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미환국 2019.07.21.일요일,비
1727년(영조3년),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당색이 온건한 인물로 인사를 개편한 정국으로
영조는 즉위하면서부터 극심한 당쟁의 폐해를 통감하고 송인명·조문명 등의 말을 들어 탕평책을 펴나가고자 하였다.
사건은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측에서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서 발단하였다.
먼저 이의연이 지난날 세제(영조) 건저를 주장하다가 처벌된 신하들을 신원하자고 성급하게 청했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혀 오히려 귀양을 가고 말았다.
또한, 송재후는 김일경이 대찬한 임인옥사에 대한 교문의 초고 중 3건의 문구를 들어 “세제시절의 영조를 모욕한 것이니 단죄할 것”을 상소하였다.
3건의 문구란 모두 영조에 관련된 것으로서 소론 김동필도 그의 불온함을 지적한 일이 있었다.
이 김일경의 교문문제에 대한 상소는 각처에서 연달아 들어왔다.
영조는 김일경을 잡아들여 친국했고, 김일경은 끝내 불복해 처단되었다.
또한, 임인고변으로 공신이 된 목호룡의 고변문구 중에도 영조에 저촉된 사실이 있었는데, 이 때 와서 김일경과의 공모혐의로 국청에서 심문을 받다가 불복하고 죽었다.
영조는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인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단한 뒤, 경종 1년 김일경이 노론4대신(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한 신축소에 연명한 이진유 등 6인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노론측의 잇단 소론대신들에 대한 논핵으로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의 소론대신들이 쫓겨나고 대신 민진원·정호 등 노론이 소환되어 조정에 들어섰다.
노론이 정권을 잡자, 신임사화 때에 처단된 노론4대신과 그 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4대신이 복관되어 시호를 받았다.
정호·민진원 등 노론측은 '임인옥안'을 번안해 당시에 자복한 사람들까지 신원했음에도 소론에 대한 보복을 계속 고집하였다.
영조는 당습을 꺼려 무욕을 밝히고 원통한 것을 풀어주면 그만이지 보복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1727년 영부사 민진원, 우의정 정호 이하 여러 노론들을 파면하고,
영조 1년에 파면했던 이광좌·조태억을 기용해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참여시켰다.
이 해가 정미년이기 때문에 ‘정미환국’이라 한다.
이 결과 탕평파인 지평 조현명은 신임사화 때 남형을 많이 저지른 것은 소론의 잘못이고,
영조 즉위초에 보복에만 급급했던 것은 노론의 잘못인데,
노론과 소론을 공정하게 등용하지 않음은 잘못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성립되었으며,
이들은 다시 번안된 '임인옥안' 문제를 들고 나와 영의정 이광좌, 대사헌 김시환 등이 4대신의 잘못을 논핵하였다.
이에 영조는 전일의 죄명을 모두 씻어주고 관작만을 삭탈하는 선에서 일단 매듭을 지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영조 4년에 일부 소론과 남인의 과격분자들이 경종을 위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권교체를 기도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이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영조는 노론·소론을 막론하고 당파심이 강한 자를 제거해 당쟁을 조정하고 폐해를 막으려는 탕평책을 펴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점차 노론이 조정에 들어오고,
영조 17년에는 '임인옥안'을 불태우고 영조는 친히 '대훈 大訓'이라는 글을 지어 종묘에 고하는 한편 나라
안에 반포하였다.
이와 같이 '임인옥안'을 놓고 번복을 거듭한 것은 결과적으로 영조의 탕평책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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