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수신사   김기수        2019.08.15.목요일,맑음

김기수; 곡산군수, 덕원부사, 대사성,제1차 일본 수신사 등을 역임한 문신.

생졸; 1832년(순조32)-미상

본관; 연안

호; 창산

출신; 서울

부; 김준연


1875년(고종12)에 현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에 오르고,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통정 대부에 올랐으며,

예조 참의로 제1차 수신사에 임명되어 대일 교섭의 첫 사절이 되었다.

사절 단원 76명을 인솔하고 4월4일 서울을 출발하여 4월29일 부산에서 일본 기선 고류마루에 승선,

4월30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고 5월4일 고베를 경유하여 5월7일 요코하마에 입항하여,

일본 외무성 관리의 마중을 받고 특별 열차편으로 동경에 도착하였다.

그 뒤 5월 27일 동경을 떠날 때까지 20일간 체류하면서 개화한 일본의 문물,

즉 전신과 철도의 가설, 군함과 대포의 제조를 비롯하여 군사·기계·학술·교육 등의 시설을 관람하는 외교

의례상 전례가 없는 환대를 받았다.


김기수의 일본 견문기는 '일동기유''수신사일기'에 나타나 있다.

수신사 일행의 보고와 김기수가 고종에게 올린 '복명별단'은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척신과 조정의 신하들에게 개국주의에 커다란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 결과 일본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과 1881년 신사유람단을 파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동경 체류 당시 주일 영국 공사가 호의를 베풀어 면회하기를 요망하였으나,

구미 외국 사절과는 일체 접촉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1877년 황해도 곡산군수, 1879년 덕원부사, 1881년 대사성,1883년 감리의주통상사무 등을 역임하고,

1893년에 홍주 목사로 나갔을 때 황간·청풍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파견되었다.

민란 주모자를 엄한 형벌에 처하여 귀양 보내고,

전 황간 현감 민영후와 전 청풍 부사 송병두는 의금부로 하여금 죄인을 잡아다가 신문하도록 하였다.

이후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문명이 높았다.

저서로는 '일동기유''수신사일기'가 있다.


1867년 학행 관련 음서에 선발되어 현감을 지내다가,

1875년(고종12년),별시 문가 병과로 급제, 응교로 뽑혔다.

1876년, 예조참의로 있을 때,강화도조약의 결과 파견하기로 한 수신사의 대표로 결정되어 일행 75명과

함께 일본 기선 고류호를 타고 ,일본제국으로 건너가 온갖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근대화한 일본의 문물을

둘러보고 왔다.

1876년 음력6월 귀국하여 '일동기유''수신사 일기' 등을 썼다.

이를 계기로 조정의 일본에 대한 관념이 호전되어 뒤에 신상유람단을 보내게 된 동기를 만들었다.


⊙ 제1차 수신사 파견          2019.08.15.목요일,맑음

이전까지는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하는 사신을 통신사라 불렀으나,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수신사로 바뀌었다.

이는 양국이 근대적 입장에서 사신을 교환한다는 뜻이다.

1876년4월,

예조참의 김기수를 필두로 한 제1차 수신사 일행 76명이 일본으로 떠났다.

이들은 군사 시설, 공장 등을 돌아본 후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수신사는 마지막 조선 통신사(1811년) 이래 65년 만에 일본을 방문한 정부 공식 사절단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 도쿠가와막부(덕천막부)의 간청으로 국교를 재개하고

고종 초년까지의 260여 년 동안 10여 차례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냈다.

 일본의 사절 역시 여러 번 조선에 와서 양국 사이에는 평화적 외교가 진행되었고,

동시에 부산에서는 일본(왜관)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자 쇄국주의자였던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이 은퇴하고 왕비 민씨 측이 정권을 잡자,

일본은 다시 우리나라와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외무성 관리 모리야마를 동래에 파견하였다.

일본측은 동래부사 황정연과의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일부러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에 보내 조선 군대와 충돌하게 하였다. 이것이 ‘운요호사건’으로서, 책임을 묻는 체하며 전권대신 구로다와 이노우에를 강화도에 보내 조선측 대표 신헌·윤자승과 회담하고, 1876년 2월 2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체결 후 일본은 계획된 절차에 따라 조선에 초대외교 형식을 취하여 사신을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선 정부는 사례의 뜻을 표하는 의미로 사신 행차를 보내기로 결정,

예조참의 김기수를 수신사로 파견하게 되었다.

수신사 일행 76명은 그 해 4월 4일서울을 출발하여, 그 달 29일 일본 기선을를 타고 부산을 떠났다. 수신사 일행은 이튿날 시모노세키(하관)에 도착한 뒤 약 2개월간의 시찰을 마치고 윤5월 7일부산에 돌아와 6월 1일서울에 도착한 뒤 고종에게 그 동안의 일을 보고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예정에도 없던 일황과 만나고, 태정대신 산조와 이토(이등방문)·이노우에 등 일본 정계 요로로부터 연회에 초대를 받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또 원로원·의사당을 비롯해 육군성·해군성·내무성·공부성·문부성·대장성과 경시청·개척사 및 육해군의 군사시설과 훈련 상황, 박물관·소방 조련 등 일본이 자랑하는 근대화한 모든 시설을 관람하는 외교 의례상 전례가 없는 환대를 받았다.

사신 행차가 일본으로 떠날 때까지 국내 여론은 일본에 대하여 경계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김기수의 견문기인 '일동기유''수신사일기'를 보면 일본행 이후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수신사 김기수 일행의 일본관과 그가 고종에게 올린 '복명별단'은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척신과 조신들에게 개국주의에 커다란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강요에 의했다고는 하나 그 뒤 우리나라가 대일 관계, 나아가 국제 정세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강화도 조약     2019.08.15.목요일,흐림

강화도 조약은

일본이 운요호 사건(1875.9.20)을 핑계로 조선의 접견 대사 신헌과 일본의 전권 대사 구로다 기요다카

사이에 강제로 체결된 불평등 조약인 동시에 일본과 최초로 1876년2월27일(고종13년)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은 일본이 조선 침략의 첫 단계를 실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일본이 서양 제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조선에서 그대로 재현시킨 것이다.

