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2019.08.03.토요일,맑음
상계군 이담;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정조의 이복 조카 이자 철종의 백부가 된다.
초명; 이준(李濬) 이며 뒤에 담(湛)으로 개명하였다
생졸; 1769년-1786년
본관; 전주 이씨
묘소; 실전되어 위치를 알수 없다.
가계도;
조부: 추존 사도세자(생졸;1735 ~ 1762)
조모: 숙빈 임씨(생졸; ? ~ 1773)
양부: 정조
양모: 원빈홍씨
생부: 은언군(생졸; 1754-1801)
생모: 상산군부인 송씨(생졸; 1753 10 15-1801.03.17)-천주교 세례명; 마리아
장남; 상계군 이담;(생졸;1769-1786)
부인 : 군부인 신씨(생졸;1769-1801), 평산인 신오(申王+奧)의 딸.
양자 : 익평군 이희(생졸; 1824년-1863년), 생부는 그의 서제 풍계군 이당
첩 : 이름 미상, 궁인 출신
아들 : 이름 미상, 요절
동생: 이창순(생졸년 미상)
동생: 이창덕(생졸년 미상)
동생: 이 당(생졸;1783-1826)
여동생 : 이씨(생졸; ? -1872년),참봉 한각신에게 출가.
생서모: 전산군부인 이씨(생졸;1764-1819), 전주인 이덕희의 딸.
이복 동생 : 전계대원군(생졸;1785-1841)
생서모: 이름 미상
이복동생: 이성덕(생졸;1775-1817.11.27)
이복동생: 이철득(생졸;1780-?)
외조부 : 송낙휴(생졸년미상)
외조모 : 능성 구씨(생졸년 미상)
외외증조부 : 구선원,구선복의 사촌
상계군 이담은 영조의 증손자며 사도세자의 손자이자 생부 은언군 이인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송낙휴의 딸로 상산군부인 진천 송씨다.
증조 할아버지인 영조가 살아 생전인 1769년(영조45년)에 한성에서 상계군 이담이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준(濬)이다.
아래로 친동생으로 이창순,이창덕,이당,한각신에게 시집간 여동생 1명이 태어났다.
이 중 풍계군 이당은 아버지 은언군의 다른 첩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풍계군 이당은 아버지 은언군의 이복 동생인 경빈 박씨 소생인 은전군 이찬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밖에 1821년에 사망한 이름 미상의 서모에게서 이성득,이철득이 태어났고,
서모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에게서 요절한 이복 동생과 철종의 생부인 이복 동생 전계 대원군이 태어났다.
상계군 이담의 부인은 통덕량을 지낸 신오(申王+奧)의 딸로 군부인 평산 신씨다.
상계군 이담에 관한 유년기와 소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상계군 이담은 생모가 상산군부인 송씨가 아니라 생부인 은언군과 어느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상계군 역시 궁녀에게서 자손을 보았으나,
철종 때와 고종 때 승정원 일기와 일성록에서 은언군의 가족과 상계군 관련 기록들을 대량으로 세초해
버려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종친부에 의해 왕세자의 손자,서손들에게 봉작되는 군작위와 도정의 작위가 내려졌어야 했으나,
영조 때 봉작이 내려졌다는 기록은 없다.
1779년(정조3년),정조의 계비며 홍국영의 누이인 원빈 홍씨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홍국영,송덕상 등에 의해 이복 백부 정조의 양자로 내정되었다.
당초 은언군은 홍국영의 제의를 사양했지만,홍국영의 거듭된 부탁으로 아들 상계군 이담을 일단 정조와
후궁 원빈 홍씨의 양자로 입양,출계되었다.
홍국영이 왜 은언군의 아들을 선택했는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있다.
원빈 홍씨의 상에 세자의 중손의 예에 따라 종2품 소의대부에 임명되고,
같은 날 왕족으로서의 처음 봉작명인 완풍군에 봉작되었다.
완풍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과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풍산에서 한글자씩 따온 것이라 한다.
많은 기록들이 이 완풍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홍국영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가 다른 후궁에게서 자녀를 생산할 수 있음을 들어 일각에서는 반대하였다.
1780년 다시 상계군으로 개봉되었고 이름은 이준(李濬)에서 이담(李湛)으로 개명되었다.
이것이 결국 화근이 되어 역모로 몰리게 되었다.
