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국민당 창당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정주영은 자신의 막강한 재력을 수단으로 대통령이 되어 보겠다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1991년 말부터 정당 창당을 추진하였고

1992년1월,통일국민당(약칭 국민당) 창당준비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대학교수 출신인 김동길이 추진중이던 새한당을 흡수하여

1992년2월 초,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통일국민당을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1992 3월에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 국민당은

정주영의 막강한 재력에 힘입어 지역구 24명,전국구 7명,모두 31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92년12월,정주영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성공한 여세를 몰아  대통령선거에 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다.

그는 대통령선거에서 많은 돈을 선거자금으로 투입하였으나

대통령선거 총투표인 수 가운데 16.3%밖에 표를 얻지 못하였다.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뒤, 정주영은 집권세력인 김영삼 정권에게서 탄압을 받았다.

그는 대통령선거법과 특정경제가중처벌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현대그룹의 기업들은 검찰수사 및 세무조사를 받았다.

1993년2월, 탄압을 견디지 못한 정주영은 전국구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더 나아가 자기가 만든 당까지 해체하려고 노력하였다.

정주영은 그가 끌어들인 국회의원들에게 국민당을 탈당하도록 사주하였고,

자기가 제공한 국민당의 당사를 폐쇄하였다.

정주영의 노력에 따라 다수의 국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탈당하였다.

국민당에 잔류한 정치인들은 김동길을 당대표로 선출하고 그를 중심으로 당을 재건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주영의 재력에 의해 만들어진 정당에 자금이 공급되지 않고

당사마저 사라져 당의 유지조차 곤란해졌다.

1993년 여름,새로 집권한 김영삼 정권이 집권당 내의 노태우 세력에 대한 숙청을 전개하는데 반발하여

집권당을 탈당한 박철언·김복동 등 소수의 대구·경북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이 국민당에 합류하였다.

그들의 합류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국회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없는 빈약한 당세에 머물렀다.

당 사무실을 이곳저곳으로 옮기며 정당으로서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해 온 국민당은

다른 정당과의 합당을 통해 활로를 개척하려고 모색하였다.

국민당의 대표 김동길은

군소정당의 하나인 신정치개혁당(약칭으로 신정당)의 대표 박찬종과 합당교섭을 전개하여

1994년 5월 두 정당이 통합할 것을 합의하였다.

그러한 합의에 따라 두 정당은 1994년 7월 통합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신민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였다.

이로써 국민당은 창당 2년 반 만에 소멸되었다.

 

한.중 수교 수립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1992년8월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협정으로

1988년7월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에서

남북한 관계 개선과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바 있으며, 한중 수교는 그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한중수교의 국제적 배경은 1989년12월, 미.소 몰타 정상회의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했고,

1989년5월,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으로 중.소 관계가 정상화되었으며,

1990년9월, 한소 수교가 수립된 것 등이 한중 수교의 디딤돌이 되었다.

 

중국인민공화국의 건설과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양국간의 교류를 새롭게 개시하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한중수교 과정을 보면,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영사 기능을 일부 수행하며 새로운 교류를 시작했다.

1991년9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이후

1991년, 1,2차 한중 외무장관 회담이 개최 되었고 ,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남북한 관계 개선의 추이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91년12월, 제5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남북한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고,

비핵화 공동 선언을 채택함으로 남북관계는 상당히 개선 되었다.

그 이후 1992년 4월에 한국과 중국의 수교 협상이 개시되었다.

 

1992년8월24일,협상 결실로 한국 이상옥 외무장관과 중국 대표 첸지천 외교부장은

북경 영빈관에서 한.중 선린 우호 협력 관계에 합의했는데,

 

내용은

상호불가침,상호 내정 불간섭,중국의 유일 합법 정부로 중화인민공화국 승인,

한반도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원칙 등으로

6개항의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외교관계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교환했다.

하지만, 한중 수교의 후속 조치로 중국이 요구한 한국과 대만의 단교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중간 국교 수립 이후 한중 교류는 여러 분야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교역 규모는 1992년 63억8천만 달러에서 2012년 2206억2000만 달러로 35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며,

사회적,문화적 교류도 급격히 증가하여 중국에서도 ‘한류 열풍’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한.미 동맹 관계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한중 관계는 불안정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그룹 정주영 회장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현대 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은

제14대 대통령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으며,

1998년에는 판문점을 통하여 '통일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98년, 남.북 간 민간 교류의 획기적 사건인 '금강산 관광'을 성사 시켰다.

