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경례의 난           2019.08.05.월요일,맑음

1811년(순조11년)12월,홍경래·우군칙 등이 중심이 되어 이듬해 4월까지 약5개월간에 걸처 일으킨 대규모 농민 반란이다.

조선 후기 봉건 사회는 17,18세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가 양적으로 팽창되어 갔다.

특히, 이앙법.이모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 기술의 변화,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

되었다.이 결과 지난날의 봉건 지주와는 다른 서민 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선된 농업 생산 기술과 시장의 확대라는 유리한 여건 속에서 차경지의 확대를 통해

상업적 농업을 하는 경영형 부농이 성장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수의 소농민들은 몰락해 영세 빈농,전호가 되었다.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층 분해는 다수의 소농민들을 중세 사회의 특징인 토지에 대한 긴박을 해체 시켜 임노동자로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부농,서민 지주로 양극 분해 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상공업은 상품 경제의 발달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수공업자의 전업화가 이루어지고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개성 상인이나 의주 상인들은 대외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등 상권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봉건적인 신분 질서의 구조에도 부(富)를 통한 신분 상승의 확대로 양반의 증가와 평민.천민의 감소,몰락

양반의 다수 존재라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양반 신분의 절대적인 권위도 동요되었다.

                

사회.경제적 변화는 19세기가 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봉건 사회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특히,정치적으로 치열했던 17, 18세기의 당쟁이 끝나고 노론에 의한 안동 김씨 척족의 일당 전제가 성립

됨으로써 삼정 문란은 농민층 분해를 더욱 촉진시켰고,특권 상인과 지방 사상 인간의 대립도 심화되었다.

더욱이 평안도 지방은 대청무역이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더욱 활발해져서 송상.만상 가운데는 대상인

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18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견직물업,유기 등 수공업 생산과 담배 등 상품작물의 재배,금·은의 수요 급증으로 인한 광산 개발이 활발하였다.

그에 따라 양반지주,상인층에 의한 고리대업의 성행으로 소농민의 몰락도 심화되었다.

일부 농민층은 부를 축적해 향촌의 향무층으로 진출했으며, 빈농.유민들이 잠채광업에 몰려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이 난은 10여 년 간 준비되었던 조직적 반란이었다.

여기에는 홍경래,우군칙,김사용,김창시 등으로 대표되는 몰락 양반.유랑 지식인들의 '정감록' 등에 의한 이념 제공이 있었다.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새로이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요호.부민 등 부농.서민 지주층과 사상 인층의 물력 및 조직력이 결합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역노 출신으로 대청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가산의 부호 이희저의 집이 있는 다복동을 거점으로

삼고,각지의 부호,부상대고들과 연계를 맺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운산 촛대봉 밑에 광산을 열고 광산 노동자,빈농,유민 등을 고용해 봉기군의 주력부대로 삼았다.

봉기군은 남진군,북진군으로 나뉘어 거병한 지 열흘만에 별다른 관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곽산.정주.

선천.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특히 각지의 내응 세력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가능하였다.

이 때의 내응 세력은 주로 좌수,별감,풍헌 등 향임과 별장.천총.파총.별무사 등 무임 중의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사상인들로 대부분이 돈을 주고 향임을 얻게 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곧 전열을 수습한 관군의 추격을 받은 농민군은 박천.송림.곽산.사송야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농민군의 전세가 이와 같이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 것은 주력 부대가 지닌 취약성 때문이었다.

농민군은 비록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으로 대표되는 봉건 지배층에 대한 공동의 이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부인 부농,상인층과 일반 병졸을 구성하는 소농,빈농,유민,임노동자층이 가지는

상호 대립적 성격으로 인해 이들 하층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에 대해 격문의 내용에서는 단지 서북인의 차별대우, 세도 정권의 가렴주구,정진인의 출현 등

만을 언급할 뿐 정작 소농·빈민층의 절박한 문제를 대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휘부가 점령 지역에서 이임,면임 등에게 병졸들을 징발하도록 한 데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그러나 일단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고립된 채 수적인 면에서나 군비에 있어 몇 배나 우세한 경군.향군.민병.의 토벌대와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다.

이러한 강인한 저항은 곧 주력부대의 구성상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정주성의 농민군은 이전의 급가 고용이나 소극적 참여자가 아니라 주로 박천.가산 일대의 소농민들로

구성되었다.이는 관군의 초토 전술에 피해를 입은 이 지역의 대다수 농민들이 정주성에 퇴각해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며, 관군의 약탈에 피해를 입은 성밖의 농민들의 협조와 또 지휘부에서도 부민에 대한 징발을 통해 평등한 분배를 제공한 때문이었다.

관군의 화약 매설에 의한 성의 폭파로 농민군은 진압되고,1,917명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처형되었다.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해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 민간의 의식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난에서 부농과는 달리 소극적인 구실만을 담당했던 광범한 소농.빈민층은 이후 임술민란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또, 이 난에서는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체제가 구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평안도 지방이 주요 무대였지만,

동시에 도성에서 소론 박종일을 중심으로 중인,서얼층이 연계해 정권 탈취를 계획한 것이라든지,

기타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층의 산발적인 소요는 같은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 난에 대한 평가는

그 주도층의 성격을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경영형 부농,서민 지주,사상인 및 일부

몰락한 양반 지식인 등이 광산 노동자,유민,빈농을 동원해 일으킨 반봉건 농민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홍경례; 1771(영조47년)-1812(순조12년)

홍경래는 '조선왕조실록'에 역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세도 정권의 부패,삼정의 문란 등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에 저항해 농민 반란을 일으킨 인물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전설 속의 영웅이며 민중의 지도자였다.

그의 사후 그를 흉내 낸 크고 작은 봉기가 잇달아 일어나는 등 홍경래는 수많은 농민 봉기에 영향을 주었고, 조선 후기 사회 변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서른세 살의 짧은 생에도 역사 속에 엄청난 삶의 자취를 남긴 셈이다.


홍경래는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면에서 태어났다.

외숙부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웠는데 어렸을 때부터 힘이 세고 총명해서 동네에서는 이름난 소년이었다.

유학원은 그의 총명함과 야심가적인 기질을 발견하여 더 이상그를 가르칠 수 없다고 여겨 그를 돌려보냈다.

그는 1798년(정조22) 사마시에 응시했다가 낙방하자 실력보다는 문벌과 혈연으로 인재를 뽑는 과거 시험을

유랑을 시작하면서 그는 청룡사에서 명문가 출신인 우군칙을 만나게 되었다.

우군칙은 서얼로 태어나 집을 나와 떠돌며 지관으로 명성을 얻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거사를 위해 향촌에서 부를 축적한 신흥 지방 유력자,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사상인 지방 차별

정책으로 관로가 막혀 불만을 품고 있던 양반 지식층 에게 접근했다.

자금을 모으기 위해 광산을 개발하고 염전을 운영해 각종 물자와 무기를 구입하고 비축했으며,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몰려든 가난한 유랑민들을 모아 군사 훈련을 시켰다.

이렇게 10년 동안 꾸준히 준비를 거듭한 후 홍경래는 1811년 가을,거사 준비를 완료했다.

약 2,000여 명의 병력은 거사일은 1812년 정월로 정했으나 12월 15일로 당겨졌다.

혁명군은 평양 감사의 관저 밑에 설치한 폭약이 터지는 것을 신호로 거사를 시작하려 했으나 당일 비가

내리는 바람에 화약이 물에 젖어 폭발하지 않았다.

대원들은 폭발을 기다리다가 난이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게다가 대원 한 명이 관가에 붙잡히는 바람에 근거지마저 노출이 되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한 홍경래는 12월18일 스스로를 평서 대원수라 칭하며 출전의 격문을 선포

아여 가산 군아를 습격해 군수 정시를 죽이고, 군대를 남북으로 나누어 각 군읍을 공략했다.

북진군은 곽산을 선두로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등을 점령했고, 남진군은 박천을 점령했다.

그러나 진격 목표를 두고 지도부 내에서 의견이 나뉘어 4일간 지체되었는데 그 사이에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해우가 이끄는 군사 1,000여 명이 안주로 들어오고, 중앙에서 파견된 양서 순무사 이요헌의 정예군이

합세했다.

□ 우군칙; 1776년(영조52년)-1812(순조12년)

본명은 우장유며,서얼 출신으로 가산군 동북면에 살면서 풍수,복설 등을 업으로 생활했다.

청룡사에서 용강의 지사인 홍경래를 만나 의기투합하여 여진 땅에서 마적을 지휘하던 정민시를 만나 군사적 행동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차력술,축지법을 동원하고 풍수 지사로 자처하면서 서북 지방의 지식인·좌수·상인·하급군관들을

끌어 모았는데, 김사용·이희저·김창시·홍총각·최이륜·김이대·윤언섭 등이 주요인물이었다.

이들은 가산 다복동을 근거지로 하고 서울의 김재찬, 의주부호 임상옥, 정주부호 김약하 등에게 지원을 받는 한편, 운산 촉대봉에 광산을 개설한 뒤 광산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금을 채굴하고 추도에 염전을 개설했다.

1811년10월, 각지의 중심 인물들이 다복동에 모인 뒤 '임신기병'의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고 광산

노동자들을 봉기 군사로 하여 마침내 12월18일 전면 봉기를 단행했다.

이때 그는 도원수 홍경래의 참모로 제갈량을 흉내내어 학창의를 입고 부채를 손에 들고서 군대를 둘로

나누어 남진군은 가산,북진군은 곽산을 치게 했다.