강화도 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선측에서는 '조일 수호조약' ,일본측에는 '병자 수교 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전권대사로 구로다 기요다카,이노우에 가오루를 부사로 보내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영해의 자유 항행,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3척의 군함으로 부산에 입항하여 교섭이 진전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킬것을 예상하여 육군을 증가해서 보낼 것을 본국에 요청한 뒤에  강화도로 향하고,모리야마 시게루로 하여금 예비 교섭을 시켰다.

이에 조선 정부는 시원임 대신 회의를 개최하여 신헌을 접견대관, 윤자승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강화도를 회담 장소로 결정하고 세번의 정식 회담을 열었으나 여러 번 결렬 될 뻔했다.


이때 조선 정부에서는 흥선 대원군 일파와 유생들의 반대와 박규수,오경석 등의 주장과 청나라 북양 대신

이홍장의 권고,고자의 적극적인 개항 의사에 따라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개국을 결정하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에 따라 1876년8월24, 다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무역장정(조일통상 잠정협약)이 체결

되었으며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일본인이 조선내에서 화폐를 사용할수 있는 화폐체계 이원화와 일본의 경제침투를 가져오는 단초가 되었다.


일본은 1967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9년이 지난 시점인 이 조약 체결 직후인 1877년 초,


몰락사족(사무라이)의 주동인 사이고 다카모리(메이지 유신의 주역)에 의해 서남 전쟁인 반란이 일어났다.

4만의 사족들과 징병제로 뽑은 7만의 농민군이 전쟁을 치루어 신정부인 농민군이 승리하였다.

이것이 일본 마지막 내전이 되었다.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                 2019.08.15.목요일,흐림

조선 후기에 정학을 지키고 사학을 배척하는 유교의 이념을 대변하는 사상으로 일어난 사회 운동이다.

구한말 외세의 개항 압력이 거셀 때 이를 반대하는 반외세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된 이론이다.

 

위정척사를 주장한 이항로,기정진,김평묵,최익현,유인석 등의 유학자들을 위정척사파라 칭했다.

반외세를 주장한 위정척사파는 병인양요 등 외세의 침략과 개화에 반대하여 상소 운동을 벌였으며,

을미,을사 의병을 일으켜 반일 투쟁을 벌였다.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반포되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결사 항쟁을 호소했다.


이와 같이 위정척사론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나 반외세 민족 의식의 형성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송나라 주자가 여진족의 침략으로 한족과 중국의 문화가 위기에 빠지자

유교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오랑캐의 사상을 배척하기 위해 위정척사를 체계화하였다.

조선의 위정척사는 조선 초 유교를 정통으로 하여 불교를 배척할 때 처음 등장했다.

영.정조 때 천주교가 들어와 유교의 전통을 거스르는 교리를 전도하자 위정척사가 다시 등장하였다.

이항로 등 유학자들은 서양을 오랑캐로,학문과 종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배척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위정척사론은 기존의 체제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논리였으나,서구의 침략에 저항하며 민족주의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개화파의 주장이 현실적이고 일리는 있었으나 무력으로 문호 개방을 하게 된 조선에서 위정척사는

개항의 침략적 속성을 꿰뚫어보고 저항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1차 수신사 파견/190815  (0) 2019.08.15
⊙ 강화도 조약/190815   (0) 2019.08.15
⊙ 명성황후/190815   (0) 2019.08.15
⊙ 운요호 사건/190815   (0) 2019.08.15
⊙ 흥선 대원군/190815   (0) 2019.08.15

⊙ 명성황후         2019.08.15.수요일,흐림

명성왕후(明成皇后) 민비; 임오군란,갑신정변,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

이름; 민지영 

생졸;1851년(철종2년)-1895(고종32년)

본관; 여흥

부; 민치록

모; 한창부부인 이씨

릉; 1897년11월,청량리의 홍릉에서 1919년 고종의 장례 때 경기도 남양주 금곡의 홍릉에 합장되었다.

명성황후 민씨는 남편 고종과 함께 서양 세력의 거친 파고 속에서 일제 침략자들의 야심에 정면으로 맞서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조선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쥐고 흔들던 왕권을 남편 고종에게 되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임오군란으로 절체절명의 고비를 넘긴 그녀는 고종을 보좌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선도한다.

제국주의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를 발판으로 조선 병탄의 야심을 숨기지 않는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강대국 러시아와 미국 등을 끌어 들여 국체를 보전하고자 했다.

이런 전략적 묘수는 소위 ‘여우 사냥’이라는 일제의 야만적인 도발로 인해 무산되었지만,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함)이라는 대반전의 승부수를 불러 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대한제국 수립이라는 결실로 맺어졌다.

오늘날 그녀는 ‘민비’와 ‘명성황후’라는 극단적인 호칭이 말해주듯 조선을 망친 여인,

혹은 조선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다 순절한 영명한 조선의 국모라는 두개의 평가를 받고 있다.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2년)에 경기도 여주에서 부친 민치록과 모친 한창부부인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8세 때 부친이 타계한 뒤,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인현왕후(숙종 계비)의 친정집인 감고당에서 살았다.

1863년(철종14년), 철종이 타계하자

조대비(신정왕후 조씨)의 명에 의해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제26대 고종)이 국왕으로 옹립되고,


3년 뒤인 1866년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에 의해 16세 때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비로써 여흥 민씨 가문에서 배출한 세 번째의 조선 왕비이며 황후다.

4남1녀의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고 순종만이 남아 대한제국 2대 황제를 지냈다.

명성황후는 청,일 사이에서 혼란과 정변,비명에 간 친정 어머니와 오빠들의 운명 등으로 일상을 보냈다.

