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인박해(병인사옥)                2019.08.15.수요일,흐림

병인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전개된 집권자인 흥선대원군이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학살한 사건이다.

첫번째는 1866년(고종 3)  봄에,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세번째는 1868년,네번째는 1871년

으로 이어져 8,000여 명의 사상사를 속축한 대학살 사건이다.

1868년의 세번째를 무진사옥,1871년의 네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인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 


1831년(순조31년),교황청이 조선을 독립교구로 설정하자 프랑스 선교회는 앙베르,모방,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해 농민,아녀자,몰락한 양반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전파해 갔으나,조선의 지배층은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1839년(헌종5),천주교 박해 중 하나인 기해박해를 일으켜 3명의 프랑스 신부를 처형

했다. 이러한 탄압과 금압령에도 천주교는 확장되었으므로 조선은 서유럽인의 침략 위협이 고조됨에 따라 국가적 위기 의식이 높아져갔다.이러한 가운데 집권자인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대응해 나갔다.


흥선 대원군은 1864(고종 원년), 연해주 지방을 차지한 제정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문호 개방 압력을

물리치는 데 프랑스를 이용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묵인하려고 한 때도 있었으나, 급속히 변하던 국내외

정세로 말미암아 실현시키지 못했다.


조선에서는 1860년(철종11년),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베이징이 점령당하는

굴욕을 겪은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고 이양선이 자주 출몰함에 따라 쇄국

양이정책의 여론이 비등해져갔다.

문호개 방을 반대하던 조선 지배층은 '금수의 사상'으로 취급하던 천주교를 탄압의 1차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에 대원군은 1866년 1월초 국내에 있던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황해도·충청도의 연해를 중심으로 사교도가 왕래하는 뱃길과 선박 등을 감시하고,

조선인으로서 외국과 연락하는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먼저 처형한 뒤 보고하라는 천주교 금압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당시 국내에 있던 주교 등 9명이 체포되고,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붙잡혔다. 대원군은 9명의 프랑스 신부에게 개종하든가 나라 밖으로 떠나든가 하나를 택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들은 대원군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하여 처형당했다.

결국 1866년에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가 서울과 그밖의 지역에서 처형되었다.

이때 프랑스 신부 가운데 체포 당하지 않고 황해도에 숨어 있던 리델이 그해 7월에 청나라의 톈진(천진)으로 도망가서 프랑스의 극동 함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보복을 요청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결국 이때의 천주교 탄압은 19세기 이래 서유럽 열강의 침략으로 위기 의식을 느꼈던 조선 정부가 취한

쇄국정책의 일환이었으며,종교를 앞세워 식민지 개척을 획책하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정책에 따른 파생물이기도 했다.이는 나중에 병인양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 조선왕 제26대 고종 이야기          2019.08.15.목요일,맑음

고종; 조선제26대 왕이며,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다.

이름; 이희

생졸; 1852(종3년)-1919년1월21일(68세 일기)

재위기간; 1863년-1907년(44년 재위)

능; 경기도 남양주 홍릉

가계도;

  부; 흥선대원군 이하흥

  모; 영흥부대부인 민씨(2남2녀)

       1남 형;완흥군 이재민(흥친왕;1845.8.22-1912.9.9)

                 풍산 홍씨(1844.4.8-1887.12.9)

                     영선군 이준용(1870.7.23-1917.3.22)

        2남 고종; 제26대왕

              명성황후 민비

                      순종(제27대 왕,2대 황제)

              순헌황 귀빈 임씨

                      영친왕

                      이방자

                          이진

               귀빈 이씨

                        완친왕

               귀빈 장씨

                        의친왕

               귀빈 이씨

                        이육

                귀빈 정씨

                        이우

                귀인 양씨

                        득혜옹주

                상공 김씨


고종은 1852년(철종3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종은 1863.12.8(철종14년)에 후사없이 죽자 철종에 이어 고종의 왕위 계승에도 깊이 관여한 조대비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결탁하여 12세인 자신의 둘째 아들 익선군 고종을 조선 제26대 왕으로 추대하고

왕위에 올려놓았다.

고종은 1866년(고종3년)에 민치록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그가 바로 비운의 왕비 민비인 명성황후다.

고종과 민비 사이에 1남4녀가 태어 났으나 27대 왕인 순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일찍 죽었다.

이 밖에 고종은 7명의 후궁에게서 3남1녀를 두었다.


고종의 즉위(1863년) 초 3년간 조대비가 수령청정 하였으며,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이 결탁하여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다.

고종 즉위와 동시에 60여년간 이어온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끝이났다.