봉기군은 27일까지 정주 등 7개군을 점령했으나, 송림·의주 전투에서 관군에 패해 정주성으로 후퇴하여

항전했다.이후 4개월 동안 버티다 4월 \19일 관군에 의해 성이 함락되자 이희저와 함께 도주했으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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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찬               2019.08.05.월요일,맑음

김재찬(金載瓚); 조선의 정치가

생졸; 1746년-1827년

호; 해석

본관; 연안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정조 때에 예문관검열, 한림, 규장각직각, 정랑, 교리, 의정부검상, 해조낭관, 부사과, 겸보덕을 지냈으며,

이후 당상관으로 승진해서 이조참의, 대사성, 검교직각, 원춘도관찰사,대사헌, 규장각직제학,도승지를 하고 이후 이조참판을 거쳐, 대사헌,형조판서,이조판서,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예조판서, 수어사, 직제학, 평안도관찰사, 조참찬, 강화유수, 지돈녕부사, 판의금부사, 우빈객, 규장각제학, 빈전제조, 병조판서,공조판서,

실록당상, 수원유수, 추참찬, 광주유수, 혼전당상, 애책문제술관 등을 지내고, 순조 때 정승이 되어 우의정

좌이정을 거쳐 순조 때 영의정에 이르렀다.

홍경래의 난 때는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 이를 평정하여 기근과 병란으로 인한 혼란된 세태를 안정시켰다. 이후 좌이정을 거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저서에 '해석일록''해석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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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의정 김재찬과 홍경래의 반란          2019.08.05.월요일,맑음

'이번에도 또 낙방이구나!' 홍경래는 깊은 시름에 젖었다.
'내가 생각을 해도 이만하면 누구보다 뛰어난 글인데.. . . .?.
그는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참방이 되지 않는데는 어찌하랴!

이전에 낙방을 하고 나자,이를 악물고 죽을 힘을 다해 상투끝을 천정에 끈으로 달아매고 다리를 송곳을 찔러가며 글 공부에 열중하기를 몇해를 두고 게속하였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학업에 열중하였다.

그야말로 과거를 보기 위하여 와신상담하였고 과거령이 내리자 또 평안도 용강현에서 변변히 노자도 없이 불원천리하고 한양까지 올라와서 과거를 보았던 것이다.

그런 것이 재차 낙방이 되고 말았다.
'서북 태생이 무엇이 될 줄 알고 과거를 보노? 보는 사람이 틀렸지!' 
'바보지. 헛수고 말라고 해도 고지식하게 과거를 보니 될 게 무엇인고? 지벌을 모르느냐?.'
같은 고향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타일렀던 것이다. 


'급기야 지벌이구나! 그러나 이것을 어느 때까지 그대로 두면 우리 고장 사람들은 어찌 되며,

또 이런 악습은 단연코 없애야 되겠다.' 홍경래는 이렇게 결심하고 세도가의 문을 두드렸다.
'일초시라도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애원을 하고 다녔으나  아무도 대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홀대만 받았다.
그는 불평과 불만을 품게 되어 그와 같은 불만에 사로잡혀 있는 곽산 사람인 우군칙을 알게 되자 서로 왕래하다가 급기야 군칙이,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어찌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죽겠소? 우리 한번 일어나 겨루어 봅시다.'
이런 말을 하니 경래는 당장에 이에 호응하였다.

편당과 지벌,그리고 뇌물로만 일을 삼는 조정의 그릇된 신하들을 쳐부수자는 것이었다.
경래는 곧 상경하여 영상으로 있는 김재찬(순조)을 찾아가,
'기왕 벼슬을 할 길이 없으니 장사 밑천이나 구해 주소서.'
그리하여 영상에게 편지를 얻어 평안감영으로 내려와 공납전 2천 냥을 얻었다.
이로부터 홍경래는 주야로 뜻을 같이하는 무리를 모았으니, 가산의 이희저, 황주 사람인 김사용, 개천의

이제초 등이 그의 밑에 모였고, 또 한편 마침 서북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던 때를 이용하여 태산, 운산 등지에 금광을 한다는 풍설을 퍼뜨려 사람을 모아서 슬그머니 군사 조련을 하였다.

홍경래는 스스로 평서 대원수라 일컫고,김사용을 부원수,이제초를 전군장군,이희저를 후군장군,

그리고 우군칙을 모사로 삼았다.

이리하여 홍총각이란 자를 선봉장으로 하여 가산읍 부터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가산 군수는 정저란 사람으로 강직한 무변 출신이었다.

정저가 홍경래 일당이 침노한다는 소식을 듣고 감영에 이 뜻을 전하는 보장을 적고 있는데 멀리서 군마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정군수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관인을 간직하려고 하는데 몰려 들어온 적이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는 적에게 끌려 동헌으로 나가니,이미 홍경래가 대청 위에 높이 앉아서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가산군수, 항복하라.' 이 말을 들은 정군수는 서슴지 않고,
'네가 누구기에 항복하라고 하느냐?' 하며 대드니, 홍경래는 더욱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평서 대원수를 모르느냐? 조정의 간당들을 쓸어 버릴 작정으로 의병을 일으켜 나가는 길에 너부터 항복을 받으려는 것이다.' 
   

'네가 감히 도당을 모아 나라를 어지럽히느냐? 네가 곧 대가리 없는 귀신이 될 줄을 모르느냐?'
장저가 이렇게 항거하니,홍경래는 정저가 관인을 들고 있는 오른쪽 손을 치게 하여 관인을 빼앗게 하니

정저는 왼쪽 손에 관인을 고쳐 쥐고 놓지 않으려고 했다.

홍경래는 또 왼쪽 팔을 치게 하였다.

정저는 피를 흘리면서도 관인을 입에 무니, 급기야 정저의 목을 쳐서 떨어뜨렸다.

이어서 정저의 부친 정노도 죽고 정저의 동생 역시 칼을 맞았으나 수청 기생 옥랑의 간호로 소생 되었던

것이다.


홍경래는 이렇게 가산을 침로하고 나아가서 박천을 포위하여 안주 병영을 손에 넣고,태산,곽산을 침략한

다음에 선천을 에워쌌다.

그 당시 선천부사는 김삿갓의 조부인 김익순이었는데,홍경래의 협박에 못 이겨서 항복을 하고 말았으니,

이로 인하여 김삿갓은 세상에 나서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홍경래는 더욱 기세를 올려서 박천에 모든 군사를 모으고 동짓달 청천강의 얼음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서

평양을 단번에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루 사이에 강물이 풀려서 군마의 왕래가 불가능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이 급하게 되자,

순조는 영상의 말에 쫓아 이요헌을 도순무사로 하고,박기풍을 순무중군으로 하여 홍경래를 치게 하였던 것이다.사방에서 보잘것 없이 항복만을 계속하던 관군이 겨우 힘을 얻어 여러 곳에서 반군을 부수고 차츰

그들을 포위하여 정주성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반군도 정주성을 쉽사리 내놓지 않자 다만 보급로를 끊고 몇달을 서로 겨루고만 지냈다.
이렇게 되자,새로 오게 된 정만석의 지략으로 성 한 귀퉁이를 폭파 시키게 되었다.
이 때 정만석은,수문중군장 유효원을 시켜
'성에서 나와 투항하면 살려 주겠노라.' 하고 방을 써 붙여 놓고 한편 성 북장대 밑을 몰래 파게 하여 화약을 묻고 화승을 달게 하였다.
양식이 끊어져서 허덕이던 성안의 홍경래 군은 이 방을 보자,

성을 빠져 나가고 싶기도 하였으나 반대로 살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얼마를 망설이다가 부녀자들을

먼저 내보냈다.부녀자들이 겁을 먹고 하나 둘 성을 나섰으나 관군은 아무 말도 묻지 않고 그대로 보내는

것이었다.이래서 부녀자들은 안심하고, 하나 둘 성을 나와서 고향을 찾는 것이었다.

급기야 홍경래의 병졸들까지 홍경래에게 몰려 들었다.
'성 밖으로 내보내 주십시오.' 이에 경래는 부하들에게 다시 한번 위협을 주었다.
'부녀자들은 살려 주었지만, 우리까지 살려 줄 것으로 아는가? 짐짓 백성들만 살려 주고 우리를 꾀어 내려는 술책이다. 청에 원병을 청했으니 그 때에 관군을 포위 도륙하고 돈과 벼슬을 나누어 고향에 가도록 하자.'
이 헛된 말에 한 가닥의 희망을 건 부하들은 다시 말을 타고 헛북만을 둥둥 울리면서 맡은 자리로 돌아섰던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 성 밖에서는 살려고 나오는 병졸이 없음을 알고 화약줄에 불을 붙였다.

한편 성 주위에는 많은 관군을 복병시키고 있었다.

성 주위의 적들은 그만 기아에 지쳐서 여기 저기 쓰러져 있으니 쥐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하였다.
'콰, 쾅, 쾅.'
이 때에 별안간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화약의 폭발과 함께 북장대가 산산 조각이 되어 버렸다.

장대를 지키던 이희저 이하 여러 병졸들은 시신도 찾을 길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초가 총에 맞아 쓰러지고 김사용이 사로잡혔다.