고종 즉위 이후 10년 동안은 어린 국왕을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성년이 되면서 정사를 보고자 하는 고종의 욕망과 이를 지지하는 척족 인물들과 재야의 여론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게 되었다.

이후 고종과 명성왕후 민비는 개화 정책을 추구하였으나,

안으로는 보수 유생,구식 군대,급진 개화파,동학 농민군의 도전에 직면하였고,

밖으로는 청국의 강화된 내정 간섭으로 국정이 표류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 명성 황후는 임오군란 당시 궁중을 탈출 했다가 환궁하였고,

갑신정변 당시는 기지를 발휘하여 거사를 무위에 그치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틈타 일본이 무단으로 조선에 파병하여 경복궁을 침략하여 조선 조정을 장악

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궁중에 연금된 상태가 되었다.

이후 조선은 위기에 처하였으나  러시아 주도의 '삼국 간섭'에 의해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였다.

이때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군주권 회복을 추구하였고,

조선 보호국화가 좌절된 일본 정부는 미우라 고로를 주한 공사로 파견하였다.

이러한 내외의 격동 속에 고종을 적극 내조해 왔으나 이로부터 한 달 여 뒤 일본은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을미사변;명성왕후 시해사건)하였다.


사건 직후 일본 정계의 요인과 외교관 등 언론인은

명성황후가 부패의 화신으로서 조선을 망친 ‘궁중의 암탉’이라 지칭하였고 흥선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의 범죄로 덮어 씌웠다.

미우라 공사는 ‘흥선 대원군의 요청에 응하여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궁궐에 도착해 보니 사건은 일단락된

뒤였다. 이 사건과 일본 군민은 무관하다’하였다.

1897년(광무1년),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선포 직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강화도 조약/190815   (0) 2019.08.15
⊙ 위정 척사운동/190815  (0) 2019.08.15
⊙ 운요호 사건/190815   (0) 2019.08.15
⊙ 흥선 대원군/190815   (0) 2019.08.15
⊙ 신미양요/190815   (0) 2019.08.15

⊙ 윤요호 사건                     2019.08.15.목요일,흐림

1875년9월20일에 일어난 운요호(운양호 사건)은 ,

일본 군함 운요호가 포함 외교의 일환으로,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자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자,함포 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 수군을 공격하고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이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포함 외교에 바로 굴복하고 개항(개국)을 하였다.

당시 국제 사회는 제국주의가 팽배해 강대국이 후진국을 무력으로 압박하여 개항을 유도하거나 침략하는

사례가 많았다. 1860년대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한론이 다시 고개를 들어 침략 전략을 가지고 조선에

접근하였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 개혁을 단행한 후,일본은 조선과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흥선 대원군의 '양이 정책'으로 실패하였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외세의 침략은다시  고개를 들기시 작 하였다..

1873년12월,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개국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한편,일본은 조선과의 수교를 좀 더 신속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포함 외교를 시도하게 되었다.   

1875년,조선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운요호와 제이정묘호를 부산에 입항시키고,조선의 항의를

무시하고 무력적 포함 시위를 단행했다.

1875년9월20일,운요호(운양호)는 동해안을 순항하고 다시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도 앞


바다인 초지진에 접근하자 조선 수비병은 일본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이에 일본군은 모함으로 되돌아가 함포로서 조선에 보복 포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 수군과 격전을 벌여 큰 피해를 입히고 퇴각했다.

1876년2월27일,운양호 사건 이후 일본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사죄와 조선 영해의 자유 항행,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내세워, 강제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조약)을 체결하였고,

일본은 조선 식민지화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위정 척사운동/190815  (0) 2019.08.15
⊙ 명성황후/190815   (0) 2019.08.15
⊙ 흥선 대원군/190815   (0) 2019.08.15
⊙ 신미양요/190815   (0) 2019.08.15
⊙ 오페르트 도굴 사건/190815  (0) 2019.08.15

⊙ 흥선 대원군               2019.08.15.수요일,흐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 조선왕26대 고종의 아버지로써 국태공

생졸; 1820-1898


흥선대원군은 왕이 아니면서 왕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고 국태공이란 최고의 존호를 받은 사람이다.

조선왕 24대인 헌종과는 7촌 아저씨 사이였고,그 뒤를 이은 25대인 철종과는 6촌간이었다.

철종이나 흥선군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지만,그들의 조부는 모두 서출이었다.

사도세자가 벽파에게 몰려 죽고 난 뒤 주동자인 노론 세력은 은언군(철종의 조부)을 강화도로,

은신군(흥선군의 조부)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그로부터 순조와 철종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문벌 정치 아래서 이들 자손은 눈엣 가시처럼 냉대를 받았다.

그런데 헌종과 철종에게서 후사가 없자 이들은 왕위를 넘볼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안동 김씨 세력은 왕위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으며,왕위에 앉혔는데 그가 바로 철종이다.


이런 처지에 똑똑한 체하며 왕위를 넘보다가는 목숨을 날려야 하는 것이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제법 똑똑한 체하며 왕위를 넘보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하전의 경우가 본보기였다.

이런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흥선군은 안동 김씨에게 붙을 수도 없고 자기 의지대로 살 수도 없었다.

흥선군은 관례대로 가까운 왕족,종친에게 주는 종친부의 하찮은 벼슬도 해 보았고,아무 실권도 없는 사복시 제조,오위도총부 도총관 따위를 얻어 해 본 적도 있었다.
흥선군은 하찮은 벼슬을 하면서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며 직무에 충실했고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용인술 또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벼슬에 연연하는 것은 안동 김씨에게 빌붙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허상의 껍질을 깨고 차라리 난봉꾼 같은 파락호로 전락했다.

그가 파락호로 생활할 때 세상 사람들은 처음에는 안동 김씨들의 주목에서 벗어나려는 위장술 정도로 생각했으나 그의 위장술은 철저했다.

그는 일부러 안동 김씨들의 잔치에 나타나 모르는 체하며 술과 안주를 집어먹었다.

