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약용                    2019.08.05.월요일,맑음

정약용(丁若鏞 );

생졸; 1762-1836

호; 다산

1801년(순조1),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탄압을 받고 있을 때였다.

정약용의 형제들도 끌려가 몽둥이 찜질을 받았다.

특히, 형 약전과 약종이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그에게 집중적으로 심문을 퍼부었다.

형관들은 오고간 편지에 나타난 괴수가 형 약종이 아니냐고 물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형 약종이 죽고 매부 이승훈도 죽었으나 그는 살아 남아 강진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오랜 귀양살이 중에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 많은 저술을 남겨 첫손 꼽히는 개혁 사상가가 되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갈라지는 양수리 위쪽 마재는 정씨들의 세거지였다.

이 마을 목사의 막내 아들이 바로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요 세계적인 학자인 정약용이다.

정약용이 태어날 즈음에는 비교적 나라가 평온했다.

그는 세 형들 밑에서 지식을 넓혔고 좀 더 자라서는 강 건너 양평에 사는 권철신에게 가서 학문을 익혔다.
그리고 광주에 사는 이가환에게서 학문의 깊이를 다지기도 했다.

권철신이나 이가환은 모두 당시의 쟁쟁한 실학자들이었고 성호 이익의 제자들이었다.

정약용은 이들에게서 성호학에 접근해 이익의 실학적 사상을 사숙하기 시작했다.

정약용의 실학 정신은 이익을 사숙함으로써 단초를 열어 가게 되었다.

소년 시절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지방 수령으로 다니자 아버지를 따라 진주 지방에서 살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지방 행정을 몸소 겪었다. 스무 살 때 과거에 합격해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다.

정조는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늘 시험을 보였는데 이때 그에게 '중용'을 내려주고 이를 강의하게 했다.

정약용은 임금 앞에서 막힘없이 강의했고 정조는 크게 감탄했다.

호학의 군주 정조는 이때 정약용을 앞으로 중용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다음해에 그는 형수의 초상을 치르고 한강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오면서 이벽에게서 처음으로 서학에 관한 말과 서양의 과학 지식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

는 수표교 옆에 사는 이벽의 집에서 많은 서양서적을 접하고 상당한 과학 지식을 쌓기도 했다.

정약용은 1789년(정조13) 마침내 알성시에 급제해 첫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사헌부 지평,사간원 정언 등의 언관이 되어 임금에게 정책을 상주하고 간언을 하는 소임을 맡았다.

정조는 젊고 재기 발랄한 정약용을 측근에 두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했다.

정조는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사도세자)를 찾아 매년 몇 차례에 걸쳐 수원의 능행길에 올랐는데,

정약용은 한강의 배다리 설치를 맡게 되었고 이 일을 훌륭히 해냈다. 

이어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수원성을 쌓을 적에 설계도와 기구를 만드는 일 또한 그가 맡았다. 그

는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힘겹게 지고 올리는 것을 보고 기구의 발명에 골몰했다.

또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성의 거리, 높이 따위를 측량해 가장 튼튼하고 단단한 성을 쌓기 위해 연구했다.

마침내 그는 거중기와 도르래,바퀴달린 달구지 따위를 발명해 성의 역사에 써먹었다.

                

이때부터 그에 대한 정조의 신임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를 암행어사로 보내기도 하고,규장각 학사나 승지 등을 맡기면서 늘 옆에 두었다.

이때 전해지는 말로는 정조는 영의정인 채제공의 뒤를 이을 인물로 장년층의 이가환,

청년층의 정약용을 꼽고 있었다고 한다.


1791년은 정약용이 정조를 만난 지 9년째로 접어든 해였다.

진산의 천주교도 윤지충이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실이 탄로나 서학에 대한 옥사가 일어났다.

목만중,이기경 등이 이 기회를 이용해 서학의 강독에 참석하고 서학을 받드는 이가환,이승훈,정약용 등을

몰아 잡으려 했다.

정약용이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은 후 첫 번째 맞는 시련이었다.

그는 문초를 받을 때 서학의 책을 읽었음을 솔직히 시인했으나,서학을 믿지 않았음을 밝혔다.

정약용은 무사했지만 그를 몰아내려던 이기경이 도리어 경원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럴 즈음 아버지가 죽어 그는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3년의 복상을 치렀다.

그리고 조정에 나와 참의의 벼슬에 있었다.

1794년에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잠입해 포교 활동을 벌이자 목만중은 또다시 정약용 일파를 걸고 들었다. 두 번째 시련인 셈이다.

정조는 반대파를 완전히 꺾어 누를 수 없음을 알고 정약용을 금정찰방이라는 한직으로 내보냈다.

그는 천주교도가 많은 홍주 아래 한 고을의 찰방으로 가서, 천주교도들을 잘 효유해 조정의 금령을 어기지 말고 제사를 잘 받들라고 권고했다.

몇 달 뒤 그는 다시 임금 옆으로 불려와 승지의 벼슬을 받았다.

