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사 박문수         2019.07.30.화요일,맑음

박문수; 조선 영조 시대에 도승지,병조판서,경기도 관찰사,어영대장,우참찬을 지낸 소론파 문신

생졸; 1691년(숙종17년)-1756년(영조32년) 

본관; 고령

호; 기은

증조부; 이조판서 박장원

조부; 세마 박선

부; 영은군 박항한

모; 공조참판 이세필의 딸


암행어사 박문수는

경종3년(17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된후 영조3년 4번의 암행어사로 활약하여 부정한 관리을 적발하고 어사로 파견 되었던 행적이 허구로 각색되며 암행어사 박문수 설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때 많은 일화들이 전해 오고있다.


1723년(경종3년),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 검열로 뽑혔다.

1724년(경종4년), 세자 시강원설서,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소론으로써 삭직 되었다.

1727년(영조3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다시 사서에 등용되어 영남안집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

   들을 적발하였다.

1728년(영조4년),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었다.이어 분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에 봉해졌다.

   같은 해 도당록에 들었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731년 영남감진어사로 나가 기민의 구제에 힘썼다.

1732년 선혜청 당상이 되었고,

1734년 예조참판으로 재직 중에 진주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그 뒤 호조참판을 거쳐,

1737년 도승지를 역임한 뒤 병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 병조 자체 내에 인신이 없어 군무의 신속한 입송에 불편을 주고 간리가 중간에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있었다.이는 군기의 중요성에 비추어 많은 문제점을 야기할 수도 있어,

   왕에게 주청해 병조판서와 이군색의의 인신을 만들었다.

1738년 다시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앞서 안동 서원을 철폐 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 부사로

   좌천되었다.

1739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1741년 어영 대장을 역임하였다.

   이어 함경도에 북도진휼사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해 송덕비가 세워졌다.

1742년 병조판서로 재직시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에 각 지방에 정배된 봉무사로서

   변통할 것을 주청해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수군 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5년 어영대장에 재임 되었고,

1749년 호조판서로 재직시 궐 안의 당우를 3년에 한 번씩 수리할 때 책임관으로서 역대 어느 관료보다도

   일을 잘 처리했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기기도 하였다.

1750년 수어사를 역임한 뒤 관동영남균세사를 거쳐,지성균관사,판의금부사,세손사부 등을 지냈고,

1751년 예조 판서가 되었다.

1752년 왕세손이 죽자 내의원 제조로 책임을 추궁당하여 제주로 귀양갔다.

1753년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한 그는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할 때 명문 벌열 중심의 인사 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했으며,

4색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을 강조하였다.

특히,군정과 세정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 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1749년 영조에게 주청해 다른 신하들과 함께 '각전각궁공상정례' 6권, '국혼정례' 2권, '각사정례' 12권,

'상방정례' 3권을 합해 '탁지정례'를 출판하였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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