또 벼슬아치들의 놀이나 시회가 있으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남은 음식들을 깡그리 해치웠다.

그 꼴을 보며 안동 김씨들과 벼슬아치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는 여염의 상가에도 거리낌없이 찾아들었고,목로주점에 앉아 시정배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셔 댔다.

종친의 신분으로 군(君)이라는 대감의 품계를 지니고 있는 처지로는 이만저만한 탈선이 아니었다.

                                      



안동 김씨들은 현재의 왕인 철종에게까지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있는 판이라,

그에게도 처음에는 좀 점잖게 ‘궁도령’이라 부르다가 뒤에는 ‘막걸리 대감’, ‘상갓집 개’라고 불렀다.

이런 수모에 한점 관심도 두지 않고 그의 난행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그는 종로의 장사치들이나 무뢰배(일종의 깡패)들과 어울려 투전판에도 뛰어들었고,

때로는 그들과 짜고 사기 투전판을 벌였다.
돈이 떨어지면 난초를 그려 대가들에게 팔아 달라고 구걸했으며 때로는 그럴 듯한 표구까지 곁들여 돈을

우려내곤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술주정꾼이나 투전꾼이 아니었다.

‘상갓집 개’ 시늉을 하면서 안동 김씨들의 동태를 예리하게 살펴보고 정계의 추이를 면밀히 관찰했다.

철종은 후사가 없었고 병골이라 언제 국상이 날지 몰랐다. 그는 국상이 날 때의 사태에 대비했다.

만약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한다면 왕위는 누가 이을 것인가?

이 절대의 권한을 쥐고 있는 것이 헌종의 어머니요 익종의 비인 조대비였다.

조대비는 궁중에서 가장 높은 어른으로 자기 친정인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에게 밀려난 것을 늘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는 처지였다.

보잘것없는 남은 종친들이 모두 안동 김씨에게 빌붙어 있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흥선군은 조대비의 친정 동생 조성하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조대비에게 다리를 놓게 했다.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자기는 안동 김씨에게 빌붙지 않았음을 알리고 둘째 아들 익선군이 영특함을 은근히 자랑했다. 한편 어린 둘째 아들에게는 제왕의 몸가짐과 학문을 끊임없이 연마하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꿈이 이루어질 때를 대비해서 술청이나 투전판에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염탐하고 민심의 동태를 끊임없이 파악했다.

술친구이자 사기 투전 패거리를 풀어 치밀하게 정보를 입수하기도 했다.

이들은 궁녀의 오라비들로 천희연,하청일,장순규,안필주 등의 무뢰배였다.

이들은 흥선군의 오른팔로 흥선군이 두들겨 맞으면 구해 주고 흥선군의 투전 밑천이 떨어지면 어디서든

구해 왔다.

또 안동 김씨 가운데 김좌근,김병익 부자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불만에 차 있는 김병학,김병국과 사이를

두텁게 해 두기도 했다.


1863년 겨울,철종이 죽자 흥선군은 재빨리 움직였다.

철종의 죽음을 안동 김씨들보다 한 발 먼저 알아냈고 조대비의 친정동생인 조성하를 통해 조대비를 만나

각본을 짜 주는 한편,원로 대신이면서 안동 김씨가 아닌 정원용,조두순에게 흥정을 했다.

고종의 대통 논의에 반대하지 않는 대가를 제시한 것이다.

조대비는 옥새를 거두어 안동 김씨의 반대 기회를 봉쇄하고 일사천리로 재황의 왕위 계승을 공표했다.

자기 패라고 믿었던 정원용,조두순까지 찬성하는 모습을 본 안동 김씨 세력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찬란한 조복을 차려 입은 흥선대원군의 빛나는 눈빛,당찬 걸음걸이,위엄이 깃든 목소리 앞에서 안동 김씨들은 쩔쩔맸다. 목숨만이라도 살려주기만을 바랐다.

섭정 이하응,국태공 이하응이었다.

이제 그는 500년 왕권을 쥐고 흔들게 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원리’대로 새 인물을 등장시켰다.

그는 이 나라의 당색을 떠나 인재를 고루고루 등용했다.

남인이건 북인이건 쓸만한 인재면 경상도에서도 불러오고 충청도에서도 불러왔다.

그러면서 조두순을 영의정으로,김병학을 좌의정으로,정원용의 아들을 판서로 기용했다.

문벌과 지연과 당색을 고루 기용한 실로  거국내각이었다.

안동 김씨 세력의 우두머리인 김좌근과 김홍근의 벼슬을 떼고,

김병익,이유원 등 좌천시키고,

그들이 모은 재산을 조대비궁에 바치게 했다.


노론 계열인 안동 김씨들은 세도가 무너지고 재산을 빼앗겼으나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다행으로 여겼고,

백성들은 이제야 살길이 생기나 보다고 생각했다.

무리들을 전국에 풀어 수탈을 일삼는 수령 방백들을 가려내 처단했고,

여러 가지 명목의 잡세를 균일세로 통일했으며,

관권 위에 군림하며 온갖 폐단을 저지르던 서원의 철폐를 단행했다.

실로 눈부신 업적이었다.
운현궁에는 ‘내가 인재’라고 생각하는 사내들이 들끓었다.

그 집 사랑채는 누구든 출입할 수 있게 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는 도통 아부를 싫어했고 흐물흐물한 호인형의 인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서원은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 놓고 철따라 제사를 지내며 학문을 익히고 향촌의 교화를 담당하는 사학기관이다.

려 말기 백운동 서원을 시초로 하여 조선 중기에 본격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엽에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쓴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백운동 서원에 내리고,

읽을 책과 부릴 노비와 경비로 쓸 토지를 내려 주었던 것이다.

이것을 사액서원이라고 한다.

그 뒤 각지에 서원이 설치되었고 기부받는 일이 허락되었다.