또 많은 사람이 어지러이 도망치다가 잡히거나 총에 맞았다.
홍경래와 우군칙은 상복을 얻어 입고 빠져 나가려고 하였으나 급기야 관군에게 들키어 일제 사격을 받고

쓰러졌다. 이래서 조정에 항거하던 홍경래의 일당은 피와 통곡으로 끝을 맺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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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2019.08.05.월요일,맑음

정약용(丁若鏞 );

생졸; 1762-1836

호; 다산

1801년(순조1),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탄압을 받고 있을 때였다.

정약용의 형제들도 끌려가 몽둥이 찜질을 받았다.

특히, 형 약전과 약종이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그에게 집중적으로 심문을 퍼부었다.

형관들은 오고간 편지에 나타난 괴수가 형 약종이 아니냐고 물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형 약종이 죽고 매부 이승훈도 죽었으나 그는 살아 남아 강진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오랜 귀양살이 중에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 많은 저술을 남겨 첫손 꼽히는 개혁 사상가가 되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갈라지는 양수리 위쪽 마재는 정씨들의 세거지였다.

이 마을 목사의 막내 아들이 바로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요 세계적인 학자인 정약용이다.

정약용이 태어날 즈음에는 비교적 나라가 평온했다.

그는 세 형들 밑에서 지식을 넓혔고 좀 더 자라서는 강 건너 양평에 사는 권철신에게 가서 학문을 익혔다.
그리고 광주에 사는 이가환에게서 학문의 깊이를 다지기도 했다.

권철신이나 이가환은 모두 당시의 쟁쟁한 실학자들이었고 성호 이익의 제자들이었다.

정약용은 이들에게서 성호학에 접근해 이익의 실학적 사상을 사숙하기 시작했다.

정약용의 실학 정신은 이익을 사숙함으로써 단초를 열어 가게 되었다.

소년 시절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지방 수령으로 다니자 아버지를 따라 진주 지방에서 살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지방 행정을 몸소 겪었다. 스무 살 때 과거에 합격해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다.

정조는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늘 시험을 보였는데 이때 그에게 '중용'을 내려주고 이를 강의하게 했다.

정약용은 임금 앞에서 막힘없이 강의했고 정조는 크게 감탄했다.

호학의 군주 정조는 이때 정약용을 앞으로 중용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다음해에 그는 형수의 초상을 치르고 한강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오면서 이벽에게서 처음으로 서학에 관한 말과 서양의 과학 지식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

는 수표교 옆에 사는 이벽의 집에서 많은 서양서적을 접하고 상당한 과학 지식을 쌓기도 했다.

정약용은 1789년(정조13) 마침내 알성시에 급제해 첫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사헌부 지평,사간원 정언 등의 언관이 되어 임금에게 정책을 상주하고 간언을 하는 소임을 맡았다.

정조는 젊고 재기 발랄한 정약용을 측근에 두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했다.

정조는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사도세자)를 찾아 매년 몇 차례에 걸쳐 수원의 능행길에 올랐는데,

정약용은 한강의 배다리 설치를 맡게 되었고 이 일을 훌륭히 해냈다. 

이어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수원성을 쌓을 적에 설계도와 기구를 만드는 일 또한 그가 맡았다. 그

는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힘겹게 지고 올리는 것을 보고 기구의 발명에 골몰했다.

또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성의 거리, 높이 따위를 측량해 가장 튼튼하고 단단한 성을 쌓기 위해 연구했다.

마침내 그는 거중기와 도르래,바퀴달린 달구지 따위를 발명해 성의 역사에 써먹었다.

                

이때부터 그에 대한 정조의 신임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를 암행어사로 보내기도 하고,규장각 학사나 승지 등을 맡기면서 늘 옆에 두었다.

이때 전해지는 말로는 정조는 영의정인 채제공의 뒤를 이을 인물로 장년층의 이가환,

청년층의 정약용을 꼽고 있었다고 한다.


1791년은 정약용이 정조를 만난 지 9년째로 접어든 해였다.

진산의 천주교도 윤지충이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실이 탄로나 서학에 대한 옥사가 일어났다.

목만중,이기경 등이 이 기회를 이용해 서학의 강독에 참석하고 서학을 받드는 이가환,이승훈,정약용 등을

몰아 잡으려 했다.

정약용이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은 후 첫 번째 맞는 시련이었다.

그는 문초를 받을 때 서학의 책을 읽었음을 솔직히 시인했으나,서학을 믿지 않았음을 밝혔다.

정약용은 무사했지만 그를 몰아내려던 이기경이 도리어 경원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럴 즈음 아버지가 죽어 그는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3년의 복상을 치렀다.

그리고 조정에 나와 참의의 벼슬에 있었다.

1794년에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잠입해 포교 활동을 벌이자 목만중은 또다시 정약용 일파를 걸고 들었다. 두 번째 시련인 셈이다.

정조는 반대파를 완전히 꺾어 누를 수 없음을 알고 정약용을 금정찰방이라는 한직으로 내보냈다.

그는 천주교도가 많은 홍주 아래 한 고을의 찰방으로 가서, 천주교도들을 잘 효유해 조정의 금령을 어기지 말고 제사를 잘 받들라고 권고했다.

몇 달 뒤 그는 다시 임금 옆으로 불려와 승지의 벼슬을 받았다.

이 무렵 정조는 백성의 수탈을 일삼는 관리의 부정을 막으려 무척 고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령들에게 그 방책을 올리게 했다.

이때 정조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 정약용을 곡산부사로 보냈다.

곡산은 민란이 자주 일어나는 고을이었다.

그는 부임 이후 조세와 부역을 공평히 하고 옥사를 너그럽게 다스렸다.

명 목민관으로 이름을 처음 떨치게 되었다.

정조는 특히 그에게 황해도 일대 수령들의 부정과 선정을 가려 올리라는 밀지를 내리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정조는 또다시 그에게 승지, 형조참의 등을 주어 곁에 있게 했다.

그러나 그가 외직에 있는 동안에도 그에 대한 모략은 끊이지 않았다.

이 무렵 목만중,이기경의 사주를 받은 조화진이 “이가환,정약용 등이 서학을 받들면서 역적을 모의한다”는 상변서를 올렸다. 정약용은 더 이상 반대파들의 모략을 견디기 어려워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정약용의 마지막 벼슬길이었다.

어느 여름날 밤, 정약용이 달을 마주하고 앉았을 적에 사립문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임금이 보낸 심부름꾼이 한서선 열 책을 내밀었다.
“다섯 권은 집 안에 보관하시고,다섯 권은 제목을 써서 올리라는 성상의 당부이옵니다.”
정약용은 임금의 선물을 받고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서 정조의 승하 소식을 들었다.

이제 용은 물을 잃었고 매는 죽지가 부러진 셈이다.

결국 정조와 어우러져 뒤뚱거리는 왕국을 바로 잡아보려는 그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그는 당쟁에 빠지지 않았다.

비록 남인의 가계에서 태어났지만, 당쟁의 중심 인물이 되지 않았음을 자랑 스러워했고,

 아들에게도 그런 일에 가담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문벌 · 당색의 타파를 열렬히 주장했고 인재의 고른 등용을 역설했다.

시파로 지목된 자신을 몰아내려는 벽파에 대해서도 비난을 퍼붓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소외되었을 적에는 감싸주기도 했다.

그를 늘 못살게 굴던 이기경이 경원으로 유배 되었을 적에 그의 동료들은 통쾌히 여겼다.

그러나 정약용은 “아니다. 우리의 재앙이 시작되는 조짐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늘 이기경의 집에 찾아가 그의 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기경의 어머니 상사에는 있는 돈을 다 털어 1천 냥이라는 많은 부조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도 이기경을 상대하지 않자 그에게 남몰래 접근해 다정한 말을 나누기도 했다.

이것은 적을 동지로 만드는 정약용의 국량이요 지도자의 자질일 것이다.

그는 누구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적 없다.

다만 남들이 자신을 헐뜯으면 자명하는 상소를 올렸을 뿐이다.

이런 그의 성격 또는 처세방법은 18년이라는 긴 귀양살이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정조가 죽은 뒤 벽파들은 남인 시파를 신서파로 몰아붙여 정약용의 집안은 거의 멸문의 지경에 이르렀다.


여유당

△ 여유당

                                     

1801년 신유박해에서 셋째 형 약종은 옥사했고 그는 둘째 형 약전과 함께 기나긴 귀양살이를 떠났다.

반대파들은 그도 죽일 것을 모의했으나 일부 동료들의 노력으로 귀양에 그쳤다.

강진 일대에서 지낸 그의 귀양살이는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안동 김씨의 문벌 정치가 굳어진 조정에서 그에게 사약을 내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약용은 농민들의 참상과 관리의 부정, 조정의 부패와 무능, 민생의 간고 등을 시로 읊기도 하고 책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수령의 부정을 막기 위해 쓴 '목민심서',

치도의 방책을 제시한 '경세유표',

공정한 형벌을 위한 '흠흠신서' 등은 나라를 살찌울 경제관계의 저술들이다.

'목민심서'는 자신이 곡산 부사로 있던 때의 경험과 강진의 농촌 현실을 쓴 것으로 불후의 명저로 꼽힌다.


당시 그는 관제,전제 등 모든 국가 제도에 대한 개혁 방안을 쓰고 있었다.

바로 '경세유표'였다.

이것을 중단하고 좀 더 직접적인 현실 문제를 타개 해야겠다는 의지에서 1817년 '목민심서'의 집필로 붓을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붓을 댄 지 1년 만에 완성했다.

그러나 집필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의 위민 사상의 정수이다.