 

조대비가 수렴청정하는 사이 실권은 흥선대원군에게 넘어가 세도정치를 해오던 외척 세력을 몰아내고 

내정 개혁을 단행했다. 그후 10년간 고종이 친정 하기 전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이루어졌다.

흥선대원군이 1873년 최익현의 탄핵으로 섭정에서 물러나자 왕비 민씨의 척족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고종의 친정(1873.12)이 이루어지면서 민비 중심의 척족 일가가 정권을 독점하면서 개국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은 첫 단계로 유림들의 부패 온상인 서원을 철폐(1864년(고종1)하였고,

비변사 폐지하고 의정부 기능을 강화 하였다.

그동안 상민들에거 부과해오던 군역법을 양반들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와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불타 방치 되었던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의 권위를 높이려했다.

중건에는 막대한 재정의 조달을 위해 원남전과 당백전을 발행하게 되었고,이는 고물가를 초래하고 화폐

경제를 혼란하는 결과를 낳아 백성들의 원성을 쌓았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1864)으로 러시아는 영국,프랑스 등 열강들과 청나라 사이의 갈등을 조정해 주고

그 댓가로 연해주를 확보한 후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여 흥선대원군은 외세에 대한 불안을 안게되었다.

영국은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막고자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통치법령을 정비하기위한 대전회통 완성(1865),병인박해(1866-1873),제너럴셔먼호 사건(1866.7.12),

병인양요(1866.9.18-11.21),오베르트 도굴 사건(1868.5),신미양요(1871),흥선대권군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1873.12),운양호 사건(운요호;1875.9.20),강화도 조약(병자.조일 수호조약;1876.2.27),제1차 수신사 파견(1876.4월말),수호조규 부록(1876.8.24)과 조일장정(조일통상 잠정협약)체결,지석영의 우두 종두법

전파(1879),김홍집을 대표로 한 제2차수신사 파견(1880.5)과 조선책략,신사유람단 파견(1881),위정 척사론과 이재선,안기영이 유생을 동원하여 민씨 척족을 몰아내려고 한 이재선 토왜 반정 음모사건(1881.11.4),

임오군란(1882.6.9),한성순보 창간(1883.10.31),제물포 조약(1882.8.30),태극기 사용(1882.8.22),우정국 설치및 갑신정변(1884.12.4-6),한성조약(1885.1.9),텐진조약(1885.4.18),거문도 사건(1885),동학교단의 삼례집회(1892.11),보은집회에서 교조신원운동(1893.3),금구집회(1893.3),갑오농민전쟁 (1894-1896).

청일전쟁 도발과 민씨정권 무터뜨리고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립 정권 수립(1894.6.21),갑오개혁(1894.12-12.6),김홍집 내각 붕괴,청일전쟁(1894.7.25-1995.4.17),을미사면및 단발령(1895.8.20),아관파천(1896),

서재필의 환국 후 독립 신문 창간,독립 협회 발족(1896.7.2),고종의 독화 사건(1898),대한제국 선포(1897.

10.12),경인선 개통(1899),러일전쟁(1904-1905),일진회 설립(1904.8.20),제1차 한일협약(1904.8.22),

경부선 철도 개통(1905),을사늑약 체결(1905.11.17),천도교 창시(1905),통감부 설치(1906.2-8),국채보상운동(1907.2-1908.7),헤이그 밀사사건(1907.4.20)으로 일제에 의한 강제 폐위(1907.7.19)된 혼란스러운가운데 27대 순종에게 양위(1907.7.20)되었고,

한일합병조약(1907.9.29)으로 고종은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되어 유폐되었으며,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1907.7.24)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과 외정권의 대부분을 통감부가 장악했다.

의병 봉기(정미의병;1907.8.1)가 일어났다.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일제 강점기1910.8.29)  이후인 1919년 1월 21일에 덕수궁에서 68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의 독살설은 3.1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고종은 즉위 초에는 조대비의 수렴청정,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력 속에서,

친정을 시작한 후로는 민씨 척족의 전횡 속에서 자신의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고,

세계 열강들의 이권 다툼의 와중에서 조선의 주권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 행위를 세상에 알리려고 하는 등 조선의 자주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추사 김정희           작성일자;  2019.08.15.목요일,흐림

 

김정희;  조선후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 실학자·서화가.

생졸;1786년(정조10년)-1856년(철종7년)

출신; 예산

본관; 경주

호; 추사(秋史)

 

 

조선조의 훈척 가문의 하나인 경주 김문에서

병조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 앞으로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와 선리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완원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종래 경학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 하였던 금석학·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진흥이비고'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신위·조인영·권돈인·신관호·조면호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한송불분론’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 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실사구시설'은

경세치용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청대 학자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학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화엄사라는 가족의 원찰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백파와 초의, 두 대사와의 친분이 깊었다.