서원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기 어려운 곳에는 글을 익히는 재실,제사만 지내는 향사 따위가 생겨나 서원

구실을 했다. 서원에 딸린 토지는 면세되었고,여기에 든 유생은 벼슬줄을 잡기가 쉬웠다.

이에 따라 유학자의 자손이나 제자들은 그 유학자의 서원을 세우는 것이 가장 든든한 양반 밑천이 되었고, 향촌에서 존경을 받고 행세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리하여 별 내세울 만한 학문적 업적이나 행적이 없는 인물이라도 자손들이나 제자들이 돈푼이나 있고

권력의 줄이 있으면 제멋대로 서원을 세웠다.

18세기에 들어서는 서원이 줄잡아 전국에 1000여 개로 불어났다.

유생들은 온갖 특혜를 누리며 파당을 짓기에 열중했다.

또 원회니 도회니 하는 구실로 몰려 다니며 무위도식하는 무리로 전락했고,서원의 원생에 끼지 못하면 행세를 못하는 현실로 변했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서원의 증설을 금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서원 중에서도 가장 세도를 부린 곳이

청주에 있는 화양동서원과 과천(오늘날의 노량진 근처)에 있는 사충서원이었다. .

                                      

이곳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에 묵패를 돌렸다.

다시 말해 먹을 조(彫, 도장의 일종으로 서원의 상징)에 묻혀 찍은 문서를 각 관아나 부호들에게 보냈다.

그러면 관아나 부호들은 그 묵패에 찍힌 내역대로 경비를 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내지 않으면 고을 원은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며,서원의 뜰에 잡혀 와 무릎을 꿇게 되었다.
붙잡혀 온 자들이 제대로 토지나 재물을 바치지 않으면 사형(私刑)을 하기도 하고,

관가에 고발하여 가두게 했다(서원에는 감옥이 없으므로).

일단 관가에 잡혀가면 서원의 통지가 있어야 풀려나게 되어 있었다.

유생들은 서원의 임원 따위가 되려고 재물을 바치며 안간힘을 썼다.

거꾸로 서원에서 어느 부호를 점찍어 장의의 감투를 씌우면 싫어도 적당한 토지를 바치고 받아들여야 했다. 이를 거부하면 체포 영장이기도 하고 세금 고지서이기도 한 묵패가 언제 날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화양묵패’라고 하면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묵패의 효력은 관가의 체포영장이나 고지서보다도 훨씬 큰 위력을 발휘했다.

관가의 것은 일정 지역에서만 통하지만 묵패는 전국 어디서나 통하기 때문이다.

사충서원의 서독도 그에 못지않았다.

사충서원에서 편지를 보내면 누구랄 것 없이 그 편지대로 시행해야 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앙의 사법 기관인 형조나 한성부에 잡혀가기 일쑤였다.

화양동서원 밑에는 이른바 복주촌(福酒村)이라는 게 있다. 이를테면 지정음식점 겸 여관이었다.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원회를 할 때면 전국의 유생 수천 수만 명이 몰려들었고 평소에도 수십 수백 명씩 드나드는 탓으로 이곳은 보통 이권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이 복주촌을 상민들이 운영하는 것 같지만 사실 서원의 직영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종사하는 하인배까지 서원의 특권을 고스란히 누렸다.

곧 군역,부역을 면제받는 것이다.

돈푼깨나 있는 상민들은 이 원노자리를 사서 군역 · 부역을 면제받았고,

 실제 복주촌에서 일하지도 않으면서 이름만 걸어 놓는 경우도 있었다.

그 수가 얼마인지 확인할 기록이 없으나 상당한 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원의 횡포는 그 서원에 모시는 인물이나 그 서원 계통의 위력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전국에 걸쳐 자행된 폐단이다. 서원은 사회적 부정, 정치적 비리의 온상이었다. 더구나 권력을 끼고 자기네 계통의 정치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조정 일에 시비를 걸거나 붕당을 짓는 일로 조정과 민간이 평온할 날이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단계적으로 서원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는 서원의 증설을 금하는 조처를 내렸다. 그리고 서원의 관리권을 서원에 모시는 유학자 본래의 후손(本孫)의 손에서 빼앗아 그 서원이 있는 고을 수령이 주관하도록 했고, 그 경비도 최소한도로 줄여 관가에서 내도록 조처했다. 흥선대원군은 1864년(고종 1)에 조대비를 통해 이런 분부를 내리도록 했다.

우리나라가 유학을 높이고 도학을 중하게 여겨 4~500년 동안 문물을 드러내 놓고 밝혀 찬란히 갖추어졌도다. 그리고 사람이 옛 현인을 높이고 사모하여 서원과 향사를 세운 것은 본래 그 학문을 익히고 그 정신을 밝히려는 것이었도다. 조정에서도 이에 따라 액호를 내리고 토지와 일꾼을 준 것은 그 뜻이 훌륭했고 그 은혜가 두터웠도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류(末流)의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는가? 글 읽는 소리가 쥐죽은 듯 들리지 않고, 술이나 먹고 다투면서 이기려는 일이나 벌이며,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반이 넘게 정한 원노에 끼어들어가게 하고, 평민을 학대하는 자들이 공공연히 사람들을 잡아들이게 하면서 이익만을 찾아 나서도다. 서로 본받아 사사로이 서원을 이곳저곳에 세워 곳곳마다 서원이 바라다보일 정도이며, 공갈 협박을 일삼고 다투기를 그치지 않도다. 서원 · 향사를 세운 본뜻이 어찌 이러했겠는가?

옛날 현인이 이를 알았다면 반드시 즐거이 제사를 흠향하지 않고 수치로 여겼을 것이다. 이것을 크게 바로잡거나 누습(陋習)을 고쳐서 옛 현인 · 군자의 신령(神靈)에 사죄하지 않을 수 없도다. 이제부터 만일 서원 · 향사를 빙자하여 평민을 침학하는 자가 있다면 관가에서 잡아들여 죄상을 따지지 않을 수 없으니 각 고을에서는 감히 숨겨 두지 말고 낱낱이 잡아들여 아뢰어서 중률(重律)로 다스려 사류의 자리에 끼지 못하게 하라.