목민은 ‘백성을 살찌운다’는 뜻이요,심서는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귀양살이 하는 한낱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1812년 서북에서 홍경래를 중심으로 농민 봉기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곳 선비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권유하기도 하고 후원하기도 했다.

이것은 농민 편에 서 있는 그로서는 이율 배반의 모습이다.

그러나 어쩌면 언제 민란의 음모자로 몰아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대비한 위장술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이 의병 제의는 불발로 그쳤다.

김조순은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김조순의 주선으로 그는 긴 유배에서 풀려났다.

만약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불평이나 터뜨리며 정담이나 설왕설래했더라면 온전 했을까?

그가 고향 집에 돌아 왔을 적에 서용보 또한 벼슬자리에서 떨어져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정약용은 묵은 감정을 씻고 그에게 사람을 보내 간곡하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이후 그는 책을 읽고 저술에 몰두하면서 틈틈이 주변의 산천경개 구경으로 나날을 보냈다.

벼슬할 뜻은 물론 없었으며 정담을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즈음 조정에서는 그에게 벼슬을 다시 주려고 논의를 벌였다.

그러나 벼슬살이를 다시 하던 서용보가 결단코 반대를 거듭해 실현되지 못했다.

정약용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흔히 그의 대표 저술로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있다.

'경세유표'가 국가의 기본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내용인 반면,

'흠흠신서'는 인명을 중시해 원옥이 없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인권관 계의 저술이요,

'목민심서'는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수령을 통해 민생의 고통을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19세기는 이 땅에 세도 문벌 정치가 들어선 시기이다.

몇몇 문벌가가 번갈아 정권을 잡고 마치 나무꾼이 작대기 휘두르듯이 나라와 민중을 몰아갔다.

이런 마당에 그들은 모두 벼슬을 차지했고 남은 찌꺼기조차 정당한 방법으로 인재를 수용하지 않고 벼슬을 팔아먹었다.

그 중에서도 지방관은 돈을 주고 산 벼슬의 값을 뽑으려고 민중을 갈취했다. 지방관은 2중3중으로 매매되어 어느 수령이 부임해서 한창 부임잔치를 벌이는 중에 다음 수령이 부임해올 정도였다.

이리하여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민중은 처음에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깊은 산 속에서 화전민이 되기도 했고 섬으로 들어가 어민이 되어 수탈의 손길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다가 도둑이 되고 명화적 떼로 뭉쳐 부호의 재물이나 관물을 빼앗았다. 그리고 끝내는 곳곳에서 떼 지어 관권에 항거했다.

앞뒤로 이런 판국이었는데도 당시의 지배자들은 정약용의 개혁 방안 따위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정약용은 결코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이 그저 팔짱만 끼고 있다가 그대로 죽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목민심서'에 제시한 그의 방안을 써주기는 커녕 읽어 주지도 않는 현실이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정약용이 열세 살 적에 나라 안에 천연두가 휩쓸었다.

한번 천연두가 휩쓸고 나면 살아남는 아이들이 적었고 더러 낫는다 해도 곰보가 되었다.

이럴 적에 나라의 대비책이라고는 피막을 지어 환자를 격리하는 정도였다.

어린 정약용이 이 병에 걸렸으니 부모는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기도 광주 땅에 사는 이헌길이라는 의원의 손을 빌려 살아났다.

이헌길은 천연두가 10-20년 단위로 유행하는 것을 보고 임상을 통해 치료법을 찾아냈다.

정약용은 그의 생명을 구해준 이헌길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천연두가 휩쓸어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이헌길의 천연두 처방책인 '을미신전'을 구해보니 찾아 보기가 매우 불편했다.

급한 마당에 하나하나 내용을 다 훑어볼 수가 없어 새로 항목을 만들고 그에 따라 처방을 제시했다.
정약용은 '마과회통'이라는 책을 썼다.

이는 이헌길에게 은혜를 갚고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리고 천연두는 자연 기운과 시대에 따라 처방이 달라지므로 이 책의 내용도 몇십 년이 지나면 처방을 바꿔야 한다고 썼다.

그의 말처럼 19세기 말 지석영이 종두법을 들여 왔을 무렵에는 기존의 처방은 효용이 반으로 줄었다.

그러나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자연의 기운과 체질에 따라 처방을 낸 이런 의술은 오늘날 민간요법으로 전승되고 있고 그 요법의 과학성 역시 부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와 같이 정약용은 인문이나 개혁 사상가 만이 아니었다.

그의 사고는 대단히 과학적이었고 생활 또한 그러했다.

그는 실로 빛나는 업적을 세웠는데 거의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만약 그에게 유배 생활이 없었다면 이런 역사적 저술이 나왔을까?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적에는 가산이라고는 별로 남지 않았다.

그는 가난하지만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더욱 학문을 연마하면서 보신에 철저했다.

이제 늙은 그였지만 그의 정적들은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일흔넷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파란이 겹친 생애였지만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저술을 통해 남기고 평탄하게 생애를 마무리했다.

죽어서도 한동안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가 사후 1백여 년 뒤인 식민지 시기에 저서를 출간할 수 있었다.

오늘날 그의 학문은 다산학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다.

다산 연구소가 발족되어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선양 사업을 줄기차게 벌이고 있다.

리고 그의 고향 일대와 강진의 유배지에서는 그와 관련된 유물 유적을 보전.전시하고 있는데,

순례단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이승훈            2019.08.05.월요일,맑음

이승훈;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으로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다.

생졸; 1756년(영조32년)-1801년(순조1년)

본관; 평창

교명; 베드로

호; 만천

부; 참판 이동욱으로 남인

외조부; 이용휴와 외삼촌 이가환의 영향

 

이승훈은 기호남인의 젊은 재사인 권일신·정약종·정약전·이기경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성호좌파의 학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서양의 신학문에 대한 수용 열정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1775년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했다.

1780년(정조4년)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갈 때, 천주교에 몸담고 있던 친척 이벽의 부탁을 받고 서학 서적을 구하기 위해 베이징 북천주당에 찾아갔다. 거기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교리를 연구한 후 입교할 것을 결심, 이듬해 예수회의 루이 그라몽(染棟材)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었다.

1784년 3월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성화·묵주 등을 갖고 귀국하여 이벽·최인길과 함께 권일신, 정약용 형제 등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하면서 영세를 집전했다.

다음해 명례동의 중인(中人) 김범우 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했다.

이들은 정기적인 신앙모임을 갖고 교리서를 언문으로 번역해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자,

이승훈은 가족들의 권유로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척사문을 짓고 배교했다.

1787년 비밀리에 복교하여 자치적인 교회활동을 개시하여 권일신을 주교로 하고 스스로는 신부가 되어 성사를 집행했다.

1789년 10월 윤유일을 베이징으로 파견하여 자치적 교회의 존재를 알리게 하고 조상 제사에 대한 교리 해석과 성직자 파견을 부탁하게 했다. 그러나 베이징 교구장 알렉상드르 구베아(湯士選) 신부로부터 조상 제사의 불가 통보와 자치교회의 부정 회답을 받고 다시 배교를 했다.

1791년 평택현감으로 재직중 윤지충·권상연의 제사 거부로 비롯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이기경을 비롯한 유생들의 상소로 관직을 빼앗기고 투옥, 옥중에서 배교를 하여 석방되었다.

1794년 중국에서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여 전도활동을 하자 교회와 다시 접촉했으나, 다음해 윤유일·최인길·지황 등이 체포·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 예산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생활중 '유혹문'을 지어 유포하고

1796년 유배가 풀린 후 '주자백록동연의'를 짓는 등 교회활동을 단절한 입장을 밝혔다.

1793년 이후 기호남인들은 정치적으로는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채당(蔡黨)과 그에 반대하는 홍당(洪黨)으로, 천주교에 대한 입장에서는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로 나누어졌다.

채당 신서파에 속한 그는 반대파에 속한 홍낙안·이기경 등에게 계속 공격을 받았다.

1801년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와 심환지 등 벽파세력 및 최헌중 등 남인의 일부 세력은 남인 시파가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계기로 사학탄압을 내세우면서 신유사옥를 일으켰다.

이에 이가환·정약용·권철신·정약종·정약전 등과 함께 연루되어 같은 해 2월 26일 정약종·최창현·최필공·홍교만·홍낙민과 함께 '구서전법''밀통양인''잠모가환의 죄목으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했다.

1856년 아들 신규의 탄원으로 대역죄는 신원되었다.

이후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에, 증손 연구·균구는 1871년에 순교하여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가 있다.






 

조선의 몰락과 중흥          2019.08.05.일요일,맑음

조선은 건국부터 정도전이 추구한 신권 중심 정치 질서가 어느 정도 있었다.

시대를 고려하면 정말 진보적인 발상이었지요. 붕당정치는 단점도 꽤 있었지만, 만약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어갔다면 조선은 점차 입헌 군주정과 비슷한 형태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조선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절대 군주 숙종이 등장하면서,

이후의 조선사는 건국부터 이어져왔던 신권 중심 정치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현종 대까지 붕당정치는 평화로운 편이었나 숙종은 그걸 죽고 죽이는 혈전으로 바꿔놓습니다.

그리고 이쪽저쪽 숙청을 반복하며 신하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고,완전히 굴복시키게 됩니다.

 

숙종의 왕권 강화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으로는 꼭 나쁘진 않습니다.

붕당정치에 폐단이 많았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현대 의회주의 민주정도 보고 있으면 정말 막장인데,

조선 붕당정치는 그보다 아무래도 심하거든요.