그리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 서간 및 영정의 제사와 발문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봉은사에 기거하면서 선지식(善知識)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미칭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 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국서와 국화풍)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친필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소동파·안진경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필체가 서투른듯 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는 시도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정도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두보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풍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도 서권기와 문자향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하고 간결한 필선으로 심의를 노출하는 문기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난을 잘 쳤다.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허유·이하응·전기·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모질도''부작란도' 등이 특히 유명하다.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비파서도가 낳은 등석여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고인의 인보를 얻어서 직접 진(秦)·한(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 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낙관에 쓰고 있었다.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자각풍인 추사각풍을 이룩하여, 졸박청수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 같은 편지 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내면 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중에도 한글 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어문 의식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 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한글로 된 편지)이 40여 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 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다.

또 한글 서예 면에서 민족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 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 되었다.

'완당척독''담연재시고''완당선생집'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에 예명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였다.

즉,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도정궁 경원군 이하전            2019.08.15.목요일,맑음

도정궁 경원군 이하전; 조선 후기 왕족 종실,문신,정치가

생졸; 1842년-1832년 

출신; 한성부

가계부;

증조부 : 진안군 이언식(1752년 - 1819년)

증조모 : 덕수군부인 장씨(1750년 - 1770년), 봉사 덕수인 장지중의 딸.

증조모 : 창원군부인 황씨(1750년 - 1775년), 창원인 황정의 딸.

증조모 : 거창군부인 신씨(1757년 - 1832년), 지사 거창인 신이복의 딸.

 양조부 : 완성군 이희(1771년 - 1830년)

 양조모 : 남양군부인 홍씨1772년 - 1808년), 목사 남양인 홍선양의 딸, 정조의 비 효의왕후와 외사촌.

 양조모 : 전주군부인 유씨(1793년 - 1818년), 전주인 유전의 딸.

 양조모 : 임천군부인 조씨(1798년 - 1850년), 임천인 조건호의 딸.

 양서조모 : 이름 미상

 양서삼촌 겸 서당숙 : 이시문

 양서삼촌 겸 서당숙 : 이시백

 양서고모 겸 서당고모 : 이씨

 양서고모부 겸 서당고모부 : 민준호

 생조부 : 이옥(1773년 - 1820년)

 고모 : 전주이씨 ? - ?)

 고모부 : 여흥인 민치구(1795년 - 1874년)

 고종사촌 : 여흥대원비 민씨,고종의 사친이자 흥선대원왕의 부인.

아버지 : 완창군 이시인(1805-1843), 이옥의 차남 -> 백부 완성군 이희에게 출계.

어머니(전모) : 남원군부인 윤씨(1803-1835), 부사 남원인 윤이현의 딸.

어머니(생모) : 경주군부인 김씨(1816-1863), 경주인 김성곡의 딸.

서모 : 평양조씨

서형 : 감찰 이우용(1827-?년), 처음 이름은 우전.

서형수 : 평양조씨(1825년 11월 9일 ~ ?), 조병기의 딸

조카 : 이해성(1870- ?)

조카며느리 : 청해이씨(1870- ?), 이인석의 딸

부인 : 달성군부인 서씨(1842년-1924년), 이름은 대혜, 참봉 달성인 서음순의 딸.

아들(양자) : 창산군 이해창(1865년 - 1945년), 증 비서감승 이경용(1848년-1919년)의 아들.

→ 덕흥대원군의 증손 밀산군의 10대손.

양 며느리 : 남양홍씨(1866년 2월 12일 ~ 1898년 11월 1일), 홍조우의 딸

양 손자 : 이덕주(1887년- ?)

양 서며느리 : 이름모름

양 서손자 : 이흥주(1890- ?)

사촌형제: 이사규

10촌 서형:이돈( 10대조 응천군 이돈과는 동명이인이다.)

장인 : 서음순


그는 도정궁 사손으로 헌종조와 철종조에 왕위 계승 후보로 물망에 올랐으며,

도정궁에에 거주하였다 하여 보통 도정궁 대감으로도 불린다.

도정궁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최초의 대원군) 사저이자 선조의 잠저이다.

