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좌의 난                  2019.07.21.일요일,비

영조가 즉위한 지 4년인 1728년, 소론계 강경파가 남인을 끌어들여 일으킨 이인좌의 난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붕당 간 정쟁이라는 성격을 띤다. 숙종 말기부터 진행된 세자 대리청정과 세제 책봉 논란, 경종 독살설 및 영조의 왕위 계승 부당성 시비, 이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갈등이 누적돼 반란의 형태로 분출된 것이다.

반란이 일어난 해가 무신년이었기 때문에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무신란의 발단은 숙종 43년인 1717년7월의 정유독대(丁酉獨對)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숙종은 노론의 당수인 좌의정 이이명과 독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후일 알려진 바로는 숙종은 이 자리에서 숙빈 최씨 소생인 연잉군(영조)이 세자 윤(昀,경종)의 뒤를 이을 수 있도록 이이명에게 각별히 부탁했다.

숙종은 희빈 장씨가 사사된 이후 그 소생인 세자 윤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희빈 장씨에 대한 반감이 남아 있었고, 그럴수록 연잉군에 대한 기대도 컸다.

독대 직후 숙종은 안질 등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세자의 대리청정 의사를 밝혔고, 이에 따라 세자 윤은 8월부터 숙종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했다.

당시 세자 윤을 보호하던 소론은 숙종이 세자의 실책을 유도해 합법적으로 연잉군의 왕위 승계를 앞당기려는 조치가 아닌지 의구심이 생긴다.

3년 뒤 숙종이 타계하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인 1721년 노론은 경종을 밀어붙여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성사시켰다.

경종이 후사가 없고, 병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내친 김에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추진하다가 소론의 반격으로 역풍을 맞는다.

소론계 강경파인 김일경 등이 노론 대신들의 역모죄를 부각시킨 상소를 올린 이후 노론 4대신이 귀양을 가고, 60여 명이 처벌을 받았다. 이를 신축옥사(辛丑獄事)라고 한다.

당시 노론이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도한 것은 결과적으로 영조에게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무신란 주모자들은 영조가 신하에 의해 선택된 택군의 방식으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부당하다며 반란의 명분 중 하나로 삼았기 때문이다.


신축옥사를 통해 정권을 잡은 소론은 이참에 노론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1722년 임인옥사를 일으킨다.

당시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은 노론의 명문가 자제들이 경종을 몰아내려 한다고 고변을 올렸다.

고변에는 경종을 해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삼급수까지 언급되어 있었다.

자객을 보내 시해하는 대급수, 음식에 독을 타 독살하는 소급수, 숙종의 전교를 빙자해 경종을 폐위시키는 평지수가 그것이다.

이 일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이 처형되고, 170여 명이 죽거나 형벌을 받았다.

이처럼 1721년부터 1722년까지 일어난 노론에 대한 소론과 경종의 보복을 신임옥사라고 통칭한다.


그러던 차에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1724년의 일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그해 8월 경종이 몸져누웠는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약재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왕세제 궁에서 게장과 생감을 준비했고, 경종은 모처럼 수라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경종이 이튿날부터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사망 과정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재위기간 1724~1776)가 즉위하고, 노론이 집권하면서 경종 독살설이 널리 퍼져 나갔다. 이는 무신란의 주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영조는 즉위 2년째인 1725년, 신임옥사를 무고에 의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노론 4대신을 신원했다.

또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형한 것을 비롯해 소론의 중진들을 축출했다.

하지만 신임옥사를 겪은 노론은 소론에 대한 더 가혹한 조치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에 염증을 느낀 영조는 특정 당파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왕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따라 오히려 소론계 온건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것이 1727년의 정미환국이다.

무신란 주모자들이 거사를 일으키려 준비하던 시점이 바로 이때였다.

하지만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자 반란의 명분이 약해지면서 일부 동조자들은 무리에서 이탈하고,

최규서 등의 고변으로 모반 계획이 알려졌다.

이에 영조가 모반 가담자를 색출할 것을 지시하자 반란 주모자들은 곧바로 군사를 일으켰다.

반란을 처음 도모한 것은 신임옥사가 무고에 의한 사건으로 규정될 당시였다.

소론 축출에 위기 의식을 느낀 이인좌,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 소론계 강경파 인사들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남인들을 포섭하고, 팔도의 명망 있는 인사들을 규합하며 세를 불려 나갔다.

이들은 영조의 왕위 계승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밀풍군 탄(坦)을 내세워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고,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절을 하며 경종을 위한 복수를 다짐했다.

이들은 경종 독살설을 퍼뜨리며 반란 세력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규합했으며, 이로 인해 전국 곳곳에는 독살설과 관련된 흉서나 괘서가 나돌았다.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격문도 붙었다. 반란군은 충청, 호남, 영남, 경기, 평안도 등 전국에 걸쳐 조직됐고, 노비나 화적은 물론 양반들까지 가세했다. 목표는 영조 제거와 노론 타도, 그리고 소론과 남인의 연합 정권 구축이었다. 이를 무신란 또는 ‘이인좌의 난’이라고 부른다.

반란은 영조 4년인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반란군은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성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성으로 진입했다. 성내에 반란군에 호응하는 인사들이 있어 성은 일거에 함락됐다. 충청 병사 이봉상과 영장 남연년 등이 이 과정에서 살해됐다.

반란군은 이곳에서 이인좌를 대원수로 삼았고, 청주 주변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붙여 동조 세력을 모집했다. 이어 반란군은 목천을 거쳐 진천까지 북상했다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대원수 이인좌는 경기 안성으로, 부원수 정세윤은 죽산으로 각각 부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이즈음 정부의 진압군을 맡은 도순무사 오명항은 첩자를 이용해 진압군이 직산으로 갈 것처럼 반란군 쪽에 퍼뜨리고, 실제로는 안성으로 향했다. 안성에 있던 반란군은 예상치 못했던 진압군의 기습을 받고 패퇴하였다. 반란군 일부는 근처 청룡산으로 피신했으나 또다시 진압군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다. 곧이어 진압군은 죽산으로 향해 정세윤이 이끄는 반란군을 무찌르고, 부원수 정세윤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안성에 이어 죽산에서도 반란군이 패배하자, 이인좌는 진압군을 피해 달아나다가 끝내 사로잡혀 한성으로 끌려갔다.

호남에서는 태인 현감 박필현이 3월 19일 난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무장에서 유배 중이던 육촌 형제 박필몽이 나타나지 않은데다, 전라 감사 정사효도 동조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무산됐다.

박필현은 진압군에게 쫓기다 경상도 상주에서 붙잡혀 참수됐다.

또 이인좌가 청주성에서 북상할 즈음, 영남에서는 정온의 4대손인 정희량이 미리 약속한 대로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와 함께 안음(경남 안의)에서 반란군을 일으켰다.

이들은 안음에 이어 거창, 합천, 함양 등 네 개 군현을 차지했다.

그러나 함양을 거쳐 이인좌의 군대와 합류를 시도하다 진압군에 의해 막힌 뒤 4월 2일 선산 부사 박필건에게 진압됐다. 이로써 왕권 교체를 기도한 무신란은 실패로 끝났다.

영조는 즉위 직후 무신란을 겪으면서 어느 한 당파에만 국정을 전적으로 맡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는 곧 영조가 탕평책을 기반으로 정국 안정과 왕권 강화를 추진할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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