당장 의회를 불신하고 현명하고 강력하며 독단적인군주가 모든 걸 다 해주길 바라는 모습은 현재 한국에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숙종 이전에 왕권을 강화했던 왕인 태종 이방원에 대한 평가도 그다지 나쁘지 않지요.


그러나, 장기 집권한 숙종의 왕권 강화는 여러 부정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위에 이야기했듯 조선 초부터 이어져오던 신권 중심의 정치가 끝나고, 강력한 왕에 신하들이 잘 보이려 노력하면서 반대파를 기회만 되면 몰락시키려 하는 혈투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선 신하들은 점점 바른 말을 잘 하지 않게 되고, 뜻 있는 자는 관직에 오르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영민한 왕이었기에 장기집권을 하는 동안 왕권강화로 인한 문제가 딱히 커지진 않았습니다. 숙종 다음에 즉위한, 숙종과 희빈 장옥정 사이의 세자였던 경종은 재위기간이 불과 42개월이었지만, 경종 다음 왕은 그 유명한 영조로 52년이나 재위. 영조 다음 대인 정조가 그 다음대로 243개월을 재위했습니다. 영조와 정조는 모두가 알다시피 능력 있는 왕이었지요.

 

 숙종이 즉위한 해는 1674년입니다. 그리고 숙종의 아들인 영조는 1776년까지 재위합니다. 중간에 경종이 4년 하긴 했지만, 어쨌든 붕당정치 붕괴 후 부자가 102년을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이후 영조의 손자 정조가 또 1800년까지 좋은 통치를 함으로 탕평시대는 조선의 본격 중흥기가 되어버립니다. 시스템의 문제를 무려 126년간 3+1군주의 능력으로 커버한 셈입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이 운이 좋았던 건데, 어떤 면에서 보면 나쁜 것이었습니다. 숙종-정조 대에 조선은 왕이 능력 있고 잘해야만 잘 돌아가는 시스템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숙종의 책임을 모두에게 납득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숙종이 붕당정치를 실질적으로 끝내고 절대군주화 되었다고는 해도, 그가 집권한 이래 126년간 조선은 꽤 잘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보다 좋은 시대였습니다. 전후복구도 끝나고 어쨌든 경제도 기술도 성장했던 시기거든요.

 

그러나, 나는 조선의 국운을 쇠하게 한 것은 결국 숙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정치시스템을 망친 건

분명 숙종이었으니까요. 정치는 왕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유능해도 혼자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명백해요. 숙종은 여러 번의 환국 과정에서 피가 흐르는 숙청을 반복했고, 이 과정에서 신하들에 대한 통제권은 확보했으되 신하들끼리의 혈투는 그 대가가 되었습니다. 서로 증오하는 신하들끼리 일처리가 제대로 되긴 어려웠고, 숙청의 정도가 심하다보니 국가 인재풀이 박살나버렸습니다. 인력이 없어지니 역설적으로 왕의 인사권은 제한되게 되었고, 경쟁할만한 붕당이 아예 사라져버리다시피 하니 또 역설적으로 왕의 권력이 줄었습니다.

 

왕의 권력은 근본적으로는 백성에서 나오고, 가까이는 왕을 받드는 신하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숙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신하들을 너무나 많이 충돌시키고 제거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간이 갈수록 왕권이 약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숙종 말에는 남인들은 몰락하고, 남인들에 대한 온건/강경 처리를 시작으로 나뉜 소론/노론으로 나뉜 서인들이 각기 훗날의 경종과 영조를 지지하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줄 잘못 서면 죽는다는 (진짜로 사약 받습니다.) 절박함이 있다 보니 아주 막장이 된 겁니다. 사실은 이미 이 시점에서 조선의 국가 시스템은 기운 것입니다. 법도를 논하는 게 아니고, 신하들끼리 정파가 갈려 서로 다른 후계자를 지지하는 건 이 때가 조선사에서 처음입니다.

 

서로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밀리더라도 제거당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중요한 겁니다. 사상의 자유라는 거지요. 인조 이후 숙종 이전엔 잘못하면 내 쫓기는 일은 있어도 죽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는 열려있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정치세력끼리 서로 증오하고 끝을 보려고 굴면, 그 사회는 쉽게 파멸합니다. 역사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한국도 대통령 일당에게 반기를 들기 어렵지요? 내부에서 이견을 제시하기도 어렵고.

 

 정리하자면 붕당갈등이 극대화된 건 숙종 책임입니다. 그 갈등은 나라를 말아먹기에 충분했기에 탕평이 필요해졌습니다. 숙종도 탕평에 대한 생각은 있었으나, 숙종은 죽을 때까지 그 면에선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탕평을 시작한 건 실질적으로 숙종 다음 대인 경종입니다.

 

 숙종 말년은 노론 세상이었고, 숙종이 병으로 쓰러진 후 경종은 노론들에게 상당한 견제와 압력을 받으면서 집무를 시작합니다. 위기를 겪다 왕이 되었으나 노론은 경종을 계속 심하게 공격합니다. 경종 집권 초에 노론은 아예 경종을 왕 대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폭주가 너무 심해져, 훗날 영조가 되는 연양군을 세제로 만들고는 대리청정을 시키라는 말까지 나왔지요.

 

 경종은 그런 실언을 빌미로 진짜 대리청정을 시킬 것처럼 이야기하다, 방심한 노론이 실수를 거듭하자 상황을 한 번에 역전시켜 노론의 세는 한 풀 꺾이게 됩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노론 쪽에서 경종을 죽이려 한 게 밝혀집니다. 나라가 갈 데까지 간 거지요.

 

 이 때 경종은 훗날 영조가 되는 세제 연양군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왕을 시해하려는 사건에 얽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경종은 그러지 않았고, 그러기도 어려웠습니다. 연양군이 아니면 경종에겐 후사가 없었습니다. 손이 귀한 것은 조선 왕실의 큰 문제였습니다.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경종은 즉위 48개월 만에 쓰러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연양군이 올린 인삼을 먹고 죽습니다. 당시 어의는 경종이 인삼을 먹는 걸 반대했고요. 결국 경종이 죽은 후 연양군은 왕이 됩니다만, 이후 임기 내내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게 됩니다.

 

 환국을 통한 숙종의 절대왕권에서부터 혈투가 되는 붕당정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영, 정조대의 탕평, 이후 이어지는 세도정치는 연역적인 인과관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무자비함과 절대권력이 혈투를 부르고, 혈투 속에서 잘 해보려는 권력조차 어쩔 수 없이 이너서클을 구성하고, 그 이너서클이 부패하면서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영정조대의 치세, 조선의 중흥기가 있었던 건 많은 것이 경종의 공입니다. 경종은 짧은 재위로 인해 별다른 평이 없습니다만, 만일 경종이 붕당간의 투쟁을 부추겼고 영조가 되는 연양군을 제거했다면 조선은 중흥 없이 훨씬 빨리 끝났을 것입니다. 경종은 분노를 참고 명분과 대의를 따랐기에 오랜 세월동안 조선 백성들이 중흥 속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종과 같은 모습을 근래 정치권에선 찾아보기 힘들어 참 우려스럽습니다.

 

 숙종이 굳은 정통성으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이었다면, 영조는 매우 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단히 투쟁적인 왕이었습니다. 경종도 장희빈의 아들이라 정통성이 모자라긴 했지만, 영조는 아예 궁녀도 아닌 무수리 출신의 아들이란 말이 돌았고 심지어 기혼녀였으며,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라 정통성이 태생부터 아주 낮았고, 이에 더해 경종 독살론에 시달리다보니 정말 흔들리기 쉬운 왕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영조는 평생 싸워야했고 그 싸움에 질린 것이 세도정치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영조 시절의 군신 다툼은 영조 집권 4년 만에 벌어진 이인좌의 난부터 언급해야겠습니다. 이건 쉽게 설명하자면 경종 독살론이 반란까지 이어진 건데, 실제 금방 진압되긴 했지만 충청-경상-전라의 삼남지방 일대에서 벌어진 거병이었습니다. 그나마 빨리 진압된 건 영조가 미리 전 해에 탕평을 시작해 이인좌의 난 주축이었던 소론 탕평파, 완론들을 대거 기용했던 덕이었고, 미리 그런 걸 안 해뒀으면 대규모 내전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때 영남지방, 그러니까 경상도가 가장 진압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반역의 지역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영남지방은 남인들의 거점이기도 해서 더더욱 견제 받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견제는 정조 때 풀릴 기미도 있었지만, 결국 흥선대원군 집권기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이런 지역차별은 조선의 몰락에 또 나름 기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소론과 남인은 다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소론 강경파 준론들은 난이 진압된 후에도 계속 영조에게 덤비면서 제거당합니다. 세력이 남은 건 숙종 때부터 영조를 받들려 하던 노론밖에 없게 되지요.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노론만 남게 되니 탕평은 영조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일이 되어갔습니다.

 

 이 시점에서 슬슬 등장하는 게 척신, 그러니까 외척입니다. 노론만 남게 된 시점에서 영조는 그 강경파를 견제하기 위해 아군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외척을 끌어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탕평은 증오 속에 실패하고 세도정치의 막이 올라갑니다.

 

 본래 왕이 외척을 정치에 쓰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부패하기 쉽지요. 그래서 유학에선 외척 기용을 금기시합니다. 그런데 영조는 노론을 견제하려다 보니 외척을 쓰게 되었고, 당대엔 이게 큰 문제까진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쁘게 작용하여 결국 조선이 망조로 흐르게 됩니다.

