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회 2019.12.27.금요일,맑음
전두환과 노태우 등 육군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육군 내에 결성된 사조직으로
신군부 세력의 중심이었으며 1979년의 12·12 사태와 1980년의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주도했다.
전두환이 대통령의 제5공화국이 끝나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1993년,해체되고 이후 군부가 정치에 간섭하는것을 엄격히 금지되었다.
하나회 결성은 1963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노태우,정호영,김복동 등 육사 11기 출신들에
의한 조직으로 알려졌다.
모태는 이들이 학생 시절 결성한 사조직 ‘오성회’이다.
1961년,
오성회는 5·16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벌이고 박정희의 신임을 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1963년,
조직된 이후 하나회 구성원들은 선후배간에 자리를 물려주며 군 요직 및 국회,정당, 등 사회 각계로 진출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1973년,하나회의 윤필용이 대통령 박정희의 퇴진과 후계자 문제를 거론해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처벌되는 과정에서 하나회의 실체가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에 대한 박정희의 신뢰로 더 큰 권력을 쥐게 되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대통령직에 오른 최규하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 지도부였던
정승화를 계엄 사령관에 임명했다.
이에 정승화 세력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충돌했고,
전두환은 군 내부 권력 장악을 위해 12월12일에 최규하의 재가 없이 휘하 병력을 동원해
정승화를 김재규 내란사건 관련 혐의로 강제 연행하는 하극상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군부를 완전히 장악한 하나회 세력은 국회를 무력 봉쇄하고
1980년5월17일, 비상 계엄 확대 조치를 내렸다.
1980년5월18일,이에 반발해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었고,
신군부는 유혈 진압하면서 결국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93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척결되었다.
1995년,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 탄압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핵심 인물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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