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존이란?          2018.12.22.토요일,맑음

실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 묘호가 내려진 것을 추존이라 말한다.

왕이 죽으면 신주를 종묘에 올릴 때 새로 등극한 왕과 대신이 의논해 정하는 것을 묘호(廟號)라 한다.

이는 임금들이 죽은 후에 그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종묘(宗廟)에 봉안된 칭호다.

왕비 역시 종묘에 봉안되면 '왕후'라는 칭호를 쓰게 된다.

 

예를 들면 세종대왕 이름은 이 도 였다.

왕으로 즉위 전에는 '이 도'라는 이름을 부르다 즉위 후에는 전하.주상.마마 등으로 불렀다.

죽은 후에 묘호나 능호가 왕의 이름을 대신했다.

 

조선조에는 총9명의 추존왕이 있었다.

이성계의 4대조상-목조.익조.도조.환조

세조 장남-덕종

영조 아들-진종.장조

순조 장남-익종

인조 부-원종이 있다.

 

조선에는 4명의 추존된 대원군이 있었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존한 것이 처음이었다.

1623년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가 1632년 다시 원종으로 추존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철종이 왕위에 옹립되었고 그의 아버지 전계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고,

           아버지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대비가

           수렴청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였다.

           그는 개항 전후 격변하는 국내외의 상황 속에서 10여 년간 권세를 누렸다

           흥선대원군만 살아 있을 때 추존되었다.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 대원군

1530년 중종과 창빈 안씨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덕흥군에 봉해졌으며,13살 때 정인지의 증손녀와 가례를 올려 선조와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

첩 사이에서 딸 하나를 더 얻었다.

손자들인 임해군,정원군,순화군(선조의 아들)보다는 덜하지만,할아버지인 덕흥대권군도 막장이다.

그러나 3남 선조가 왕이 돼서 그런지 이러한 행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실록은 아무리 왕이라도 함부로 열람할수도 수정할 수도 없었기에 명종실록에 기록된 덕흥대원군의 몹쓸

행각은 지워지지 못하고 전해 내려 오는 것이다.

덕흥 대원군은 어릴 때부터 주색에 빠져 3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선조의 생부 생모가 빨리 죽어서 명종 시절 문정왕후 외척들에 시달린 신하들은 덕흥대원군의 3남 하성군인 선조가 즉위 후 1569년에 대원군으로 추존된다.

 

   도정궁(都正宮)은 한성부 서부 인달방에 있던 궁으로 덕흥대원군이 살았다.

   선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이곳은 덕흥대원군의 후손에 의해 사당을 모신 궁으로

   47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왔다.

   도정궁 내 덕흥대원군의 사당인 덕흥궁은 장자 하원군의 후손으로 계승되면서 도정(都正)들이 사는 곳이

   라는 뜻에서 ‘도정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후손은 4대까지는 종실의 녹을 받았으며,이후부터는 대대로 도정 벼슬을 세습했다.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 대원군(1785-1841)은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인 은언군의 세째 아들이며 철종의 생부다.

큰아버지인 상계군(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의 양자)과 아버지 은언군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추방되어

빈농으로 생애를 마쳤으며, 한때 노비로 전락하기도 했다.

1820년과 1822년,1826년 일시 석방되고 1830년 석방되어 도성에서 살 수 있었다.

은언군의 세째 아들이라 평생 품계와 작위가 내려지지 않았다.

철종 즉위 후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 명으로 은언군,상계군 관련 일성록,승정원 일기,조선 왕조 길록 등을 대량으로 세초, 인멸해 버렸기 때문에 그의 초기 삶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영조 시절 첫번째 후궁인 원빈 홍씨(홍국영의 여동생)의 양자가 되었던 상계군은 홍국영이 상계군을 세자로 삼으려던 일로 상계군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연좌되어 죄인의 신분으로 거주지에 가시 울타리가 쳐지고 계속 감시 당했으며,이 후 강화도에서 빈농으로 생활하였다.

형인 이성득이 고문치사한 일을 계기로 순조는 1822년 은언군의 자녀들을 일시적으로 석방하였고,

이때 성인식인 관례를 올렸다. 그러나 다시 강화도로 끌려갔고 1826 노비 신분으로 격하되어

충청도 온양에 정속되었다가 그해 임시 석방되었다.

1830년 최종 석방되면서 한성부로 와서 생활하다 이유를 알수 없는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소실 중 한명인 염씨에게서 얻은 셋째 서자 이원범이 1849년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군호를 의망하여 전계군의 작호가 내려졌다가, 다시 대원군으로 추봉되어 전계대원군이 되었다.