 

 이 문제에서 영조를 마냥 탓하기도 어렵습니다. 영조는 실제 평생 암살을 걱정할 정도였거든요. 취임하자마자 내전 겪고 아무리 탕평하려 해도 말을 듣긴 커녕 잦은 반역, 남은 세력도 못 믿으니 영조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삶이 원인일까요. 영조는 나이가 들수록 나쁜 성격을 드러냅니다. 편견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그의 단점이 정말 극단적으로 나쁜 방향으로 표출되는 유명한 사건이 생기니,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게 그것입니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임금이 세자를 그런 식으로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 건, 영조가 좋은 임금이고 아니고를 떠나 더 이상 조선이 유학의 나라로 남긴 어렵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때 이미 나라는 다 기운 것이지요.

 

 그러나 영조의 뒤를 이었던 정조가 워낙 밸런스 브레이커 또는 치터라 조선의 중흥기는 좀 더 이어집니다. 영조의 비정한 사도세자 살해가 결과적으로 조선 백성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결과가 되긴 했는데, 문제는 그게 끝물이었다는 거지요.

 

 정조는 임금으로 갖춰야 할 거의 모든 자질을 다 갖춘 왕이었습니다. 다만 정조가 조선에서 마지막 좋은 임금이었던 건... 굳이 보면 정조가 넘칠 정도로 천재였던 게 문제입니다. 이미 붕당정치는 깨지고 유학도 기운 상황에서 밸런스 브레이커 정조가 이끌던 게 당시의 조선인데, 그러다보니 그 국가 시스템은 정조만이 돌릴 수 있는 쪽으로 변화했습니다. 게다가 정조의 업무량은 너무 가혹해서 건강을 빨리 잃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한 스포츠 팀에 초월적인 실력을 가진 슈퍼스타가 있어 좋은 성적을 한동안 거두지만, 혹사로 인해 선수생명이 짧아지고 그가 은퇴한 후에 팀이 몰락하는 사례랄까요. 실제 드문 경우가 아니지요.

정조의 장점은 정말 많지만 특별했던 건 관대함입니다. 정조는 신하가 자신에게 막말을 해도 더 심한 막말로 응수했지 기분 나쁘다고 큰 벌을 내리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신하를 구박은 해도, 말을 들으면 그만큼 보상을 해줬습니다. 전반적인 형벌도 완화시켰고, 격쟁도 잦았습니다. 격쟁은 임금에게 백성이 직접 민원을 넣는 건데, 정조가 한 번 행차하면 백성들이 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다가와 이런저런 하소연을 했고, 그게 대략 한번 행차시마다 50회 정도 되었다 합니다.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있었으나, 조선 시대엔 평민 또는 천민은 글을 잘 몰랐으니까요. 천민도 왕에게 직접 다가가서 억울함을 고할 수 있었던 나라였던 게 조선입니다. 격쟁이 들어가면 보통 사흘이면 답이 돌아왔다고 하니, 소통하는 척/민주적인 척/온갖 착한 척 하다가 청와대에 13만 명이나 의견을 모아 넣었더니 코웃음치고 놀리듯 20만 명 모아 오라는 현 대통령 및 정부와는 달라도 정말 다르지요.

 

 세도정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정조는 남인까지 다시 활용하는 등 이 세력 저 세력을 마음껏 주무르면서 아예 정치 구도 자체를 재편집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정조가 아무리 잘났어도 각 붕당들끼리 증오를 내려놓고 평화로운 경쟁을 하게 만들 수는 없었지만요. 그런데 갑자기 정조의 건강이 악화됩니다.

 

 결국 정조는 50살도 되기 전에 사망. 정조의 뒤를 이은 세자 순조는 즉위할 때 나이가 겨우 11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그 유명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조격이 되긴 하는데... 사실 김조순을 그 위치에 올려준 건 세자를 보호하려는 정조였고, 막상 김조순은 인품도 능력도 괜찮은 편이라 김조순이 살아있을 땐 세도정치 문제가 별로 없었습니다.

 

 순조대의 문제는 좀 다른 것이었는데, 순조는 일단 즉위 시 너무 어려서 1804년까진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81112, 순조의 의욕을 꺾는 사건이 일어나니... 다름 아닌 홍경래의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은 굳이 보자면 조선 시대 내내 계속된 평안도 차별로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평안도는 현재 북쪽 조선로동당 강점지 중 평양을 포함한 평안북도, 평안남도, 자강도를 합친 넓은 지역입니다. 평안도는 조선 입장에선 변경이고, 늦게 영토에 편입된 지역도 많은데, 신세 비슷한 함경도는 태조 이성계의 본거지였던 반면 평안도는 기댈 데도 없다보니 중앙 사대부 사회에 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홍경래의 난이 있을 무렵에 이미 평안도는 남쪽 지역과는 달리 상업과 광업이 발달하고, 흉년에 삼남지방에서 몰려온 유민들이 많은 혼란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연줄이 없어 중앙 정부의 부패한 면엔 가장 쉽게 피해를 보다보니, 반란이 일어나기 쉬운 상태였습니다.

 

 난은 규모가 꽤 있었음에도 반년 만에 제압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순조가 마음고생이 많았던 건지, 원래 몸이 약했던 건지. 여하튼 이후 순조는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국정에 신경을 많이 안 씁니다.

 

 그럼에도 순조 때 당장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순조는 업무를 적게 한 거지 딱히 나쁜 왕은 아니었고, 김조순도 살아있을 땐 딱히 세도정치 문제가 두드러지진 않았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었지요. 선대인 정조가 이미 왕이 영웅적 활약을 해야 돌아가는 나라를 만들어 놨었는데, 순조는 방목 스타일이었고 세도가들이 이 순조 대에 힘을 잔뜩 키웁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세계 전반은 아주 바쁘고 혼란스럽게 돌아가지요. 빨리 개혁해도 모자랄 나라가 안일하게 세월을 보낸 셈입니다.

 

 그나마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매우 총명해서 순조가 많은 기대를 했다고 하는데, 문젠 순조가 건강이 악화되어 효명세자가 집무본 지 4년 만에 효명세자가 겨우 22살 나이로 요절합니다. 사인은 분명하지 않으며 과로사 추정. 그리고 순조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효명세자 사망 전 해엔 차녀 영온옹주가 사망. 그리고 2년 후 명온과 복온, 두 공주가 사망.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순조 본인도 건강악화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순조 사망 시점에 살아있던 유일한 자녀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였는데 (임금의 적녀만 공주고, 적녀가 아닌 딸은 옹주입니다. 덕온공주 이후 왕의 적녀는 태어나더라도 공주에 봉해지기 전에 죽었습니다.) 이 덕온공주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23세에 급체로 사망(...) 합니다. 현대 기준에서 보면 급체는 소화불량일 뿐이지만, 당시 기준에선 온갖 질병들이 급체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위천공이나 급성 췌장염, 심근경색 같은 것들 말이지요.

 

 이렇게 순조-효명세자 및 공주, 옹주 일가가 줄초상이 났고, 이에 조선의 미래도 한없이 어두워집니다. 순조가 명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하들에 대해 위엄은 있었고, 여러 문제는 있었으나 당시만 해도 세도정치가 아예 막장은 아니었습니다. 김조순도 정조의 명은 지켰다 볼 수 있지요. 그러나 효명세자의 아들이었던 헌종이 1834, 8살 나이로 즉위하면서 조선의 앞날에도 종이 칩니다.

 

 왕 일가는 씨가 말라. 붕당 균형은 깨진지 오래. 세도정치는 김조순 및 명온과 복온, 두 공주가 죽은 후 (셋 모두 1832년 사망.)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한 상태였고, 이미 이 때 조선엔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의료봉사 등을 하며 개항을 요구하던 시기였으나, 조선 조정은 하필 효명세자가 죽은 시점이라 전혀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세도정치가 커지게 된 덴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위에서부터 쭉 이야기했듯 숙종의 환국 이후 붕당끼리의 어느 정도 건전한 경쟁은 끝났고, 그 혈투는 왕이 찍어 누르고 다스려야 하는 상황이 이어져 왔습니다. 유능했던 영조, 밸런스 브레이커 정조 대까진 괜찮았지요. 그런데 몸이 약한 순조의 치세가 어찌 골골대면서도 35년간 이어지면서, 정조가 순조를 돌보려 세웠던 김조순이 살아있는 동안엔 극단화되진 않았습니다만 그 동안 안동 김씨는 온갖 요직을 장악하긴 했고, 또 한편으로 숙종 때부터 남인이 몰락하면서 사림이 중앙-지방으로 나뉘어져 수도권 명문사족만 관직을 얻을 수 있는 부정부패가 심해진 상황이었고, 지방 사족은 필사적으로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상황이 되어, 이미 조선 조정은 인재를 충분히 수급하고 각 지역의 균형을 맞추기 힘든 입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숙청으로 인재를 워낙 많이 잃기도 했고요.

 

 전편에서부터 이야기했지만, 조선은 그 건국 철학부터 민주정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할 수가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권과 왕권의 다툼에서 계속 왕권이 승리했고, 이는 지도자가 유능할 땐 별 문제가 없으나, 그렇지 않으면 무너지기 쉬운’, 민주적이지 않고 닫힌 정치체제의 전형적 단점으로 표면화되어 버립니다.