음서(음서 또는 음서제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중신 및 양반의 신분을 우대하여 친족 및 처족을 과거와 같은 선발 기준이 아닌 출신을 고려하여 관리로 사용하는 제도이며,음보,문음,음사,음직이라고도 표기하며,

음덕으로 표현하기도 한다)로 선발된 관료들은 음관이라 불렀는데 규정에는 음서제로 관직에 오른 자는

당상관(당상관은 조선의 관직 가운데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정치적 책임을 갖는 정 3품 이상의 자리를 가리킨다) 이상의 직책과 청요직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문벌의 영향력에 따라 간혹 청요직과 3정승, 2찬성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참봉이 되었으며 전부, 경모궁령 등을 지냈다.

헌종 때에 그는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였으나,

안동 김씨 세도 기간 중 철종에게 이 나라 조선이 전주 이씨의 나라인가 안동 김씨의 나라인가 하는 항의를 하였다가 이 발언이 결국 문제가 되어

1862년,김순성,이극선 등의 추대를 받았다는 무옥으로써 제주도로 귀양가서 끝내 역모로 몰려 사사되었다.

사후 1863년 복권되고 순종 즉위 후 1908년(융희 2)  증 흥록대부 경원군으로 추봉되었다.

 



⊙ 전계 대원군의 궁인 누동궁(樓洞宮)        2019.08.15.목요일,흐림

누동궁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있던 궁으로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이 살았고 철종이 태어난 곳이다.

철종은 왕위에 오른 뒤 생사고락을 함께한 형 영평군을 이곳에 살게 했다.

1869년에는 안국동 별궁에 있던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영평군의 집으로 옮겼다.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박영효의 혼례가 이곳에서 치러지기도 했다.


1752년 사도세자의 승은을 입은 숙빈 임씨는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은 후 양제(세자의 후궁으로 가장 높은 종2품)가 되었다.

그러나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 임씨도 폐서인이 되어 두 아들과 함께 궁궐을 나와서 전동(현재 우정총국 부근 종로구 견지동을 말하나 양제궁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에 살게 되는데,

 ‘양제궁’이라 불렀다.

영조가 은언군의 행방을 알아볼 때 ‘전동의 집’을 언급했던 적이 있다.

영조는 죄책감에서 인지 사도세자의 서자들에게 관대했다.

그러나 은언군과 은신군은 젊은 나이에 늙은 재상이 타는 남녀(藍輿)를 타고 다니고,

시전 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는 등 방자한 행동을 하여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양제궁은 문을 닫고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1771년4월12일,은신군이 제주도에서 사망하자,

  놀란 영조는 즉시 가시울타리를 철거하게 하고 시신을 운구하도록 한다.

  그리고 즉시 은언군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고 은언군이 살 두어 칸의 집을 지급하고 생모 임씨와 노복의

  왕래를 허락했다. 이때 마련해준 집이 당시 과천 흑석리에 있은 듯하다.

  정조는 이복 동생 은언군을 서용하여 수릉관으로 삼았으며 관직을 회복 시켜 주었다.

  은전군에게도 직첩을 주고 서용했다.

  숙빈 임씨는 정조 즉위년에 복작되었고 고종 때 가서 숙빈으로 추봉되었다.

  숙빈 임씨는 1771년7월12일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은신군의 흑석리 집은 당시에 과천현 흑석리였던 것이다.

                

1776년 홍봉한의 이복 동생 홍인한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 은전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꾸몄다.

  이들은 은전군의 생모 박씨가 장헌(사도)세자에 의해 죽었으므로 그 원한을 이용해 은전군을 왕으로 추대

  하려고 한 것이다.

  신하들이 추대된 은전군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조는 은전군을 지켜주었다. 그

  러나 은전군은 1777년에 홍상범 등에 의해 다시 왕으로 추대되어 다음 해에 왕명을 받고 자결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은언군은 정조 등극 후 홍록대부까지 올라 세 아들인 이담(상계군),이당(풍계군),이광(전계군)과 편안히 살았다.

그러나 1786년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 이자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가 죽자,

은언군의 장자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

풍산 홍씨의 대를 이었다고 해서 상계군을 완풍군으로 봉했으며 가동궁이라 했다.

홍국영이 죽은 뒤로도 역모는 이어졌고 상계군은 또다시 역모에 연루되었다.

이에 집안에서 폭사(스스로 참혹하게 죽음)하였다고 하는데 한때 아버지 은언군이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후 은언군은 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12년 후인 1798년,은언군이 유배지에서 도망쳐 도성을 드나 든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에 정조는 인륜으로 형제를 만나는 것이며 10여 차례 만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를 한양으로 들이고 싶지만 1년에 한번 정도 만나는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후 정조가 죽고,1801년 신유박해 때 대왕대비가 사학에 연루된 은언군 이인의 처와 며느리를 사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인으로 순교하자 은언군은 강화도 귀양지에서 사사되었다.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양제궁에 유폐되어 있을 때 천주교 신자인 강완숙을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청나라 주문모 신부에게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또한 신유박해 때 양제궁에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킨 일이 양제궁의 궁녀 서경의의 밀고로 알려졌다.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결국 사사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전국에서 많은 신자가 신앙을 증거하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송씨와 신씨는 유일한

왕실의 순교자가 되었다.

