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오 의리 (壬午義理)       2019.08.04.월일일,맑음

임오의리는

영조38년인 1762년에 발생한 임오화변(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사건)에 관한 의리다.

영조가 확립한 ‘영조의 임오의리’를 말하지만,

정조가 평생에 걸쳐 수정하려고 한 ‘정조의 임오의리’도 함께 고려해 보아야야 한다.

정조와 순조대에 걸쳐 대립하는 두 가지 임오의리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가 충신과 역적(忠逆)의 기준인 동시에 정국 주도 세력의 변동을 가져온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임오의리를 막연하게 모년의리(某年義理)라고도 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다. 
영조는 임오화변 직후 사도세자 처분의 정당성을,세자가 질병으로 인해 법도를 잃었고 그 결과 변란의 기미가 급박했기 때문에 세자가 반역의 죄인이 되기 전에 부득이 사사로운 인정을 끊고 종사를 위해 결단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이것이 "의리는 의리이고 애통은 애통이니,사적 애통으로 공적 의리를 가릴 수 없다."고

하는 영조의 임오의리이다.

영조의 임오의리는 처분의 근거를 질병-실성-광패-변란 사이에 모호하게 둔 채, 더 이상 신하들 차원에서 이를 언급하거나 수정하지 못하게 한 것이 특징이다.
정조 역시 영조의 임오의리를 준수하겠다고 공언하고서야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평생에 걸쳐 이를 수정하여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지위도 왕으로 높이려

하였다.

정조의 임오의리는 사도세자가 미덕을 지녔고 대리청정 때에는 저군으로서 문(文)과 무(武)에 걸쳐 공업을 수립하였으나,부자간의 성격과 견해 차이, 그리고 역적들의 이간책에서 기인한 병 때문에 사망하였으므로 왕으로 추숭될 자격을 두루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영조의 임오의리를 수정하기 위해,

정조는 영조가 자신의 처분을 후회하며 남긴 '금등(金縢' 문서까지 제시하는 등 일련의 공론 변경 과정을

거쳤다.
정조가 급작스럽게 승하함에 따라 정조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도리어 순조대 초반 급격한 정국 변동을 거치면서 세도정치가 자리 잡게 되자,

부담스러운 의리 변경보다는 이미 확정되어 있던 영조의 임오의리가 확고하게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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