 

 세도정치가 정말 답이 없었던 걸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위에 이야기했듯 이미 조선은 정당하게 교육과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막힌 사회였는데,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등의 세도가가 장악하면서, 세도가에 줄을 대야 관직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첫 번째 문제였습니다. 사실 현대 한국도 모 정치세력이 교육에 손댈 때마다 벌어지는 사다리 걷어차기문제가 있는데, 시민들이 위선에 속지 말고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세도가에 줄을 대고 관직을 얻은 사람들은 줄 대느라 소모한 재산을 만회하기 위해 백성을 쥐어짰고, 이에 부정부패가 일상화됩니다. 너무 심한 수탈에 백성들은 떠돌거나 도적이 되기 시작했고, 출세길이 막힌 양반들까지 점차 견딜 수 없어져 결국 민란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세도가문들은 조선을 잘 다스리고 개혁하는 것엔 정말 참담할 만큼 관심이 없었는데, 권력은 가졌으되 책임의식은 없었던 겁니다.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정치인은 책임지는 자리라는 건데, 책임을 회피하는 정치인이나 책임의식을 도외시하는 맹목적 지지자들을 항상 주의하고 견제, 낙선시켜야 합니다.

 

 헌종 이야기로 돌아가 마무리하자면, 헌종은 8살에 즉위했기에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는데, 순원왕후는 김조순의 딸로 안동김씨입니다. 순원왕후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치적 능력은 좋지 않았고 친정에 의지했는데, 그 바람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심각한 지경이 됩니다. 왕실 기강 살린다고 나라살림도 어려운데 지출도 많이 해 민심까지 잃었고, 이후 시간이 지나 헌종이 친정을 하면서 세도정치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는데 그 바람에 할머니인 순원왕후와 갈등이 심해집니다. 그러다가 헌종은 23세로 젊은 나이에 급사해 버리지요. 헌종에겐 자식이 없었습니다. 옹주가 하나 있었지만 태어난 날 죽었지요. 헌종의 죽음에도 여러 설은 있습니다만, 확실한 건 없습니다.

 

 이에 효종 때부터 이어진 조선 왕가의 직계 혈통은 단절됩니다. 실질적으로 이 때 조선왕가는 기운 것입니다. 무슨 유전병이라도 발현된 건지, 순조의 자녀들과 손자들 모두 25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으니까요.

 

 왕이 제어해야만 하는 나라가 왕의 혈맥이 끊겼고, 관직은 탐욕스러울 뿐 책임감도 현명함도 비전도 없는 세도가들이 장악했으며, 시대는 급변하는 난세였으니 조선의 국운은 끝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이 망해가는 와중에 정말 주목할 만한 것이 하나 있으니, 딱히 나쁜 왕은 없었다는 겁니다. 거의 다들 그 나름대로 열심이었고 덕치하려 애썼고 딱히 부귀영화를 탐하거나 폭군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기우는 걸 막지 못했지요. 이는 조선 왕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단 입헌군주화가 되지 않음으로 왕정이 가진 태생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파벌들끼리 서로 싸우고 증오하는 걸 왕조차 어쩌지 못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걸 명심해야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역사를 중시한다는 사람들이 실제 역사를 모르고, 역사를 경시하며,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걸 항상 봅니다. 역사적 사건들을 외우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미 드러났던 문제가 반복되지 않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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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외척 세도 가문이 권력을 주도했던 정치형태로

어린 왕의 즉위와 그에 따른 왕권의 약화를 원인으로 본다.

 

조선의 제 22대 임금인 정조 때 권세를 휘둘렀던 최초로 홍국영으로부터 시작되어 순조 즉위 후 김조순

이래 안동 김씨,

1827년 세자가 정치를 대리한 이후 풍양 조씨,

철종 때는 안동 김씨 등 임금의 외척이 되는 집안이 세도 정치를 행했다.

1973년 고종의 왕위 계승을 계기로 흥선 대원군 정권이 등장하여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막을 내렸다.

세도정치의 본래 의미는 '세상 가운데의 도리'인 세도(世道)를 실현하는 정치로, 그러한 정치가 되기 위해서 세도의 책임자가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순조·헌종·철종 대에 실제로 전개되었던 정치형태를 칭할 때는 세도의 책임을 맡은 자가 세도를 빙자하여 세력을 휘둘렀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세도정치(勢道政治)라고 불렀다. 세도정치의 효시는 정조초에 정조의 신임으로 세도의 책임을 부여받은 홍국영(洪國榮)의 독단적인 정치운영이다.

순조 이후에는 안동김씨·풍양조씨 등 노론 출신의 외척 가문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여기에 남양홍씨·대구서씨·연안이씨·나주박씨 등 노론의 몇몇 유력가문이 참여하여 권력을 독점하는 등 본격적인 세도정치가 행해졌다. 이들 가문들은 당쟁을 통해 다른 당파, 다른 가문들을 정치적으로 도태시키면서 주도권을 확립했는데, 이는 곧 당쟁의 주요쟁점이었던 명분과 의리 다툼에서 승리했음을 의미했다. 오랜 당쟁의 과정에서 살아 남은 세도가문들은 그들 스스로가 내세운 명분과 의리를 세상 가운데의 올바른 도리로 정립하고 스스로를 그러한 의리의 실현자 곧 세도의 책임자로서 자임할 수 있었다. 이들은 관료적 기반, 산림으로서의 명망, 왕실의 외척으로서의 정치적 영향력 등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했다. 대표적인 예가 안동김씨 김조순(金祖淳) 집안이다. 김조순은 순조비의 아버지로서 순조가 친정하면서부터 정치권을 장악했다. 그는 노론의 중심인물들이었던 김수항·김창집 등 선대가 쌓아놓은 정치적 기반을 이어받았으며, 그 자신은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서 정조에게 신임을 받았다. 김조순의 뒤를 이어, 김좌근(金左根)·김병기(金炳冀) 등이 풍양조씨 조만영(趙萬永) 집안과 경쟁하면서 세도가문의 지위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비변사를 장악하여 고위 관직을 계속 독점했으며, 군영을 장악하여 군사력을 그들의 통제 안에 두었다. 국왕은 정치를 거의 이들에게 의존하고 독자적인 정치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세도정치가 행해졌던 19세기는 봉건사회가 급격히 해체되는 변동기로서 일반백성은 물론이고 양반들마저도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갔다. 따라서 농민들은 점차 격화되어가는 사회모순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1862년(철종 13)에는 삼남지방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이에 세도정권은 사회모순의 해결 없이는 정권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농민들의 요구사항의 하나였던 삼정(三政) 문제의 해결을 약속하고 사태를 수습했으나 그것마저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농민항쟁으로 조성된 정치적 위기 상황 속에서 1863년 고종의 왕위계승을 계기로 대원군 정권이 등장함에 따라 세도정치는 막을 내렸다. 대원군 정권이나 민씨 정권의 정치형태를 세도정치에 포함시키기도 하나 정치제도, 정치세력의 존재 형태와 지향, 정치상황 등이 이전과는 크게 달라져 세도정치와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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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조순                2019.08.05.월요일,맑음

김조순;조선 후기 문신이며 정치가,노론이나 시파

생졸; 1765년-1832년)은 조선후기의 문신,정치가이다.

본관; 안동

묘소; '풍고 김조순 묘역은 경기도 기념물 제207호로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에 있다.

호; 풍고

조부; 영의정 김창집

부; 서흥부사 김이중


 

김조순은 노론이었으나  시파에 속하였으며,

정조의 신임이 바탕이 되어 딸인 순원왕후가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면서

어린 순조를 도와 국구로서 30년간 순조를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여,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순조 즉위 후 영돈녕 부사 영안부원군에 봉해졌고

정순왕후 사후 노론 벽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풍고집이 있고 소설인 오대검협전을 쓰기도 했다.

 

영조의 즉위를 추진하다가 사형 당한 노론 4대신 김창집의 현손으로 태어났다.

178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규장각 대교를 지냈다.

그는 노론계열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7488년 규장각의 대교를 지낼 당시, 시파와 벽파의 당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정조에게 주장하였다.

1792년에는 동지(冬至)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규장각 직각과 이조참의, 승지, 총융사, 양관(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로부터 어린 순조의 보필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은 규장각의 각신들 중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정조는 사망 직전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였으나 결혼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함으로써 김조순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정조의 후계 작업이 미완성인 채 김조순의 지위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대와대비인 정순왕후는 새로 즉위한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정순왕후에 의해 병조판서에 임명되자,(1800년) 두번이나 사직하였으나, 정순왕후를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게다가, 정순왕후는 곧 그를

비변사 제조도 겸임하게 하였다(믕력8월4일).

정순왕후로서는 쉽사리 김조순을 내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면상의 관직 제수와 별개로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의 정권은 전방위적으로 김조순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

즉, 노론 벽파의 사헌부 장령  이안묵이 시파의 서유린 형제를 탄핵했다.(1800년))

또한,정순왕후가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림으로써(1801년) 신유박해가 개시되었는데,

실제의 공격대상은 노론 시파,소론,남인에다 왕실인사까지 광범위했다.

이때, 김조순의 친족인 천주교 신자 김건순이 체포(4월28일) 및 처형(6월1일)되었고, 김조순과 친분관계에 있던 김려(金鑢)도 이때 체포되었다.

1801년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환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딸(순원왕후)이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자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정치인으로서 그는 결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1802년에 다시금 훈련대장과 호위대장에 제수되었으며 역시 같은 해인 1802년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도 제수되었으나 두 차례의 사직 상소를 올려 윤허(允許)되었고 같은 해에 판의금 부사에 제수되었다.