이 무렵 정조는 백성의 수탈을 일삼는 관리의 부정을 막으려 무척 고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령들에게 그 방책을 올리게 했다.

이때 정조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 정약용을 곡산부사로 보냈다.

곡산은 민란이 자주 일어나는 고을이었다.

그는 부임 이후 조세와 부역을 공평히 하고 옥사를 너그럽게 다스렸다.

명 목민관으로 이름을 처음 떨치게 되었다.

정조는 특히 그에게 황해도 일대 수령들의 부정과 선정을 가려 올리라는 밀지를 내리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정조는 또다시 그에게 승지, 형조참의 등을 주어 곁에 있게 했다.

그러나 그가 외직에 있는 동안에도 그에 대한 모략은 끊이지 않았다.

이 무렵 목만중,이기경의 사주를 받은 조화진이 “이가환,정약용 등이 서학을 받들면서 역적을 모의한다”는 상변서를 올렸다. 정약용은 더 이상 반대파들의 모략을 견디기 어려워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정약용의 마지막 벼슬길이었다.

어느 여름날 밤, 정약용이 달을 마주하고 앉았을 적에 사립문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임금이 보낸 심부름꾼이 한서선 열 책을 내밀었다.
“다섯 권은 집 안에 보관하시고,다섯 권은 제목을 써서 올리라는 성상의 당부이옵니다.”
정약용은 임금의 선물을 받고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서 정조의 승하 소식을 들었다.

이제 용은 물을 잃었고 매는 죽지가 부러진 셈이다.

결국 정조와 어우러져 뒤뚱거리는 왕국을 바로 잡아보려는 그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그는 당쟁에 빠지지 않았다.

비록 남인의 가계에서 태어났지만, 당쟁의 중심 인물이 되지 않았음을 자랑 스러워했고,

 아들에게도 그런 일에 가담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문벌 · 당색의 타파를 열렬히 주장했고 인재의 고른 등용을 역설했다.

시파로 지목된 자신을 몰아내려는 벽파에 대해서도 비난을 퍼붓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소외되었을 적에는 감싸주기도 했다.

그를 늘 못살게 굴던 이기경이 경원으로 유배 되었을 적에 그의 동료들은 통쾌히 여겼다.

그러나 정약용은 “아니다. 우리의 재앙이 시작되는 조짐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늘 이기경의 집에 찾아가 그의 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기경의 어머니 상사에는 있는 돈을 다 털어 1천 냥이라는 많은 부조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도 이기경을 상대하지 않자 그에게 남몰래 접근해 다정한 말을 나누기도 했다.

이것은 적을 동지로 만드는 정약용의 국량이요 지도자의 자질일 것이다.

그는 누구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적 없다.

다만 남들이 자신을 헐뜯으면 자명하는 상소를 올렸을 뿐이다.

이런 그의 성격 또는 처세방법은 18년이라는 긴 귀양살이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정조가 죽은 뒤 벽파들은 남인 시파를 신서파로 몰아붙여 정약용의 집안은 거의 멸문의 지경에 이르렀다.


여유당

△ 여유당

                                     

1801년 신유박해에서 셋째 형 약종은 옥사했고 그는 둘째 형 약전과 함께 기나긴 귀양살이를 떠났다.

반대파들은 그도 죽일 것을 모의했으나 일부 동료들의 노력으로 귀양에 그쳤다.

강진 일대에서 지낸 그의 귀양살이는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안동 김씨의 문벌 정치가 굳어진 조정에서 그에게 사약을 내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약용은 농민들의 참상과 관리의 부정, 조정의 부패와 무능, 민생의 간고 등을 시로 읊기도 하고 책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수령의 부정을 막기 위해 쓴 '목민심서',

치도의 방책을 제시한 '경세유표',

공정한 형벌을 위한 '흠흠신서' 등은 나라를 살찌울 경제관계의 저술들이다.

'목민심서'는 자신이 곡산 부사로 있던 때의 경험과 강진의 농촌 현실을 쓴 것으로 불후의 명저로 꼽힌다.


당시 그는 관제,전제 등 모든 국가 제도에 대한 개혁 방안을 쓰고 있었다.

바로 '경세유표'였다.

이것을 중단하고 좀 더 직접적인 현실 문제를 타개 해야겠다는 의지에서 1817년 '목민심서'의 집필로 붓을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붓을 댄 지 1년 만에 완성했다.

그러나 집필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의 위민 사상의 정수이다.

목민은 ‘백성을 살찌운다’는 뜻이요,심서는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귀양살이 하는 한낱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1812년 서북에서 홍경래를 중심으로 농민 봉기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곳 선비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권유하기도 하고 후원하기도 했다.

이것은 농민 편에 서 있는 그로서는 이율 배반의 모습이다.

그러나 어쩌면 언제 민란의 음모자로 몰아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대비한 위장술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이 의병 제의는 불발로 그쳤다.

