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만영 2019.08.05.월요일,맑음 조만영(趙萬永); 추존왕 익종(효명세자)의 장인으로 어영대장,훈련대장,영돈녕 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생졸; 1776(영조52년)-1846년(헌종12년) 본관; 풍양 증조부; 조상경 조부; 조엄 부; 이조판서 조진관 모; 홍익빈의 딸이다. 제; 영의정 조인영의 형. 익종의 장인인 조만명은 음보로 능원랑을 지내다가 1813년(순조13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된 뒤 지평,정언,겸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816년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탐관 오리들을 다스렸고,돌아와 전라도 내의 민폐인 진전징세, 환곡허록,각 궁방의 횡포 및 각사둔전의 폐,어염선세의 강제 징수 등을 열거,상소하여 전라 감사 김계온을 파직하게 하였다. 이어 심양사 한용구와 함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1819년 부사직이 되었다. 이 때 그의 딸이 효명세자(순조의 아들)의 빈(후일의 조대비)으로 책봉되었다. 뒤이어 이조참의·대사성·금위대장을 거쳐 1826년, 예조판서·이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827년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할 목적으로,순조가 건강상 이유를 들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그는 이조 판서로서 어영 대장을 겸해 실력자로 부상, 풍양 조씨 세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828년 이후 훈련 대장직을 겸임하면서 훈련도감 운영비의 조달 방법으로 주전을 건의하였다. 또 쓸모없이 된 훈국승호포수초상법의 개혁을 요청,전국의 각 고을'읍'을 단위로 식년마다 1인씩의 승호를 뽑아 올리게 하되,승호된 자가 그 임무를 계속하는 경우에 당해 고을은 다시 뽑지 않고 납전하게 함으로써 종래와 같이 무뢰배로 보충하는 폐단을 시정하였다. 1830년,왕세자의 병사로 그 일파는 안동 김씨파에 밀려 났지만, 그만은 호조판서,판의금부사,지중추부사,예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어린 세손의 보호에 힘썼다.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 외할아버지로서 호위대장,어영대장,훈련대장을 역임하면서 불안한 왕실을 보호하는 한편,자기파인 홍석주와 이지연을 계속 상위에 머물게 하며,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현 등을 이조와 형조판서직에 앉히는 등 세력 만회를 도모하였다. 안동 김씨 정권의 미온적인 태도로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자 이를 안동 김씨 세력을 꺾는 호기로 삼아 1839년(헌종5년) 천주교도에 대한 일대 탄압을 전개하며(기해사옥), 동생인 이인영으로 하여금 척사윤음을 올려 그 명분을 세우게 했다. 이로써 풍양조씨의 세도를 확립,이 후 5-6년 간 정권을 쥐고 그 일족이 현달했으며, 그도 1845년,궤장을 하사받고 영돈녕 부사가 되는 영예를 누렸지만, 문중내의 내분과 아들 조병귀가 규탄을 받아 갑자기 죽자 실의에 빠진 후 눈이 멀어 병사하였다. 그는 풍양 조씨 가문의 좌장이고 핵심 인물로서, 자신은 현직을 사양하고 뒤에서 왕세자나 헌종의 신변 보호와 왕실 안전을 명분으로 각 군영의 대장직을 차례로 역임, 오랫동안 군사권을 장악하여 조씨 세도의 군사적 배경을 이루었다. 때문에 그의 실력으로 볼 때, 정치 혁신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안동 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 민생 문제와 사회 병폐를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삼정문란을 초래했다. 글씨에 능해 영흥 궁달리기적비,임천 '회양부사조신묘표' 등이 전해지고 있다. 저서로 '동원인물고'의 편술을 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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