마침내, 순조의 15세가 되는 시점을 앞두던 시절에 정순왕후가 갑작스레 수렴청정 체제를 거두고(1804년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자, 그는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게 되었다. 섭정에 오른 직후 노론 벽파의 지도자들을 대부분 정조 임금의 유지를 저버린 역적으로 단죄한 후 1804년 영의정이었던 이병모에게 1805년까지 1년간 섭정을 위임케 하고 이후 1805년에는 16세였던 사위 순조 임금에게 친정 체제를 부여케 하였다.

정순왕후가 승하(1805년2월11일)한 뒤, 정순왕후의 6촌으로서 함께 권력을 쥐고 있던 김고나주가 귀양길에 병사(1806년)하는 등 정순왕후의 친정 가문 경주 김씨의 벽파가 대규모로 숙청되었다. 그리고, 김조순 자신과는 10촌 친척이지만, 벽파인 김달순도 사사되었다.(1806년)

또한, 노론 벽파의 당수였던김종수 및 심환지(각각 이미 고인이었다)도 역시 선왕 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들로 지목하여 추탈시켰다. 여기에 남인 계열도 숙청되었다.

그러한 빈 자리에는 새로 과거로 뽑아들인 노론 청명당 및 노론 시파 계열 인사들과 일부 소론,구장각에서 눈여겨봤던 각신들을 대거 발탁하여 조정의 요직에 배치했다.

김이익과 김이도) 등의 안동 김씨 시파도 등용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정순왕후 집권 이후 계속된 천주교 박해는 다소 완화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숙청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1811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되었으나 세 차례나 사직상소를 올려 결국 윤허되었다.

1827년에는 관서지방을 여행하다가 서하(西下) 지방의 열악한 민간 실정을 순조에게 보고하여 경외(京外)에 위치한 각 아문(衙門)들의 절미(折米)와 형정(刑政), 인사, 대동미 등의 폐단을 정리하게 하였다.

아래는 김조순이 환곡

과 대동미의 폐단을 순조에게 보고한 내용 중 일부이다.

신이 이번 관서에 내려가 이미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으니, 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도의 구환(舊還)이 경외(京外) 각 아문의 절미(折米)를 아울러 계산하면 6만 9천 3백여 석이 되는데, 그중 3만 9천여 석은 유망(流亡)한 호구에서 받아야 할 것이어서 지적해 받을 곳이 없으며, 2만 9천여 석은 현재 있는 호구에서 받을 것인데, 이른바 현재 남아 있는 호구라는 것은 바로 신미년(辛未年)과 임신년(壬申年)의 난리 후에 미처 도망하지 못한 고아와 과부를 억지로 현재 있는 호구로 기록한 자들이니, 원호(元戶)와 비교할 수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법대로 징수해 받아들인다면 인족(隣族) 역시 조만간 화가 옮겨 올 것을 알기 때문에 의구(疑懼)하여 흩어질 마음을 두고 있으며, 심지어 풍년이라는 말을 원하지 않기까지 합니다. 이제 아무 이로움이 없는 빈 장부(帳簿)를 가지고서 포흠낸 환곡을 징수할 것으로 여겨 고할 곳 없는 자들로 하여금 더욱 독촉을 받게 하여 안도(安堵)했던 자들이 도리어 도망해 흩어지게 된다면 이미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가 아니며, 또 안정시키는 방도에 어긋납니다. 이는 묘당이나 방백이 경솔하게 거론할 것이 아니니, 신의 뜻으로는 주상께서 탕감하라고 특명하시어 한 도(道)의 잔민(殘民)과 실호(實戶)가 모두 조가(朝家)에서 다친 사람을 돌보아 주듯이 하는 덕을 입을 수 있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1828년, 김조순의 아내인 청양부부인 심씨가 사망하자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를 보내 직접 조문하게 하였으나 김조순이 “처음에는 놀라고 송구스러워하다가 이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나 이는 국조(國朝) 수백 년 내에는 아직까지 듣고 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라며 사양하여 조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82년,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두 달 뒤인 1882년에 사망하였다.

사후 증직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춘추관성균관관상감사에 증직되었다.

그 뒤에도 경기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과 이천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생전에는 문장력이 뛰어나 초계 문신을 역임하였다.

그외에도 죽화(竹畵)를 잘 그렸던 것으로 전해지며 문집으로는 16권 8책으로 구성된 '풍고집' 있다.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器局)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조의 깊이 알아줌을 받았다.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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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辛酉迫害)                      2019.08.05.월요일,맑음

신유 사옥(辛酉邪獄) ,신유교난이라고도 한다. 제1차 천주교 탄압

정조는 천주교와 남인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으나

1800년 순조 즉위 후 벽파가 정권을 잡자 원론적 입장에서 천주교와 남인을 탄압했다.
1801년 정순왕후는 사학을 엄금하고 뉘우치지 않는 자에게는 반역죄를 적용하였다.

이유는 천주교가 혈연과 군신의 관계를 부정하여 인륜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을 오랑캐나 금수의 상태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천주교에 관여했던 남인 인사와 교회를 이끌고 있던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많은 인사가 옥사하거나 처형당했다.신자 약 100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같은 해

1801년12월에 '척사윤음'이 공표되면서 일단 마무리되었으나 이후에도 천주교 박해는 계속되었다.


조선 후기에 집권자들은 성리학을 한층 교조적으로 신봉하면서, 그 사회 질서에 위협이 되는 이념을 배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하나의 학문에서 신앙으로, 소수의 지식인들로부터 민중 사이로 널리 퍼졌다.

특히 1794년(정조 18) 중국 베이징 교구에서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한 이후, 약 4,000명이던 신자가 수년 만에 1만 명으로 증가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당시 남인들은 정치적·이념적으로 노론 집권세력과 지향점이 달라 갈등이 깊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천주교를 탐구하고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많은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한편 영조 말년 이후 정계에서는 벽파와 시파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그 중심 인물이 모두 노론 계열이었고,쟁점도 주로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 및 그에 대해 정조가 취해야 할 입장에 대한 것이었지만, 시파는 벽파와 달리 정조의 정책을 따라 천주교와 남인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대립은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여 김구주의 누이인 영조 계비 가 수렴청정하면서 벽파가 일시에 정권을 잡았다.

벽파 정권은 먼저 시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으며,

이단의 배격이라는 원론적 입장에서 천주교와 남인에 대해 탄압을 가했다.

1801년 1월 정순왕후는 사학을 엄금하고 뉘우치지 않는 자에게는 반역죄를 적용하며,

전국적으로 오가작통법을 철저하게 실시해 신자의 씨를 남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천주교가 혈연과 군신의 관계를 부정하여 인륜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을 오랑캐나 금수의 상태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천주교에 관여했던 남인 인사와 당시 교회를 이끌고 있던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그해 2월에 정약종·최창현·최필공·홍교만·홍낙민·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권철신·이가환은 옥사했으며,이존창은 충청도 공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유배당했다.

여주와 양근 감옥에 갇혔던 이중배·최필제 등의 경기 지방 천주교도들도 다수 처형당했으며,

황주까지 피신했던 주문모 신부도 자수하여 효수되었다.

가을에는 황사영이 탄압의 전말을 보고하고 중국이나 서양의 힘을 동원하여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베이징의 교회에 보내려 한 일이 발각되어 이에 관계된 인물들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신자 약 100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같은 해 12월에 '척사윤음'이 공표되면서 일단

마무리되었으나 이후에도 천주교 박해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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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환지                25019.08.05.월요일,맑음

심환지;

생졸; 1730년(영조6년)-1802년(순조2년)

본관; 청송

증조부; 심속

조부; 교리 심태현

부;  심진

모; 부사 김이복의 딸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주로 삼사의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준엄하고 격렬한 언론을 펴서, 의리·공의를 강조하여 몇 차례의 유배 생활을 겪었다.

1793년(정조 17) 이후 이조참판·규장각제학을 거쳐서 이조·병조·형조의 판서에 임명되었다.

김종수·윤시동과 정치적 동지로서 신임의리의 고수를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위배되는 남인 계열의 채제공·이가환·이승훈의 징토에 앞장서서 이단 배척을 역률로 할 것을 주장했고, 소론계의 서명선도 공격했으므로 이른바 벽파 선봉으로 인정되었다.

윤시동이 죽은 뒤 1798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일파의 영수가 되었다.

다음 해에는 성행하던 금광의 채굴을 금지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800년(순조 즉위) 순조가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자, 영의정에 올랐다. 원상(왕이 병이 나서 정무를 보기 어렵거나 어린 왕이 즉위할 때 왕을 보좌하던 원로대신)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세도를 진정시킬 것을 자임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동벌이(黨同伐異: 당적이 같으면 동지로 받들고 다르면 물리침)에 주력하여 반대파 인물들을 크게 살육했으니, 이 사건이 곧 신유사옥이다.

심환지는 정조가 탕평책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사용했던 장용영을 혁파하였다.

그리고 김구주와의 절친했던 관계를 생각하여 김관주·정일환을 등용하고, 김관주·정일환의 사적인 원한이 정국에 개제되게 했다. 또, 권유를 대사헌으로 임명하여, 정조의 처지를 지지하던 김조순에 대한 공격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죽은 뒤에 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육한 죄와, 순원왕후의 대혼을 방해했다는 비판을 받아 관작이 삭탈되었다. 철저한 노론계 당인으로서 치적은 볼만한 것이 없으나, 다만 죽을 때까지 검소한 생활을 하여 칭찬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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