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辛酉迫害)                      2019.08.05.월요일,맑음

신유 사옥(辛酉邪獄) ,신유교난이라고도 한다. 제1차 천주교 탄압

정조는 천주교와 남인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으나

1800년 순조 즉위 후 벽파가 정권을 잡자 원론적 입장에서 천주교와 남인을 탄압했다.
1801년 정순왕후는 사학을 엄금하고 뉘우치지 않는 자에게는 반역죄를 적용하였다.

이유는 천주교가 혈연과 군신의 관계를 부정하여 인륜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을 오랑캐나 금수의 상태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천주교에 관여했던 남인 인사와 교회를 이끌고 있던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많은 인사가 옥사하거나 처형당했다.신자 약 100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같은 해

1801년12월에 '척사윤음'이 공표되면서 일단 마무리되었으나 이후에도 천주교 박해는 계속되었다.


조선 후기에 집권자들은 성리학을 한층 교조적으로 신봉하면서, 그 사회 질서에 위협이 되는 이념을 배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하나의 학문에서 신앙으로, 소수의 지식인들로부터 민중 사이로 널리 퍼졌다.

특히 1794년(정조 18) 중국 베이징 교구에서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한 이후, 약 4,000명이던 신자가 수년 만에 1만 명으로 증가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당시 남인들은 정치적·이념적으로 노론 집권세력과 지향점이 달라 갈등이 깊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천주교를 탐구하고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많은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한편 영조 말년 이후 정계에서는 벽파와 시파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그 중심 인물이 모두 노론 계열이었고,쟁점도 주로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 및 그에 대해 정조가 취해야 할 입장에 대한 것이었지만, 시파는 벽파와 달리 정조의 정책을 따라 천주교와 남인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대립은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여 김구주의 누이인 영조 계비 가 수렴청정하면서 벽파가 일시에 정권을 잡았다.

벽파 정권은 먼저 시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으며,

이단의 배격이라는 원론적 입장에서 천주교와 남인에 대해 탄압을 가했다.

1801년 1월 정순왕후는 사학을 엄금하고 뉘우치지 않는 자에게는 반역죄를 적용하며,

전국적으로 오가작통법을 철저하게 실시해 신자의 씨를 남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천주교가 혈연과 군신의 관계를 부정하여 인륜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을 오랑캐나 금수의 상태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천주교에 관여했던 남인 인사와 당시 교회를 이끌고 있던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그해 2월에 정약종·최창현·최필공·홍교만·홍낙민·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권철신·이가환은 옥사했으며,이존창은 충청도 공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유배당했다.

여주와 양근 감옥에 갇혔던 이중배·최필제 등의 경기 지방 천주교도들도 다수 처형당했으며,

황주까지 피신했던 주문모 신부도 자수하여 효수되었다.

가을에는 황사영이 탄압의 전말을 보고하고 중국이나 서양의 힘을 동원하여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베이징의 교회에 보내려 한 일이 발각되어 이에 관계된 인물들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신자 약 100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같은 해 12월에 '척사윤음'이 공표되면서 일단

마무리되었으나 이후에도 천주교 박해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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