은언군과 부인 송씨의 묘는 진관외동에 있었는데 묘는 유실되고,

묘비는 1989년 전계대원군의 후손 이우영의 기증으로 절두산 순교성지로 옮겨와 조선 왕실의 첫 순교자를 기념하고 있다.

                                      

은언군이 죽고 난 뒤, 이당(풍계군)과 이광(전계군)은 강화도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세월이 지나 역모에 관한 일들도 잊혀지고 효명세자가 장성하여 14세가 되는 1822년, 순조는 사촌형제들이 살고 있는 강화도 집의 가시 울타리를 철거하여 일반 백성처럼 살도록 했다.

그리고 혼사 비용을 챙겨주고 종친부가 주관하여 혼사를 거행하게 했다.

이때 풍계군은 혼인하여 1824년 익평군을 낳고 2년 후에 죽었다.

익평군은 백부 상계군의 양자로 들어갔다.

전계군도 늦은 나이에 최수창의 딸과 혼인하여 원경(회평군)과 경응(영평군)을 낳았다.

그리고 최씨가 죽자 염성화의 딸을 부인으로 들여 원범(철종)을 낳았다.

철종은 경행방 사제(누동궁)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자랐다.

그런데 1844년 무인 민진용 등이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발각되어 원경이 사사되었다.

따라서 경응과 원범은 또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사도세자의 자손은 이렇게 끊임없이 역모에 연관되었다.

영조 이후 아들이 귀했고 또한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왕실의 후계자로 은언군,은신군,은전군과 그 자손이 추대되었다.

이리하여 사도세자의 서자와 손자들에 이르기까지 역모에 관련되어 죽임을 당했다.

그 때문에 전계군과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은 역모로 이용되어 죽는 종친들을 봐야 하는 남다른 아픔이

있었다. 흥선군이 시중 잡배 노릇에 파락호 생활을 한 것은 이러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철종 이원범은 11세에 부친을 잃었고,

1844년 14세에 큰형 이원경이 역모에 거론되어 온 집안이 교동으로 옮겼으며,

10여 일 후 다시 강화도로 옮겨 유배 생활을 했다.

1849년 6월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조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19세의 강화 도령 원범은 입궁하여 덕완군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라 철종이

 되었다.

 따라서 이원범이 살던 곳은 왕이 살던 잠저라 하여 ‘용흥궁’이라 불렀다.

본래의 용흥궁(강화읍 동문안길 21번길 16-1)은 ‘철종조잠저구기’라고 쓴 비석과 비각이 있는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이것을 1853년(철종 4년)에 강화도 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1903년 전계대원군의 사손 청안군 이재순이 보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규모의 ‘용흥궁’이 된 것이다.


철종이 태어나던 날, 실록에는 순원왕후가 꾸었던 꿈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1831년 6월17일에 경행방의 사제에서 탄생했습니다.

이때 순원왕후의 꿈에 영안 국구(김조순)가 한 어린 아이를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시오.’ 했는데, 왕후께서는 꿈에서 깨고 나서 그 일을 기록하여 두었던 바,

그 후 임금이 궁궐에 들어오게 되자 이를 살펴보니 의표가 꿈속에서 본 아이와 똑같았습니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했고, 인척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였다. 그 뒤로 김문근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철종은 등극 후 두 형, 회평군과 영평군을 복작하고, 영평군에게 은신군집(안국동별궁)에서 전계대원군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또 전계대원군의 사저였던 경행방의 집을 주었다. 영평군은 청도 김씨와 혼인하고 이 집에 살았는데 익랑(대문 좌우에 이어 지은 행랑)이 많았으므로 ‘익랑골’로 불렸다. 1869년(고종 6년)에는 안국동별궁에 모셔진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경행방에 있던 영평군의 집으로 옮겼다.

왕의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시골 무지렁이로 살던 철종은 재위 2년 반 만에 정사를 돌보았고, 재위 14년 만인 1863년에 생을 마쳤다. 자녀는 숙의 범씨의 딸 영혜옹주만 살아남고 모두 일찍 죽었다.

