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주        2019.07.14.일요일,맑음

김석주; 서인,남인을 도와 서인을 몰락시킨 장본인
생졸; 1634년(인조12년)~1984년(숙종10년)

본관; 청풍.

호; 식암

증조부;  강릉참봉 김흥우

조부;영의정 김육

부; 병조판서 김좌명

모; 어머니는 오위도총부도총관 신익성의 딸

조선 후기 이조좌랑과 우의정을 지낸 인물로 유악 남용사건과 기사환국으로 실각되었다.


1657년(효종 8). 진사가 되었으며,

1661년(현종 2). 왕이 직접 성균관에 거둥해 실시한 시험에서 성적이 우수해 곧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1662년(현종3년). 증광 문과에 장원,전적이 된 뒤 이조좌랑,정언,지평,부교리,수찬,헌납,교리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674년 겸보덕에 이어 좌부승지가 되었다.

    당시 서인 중의 한당에 가담해 집권당이던 산당에게 중용되지 못하였다.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 허적 등과 결탁해 송시열,김수항 등 산당을 숙청하고 수어사에 이어 도승지로 특진되었다.

    남인의 정권이 강화되자 이를 제거하기 위해 다시 서인들과 제휴해 송시열을 제거하려는 남인들을 꺾어,

    이 때부터 송시열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1680년 허적 등이 유악 남용 사건(왕실에서 쓰는 장막을 사사로이 사용해 일어난 사건)으로 실각한 뒤

    이조판서가 되어,남인의 잔여 세력을 박멸하고자 허견이 역모한다고 고변하게 하여 이들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 1등으로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682년 우의정으로 호위대장을 겸직하였다.

    이어 김익훈과 함께 남인의 완전 박멸을 위해 전익대를 사주해,허새 등 남인들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는 등 음모를 꾀하였다.

1683년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음험한 수법으로 남인의 타도를 획책했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

    로부터 반감을 사서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하는 원인의 하나를 제공하였다.


사후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공신호를 박탈당했다가 뒤에 복구되었다.

경신대출척을 일으켜 남인을 숙청했다


저서로는 "식암집""해동사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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