어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있어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궁핍하게 되었다. 이에 매일 왕에게 공급되는 쌀의 양을 줄여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보태도록

    하였다. 그리고 곳곳에 산재한 유해를 수집해서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 회담이 깨지고 재차 왜군이 침입하자 다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한편,관군의

    정비를 촉구하였다.임진왜란 중에 3궁()이 소진되고 귀중한 전적을 보관한 춘추관이 불타 귀중 도서가

    소실된 것을 애석해 하여 각처에 흩어져 있는 서적들을 거두어 모아 운각(校書館)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또한 불타서 없어진 문묘(文廟)에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려 전쟁 중에도 윤기(倫紀)의 소중함을

    대내 외에 알렸다. 궁궐이 불타 정릉동 행궁에 거처하게 되자 실의에 잠긴 선조는 불에 탄 옛 궁궐터에

    초가를 지어 옮기려고 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왕의 거처가 초라함을 보고 궁궐의 영건(營建)을 권했으나

    왜군의 깊은 원수를 갚기 전에는 지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정유재란 때, 우리 수군 함대가 부산에 총집결하자 이를 염려하고 왜병은 뜻하지 않은 곳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니 부산에만 군사를 집결시킬 것이 아니라 호남 지역도 소홀해서는 안되며 육지에도 험한 곳에 군대

    를 배치하는 것이 계책임을 역설했다는데 그 추측은 들어맞았다.


1604년  왜란이 끝난 뒤에 호성(扈聖)·선무(宣武)·청난(淸難) 등의 공신을 녹훈하여 전쟁의 마무리를 짓고

    전후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서인의 당쟁은 더욱 격심해져서 커다란

    시련을 받았다.더욱이 죽기 직전에 측근을 불러 적자 영창대군을 보필해달라고 유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영창대군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두 대비 모시기를 친어머니 섬기듯 효도가 지극하였다. 성품이 본디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

    다.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비빈이나 궁인들이 감히 사치하지 못하였다.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해 한 톨의

    낟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서화에도 뛰어났으며,명나라 이여송이 선조의 어필을

    청했으나 거절하였다. 

 

1608.3 붕어 할 때까지 둘째 서자 광해군 이혼이 왕세자 신분으로 잠시 대리청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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