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봉휘(柳鳳輝)              2019.07.21.일요일,비

유봉휘;

생졸; 1659년(효종10년)~1727년(영조3년)

본관; 문화

호; 만암(晩菴)

부; 영의정 유상운(尙運)


1684년(숙종10년) 진사가 되고,

1699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문학·지평·정언·수찬·이조정랑·헌납·부교리 등을 거쳤다.

1710년 대사간으로 재직시 진휼을 위해 백성들에게 제공하는 곡식의 다소에 따라 관직을 상으로 주었기

  때문에 당상관이 범람하게 되었다며 납속수직 폐지를 주장했다.


부제학·이조참의·승지·동의금 등을 역임한 후,

1721년 행사직이었을 때 노론 4대신이 중심이 되어 연잉군(훗날 영조)을 세제로 책봉한 것에 대해 시임대신

  조태구가 참여하지 않는 등의 절차상의 문제점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연잉군은 세제 책봉을 사퇴하려 했고, 노론들은 유봉휘를 국문하자고 주장하여 세제책봉을 둘러싼

 노소론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해 10월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12월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후 세자빈객·대사헌·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후에

1724년(영조 즉위) 영조의 탕평책 실시에 의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725년 노론 측에 의해 세제 책봉 때의 상소와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경원에 유배되었다. 노론은 그가 유배지에서 죽은 후에도 역율에 따라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노비로

  삼을 것을 요구했을 정도로 유봉휘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1727년7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자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1755년 나주 괘서 사건으로 소론 명문이 거의 몰락하는 가운데 다시 역율로써 추형(일정한 지역 밖으로

   내쫓는 형벌;追刑)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인좌의 난/190721  (0) 2019.07.21
⊙ 정미환국/190721   (0) 2019.07.21
⊙ 정호/190721  (0) 2019.07.21
⊙ 민진원/190721   (0) 2019.07.21
⊙ 조태억/190721   (0) 2019.07.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