 

                                 

1872년 고종은 철종이 남긴 유일한 딸인 영혜옹주와 부마 박영효의 혼례를 영평군의 집, 누동궁에서 치르도록 했다. 박영효는 금릉위에 봉해졌고, 관훈동 30번지 근처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동안 영혜옹주와 박영효의 집은 인사동 경인미술관터로 알려져 남산한옥마을로 이전 · 복원했다. 그러나 2010년 서울시는 경인미술관터는 민영휘 가옥의 일부이며 박영효 가옥은 그 서쪽에 있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영혜옹주와 박영효의 집은 그 흔적이 없어져 인사동의 일부가 되었다.

    

고종은 철종의 둘째 형 영평군에게 후사가 없자, 1864년 선조의 아홉째 아들인 경창군의 후손 이신휘의 아들 이순달을 계후하게 하였다. 이순달은 1899년 청안군에 봉작되었으며 청안군이 후사가 없자 다시 풍선군 이한용을, 풍선군이 후사가 없자 1908년 청풍군 이해승을 계후하게 했다. 그리고 이해승의 아들 이완주와 손자 이우영이 전계대원군의 제사를 모셨다. 이해승은 1910년 일본 정부에서 후작 작위와 은사공채(恩賜公債, 조선총독부가 국권피탈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준 사례금)를 받았으며, 6 · 25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 행방은 알 수 없다.

1841년 전계군이 죽자, 아버지 은언군묘 근처인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에 안장했다. 신혈면 진관은 1914년 양주군에서 고양시로 편입되면서 신혈면과 하도면이 합해져서 신도면이 되었다. 1973년에 신도면 관내 구파발리와 진관내 · 외리는 서울시로 편입되어 현재의 은평구가 되었다.

철종은 등극하면서 생부 전계군을 전계대원군으로, 아버지의 첫째 부인 최씨를 완양부대부인, 생모 염씨를 용성부대부인으로 추봉했다. 묘도 다시 정비하고 신도비를 세웠으며, 1856년에는 전계대원군과 완양부대부인의 묘를 포천시 선단동으로 옮겼다. 이후 용성부대부인묘, 회평군묘, 영평군묘가 옮겨져 일가가 함께 있다.

             

그랜드힐튼호텔이 자리한 홍은동 선산은 영평군에게 사패지(賜牌地, 왕이 내려준 땅)로 내려져 후손에게 내려왔다. 현재에도 이 부근의 산 대부분이 이우영의 소유다. 일제강점기와 8 · 15광복을 거치면서 왕족의 재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었지만 덕흥대원군 · 전계대원군 · 흥선대원군 후손의 재산은 개인 재산으로 분류되었다. 그 때문에 고종의 직계 후손이 모든 재산을 빼앗길 때, 이들은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

                                      

이해승의 아들 이완주는 신봉원과 혼인하여 이우영, 이우진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신봉원은 1968년 학교법인 동고학원을 설립했고, 1969년 홍은동 선산 아래 홍은동 산 11번지 141호(연희로 37안길 51)에 정원여자중학교를 개교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1995년에는 둘째 아들 이우진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해승의 며느리이며 동고학교재단 명예이사장 신봉원은 2010년 4월까지 살았다.

이우영은 1988년 5월에는 선산이 있던 홍은동 땅에 병원을 지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 한국에 취항하는 스위스항공에서 호텔 사업을 제안해옴으로써 스위스그랜드호텔을 세웠다. 그러나 2001년 세계적인 항공업계 불황으로 스위스항공이 파산하면서 2002년 4월 그랜드힐튼서울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계대원군이 살았고 철종이 태어났으며 영평군이 살았던 누동궁이 있던 곳은 궁동 또는 궁골이라 불렀다. 1914년에는 궁동, 익동, 돈녕동, 니동, 한동이 합하여 익선동이 된다.

누동궁터인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 전체 넓이는 약 8,264㎡(2,500평)로, 남북으로 긴 형태의 궁이었다. 의친왕의 5녀 이해경은 2005년 9월 〈이코노미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누동궁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와 가끔 큰집이라 불리는 누동궁에 갔어요. 당시 이우영 회장의 조부인 이해승 씨가 집주인이셨죠. 들어가는 입구부터 조경이 잘 되어 있었고 경치가 수려했죠. 출입문 입구에는 양쪽으로 커다란 장식물이 나열되어 있어서 마치 중국의 성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동궁 주변에서 중국식 석물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문득 이것들이 이해경이 이야기하는 누동궁 입구의 조경 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승이 팔고 나간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에는 한옥마을이 조성되었다. 구 등기부등본을 보면 1930년대에 익선동 166번지에서 분할되어 옮겨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누동궁은 분할되어 행랑길 · 누동궁 1길 · 2길로 나뉘었다가 다시 누동궁 1길 · 2길 · 3길로 나뉘었는데, 2010년 새 주소가 발표되면서 수표로 28길로 통합되었다. 이 한옥들은 아직까지 현존하고 있으나, 서울시는 2004년에 익선동 일대에 ‘익선동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이곳에 아파트, 관광호텔, 오피스텔, 근린생활시설이 들어올 예정이다.

