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부 김대건 2019.08.05.월요일,맑음
신부 김대건;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 재복
생졸; 1822-1846
본관; 김해
출생지; 충청남도 내포 솔뫼(지금의 당진)
대건은 관명(冠名)이다.
신부 김대건은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모방(Pierre P.Maubant) 신부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조선에 돌아와 전교 활동과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던 그는 기해박해 때 순교 당했다.
그의 열성적 전교 활동과 경건하고 당당한 신앙 자세는 이후 천주교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대건은 관명(冠名)이다. 충청남도 내포(內浦) 솔뫼(지금의 당진)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김진후는 50세 때 교인이던 아들의 권유로 입교한 후 순조 때인 1791년의 박해 이래 수차례 검거
되어 고문,귀양 등의 고난을 겪다가 1814년 충청남도 해미 옥중에서 순교했다.
이에 조부 김택현은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 했으며 김대건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 김제준은 다시 내포로 이사하고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한양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이같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자라난 김대건은 1831년 조선 교구 설정에 이어 1836년 파리 외방 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적합한 소년을 물색하던 모방(Pierre P. Maubant) 신부에 의해 최양업,최방제에 이어 선택되었다.
모방 신부는 이들에게 라틴어와 함께 성직자로서의 기본소양을 가르친 후,
이들을 12월 2일 한양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 유방제 신부편에 마카오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모방 신부는 가장 늦게 선정된 그의 마음을 잘 몰라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김대건이 "앞으로 조선 성교회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다"고 굳게 맹세하여 함께 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만주,내몽골,중국을 거쳐 8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경리부에서 정식 교육을 받게 되었다.
먼저 중등 과정을 마친 후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했으며 이들 중 최방제는 1838년 병사했다.
1841년9월,김대건은 아편 전쟁을 틈타 중국과 조선에서의 이권을 위해 파견된 프랑스 군함 2척 중 1척에 동승하여 1842년 양쯔강에 이르렀으나 난징 조약의 체결로 군함이 되돌아가자 중국인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만주로 향했다.
이어 1842년12월에는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에 진입했으나 여러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다음해 1월 만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또 1844년에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éo) 주교의 명으로 외국인 신부들의 조선입국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조선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한 탄압의 분위기와 악화된 건강 때문에 천주 교회의 수습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1845년4월 배편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여기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로부터 8월17일에 신품성사를 받았다.
이로써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1845년10월에는 배편으로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조선으로 향하여 천신만고 끝에 강경 황산포 부근의
나바위에 상륙했다.
이어 그는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한양으로 잠입하여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1846년에는 아직 만주에 머물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 등의 입국을 위해 서해안 길을 개척하다가
6월에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
옹진군 감옥을 거쳐 해주 감옥에서 황해 감사로부터 심문을 받고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성장하고 천주교를 펴기 위해서 귀국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이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가의 금령을 어기고 출국한 사실 및 천주교의 신부임이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몇몇 대신들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의 개략을 책으로 만들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번역
하여 2벌의 지도를 채색하여 바치기도 했다.
이 당시 조선 정부는 그동안 권세를 누리면서 천주교 박해에 앞장서 왔던 풍양 조씨의 세도가 막을 내려
큰 권력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김대건 등의 옥사가 크게 중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1846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 3명의 처형을 따지기 위해 프랑스 함대가 충청도 홍주 앞바다에 기항하고 조선국 정대감 앞으로 된 문책서를 전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크게 놀란 조선 정부는 그의 처형을 결정하여 김대건은 9월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교인들이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산중에 안치되었다.
김대건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부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열성적 전교 활동과 경건하고 당당한 신앙자세 때문에 이후 천주교인들의 귀감이 되어 많은 교회나
수도회의 주보가 되었다.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에는 103인 성인의 하나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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