사액서원은 토지 3결을 갖추어 법에 따라 면세하는 이외에 만일스스로 3결을 못 갖추었다고 함부로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수를 채우려는 자는 일체 적발하여 바로잡을 것이며, 원생과 원노는 비록 정식(定式)이 있으나 그 수가 지나치게 많은 폐단이 있으니 원노나 고지기 등 긴급한 일꾼들만 조정에서 정수를 정해 준 것 말고는 일체 뜯어고쳐서 군액에 채울 것이로다.
- 《고종실록》 권1, 원년 갑자 8월조

위의 조치들은 서원의 부정과 증설을 막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국의 썩은 유생들은 불만이 커지면서 흥선대원군의 서원정책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이즈음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등을 겪으면서 척화정책을 펴고, 경복궁의 중건을 서두르며 왕권 강화를 다지는 한편,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을 수습하느라 서원정책에는 골몰하지 않았다. 이 틈에 유생들은 대원군의 비교적 온전한 서원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대원군이 처음에 서원의 폐단만을 시정하고 철폐까지 단행하지 않은 것은 몇백 년 묵은 뿌리를 쉽게 뽑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횡포를 일삼던 유생들이 반성은커녕 기승을 부리자 일대 용단을 내렸다. 전국의 서원 중에 횡포가 적은 47개소만 남기고 모조리 헐어 버린 것이다. 헐어 버린 서원 가운데 당연히 화양동서원과 사충서원도 포함되었다. 철폐된 서원의 신주는 땅에 묻게 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철원매주(撤院埋主)’이다.

격분한 전국의 유생들은 사생결단으로 들고 일어났다. 떼를 지어 광화문으로 몰려와서 궁궐 앞에서 유학이 어떻고 교화가 어떻고 도학이 어떻다는 따위의 낡아빠진 문투로 엮은 상소문을 들고, 자기네들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버텼다. 흥선대원군은 코웃음을 치며 유생들을 몰아냈다. 민란 중에는 발을 개고 서원에 앉아 있던 유생들은 이 일에는 몸을 벌벌 떨며 대들었지만 흥선대원군의 호령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며 서원의 횡포를 막아 보려던 영 · 정조도 못한 일을 흥선대원군이 해낸 것이다. 서원의 유생들은 기가 한풀 꺾였고, 서원을 빙자해 백성들에게 부리던 횡포도 사라졌다.

흥선대원군의 뛰어난 결단력이 아니고는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고, 그 영단으로 몇백 년의 고질이 영영 사라졌다. 흥선대원군이 실세하고 난 뒤 유생들이 화양동서원을 다시 재건하는 따위의 운동을 벌인 것만 보아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가 얼마나 강경했는지를 알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그의 혁신정치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왕권이 권신들에 의해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사색(四色)이 생긴 이래, 노론 · 소론 · 남인 · 북인의 문벌정치라는 독점적 권력체제 앞에서 왕권은 늘 흔들렸다. 심지어 왕의 자리나 왕비의 간택까지 그들 손에 멋대로 놀아났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맨 먼저 권력의 집중(섭정인 그 자신의 손안으로)을 다졌다. 척족이 이룬 문벌정치 종식, 양반들이 누리는 특권 배제, 서원을 통한 유생들의 치외법권 철폐, 엄격한 절차에 따라 왕의 손으로 수령을 임명하는 일들이 그것이다. 그는 왕실의 위엄을 중시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정전(正殿)인 경복궁의 중건을 시작했다. 모자라는 비용을 부호 또는 몰수한 안동 김씨의 재물로 보충했고,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해 재정을 압박했다. 사색을 고루 등용한 것은 ‘기회의 균등’이라는 뜻도 있지만, 실제 신하들의 권력 분산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한 방법일 수 있었다. 그는 척족이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해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는 사고무친인 민씨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지원세력을 키우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적극적으로 종친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소현세자와 인평대군의 자손들은 역적으로 몰려 많은 핍박을 받았고, 익안대군 · 양녕대군 · 능원대군의 자손들도 소외되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 자손을 찾아내 벼슬을 주기도 하고 조상의 제사 경비를 대기도 했다. 인평대군의 후손인 이시원의 조상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이때 이시원을 발탁해 예조판서 · 이조판서의 자리를 주었다.

이도 모자라 1864년에는 엉뚱하게도 종친과(宗親科)라는 이름의 과거를 실시했다. 다시 말해 전주 이씨만 골라서 과거를 보게 한 것이다. 여기에 합격하면 선파(璿派, 임금의 일가붙이) 유생이라고 불렀다. 때로는 초시를 거치지 않고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를 보여 합격시키는 불법을 저지르기도 했다. 전주 이씨들은 어중이떠중이 가릴 것 없이 종친과 시험장에 몰려들었다.

1865년에는 전주 이씨 대동보를 만들었다. 여기에 전주 이씨들은 다투어 이름을 올렸고 담당 벼슬아치는 전국을 돌며 전주 이씨들을 찾아내 이름을 올렸다. 시골에 사는 성이 없던 천민들도 전주 이씨로 위장해 대동보에 이름을 올렸다. 흥선대원군은 대동보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는데 6~7만 명이 몰려들기도 했다 한다. 흥선대원군은 흐뭇해 하며 “내가 나라를 다스리면서 10만 명의 정예 군사를 얻었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지원세력을 키우려는 일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무리수를 둔 것이다.