언젠가 누동궁은 이 사업으로 그 흔적들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던 ‘누동궁길’이라는 이름조차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도로명 주소가 편리한 점도 있겠지만, 그 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길 이름들이 모두 사라져버려 과거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사람으로서 답답하기 그지없다. 나는 주변의 고층 건물이나 빌라에 올라가 누동궁의 흔적인 한옥마을을 바라보며 사라지기 전의 누동궁을 눈으로 가슴으로 새겼다.




 

⊙ 조만영                   2019.08.15.목요일,맑음

조만영(趙萬永); 추존왕 익종(효명세자)의 장인으로 어영대장,훈련대장,영돈녕 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생졸; 1776(영조52년)-1846년(헌종12년)

본관; 풍양

증조부; 조상경

조부; 조엄

부; 이조판서 조진관

모; 홍익빈의 딸이다.

제; 영의정 조인영의 형.



익종의 장인인 조만명은 음보로 능원랑을 지내다가

1813년(순조13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된 뒤 지평,정언,겸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816년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탐관 오리들을 다스렸고,돌아와 전라도 내의 민폐인 진전징세,

   환곡허록,각 궁방의 횡포 및 각사둔전의 폐,어염선세의 강제 징수 등을 열거,상소하여

   전라 감사 김계온을 파직하게 하였다.

   이어 심양사 한용구와 함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1819년 부사직이 되었다.

   이 때 그의 딸이 효명세자(순조의 아들)의 빈(후일의 조대비)으로 책봉되었다.

   뒤이어 이조참의·대사성·금위대장을 거쳐

1826년, 예조판서·이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827년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할 목적으로,순조가 건강상 이유를 들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그는 이조 판서로서 어영 대장을 겸해 실력자로 부상, 풍양 조씨 세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828년 이후 훈련 대장직을 겸임하면서 훈련도감 운영비의 조달 방법으로 주전을 건의하였다.

   또 쓸모없이 된 훈국승호포수초상법의 개혁을 요청,전국의 각 고을'읍'을 단위로 식년마다 1인씩의 승호를

   뽑아 올리게 하되,승호된 자가 그 임무를 계속하는 경우에 당해 고을은 다시 뽑지 않고 납전하게 함으로써

   종래와 같이 무뢰배로 보충하는 폐단을 시정하였다.

1830년,왕세자의 병사로 그 일파는 안동 김씨파에 밀려 났지만,

   그만은 호조판서,판의금부사,지중추부사,예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어린 세손의 보호에 힘썼다.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 외할아버지로서 호위대장,어영대장,훈련대장을 역임하면서 불안한

   왕실을 보호하는 한편,자기파인 홍석주와 이지연을 계속 상위에 머물게 하며,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현 등을 이조와 형조판서직에 앉히는 등 세력 만회를 도모하였다.


안동 김씨 정권의 미온적인 태도로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자 이를 안동 김씨 세력을 꺾는 호기로 삼아

1839년(헌종5년) 천주교도에 대한 일대 탄압을 전개하며(기해사옥),

 동생인 이인영으로 하여금 척사윤음을 올려 그 명분을 세우게 했다.

 이로써 풍양조씨의 세도를 확립,이 후 5-6년 간 정권을 쥐고 그 일족이 현달했으며,

그도 1845년,궤장을 하사받고 영돈녕 부사가 되는 영예를 누렸지만,

문중내의 내분과 아들 조병귀가 규탄을 받아 갑자기 죽자 실의에 빠진 후  눈이 멀어 병사하였다.


그는 풍양 조씨 가문의 좌장이고 핵심 인물로서,

자신은 현직을 사양하고 뒤에서 왕세자나 헌종의 신변 보호와 왕실 안전을 명분으로 각 군영의 대장직을

차례로 역임, 오랫동안 군사권을 장악하여 조씨 세도의 군사적 배경을 이루었다.

때문에 그의 실력으로 볼 때, 정치 혁신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안동 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

민생 문제와 사회 병폐를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삼정문란을 초래했다.

글씨에 능해 영흥 궁달리기적비,임천 '회양부사조신묘표' 등이 전해지고 있다.

저서로 '동원인물고'의 편술을 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철종과 강화도        2019.08.14.수요일,맑음
철종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강화도.    

