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2018.12.30.일요일,맑음

인조반정(1623년) 이후 정치를 주도했던 서인 세력은 명나라와만 친하게 지내고 후금(여진족;청) 세력을

멀리했다. 이를 빌미로 후금 군대가 조선 영토를 두 차례 침범해 왔으니,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이 바로 그것이다.

 

정묘호란은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서인 세력과 인조는 친명배금의 태도를 취하였다.

이를 빌미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이다.

후금의 침략에 관군과 의병이 맞서 싸웠으나 침략군을 물리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후금 역시 명과의 전투가 더 중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화의가 이루어져,

조선과 후금은 형제 관계를 맺었다.
임진왜란(선조25년 1592년 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으로 피폐한 조선은

이 전쟁으로  또 다시 쑥대밭이 되었으며,백성의 삶은 한층 곤궁해졌다.


병자호란은

오랑캐의 나라라고 얕잡아 보다가 후금에게 크게 당했으면서도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반란과 세력 다툼으로 나라 사정은 더욱 어지러웠다.

후금은 주변 세력을 끌어들여 힘을 키우고,나라 이름도 청나라로 바꿨어요.

청나라의 태종은 조선을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 가깝게 지내고,청나라를 멀리하고 있다.

이런 조선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청 태종은

정묘호란이 일어난 지 9년 후인 인조 14년 1636년, 2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이 일어 났든 것이었다.

6일 만에 한양을 빼앗긴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 했으나 그 길마저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청나라 군대는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어진 인조는 끝까지 싸울 것인지,아니면 항복을 할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했다.

 

1637년,항복을 결정한 인조는 꽁꽁 언 땅 위를 걸어 남한산성 밖으로 나왔다.

그 뒤로 소현 세자를 비롯해 500여 명의 신하들이 줄줄이 따랐다.

인조는 청나라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삼전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청나라 태종이 아홉 개의 계단이 놓여진 높은 단상 위에 앉아 있었다.

단을 높게 쌓은 것은 태종을 우러러 보라는 뜻이었다.

인조는 청 태종이 앉아 있는 단 앞으로 걸어가 절을 했다.

한 나라의 왕이 무릎 꿇고 엎드려 땅에 머리를 대고 절을 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치욕적인 일이다.

그래서 이 일을 두고 <삼전도(지금의 송파 삼전 나루)의 치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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