    
그는 대외문제에서는 철저한 척화정책을 폈다. 서양 또는 일본세력과의 타협을 거부했고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국내의 서학세력이 서양과 연결되어 있다고 탄압을 했다. 동시에 동학도 왕조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보아 억눌러 금지했다. 실제 서양과 손을 잡게 되면 청나라를 통해 교섭을 벌여야 하고, 그렇게 되면 전통적 사대질서에 따라 자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현실이기도 했다. 이런 정책들도 따지고 보면 왕조를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보수적인 개혁파였다. 서양세력의 도전(병인 · 신미양요)에 맞서 국방을 강화하려고 한때 신무기 개발에 열을 올렸으나, 서양식 기술을 동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기지대로 솜을 듬뿍 넣어 방탄복을 만드는 따위의 아이러니를 연출했을 뿐이다. 사실 그의 제왕다운 면모가 후기에 와서는 점차 퇴색하기 시작했다.

민비(뒷날 명성황후로 추존됨)는 고종이 성년이 되자 친정(親政, 임금이 몸소 정사를 봄)을 권고했다. 왕으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기대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제구실을 하라는 것이다. 민비의 꼬드김에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궁실 전용 출입문인 금호문(金虎門)을 막아 버렸다. 민비는 이제 양오라버니인 민승호에게 관직을 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계속 민씨들을 등용했다. 다시 민씨 문벌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으로서는 짐작도 못한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세력을 잃자, 공평한 인사에 소외되었던 종친들과 악의에 찬 유생들, 묵은 감정을 품고 있던 노론의 찌꺼기들이 들고 일어나 대원군에게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60세를 바라보는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이를 갈았지만 헛일이었다. 그러던 중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척족 민겸호가 맞아죽자, 고종은 아버지를 불러들였다. 칩거한 지 10년, 이제 다시 ‘늙은용’이 물을 얻은 격이었다. 그러나 이 군란의 책임자를 대원군으로 본 청나라는 대원군을 압송해 갔다. 틈을 타서 숨어 있던 민비가 다시 나타났다. 흥선대원군이 중국에 유폐되어 있다가 돌아올 때에 고종은 아버지를 맞으러 남대문까지 마중 나갔다. 이때 부자간에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부자간의 감정이 극도로 상해 있었다.

권력을 놓고 흥선대원군의 형제, 아들들, 아들의 사촌들끼리 원수 사이가 되어 물고 물렸다. 대원군의 권위는 여지없이 땅에 떨어졌다. 그는 1894년 일본의 침략세력을 누르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한때 그가 탄압을 가했던 동학농민세력과 손을 잡고 반전을 시도했다. 전봉준의 손을 빌려 마지막으로 왕국을 지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또한 묵은 왕국을 지탱하기 위해 내치를 다져보려 했지만, 19세기 제국주의 열강 앞에 나무토막처럼 쓰러져야 했다.

그렇게 왕권을 다지기 위해 척족의 등장을 막으려고 했지만, 민비의 술수 앞에 크게 당해야 했다. 특히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열강에 놀아나다가 대원군은 결국 민비가 죽은 지 3년 뒤 79세의 나이로 망해 가는 왕국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

어쨌든 그는 제왕이 아니면서 제왕의 권력을 누렸고, 왕통이 아니면서 왕통을 이어 주었다. 통치자로서의 그의 여러 면모는 영민하고 뛰어났다고 하나 새로운 시대를 보는 안목이 부족해서 비운을 겪은 불행한 노인이기도 했다. 이렇게 그에 대한 평가는 뚜렷하게 갈린다.

이런 대원군의 풍운사를 통해 용기와 결단을 고루 갖춘 뛰어난 인물이라도 시대의 운을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아무리 뛰어난 통치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국내외적으로 밀려오는 대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것도 일깨워 주고 있다.

서원 철폐

비변사 철폐

사창제 실시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명성황후/190815   (0) 2019.08.15
⊙ 운요호 사건/190815   (0) 2019.08.15
⊙ 신미양요/190815   (0) 2019.08.15
⊙ 오페르트 도굴 사건/190815  (0) 2019.08.15
⊙ 병인양요190815   (0) 2019.08.15

⊙ 신미양요    2019.08.15.수요일,흐림

신미양요는 1871.6.1-6월11일 까지 12일간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5년 후 빌미로 미국이

강화도 일대에서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의 전쟁이다.

조선과 미국은 1855(철종6년),1865(고종2년),1866년에 3차에 걸처 미국 배가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

영일 연해,선천군에 표류하여 접촉 하였는데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1866년7월,평양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조선에 대해 무력에 의한 강제 통상을 계획했으며 청국에 사건의 조사를 의뢰했다.

 

또한 1866년에는 병인양요를 일으켰던 프랑스에게 공동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자고 제의했으나,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 전야에 있었으므로 거절했다.


1867년 미국은 슈펠트 중령으로 하여금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의 황해도 연안을 수색했으며,

1868년에도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에 대해 손해 보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황해도,평안도 등지를 배회하며 지방관과 회담하다가 성과 없이 돌아갔다.

 미국은 조선과의 통상은 군함을 거느리고 무력 시위를 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871년 조선측과의 교섭 책임을 주청 특명 전권공사 F. F.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에게 조선 원정을 지시했다.

로와 로저스는 상하이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에 이르러 휘하의 함대를 집결시킨 뒤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대포 85문,병력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1871년4월3일, 미국 함대는  경기도 남양부 풍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수로를 측량하면서

1871년4월8일에는 물류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선 정부는 남양 부사로부터 급보를 전해 듣고 어재연을 진무중군으로,이창회를 강화 판관에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서울의 군대를 차출하고 대포,화약,군량미를 수송했다.

1871년4월14일,조선 정부에서 한학역관을 파견하자 미국의 로는 미관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고관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그날 오후 로저스는 해군 중령 블레익으로 하여금 소선 4척과 포함 2척을 거느리고

염하 일대를 측량하게 했는데,이들이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는 포격을 가했고,덕진진,초지진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했다.

그결과 미국측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1871년4월15일,대원군은 진무사 정기원을 시켜 미국의 불법 침략을 문책하고 통상 조약 교섭을 거절하게

   했다.로는 무단 공격의 책임은 조선에 있고 3,4일 내에 협상하지 않으면 미국은 자유 행동을 취할 것이라

   협박했다.