 

1915년,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30년, 송전 소학교를 졸업한 후 가난햐여 상급학교에 진학치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1937년9월에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한 끝에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을 시작했다.

1940년,지인의 소개로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 공장을 인수하게 된다.

그 뒤 1946년 4월 현대 자동차 공업사를 설립하였고,

1947년5월에는 현대 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다.

1950년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현대그룹의 모체가 된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여

1971년, 현대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현대 건설은 6.25 전쟁 후 후 점차 늘어가는 건설 수요를 감안하여

1964년6월에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1970년1월에는 현대 시멘트 주식회사로 독립하였다.

이후 해외 건설시장 개척과 울산 조선소 건설,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1987년 명예회장으로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정주영은

1992년 초,통일국민당을 창당,대표최고위원이 되어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12월에 제14대 대통령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 위원직을 사임하고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었다.

2000년5월,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으며,

2001년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사망했다.

1969년-1989년까지 지역사회학교후원회 회장,

1977년-1987년까지 전국 경제인 연합회 회장,

1982년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2년-1984년까지 대한체육회 회장 겸 한국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1989년-1992년까지 한.소 경제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95년 미국 존슨흡킨스 대학교에서 명예 인문 과학박사 등의 학위를 받았다.

1998년6월16일,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엿고

1998년11월18일,남북 민간교류의 획기적 사건인 '금강산관광'을 성사시켜 첫 출항하였다.

 

제1회 한국경영대상(1987),국민헌장 무궁화상(1988), IOC훈장(1998),

노르웨이 왕실훈장(1998) 등을 수상하였고,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1996) 등에 선정되었다.

주요저서에 회고록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1991)',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1998) 등이 있다.

2001년5월, 사후에 만해상 평화상을 받았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일 국민당 창당  (0) 2019.12.27
한.중 수교 수립  (0) 2019.12.27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실시/191227   (0) 2019.12.27
⊙ 정호용/191227  (0) 2019.12.27
⊙ 윤필용/191227  (0) 2019.12.27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실시         2017.12.27.금요일,맑음

1992년3월24일,1988년5월30일에 개원한 제13대 국회의 임기가 끝나감에 따라 

제6공화국 때에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이다.

출마한 당으로는 민주자유당·민주당·통일민주당·신정치개혁당·공면민주당·민중당이다

선거 방식은 지역구(직접선거에 의한 소선거구)와 전국구 방식이었다.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 때와 내용은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의원 정수 역시 299명으로 13대 때와 같지만,지역구가 224명에서 237명으로 늘어나고,

대신 전국구가 75명에서 62명으로 줄어들었다.

선거 방식은 직접선거로 선거구별로 최다수 득표자 1인을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소선거구 다수대표제의

지역구와 비례대표제의 전국구로 구분해 실시하였다.

전국구의 의석 배분은 정당의 의석  비율에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5석 이상의 의석을 얻은 정당을 자격 요건으로 하되 ,

5석 미만을 차지한 정당도 총유효투표 수의 3% 이상을 얻으면 우선적으로 1석을 배분하기로 하였다.

선거의 양상은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한 민주정의당이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과 통합한 민주자유당,

평화민주당과 신민주연합당의 통합으로 탄생한 민주당,

현대그룹의 정주영을 중심으로 탄생한 통일국민당의 3파전으로 압축되었다.

선거인 명부에 등록된 전국의 총유권수는 2900만 3828명으로,

2084만 3482명이 투표에 참가해 71.9%의 투표율을 보였다.

정당은 무소속을 제외하고 6개 정당이 참여하였는데,

선거 결과 민주자유당이 149석(지역구 116, 전국구 33), 

민주당이 97석(지역구 75, 전국구 22),

통일국민당이 31석(지역구 24, 전국구 7)을 차지하였다.

그 밖에 무소속이 21석,

신정치 개혁당이 1석을 차지하였고, 

공명민주당과  민중당은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함으로써 등록이 취소되었다.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1석 차이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였고,

야당과  무소속의 약진이 두드러졌으며, 13대 때와 마찬가지로 지역 할거주의 현상이 계속되었다.

