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당 합당 민주 자유당 창당 2019.12.27.금요일,맑음
1990년1월22일,
대한민국의 여당인 민주 정의당,야당인 통일 민주당,신민주 공화당이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한 사건을 말한다.
1988년4월,
3당 합당의 발단은 제13대 국회위원 총선거에서 출발한다.
당시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은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의석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고,
통일 민주당,평화 민주당,신민주 공화당의 야당 3당에 밀려 여소야대 정국이 되자,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의 표결,국회에서의 증언 및 감정 등에 대한 법률 등 여러 현안이
야당의 주도 아래 처리되었다.
아울러 국민들의 지속적인 민주·자율화 요구, 하향세로 접어드는 국내 경기 등은 여소야대 정국과 함께 노태우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을 압박했다.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을 극복하기 위해 야당과의 합당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민주정의당에 마땅한 차기 대권 주자가 없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합당을 통한 차기 대권 주자의 영입으로 정권을 유지시킨다는 것이다.
3당 합당의 성사는 여당의 의지뿐만 아니라 야당의 호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통일민주당의 총재였던 김영삼은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김대중이 총재로 있던 평화
민주당에게 의석수를 역전 당해 제1야당의 지위를 빼앗긴 상황이었다.
김종필이 총재였던 신민주 공화당은 야당 중에서 가장 의석 수가 적어 정국에 참여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김영삼·김종필 두 사람은 모두 보다 많은 정치적 영향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구체적인 3당 합당을 위한 논의는 1989년6월부터 이루어졌다.
김종필은 내각제 개헌과 색깔론을 주장하면서
1989년7월, 노태우와의 단독 회동을 통해 정계 개편을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이에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의 합당설은 내부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1989년10월에는 김영삼이 김종필과 골프 회동을 가졌고,
1989년10월26일에 김영삼이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통일민주당과 유신정권 출신들이 포함된 신민주 공화당과의 합당설이 제기되었다.
1990년1월22일,노태우·김영삼·김종필은 민주자유당으로 아래 3당의 합당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화민주당의 김대중은 3당 합당을 규탄하며 범민주 유일 야당을 내세움과 동시에
지역 구도를 희석하려는 노력을 진행했다.
3당이 합당이 되자,
야당은 평화민주당만이 남아 여소야대에서 여대야소의 정국으로 바뀌었다.
이런 정국은 기존의 호남·PK(부산·울산·경남)·TK(대구·경북)·충청의 지역 구도를 호남 대
비호남이라는 지역 구도로 개편·강화시켰다.
1987년,제13대 국회위원부터 본격화된 지역주의 정치가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거쳐
3당 합당이 결성되며 더욱 강화된 것이다.
또 다른 3당 합당의 결과는 노태우 정부가 권위주의 세력에서 벗어나 민주화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김대중이 지역 대결 구도를 극복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 이념을 강화 했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이는 향후 정당 간 이념적 차별성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선까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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