강화도는 걷기에 좋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연이 깃든 길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사연을 알고 걸으면 한층 더 마음에 와닿는 강화도의 풍경들.
강화도는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의 추억이 담긴 아름다운 길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강화 나들길 14코스로 지정된 ‘강화 도령 첫사랑길’이 특히 그러하다.
강화의 아픈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강화 도령 시절의 철종과 첫사랑 봉이의
애잔한 사랑 이야기가 곳곳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에서 출발해 철종과 봉이가
처음 만난 장소로 추정되는 청하동 약수터와 강화 산성을 지나 철종 외가에까지 이르는 길이다.
짧은 생을 살다간 철종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강화도 마니산에서-



 

 

⊙ 철종이 사랑한 여인 봉이          2019.08.14.수요일,맑음

비운의 왕 철종이 사랑한 유일한 여인인 봉이.

그는 철종의 정인이라는 이유로 끝내 죽임을 당한다.

자객의 독화살을 맞고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봉이를,

그에게 향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 스승 지명 선사가 등에 업고 혜각사 대웅전 앞뜰에 당도했다.

죽어가는 봉이와 선사의 대화는 참으로 눈물겹다.

채 피어나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을 구중 궁궐로 떠나보내고 정인이 왕이 되었다는 이유로 끝내 생을

마감하는 봉이와 나누는 대화는 그대로가 한 편의 절절한 법문이다.

자신이 만든 향을 전하께 전해 달라며 지명 선사와 나누는 대화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지명 선사는 봉이와 강화 도령 철종의 스승이자 철종이 왕이 된 후에는 왕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스님이다.

“전...전하 꿈속에…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꿈속에 나타나면… 전하는 슬픔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전하가 빨리 잊고… 성군이 되시기를….”

“분명 그리 되실 게다!”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넌 선업을 많이 쌓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이번 생의 몸이 마지막 몸이 되어라. 니르바나로 들어가 해탈하여라.”

“그 말… 다시 듣고 싶어요. 인생은….”

“연꽃잎에 내리는 빗방울과 같다…. 인생은 연꽃잎에 내리는 빗방울과 같다….”

선사는 봉이와 이렇게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는 숨이 끊어진 봉이를 업고 탑돌이를 멈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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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흥궁(龍興宮)               2019.08.14.수요일,맑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8-1번지에 위치한

인천 유형문화재 제20호(1995년3월1일 지정)인 용흥궁은

‘원범이네 집’으로 불리는 곳으로서,원범은 강화 도령으로 알려진 철종의 이름이다.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년-1863년)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잠저)으로,

이 집은 본래 초가삼간이었으나,

 그가 왕위에 오르자 강화 유수가 기와집으로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는데,

용(龍)이란 왕을 상징하는 글자로서 왕의 탄생을 뜻하는 이름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조선 말기 안동 김씨의 세도가 한창 일 때 24대 헌종이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뜨자,

대신들은 똑똑치 못한 왕족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여 정사를 손아귀에 쥐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강화도에 살고 있던 이원범이 지목되었다.

영조의 현손인 그가 강화에서 자라게 된 것은 할아버지인 은언군이 신유사옥 때 강화로 쫓겨나 사약을 받고 죽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부로 전락한 그는 임금으로 봉한다는 대왕대비의 교서도 읽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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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정이정청                 2019.08.14.수요일,맑음

철종 13년(1862년)5월,

임술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삼정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 관청이다.

민란이 확산되자 정부에서는 지방관과 안핵사를 통해 민란의 배경을 조사하고,

진주 안핵사 박규수의 의견을 좇아 삼정 문란을 민란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의 개혁을 전담할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이정청은 각종 보고서를 바탕으로 자체 논의를 진행하는 한편,

전국적으로 전,현직 관리와 유생들의 개혁 방안을 수합하여 대책을 마련하려 하였고,

이에 따라 다양한 개혁론이 표명되었다.


이러한 의견들 참고하여 삼정이정청은 삼정이 정절목이라는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전정의 철저한 운영(잡세 금지,도결 금지 등),어린아이와 노인에 대한 군포 징수 금지와 희망 지역에 따른 동포제 허용,환곡의 혁파와 사창의 설치 및 재정 부족분에 대한 결세 신설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안도 실제로는 유야무야 되었다.

즉 임시 기구인 삼정이정청이 철폐되고,

비변사가 삼정 업무를 맡게 된 뒤 농민층에게 가장 피해를 끼쳤던 환곡의 폐지안은 취소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삼정의 개혁 문제는 다음 해 집권한 대원군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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