시·도별 투표율은 제주도가 78.6%로 가장 높았고, 경북78.4%,강원도 78%,경남 77.3%로 그 뒤를 이었다.

투표율이 가장 낮은 지역은 66.6%를 기록한 대구이며,전국의 6대 도시가 평균 경쟁률을 밑돌아 도시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 풍조가 나타났다.

또 선거구별 최고 투표율은 광양시로 86.3%였으며,최저는 대구 달서을의 59.6%였다.

최고령 당선자는 민주당의 홍영기로 74세,

최연소는 통일국민당의 조일현으로 37세였다.

최다 득표 당선자는 동래갑의 민주자유당 박관용으로 9만 2353표로,

최소 득표 당선자는 장흥군의 민주당 이영권으로 1만 3704표로 당선되었다.

그 밖에 광주북구을의 민주당 이길재가 85.7%의 최고득표율로 당선되었고,

통일국민당의 김범명이 24.8%의 최소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통일국민당의 차화준 후보는 민주자유당의 김태호 후보를 단 11표 차로 이기고 당선됨으로써 최소득표차 당선 기록을 세웠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중 수교 수립  (0) 2019.12.27
현대 그룹 정주영 회장  (0) 2019.12.27
⊙ 정호용/191227  (0) 2019.12.27
⊙ 윤필용/191227  (0) 2019.12.27
⊙ 하나회/191227   (0) 2019.12.27

⊙ 정호용                     2019.12.27.금요일,맑음

정호용(생졸;1932년9월10일~현존)은 대구에서 출생하여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후일 육사의 동기가 되는 노태우는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이자 동창이었다. 1951년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 중 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전두환, 노태우가 육사 11기 동기생이며 이후 전두환, 노태우 등과 사적 모임인 하나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1951년,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 중 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그 후 육군사관 학교에 진학했고

1955년, 전두환,노태우와 육사 동기로 육군 사관학교를 11기생으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고,이 후  전두환,노태우 등과 사적 모임인 하나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하나회가 전두환 파벌과 윤필용 파벌로 나뉠 때 그는 전두환 파벌에 가담하였다.

1963년,군 복무 중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5년,

육군 본부 인사장교를 거쳐 중령으로 재직 중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1967년에 수료하였다.

1967년,

육군본부 진급 계장을 거쳐 수직 이동하여 육본 진급 과장으로 승진했다.


그 뒤 월남전에 참전하여 육군 제9보병사단 예하대대의 대대장으로 베트남에 파견,활동하고 귀국하였으며

1971년,육군 대령으로 승진하여 연대장 보직을 두루 역임한 뒤

1974년, 특전사 제7공수 특전여단이 창설되면서 초대 제7공수특전 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77년, 특전 사령부(특전사) 참모장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

1978년, 대구 주둔의 육군 제50보병 사단장이 됐다.

그러나 하나회의 리더 '윤필용 사건'발언 파문으로 한때 예편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1979년,12.12 군서 반란 이후 특전사령관에 취임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행각을 방조한 의혹이 있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의심한 전두환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한 12·12 사건 때는 대구에서 상경하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이 후 특전사령관에 취임했다.

1980년, 5.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와 서울을 3차례 오가면서 공수부대로

부터 보고를 받거나 현장 상황을 확인했다.

1980년5월27일, 상무충정 작전 직전 육군 본부로부터 가발, 수류탄 등 군수품을 지원받아 현지의 공수 부대에 제공했다.

1980년5월30일, 국가보위 입법회의가 구성되자 상임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1980년8월27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신군부 인맥 서열 3순위로 육군 대장까지 승진했고,

이듬해 1981년에는 육군본부 육군참모차장이 되었다가 1983년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예편 후에는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각각 역임했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건국데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박사학위를 받는다.

1985년에는 일해재단 연구원이 되었다.

1987년1월,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가 4개월 만인 그 해 5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당내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같은 해 7월 국방부 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했으나 전두환 정권이 불과 7개월밖에 남지 않은지라 오래 재직하지 못했다.