김조순은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김조순의 주선으로 그는 긴 유배에서 풀려났다.

만약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불평이나 터뜨리며 정담이나 설왕설래했더라면 온전 했을까?

그가 고향 집에 돌아 왔을 적에 서용보 또한 벼슬자리에서 떨어져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정약용은 묵은 감정을 씻고 그에게 사람을 보내 간곡하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이후 그는 책을 읽고 저술에 몰두하면서 틈틈이 주변의 산천경개 구경으로 나날을 보냈다.

벼슬할 뜻은 물론 없었으며 정담을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즈음 조정에서는 그에게 벼슬을 다시 주려고 논의를 벌였다.

그러나 벼슬살이를 다시 하던 서용보가 결단코 반대를 거듭해 실현되지 못했다.

정약용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흔히 그의 대표 저술로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있다.

'경세유표'가 국가의 기본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내용인 반면,

'흠흠신서'는 인명을 중시해 원옥이 없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인권관 계의 저술이요,

'목민심서'는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수령을 통해 민생의 고통을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19세기는 이 땅에 세도 문벌 정치가 들어선 시기이다.

몇몇 문벌가가 번갈아 정권을 잡고 마치 나무꾼이 작대기 휘두르듯이 나라와 민중을 몰아갔다.

이런 마당에 그들은 모두 벼슬을 차지했고 남은 찌꺼기조차 정당한 방법으로 인재를 수용하지 않고 벼슬을 팔아먹었다.

그 중에서도 지방관은 돈을 주고 산 벼슬의 값을 뽑으려고 민중을 갈취했다. 지방관은 2중3중으로 매매되어 어느 수령이 부임해서 한창 부임잔치를 벌이는 중에 다음 수령이 부임해올 정도였다.

이리하여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민중은 처음에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깊은 산 속에서 화전민이 되기도 했고 섬으로 들어가 어민이 되어 수탈의 손길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다가 도둑이 되고 명화적 떼로 뭉쳐 부호의 재물이나 관물을 빼앗았다. 그리고 끝내는 곳곳에서 떼 지어 관권에 항거했다.

앞뒤로 이런 판국이었는데도 당시의 지배자들은 정약용의 개혁 방안 따위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정약용은 결코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이 그저 팔짱만 끼고 있다가 그대로 죽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목민심서'에 제시한 그의 방안을 써주기는 커녕 읽어 주지도 않는 현실이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정약용이 열세 살 적에 나라 안에 천연두가 휩쓸었다.

한번 천연두가 휩쓸고 나면 살아남는 아이들이 적었고 더러 낫는다 해도 곰보가 되었다.

이럴 적에 나라의 대비책이라고는 피막을 지어 환자를 격리하는 정도였다.

어린 정약용이 이 병에 걸렸으니 부모는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기도 광주 땅에 사는 이헌길이라는 의원의 손을 빌려 살아났다.

이헌길은 천연두가 10-20년 단위로 유행하는 것을 보고 임상을 통해 치료법을 찾아냈다.

정약용은 그의 생명을 구해준 이헌길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천연두가 휩쓸어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이헌길의 천연두 처방책인 '을미신전'을 구해보니 찾아 보기가 매우 불편했다.

급한 마당에 하나하나 내용을 다 훑어볼 수가 없어 새로 항목을 만들고 그에 따라 처방을 제시했다.
정약용은 '마과회통'이라는 책을 썼다.

이는 이헌길에게 은혜를 갚고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리고 천연두는 자연 기운과 시대에 따라 처방이 달라지므로 이 책의 내용도 몇십 년이 지나면 처방을 바꿔야 한다고 썼다.

그의 말처럼 19세기 말 지석영이 종두법을 들여 왔을 무렵에는 기존의 처방은 효용이 반으로 줄었다.

그러나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자연의 기운과 체질에 따라 처방을 낸 이런 의술은 오늘날 민간요법으로 전승되고 있고 그 요법의 과학성 역시 부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와 같이 정약용은 인문이나 개혁 사상가 만이 아니었다.

그의 사고는 대단히 과학적이었고 생활 또한 그러했다.

그는 실로 빛나는 업적을 세웠는데 거의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만약 그에게 유배 생활이 없었다면 이런 역사적 저술이 나왔을까?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적에는 가산이라고는 별로 남지 않았다.

그는 가난하지만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더욱 학문을 연마하면서 보신에 철저했다.

이제 늙은 그였지만 그의 정적들은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일흔넷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파란이 겹친 생애였지만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저술을 통해 남기고 평탄하게 생애를 마무리했다.

죽어서도 한동안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가 사후 1백여 년 뒤인 식민지 시기에 저서를 출간할 수 있었다.

오늘날 그의 학문은 다산학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다.

다산 연구소가 발족되어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선양 사업을 줄기차게 벌이고 있다.

리고 그의 고향 일대와 강진의 유배지에서는 그와 관련된 유물 유적을 보전.전시하고 있는데,

순례단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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