1871년4월23일,로저스는 450명의 해병대가 물류도를 출발하여 초지진에 상륙 했으며

1871년4월24일,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왔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수륙 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이 격전에서 조선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 등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 등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미국 함대도 퇴각할 것이라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 도회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이러한 조선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 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기하던 미국측에게 의외로

   받아 들여졌다.이에 미국측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조선 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 행동을 감행

   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 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대규모 군사 행동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 외의 일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기로 결정했다.

1871년5월15일,조선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 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 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 되었을 경우에는 구조해달라고 요청한 후,

1871년5월16일,전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 충천했고 배외 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흥선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 세력과의 수교를 거부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       2019.08.05.목요일,맑음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1868년5월에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가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이후 흥선 대원군의 서양 세력에 대한 적대감이 심화되었다.


1863년,어린 고종이 즉위하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여 대신 정치를 행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을 위해 각종 사회 제도 개혁과 외적으로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실시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한 1866년 병인박해로 프랑스 세력이 침입한 병인양요를 겪었고,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적발되는 사건인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대원군의 서양 세력에 대한 강경한 태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흥선 대원군/190815   (0) 2019.08.15
⊙ 신미양요/190815   (0) 2019.08.15
⊙ 병인양요190815   (0) 2019.08.15
⊙ 제너럴 셔먼호 사건/190815   (0) 2019.08.15
⊙ 병인박해/190815  (0) 2019.08.15

⊙ 병인 양요    2019.08.15.수요일,흐림

병인양요는 조선 조정(흥선대원군)에서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난 카톨릭 교도에 대한 대량 학살 사건으로,

첫번째는 1866년 봄에,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세번째는 1868년(무진사옥),네번째는 1871년(신미사옥)으로 도합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흥선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이 네번의 사건은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인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다.


병인박해는 조선 조정(흥선 대원군)에서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의 원인러시아의 남하 정책에서 비롯된다. 

1864년(고종1년),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흥선 대원군과 정부 요인은 놀라고 당황하였으나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가톨릭 교도들은 대원군에게 한.불.영 3국 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대원군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라고 하자 대원군은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지방에서 포교 활동을 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 왔을 때는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 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당시 카톨릭교를 서학.사학이라 하여 배척하던 때라 선교사들은 3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무책임한 주선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운현궁(대원군 사저)에도 카톨릭 교인들이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대비(신정왕후 조씨;순조의 며느리)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가톨릭 교도를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고종3년)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고,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으며,조선인 천주교 신자 남종삼,정의배 등 천주교도 8천명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으로 피신하여 병과 굶주림으로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1866년5월,이들 3명 중 리델 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해 중국 텐진(천진)에 주둔한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 사건을 알림으로써 병인 양요가 일어났다.


베이징(북경) 주재 프랑스 대리 공사는 청국 정부에 공한을 보내어 조선으로 진격할 결심을 표명하고,

이후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든 청국 정부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청국을 통해 프랑스 동태를 알게된 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과 변경 수비를 강화하자 이에 로즈가

함대를 이끌고 3차에 걸처 내침함으로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프랑스 공사 벨로네는 청국의 승인을 받고 조선이 병인박해를 단행하였으므로 '공범자'라고 청국 정부를

규탄하므로 청국은 조선은 중국의 조공국이지만 정치적으로 독립국가이며,공범 사실은 사실 무근이라고

하면서 거병을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조선과 수교 관계가 없다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 국가라는 점 등을 들어 프랑스

정부의 직접 개입 없이 현지 사령관인 로즈의 주재 하에 군사적 응징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정부는 조선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고 로즈 제독에게 응징 원정을 결행 할 것을 명하였다.


제1차 원정은 강화 해협을 중심으로 서울 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원정이었다.

   1866년9월18일부터 10월1일까지 로즈는 군함 3척을 이끌고 서울 양화진,서강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세 정찰과 수로 탐사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제2차 원정은 10월11일에 군함 7척,함재 대포 10문,총병력 1,000명,향도 및 수로 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최인서,심순녀 등 3명을 대동하여 제2차 조선 원정길에 올랐다

   10월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포고문을 발표하여 강경한 응징 보복 의지를 보였다.


사태가 위급하게되자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대장에 이경하,중군에 이용희,천총에 양헌수를 임명해 출정하게 하였다.

양헌수는 제주목사로 있다가 천총에 임명되어,통진부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였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26일에 문수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이때 양헌수는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려면 기병 작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하다고 판단하고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11월7일,덕포에서 심야 잠도작전을 전개하여 549명의 군대가 정족 산성을 점거했다.

 양헌수는 정족진을 결성한 뒤 남문에는 초관 김기명 지휘 하의 포수 161명,동문에는 초관 이렴 지휘 하의 포수 150명,서문과 북문에는 초관 이대흥 지휘 하의 경군 및 향군 157명을 배치,매복하게 하고,프랑스군의 내습을 기다렸다.조선군이 강화 해협을 건너가 정족 산성에 농성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는 올리비에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9일,올리비에는 16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야포 없이 경무장한 채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조선군이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정족산성에서의 접전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강화도의 정족 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며,

프랑스군은 10월14일 상륙 이래 거의 한달 동안 강화도를 점거했지만,

정족산성을 재공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11월10일 함대를 철수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철수 시 고도서와 은괴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이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도서들을 145년만에 최근(2011.11.14)에야 임대 형식으로 반환했다.      

이 싸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 세력을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로즈의 조선 원정은 11월 21일 제2차 원정이 끝날 때까지 무려 2개월여에 걸친 장기 원정이었다.

원정을 끝내고 청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복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그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조선의 강화도를 침범함으로써,조선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진 사건으로 병인양요(병인사옥)라고도 한다.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1867년3월,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프랑스는 병인사옥(1866년)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으니 대조선 미.불 공동

원정을 제의하였을 때,프랑스 정부는 이미 조선 원정을 통해 응징 보복을 했기 때문에 새삼스러이 공동 원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한 예를 들 수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