1988년5월, 이후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민주정의당 대구경북지구당 위원장에 임명,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는 대구 지역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여소야대 국회에서 제5공화국 비리에 대한 청문회, 5·18 청문회로 사회 여론이 공직사퇴요구를 제기하자 결국 1990년 1월 5일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2] 이후 명예회복을 위해 자신의 지역구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정치적 부담을 느낀 노태우 정부의 압력에 의해 후보직에서 다시 사퇴했다.

1990년3월,부인 김숙환의 자해 미수 사건으로 파란을 겪기도 했고,4월 초에 미구으로 출국했다가 귀국하였다.

1992년,제14대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고 후에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우리가 남이가"(경남 출신 김영삼과 정호용의 출신 지역인경북인들은 동향인이라는 뜻)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경북에서 김영삼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과거 청산 작업에 따라

1996년, 다시 12·12 군사 반란과 5·18 내란 혐의로 구속되어 유죄가 확정되었다.

1996년,제15대에서 옥중에서 대구 서갑에 출마하였으나 2위로 백승홍에게 석패하였다.


1980년,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정호용은 5.18 당시 전두환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수 차례나 광주와 서울을 오갔다. 또한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이였기 때문에 특전사 소속 부대의 잔혹행위를 둘러싸고 훗날 책임론이 제기됐다. 1989년에 열린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정호용은 당시 특전사 소속의 진압부대들은 당시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교사에 배속됐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신군부는 공식적인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사조직 하나회의 인맥에 의한 명령을 내리는 일이 빈발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1996년1월,

5.18 검찰 수사 결과 정호용이5.17 쿠테타에서의 내란모의참여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 관여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에 따라 이듬해 1997년 4월 대법원은 정호용에게 내란모의참여죄,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였던 이후, 그 해 광복절에 정부에게 12·12, 5·18 관련자를

사면받으면서 석방된 정호용은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2002년에 종친인 정몽준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돕기도 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 그룹 정주영 회장  (0) 2019.12.27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실시/191227   (0) 2019.12.27
⊙ 윤필용/191227  (0) 2019.12.27
⊙ 하나회/191227   (0) 2019.12.27
⊙ 한.소 수교 수립/191227   (0) 2019.12.27

⊙ 윤필용                   2019.12.27.금요일,맑음

윤필용(생졸; 1927년3월10일~2010년7월24일)은 군인이며 국영기업가인 동시에 정치가다.

경북 청도 출신으로 가족으로는 배우자 허필순과 아들 미주 제강 회장인 윤해관,딸 윤보경과 윤혜경이 있다.

 

1949년,육군 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 대대장으로 있을 때 박정희 사단장에 발탁되어

군수참모를 역임했다.

1961년,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실 비서실장 대리를 거쳐

1965년, 육군 방첩 부대장,

1965년,월남전에 참전하였으며

1968년, 사단장을 지냈다. 

1970년,수도 경비 사령관 등을 지냈다.

전두환 등이 속한 하나회의 후견자였다.

1973년,‘윤필용 사건’으로 쿠데타 모의 혐의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으나

쿠데타 모의 혐의는 입증되지 못했고 업무상 횡령과 특정 범죄 가중 처벌법 위반 등 8개

죄목이 적용되어 징역15년형을 받았다.

1973년, 육군 소장으로 강제 예편하였고,

1975년, 2년의 형을 치른 뒤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으며 1976년 사면·복권되었다.

1980년에는 제4대 한국 도로 공사 사장을 지냈으며,

1982년 한미 친선 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87년 한국 전매 공사 이사장,

1989년 한국 담배 인삼 공사 이사장을 지냈다.

2012년2월22일,

서울 고법 형사 11부에서는 당시 유죄를 선고받은 윤필용에 대한 재심을 하여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억울한 옥살이와 39년 동안의 누명을 벗었다.

윤필용 사건은 1973년,

당시 수경사령관이던 윤필용 소장이 이후락에게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십니다.

김춘추도 당나라에 갔다 와서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해서 불거진 사건이다.

윤필용 사령관과 그를 따르던 장교들은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처벌됐다.

하나회가 세간에 처음으로 알려진 사건이기도 하다.

⊙ 하나회                       2019.12.27.금요일,맑음

전두환과 노태우 등 육군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육군 내에 결성된 사조직으로

신군부 세력의 중심이었으며 1979년의 12·12 사태와 1980년의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주도했다.