 

   누동궁(樓洞宮)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있던 궁으로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이 살았고,

   철종이 태어난 곳이다.철종은 왕위에 오른 뒤 생사고락을 함께한 형 영평군을 이곳에 살게 했다.

   1869년에는 안국동 별궁에 있던 전계 대원군의 사당을 영평군의 집으로 옮겼다.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박영효의 혼례가 이곳에서 치러지기도 했다.


선 전기는 세조를 제외하고 대군이 왕위를 잇는 종법이 무난히 내려왔다.

그러나 선조에 이르면 명종에게 대를 이을 자손이 없고 왕위를 물려줄 왕자가 없자 14대 선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종법의 문제가 대두된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며 선조의 아버지 덕흥 대원군은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 낳은 7째 아들이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3째 아들이다.덕흥대원군은 대군이 아닌 왕자였기에 왕으로 추존되지 못했다.

철종의 아버지 은언군의 손자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은 왕자가 아니기에 왕으로 추존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왕이 죽은 뒤 다음 왕이 즉위해서 왕과 신하가 선왕에 대해 조()와 종(宗)으로 지었다.

()이 있는 왕에겐 조()를 붙이고 덕()이 있는 왕에겐 종()을 붙인다.

이것을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 하는데,

말의 유래는 사마천이 지은 '사기' 에 의하면

왕 중에서 공적이 있는 자는 '조(祖)'라고 하고,덕망이 있는 자는 '종(宗)'을 붙여 사용한다 라고 하였다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 왕조 때 왕들의 묘호를 보면 이런 규칙에서 비롯된 것 만은 아니다.

임진왜란을 당한 선조나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가 공이 있어서 조를 썼다?

그러나 선조는 선종(宣宗)이었으나 국난을 극복했다는 공을 억지로 갖다 붙여 후에 조를 얻어 쓰게 된다.

기실 왕위 계승자가 아닌 왕들이었기에 종법을 피하기 위한 핑계였다.

선조가 죽자 선종(宣宗)이었으나 그의 아들인 15대 광해군 8년 선조(宣祖)로 바꾼다.

왕비가 낳은 대군으로 대를 잇는다는 종법은 숙종 이후 계속된 왕비 불임으로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 이전에 종법을 철저하게 파괴한 것은 16대 인조였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쿠데타로 왕위에 앉은 왕이다.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 낳은 정원군이다.

정원군은 왕비가 낳은 대군이 아닌 왕자였으니 조선 왕실의 종법으로 보아 왕으로 추존되지 못하지만

쿠데타로 잡은 정권이 다 그렇듯이 정통성을 만들기 위해 묘에 불과했던 정원군의 묘를 1627(인조5) 김포로 천장하고 흥경원으로 추숭한다.

그 후 인조10년 이귀의 주청에 따라 원종(元宗)이라는 묘호와 장릉이라는 능호를 올려 아예 추존왕으로

만들었고 장릉은 조선 최초의 추존왕릉이 됐다.

대군이나 세자가 아닌 왕자로 추숭왕이 된 건 원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영조, 정조, 순조의 묘호의 유래를 보면 

21대 영조는 숙빈 최씨의 아들이니 당연히 종을 쓸 수 없었다.

22대 정조 역시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서인으로 폐했기에 종을 쓸 수 없었고

23대 순조 역시 정조와 수빈 박씨 소생이라 종을 쓸 수 없었다.

이들 왕은 영종(英宗),정종(正宗),순종(純宗)이었으나,

1890(고종27) 영조,1899(광무3) 정조,순조로 각각 바로 잡았다.

그렇다면 왜 철종(哲宗)은 바꾸지 않았는지 의문이 남는다.

선왕을 종법을 내세워 당장 묘호를 바꾸기는 어려운 일이고,고종의 가계와 철종의 가계가 같다는 점에서

후로 미룬 것이다.

이후 황제로 등극했고 국운이 기우는 소용돌이 속에서 종법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고종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 낳은 은신군과 은언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언군의 순자가 철종이고,은신군의 후손이 고종이다.

고종이 바로잡은 종법이 영조부터 해당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융희2(1908) 철종은 철종장황제로 추존되지만 종법을 고치는 일을 벌이기엔 이미 국운이 기울었고

이후 바로잡을 기회가 없었고 1910년 조선 왕조는 멸망했다.

 

조종(祖宗)이란 묘호가 붙은 역사의 뒷면을 살펴보면 종법 계승인지 아닌지를 두고 벌인 사건들이 드러난다. 겉으로 조공종덕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종법에 어긋난 왕들의 위신을 살려준 내면에는 여전히 종법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조선 왕실의 고민이 엿보인다.

혼란스러웠던 조종(祖宗)의 실체를 알면 조선의 역사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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