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화 추진 협의회 발족 2019.12.27.금요일,맑음
1984년5월18일,
김영삼과 김대중을 중심으로 발족되어 부산 등지에 조직을 둔 재야 정치 단체다.
민주화 추진협의회는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고 1985년의 12대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재야 민주 정치 세력을 연합하고자,
1984년5월18일, 김영삼과 김대중을 지지하는 야당 인사들이 연합하여 설립하였다.
1979년,박 정권에 의해 국회의원에서 제명되고 가택 연금을 당한 신민당 전 총재 김영삼은
1983년,5·18 민주화 운동 3주년을 기해 민주화 5개 항을 내걸고 무기한 단식을 시작하였다.
당시 미국에 있던 김대중은 김영삼을 지지하는 성명과 언론 기고문을 발표하고, “김영삼을
구출하라”는 내용의 시위를 하는 등 김영삼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하였다.
이에 정권에 의해 가택 연금이 풀린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정치
활동의 금지를 해제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김영삼의 상도동계 인사들은 친목 모임인 민주 산악회를 구성하는 한편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제휴를 모색하였다.
동교동계의 김녹영·박성철·박종률·김상현·김윤식과
상도동계의 이민우·최형우·윤혁표·김명윤·김동영 등 10명의 소위원회가 구성되고,
양 계열의 합작으로 1984년5월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설립되었다.
민주화 추진협의회는 김영삼과 김대중(미국에 머물던 김대중을 대신하여 김상현이 권한
대행으로 활동)을 공동 의장으로 하고,부의장 19명,운영 위원 452명,16개국, 32개 부서를 갖춘 조직으로 탄생하였다.
1984년 말에는 해금된 인사들로 인력을 보강하여 조직을 강화하고,
1984년12월20일, 신한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85년, 신한 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한 뒤에도 민주화 추진협의회는 김영삼, 김대중의
원외 활동 기반으로 신민당과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987년, ‘이민우 구상’과 내각제 개헌 주장 등으로 신한 민주당이 분열하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 민주당을 창당하게 되면서 민주화 추진협의회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1987년12월, 대통령 선거 후보자 선정 문제로 김대중이 탈당하여 평화 민주당을 창당함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는 해체되었다.
1984년5월18일, 공동 의장의 이름으로 ‘민주화 투쟁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각종 성명서 및 기자 회견을 통해 반(反)정부 활동을 전개하였다.
처음부터 정치 활동 재개를 위한 사전 조직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정치 단체로,
인적 구성에서도 재야 세력 중 비정치인은 배제했으며,
조직의 규약이나 강령도 채택하지 않았다.
2002년,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을 고문으로 한 법인체를
만들어 재창립하였다.당시 이사장은 김상현·김명윤, 회장은 김덕룡·김병오가 맡았다.
2007년에는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희부 부이사장 등 33명이 박근혜 후보 지지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민주화추진협의회는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 아래에서 재야에 흩어져 있던 민주 정치 세력을 김영삼·김대중을 필두로 결집시켰으며, 범민주 세력의 단합을 이끌어 내고
1985년,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사상적·조직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정치 단체라는 한계는 양김(김영삼·김대중)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나아가 각각을 지지하는 재야 민주 세력의 분열로 인해
1987년 대선에서 다시 군부 정권이 집권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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