전두환이 대통령의 제5공화국이 끝나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1993년,해체되고 이후 군부가 정치에 간섭하는것을 엄격히 금지되었다.

 하나회 결성은 1963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노태우,정호영,김복동 등 육사 11기 출신들에

의한 조직으로 알려졌다.

모태는 이들이 학생 시절 결성한 사조직 ‘오성회’이다.

1961년,

오성회는 5·16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벌이고 박정희의 신임을 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1963년,

조직된 이후 하나회 구성원들은 선후배간에 자리를 물려주며 군 요직 및 국회,정당, 등 사회 각계로 진출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1973년,하나회의 윤필용이 대통령 박정희의 퇴진과 후계자 문제를 거론해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처벌되는 과정에서 하나회의 실체가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에 대한 박정희의 신뢰로 더 큰 권력을 쥐게 되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대통령직에 오른 최규하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 지도부였던

정승화를 계엄 사령관에 임명했다.

이에 정승화 세력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충돌했고,

전두환은 군 내부 권력 장악을 위해 12월12일에 최규하의 재가 없이 휘하 병력을 동원해

정승화를 김재규 내란사건 관련 혐의로 강제 연행하는 하극상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군부를 완전히 장악한 하나회 세력은 국회를 무력 봉쇄하고

1980년5월17일, 비상 계엄 확대 조치를 내렸다.

1980년5월18일,이에 반발해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었고,

신군부는 유혈 진압하면서 결국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93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척결되었다.

1995년,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 탄압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핵심 인물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 한.소 수교 수립          2019.12.27.금요일,맑음

1990년9월30일,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양국의 외무장관 사이에 이루어진 한국과 소련의 공식 수교다. 


1884년에 체결된 조.러 수 호통상 조약은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1904년 파기

되었고, 그 후 양국은 냉전을 거치면서 거의 교류가 없었다.

적대적이던 한소 관계는 1970년대 동서 진영의 데탕트가 시작되면서 상호 입국허용,

제3국을 통한 간접 교역, 문화교류 등으로 점차 호전되었다.

그러나 1983년 9월1일의 'KAL기 피격 사건'으로 개선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었고,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구상서를 교환하는 것을 시작으로 소련이 올림픽에 788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참가시키면서 다시 호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89년4월3일, 소련 상공 회의소 서울사무소가 개설되었고,

1989년7월에는 대한 무역 진흥 공사(KOTRA) 모스크바 사무소가 설치되었다.

1989년11월17일,양국간 영사처 설치를 합의함으로 86년만에 공식 외교 관계를 복원하였다.

1990년6월4일,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정상회담을 통해

한 소 수교의 원칙을 합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90년9월30일에,

 유엔 본부에서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상과 최호중 외무 장관이 '한 ·소 수교 공동 성명서'에 서명함으로써 한국과 소련은 역사적인 수교를 수립하게 되었다.


한국과 소련의 수교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및 등거리 외교 정책과,

탈냉전의 세계적 추세에 부응하려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가 맞물려 추진된 결과였으며,

한.중 수교와 함께 북한의 최우방 국가들을 상대로 남북한 교차 승인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북한 핵사찰수용 등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북방 외교가 낳은 성과였다.

그러나 소련에 3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면서도 상환 조건을 명시하지 않는 등 경제적

실리를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정치적 명분에만 압도된 외교라는 비판도 많았다.

 









⊙ 3당 합당 민주 자유당 창당             2019.12.27.금요일,맑음

1990년1월22일,

대한민국의 여당인 민주 정의당,야당인 통일 민주당,신민주 공화당이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한 사건을 말한다.

 

1988년4월,

3당 합당의 발단은 제13대 국회위원 총선거에서 출발한다.

당시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은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의석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고,

통일 민주당,평화 민주당,신민주 공화당의 야당 3당에 밀려 여소야대 정국이 되자,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의 표결,국회에서의 증언 및 감정 등에 대한 법률 등 여러 현안이

야당의 주도 아래 처리되었다.

아울러 국민들의 지속적인 민주·자율화 요구, 하향세로 접어드는 국내 경기 등은 여소야대 정국과 함께 노태우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을 압박했다.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을 극복하기 위해 야당과의 합당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민주정의당에 마땅한 차기 대권 주자가 없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합당을 통한 차기 대권 주자의 영입으로 정권을 유지시킨다는 것이다.

