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재우    2018.10.03.수요일,맑음

곽재우는 1585년 34세의 나이로 별시에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러서 합격이 취소됐다.

그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은거했으나 임진왜란이 터지고 관군이 대패하자 의병을 일으켜 싸운다.

그는 의병활동 초기에 의령에 지휘본부를 두고 활약했고 스스로를 <천강홍의 장군>이라 칭했다.

연전연승을 거두어 휘하의 병력이 2천 명에 육박하기도 했고 왜군이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정암진에서 완전히 차단하여 이순신의 배후를 보호했다.

곽재우는 그 공으로 벼슬에 올랐으나 1595년 강화회담이 진행되자 벼슬을 내놓고 은거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나와서 창녕의 화왕산성을 수비했다.

그는 조정에서 여러 번 관직에 나올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하고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밑바탕은 민족적 저항의식이었다.

의병장은 전직 관원이나 문반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단순한 무장 출신은 소수에 불과했다.

 

◐ 허준

허준은 1546년 무인 집안에서 태어나 29세 때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봉직하게 된다.

허준은 어의로 활동하며 왕자의 두창을 낫게 했고 임진왜란 때는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종공신이 되었다.

허준은 선조의 명을 받아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25권 25책인 <동의보감>을 완성시켰는데 이책은 당시의 의학지식을 총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로서 각 병증의 항과 목이 증상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따라서 임상의가들이 환자를 대했을 때 많은 책을 참고로 하지 않아도 이 책 한 권으로 손쉽게 고금의 의서들을 열람한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게다가 세종 때 만들어진 <향약집방서>,<의방유취>와 선조 때의 <의림촬요>,복희의 저작으로 알려진 <천원옥색>,신농의 저작이라는 <본초> 등 83종의 고전 들과 <상한경>,<맥경> 등의 70여 의방서들을 인용한 <동의보감>은 편집력과 서술의 우수성으로 인하여 출판된 뒤 일본과 중국에도  전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귀중한 한방 임상 의학서로 취급되고 있다.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의 손자이자 용천부사 허윤의 서자출신.원래 무인 출신 집안이었으나 무과에 응시하지 않고 29세때 의과에급제 하여 내의원에 봉직되었다 이후 내의 태의어의로 명성이 높았고 1575년 안광익과 함께 입진하여 실력을 증명하였고 1581년 "찬도맥결"을 교정 하였으며 왕자의 두창을 치료하여 선조로부터 당상의 가자를받기도했다

임란때는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종공신이 되었으며 그 뒤에도내의원에 남아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여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중 1596년 선조의 명을 받아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 을 편집하기 시작했으나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훗날 단독으로 의서 편집을 하게되고 그는 내의원 어의로 종사하면서도 편집일에 전념하여 광해군 2년 인 1610년에 "동의보감" 을 완성시켰다

그 뒤에도 "언해구급방" "두창집요" "언해태산집요" 등 많은 의서를 개칭하여 간행하였다 그는 동의학사에 이 같은 많은 업적을남기고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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