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군과 인목대비 2018.12.13.목요일,맑음
1623년,서인이 광해군을 왕좌에서 내리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바로 ‘인조반정’이다.
인조 반정후 서인은 광해의 조카 능양군을 새 왕으로 추대한 임금이 인조다.
서인에 의해 추대되어 졸지에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인조는 왕이 될 의지가 전혀 없는 왕족이었다.
인조가 왕이 될 때에 이를 인정해 준 사람은 선조의 부인인 인목대비(영창대군 어머니)였다.
광해군과 인목대비는 악연으로 만나 악연으로 끝난 인연이다.
1602년 50이 넘은 선조는 부인이 죽자 새부인으로 간택된 열아홉 살의 아리따운 처녀 인목대비 였다.
인목대비는 광해군 보다도 아홉 살이나 어린 나이었다.
결혼 5년째 되던 해에 인목대비는 선조의 나이 55세 때 얻은 늦둥이인 영창대군이다.
고대했던 집안의 대를 이어 갈 장남’인 적장자의 탄생이었다.
광해군 때 집권 세력인 북인이 인목대비가 낳은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권을 위협한다는 구실로 죽여 버렸다.
그의 나이 겨우 8세였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위험 인물로 간주하여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 가두어 버렸다.
1613년 광해군 5년에 소양강을 무대로 서양갑,박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이른바 ‘7서의 옥’이 일어났다.이이첨 등은 이 역모 사건에 그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영창의 외조부 김제남도 관계한 것으로 진술을 유도하여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
구원의 상소가 이어졌고,형제와 여덟 살밖에 안된 어린 아이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자,대북파의 요구로
1613 봄에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 부사 정항에 의해 영창대군은 살해되었다.
광해군 일기에 의하면 정항이 영창대군을 굶겨서 죽게 하였다거나 정항이 온돌을 뜨겁게 달구어 영창대군을 살해 했다고 되어 있으나,
인조실록에 의하면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이정표가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죽게 하였다고 기록
되어 있다.그의 나이 경우 8살이었다.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처지가 매우 곤궁해진 사람은 광해군 이었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 세자 자리에 올랐다.
그의 어머니가 후궁이었기에 태생적으로 왕위 계승에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유교 윤리가 지배하고 있던 조선 사회에서 집안의 대는 반드시 본부인이 낳은 아들이 이어야 한다는 원칙
이 존재했다.
이런 시대에 적장자가 탄생해 버렸으니,광해군의 위치가 좌불안석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광해군은 왕의 자질이 충분한 인재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세자가 된 그는 조선의 북쪽 끝 의주로 도망치듯 피난 간 선조를 대신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술렁이는 민심을 다잡고 의병을 독려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여기에 임금이 된 뒤에는 장기간의 전란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토지세를 제대로 거두기 위해 토지 조사를 실시하였고,
대동법으로 특산물을 바치던 세금인 공물을 쌀이나 베로 통일해서 바치게 한 세금 납부 제도를 시행해
나라 재정을 늘리는 동시에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또한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해서 의사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완성하게 하였으며,
전란 도중에 무너져 버린 성곽들을 보수하고 무기를 수리하여 국방력을 키우는 데도 힘을 쏟았다.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은 정변의 명분으로 크게 두 가지를 내세웠다.
첫째는 광해군 추종 세력인 북인이 일으킨 ‘폐모살제’ 사건이다.
‘폐모’란 어머니 인목대비를 일반 백성으로 신분을 낮추어 서궁 깊숙한 곳에 가둔 일이고,
‘살제’란 친형 임해군과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일이다.
이 사건은 당시 정계를 이끌던 북인 주도로 발생했지만,
대다수 사대부는 왕의 동의가 있었기에 이런 패악무도한 일이 생겼다며 광해군을 비난했다.
서인이 광해군을 쫓아 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이다.
중립 외교 정책이란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는 정세가 불안정했다.
만주에서 여진족이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주변 나라를 위협했고,
특히나 명나라 입장에서 후금의 탄생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한 일이었다.
탄생지가 자기 나라의 변방인 만주 땅인데다가,
후금의 성장은 명나라에 커다란 위협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명나라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후금을 단독으로 치려 하지 않고,
조선에 후금 정벌을 함께하자고 도움을 청해 온 것이었다.
전후 복구 사업에 전력을 다하고 있던 광해군에게 명나라의 이 제안은 참으로 난감하기만 했다.
신하 대다수가 명나라는 조선이 받들어 모시는 나라이자, 왜란 때 도와준 은혜가 있으니, 명의 요청을 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광해군 생각은 달랐다.
명나라는 당시 국내에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가만 놔둬도 멸망할 가능성이 큰 나라였다.
반면 후금은 신흥 강국이었다.
후금을 업수이 여긴다면 조선에게 큰 피해가 올 가능성이 컸다.
국제 정세에 밝던 광해군은 오랜 고민 끝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내놓았다.
명의 요구대로 군대를 파병하되,현지에서 후금 군사를 만나면 적당히 타협해 버리는 작전이었다.
후금에게 명의 요청을 무시하기 어려운 조선의 사정을 설명하고, 후금과 싸울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알릴 작정이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중립 외교 정책’이라고 한다.
이 전술은 조선의 당시 현실에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조선에게 시급했던 문제는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의 후폭풍을 앓고 있던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서인이었어요.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 입장에서 광해군의 파병 작전은 아버지 나라인 명에 대한 배신 행위에 불과했다.
서인 생각에 광해군의 전략과 전술은 용납할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서인은 비밀리에 거사를 꾸며 광해군을 왕위에서 쫓아 내 버렸다.
‘인조반정’이었다.
서인 주도의 반정이 성공한 이후,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인생은 역전되었다.
경운궁에 감금된 인목대비 앞에 광해군이 죄인 신분으로 섰다.
반정 이후 광해군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훗날 제주에 이배되어 일생을 마쳤다.
15년 동안 왕 자리에 있었으나 묘호마저 부여받지 못한 채 ‘폭군’의 이미지로 역사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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