3당 합당의 성사는 여당의 의지뿐만 아니라 야당의 호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통일민주당의 총재였던 김영삼은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김대중이 총재로 있던 평화

민주당에게 의석수를 역전 당해 제1야당의 지위를 빼앗긴 상황이었다.

김종필이 총재였던 신민주 공화당은 야당 중에서 가장 의석 수가 적어 정국에 참여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김영삼·김종필 두 사람은 모두 보다 많은 정치적 영향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구체적인 3당 합당을 위한 논의는 1989년6월부터 이루어졌다.

김종필은 내각제 개헌과 색깔론을 주장하면서

1989년7월, 노태우와의 단독 회동을 통해 정계 개편을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이에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의 합당설은 내부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1989년10월에는 김영삼이 김종필과 골프 회동을 가졌고,

1989년10월26일에 김영삼이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통일민주당과 유신정권 출신들이 포함된 신민주 공화당과의 합당설이 제기되었다.

1990년1월22일,노태우·김영삼·김종필은 민주자유당으로 아래 3당의 합당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화민주당의 김대중은 3당 합당을 규탄하며 범민주 유일 야당을 내세움과 동시에

지역 구도를 희석하려는 노력을 진행했다.

3당이 합당이 되자,

야당은 평화민주당만이 남아 여소야대에서 여대야소의 정국으로 바뀌었다.

이런 정국은 기존의 호남·PK(부산·울산·경남)·TK(대구·경북)·충청의 지역 구도를 호남 대

비호남이라는 지역 구도로 개편·강화시켰다.


1987년,제13대 국회위원부터 본격화된 지역주의 정치가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거쳐

3당 합당이 결성되며 더욱 강화된 것이다.

또 다른 3당 합당의 결과는 노태우 정부가 권위주의 세력에서 벗어나 민주화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김대중이 지역 대결 구도를 극복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 이념을 강화 했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이는 향후 정당 간 이념적 차별성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선까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 서울 올림픽 개최                      2019.12.27.금요일,맑음

1988년9월17일부터 1988년10월2일까지 16일 동안 치뤄진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는 

‘화합·전진’의 기치 아래 전세계 160개국이 참가해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되어

성공리에 끝났으며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종합 4위를 차지하였다.

1981년9월,

서울 개최가 결정된 후부터 준비가 진행되어,스포츠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 문화와 우수한 경기 운영 역량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제24회 올림픽대회를 서울에 개최하기 위한 유치 활동은

1979년9월19일, 국민 체육심의 위원회 7인 소위원회의 유치 결의에서부터 비롯되었다.

1979년9월21일,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되었으며,

1979년10월8일, 서울 특별시장이 올림픽 유치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1980년3월7일,올림픽 유치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80년9월29일, 대한올림픽위원회 10인소위원회와

1980년11월6일, 대한올림픽위원회 확대상임 위원회를 거쳐

1980년12월2일, 서울특별시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후보 도시로 신청

하게 되었다.

1981년2월13일, 국제올림픽위원회로부터 서독 바덴바덴 총회에 참석할 대한민국 대표단원 규모를 통보해 달라는 요청이 왔으며, 

1981년3월30일부터 4월4일 사이, 서울이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위한 국가올림픽위원회(NOC) 조사단의 방한이 있었고,

1981년4월4일부터 4월8일 사이 같은 목적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 조사단이 방한했다.

1981년6월9일부터 11일 사이 국제스포츠연맹 조사단이 서울에 다녀갔으며,

1981년7월9일부터 11일 사이 전상진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베네수엘라에서 개최된 미주 국가 올림픽위원회 총회에 참석,올림픽 유치교섭을 벌였다.

1981년9월18일, 정주영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한민국대표 추진위원회를 바덴바덴에 파견

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81년9월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는 1988년 하계

올림픽의 개최지로 서울을 선정했다.

특히,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 대회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60여 개국이 불참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대회는 소련 등 동유럽 국가 18여 개국에서 역시 불참했다.


올림픽이 정치적 대결로 위기에 처한 시점에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개최하게 된다면 세계평화를 정착시키는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이었다.

멕시코를 제외한 역대 올림픽 개최국이 모두 선진국이었는데,

한국은 선진국도 후진국도 아닌 개발도상국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