원빈의 오빠 홍국영에 의하여 원빈의 양자가 되어 완풍군에 봉하여졌다.
곧이어 상계군으로 개봉되면서 왕의 후계자로 추대 되려 하였으나,
홍국영의 마음에 들지 않아 오히려 모반죄로 몰려 유폐되고,
이 결과 1786년 음독 자살하고 말았다.
한때 왕의 잠재적 후계자로 지명되어 가동궁(假) 으로도 불렸다.
1786년(정조10년)11월,신오의 딸 군부인 신씨와 혼례를 치른 뒤 의문의 음독 사망하는데,
자살설 외에도 아버지 은언군에 의한 독살설과 홍국영 일파에 의한 독살설이다.
1849년(철종 즉위년), 이복 백부인 상계군 이담은 복권되고
1858년(철종9년),현록대부에 추증되었다.
당일 정조에 의해 원빈의 빈전 수빈관에 임명되고 수묘관에 내정되었다.
그는 원빈홍씨 상중에 빈전 수빈관과 대전관으로 참여하였고, 탈상 후 인명원 수원관에 임명되었다.
홍국영은 그를 자신의 생질이라 칭하였지만,상계군은 홍국영과 마음이 맞지 않아 갈등하였다.
당시 정조는 20대의 나이였고 완풍군을 양자로 들인 일과 가동궁으로 부르게 한 일로 결국 역적으로 지목
되어 1779년 홍국영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흑두봉조하가 되었다.
이후 김치인은 홍국영과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송시열의 후손인 송덕상의 처벌도 주장하면서 노론 대신들은 완풍군을 반역자로 공격하였으나 정조는 듣지 않았다.
1780년(정조4),의정부 우이정 이휘지 등의 청으로 인조반정 공신 완풍군에 봉군된 이서와 작호가 중복된다는 이유로, 작호는 완풍군에서 상계군으로 고쳤고,이름도 준에서 담으로 개명하였다.
1784년(정조 8),정조는 친히 상계군의 혼처를 찾았다.
그러나 신하들은 회피하며, 상계군의 혼처를 찾는 영조의 명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
사대부 안광집의 딸이 결정되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통덕랑 신오의 딸이 낙점되었다.
1784년 사옹원부제조가 되고 ,특명으로 숭헌대부로 가자되고,다시 가덕대부로 승작되었다.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가 연달아 죽은 해에,
그는 혼례를 올린 직후 독약을 마시고 음독사했는데, 자살설과 홍국영의 독살설, 생부 은언군 이인이 독살했다는 설 등이 있다.
외조부 송낙휴에 의하면 사망 직전에도 그는 건강했는데 갑자기 사망했다 한다.
최종 관직은 가덕대부 상계군이었다.
한편 그의 혼례를 주관하던 김우진은 상계군 사후, 상계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그밖에 영조,정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구선복 등도 평소 원한을 샀다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다.
예조판서 서유린은 상계군이 죽었다는 보고를 꺼렸으나,
결국 상계군의 사망 소식이 궁궐에 알려지게 되었다.
장례식은 정조의 특명으로 친왕손의 예대로 예장하였다.
한편 그의 외할아버지 참봉 송낙휴는 상복을 입고 상계군이 파양된 것에 대해 원망,앙심을 품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그리고 사망 직전 "심상철이 살면 나도 살고 김정승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라는 말을 한 뒤 며칠 후 급사했다는 것이었다.
송낙휴는 또 "구이겸이 황해 병사로 있을 때 후히 선물을 바치고 편지에 소인이라고 지칭한 것을 일찍이
목격하였습니다.
담은 평소에 병이 없었는데, 김 정승에 대해 말한 후 며칠 있다가 갑자기 죽었으니, 의심스럽습니다."하고
고변했다.
영의정을 지낸 김상철이었다.
송낙휴는 또 상계군을 추대하는데 자신의 처당숙인 무관 구선복이 가담했다고 고변,
구선복과 그의 아들 황해도 병마절도 구이겸, 송낙휴의 처남이며 6촌동생 구이겸에게 자기 아들을 양자로 보냈던 충청도병마절도사 구명겸 등이 체포되어 추국당한 뒤 처형되었다.
이어 노론,남인,소론 내에서 모두 홍국영에 대한 노륙을 청하는 상소와 함께 그에게도 죄를 줄 것을 청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이어 12월1일 정순왕후가 언문교서를 직접 발표하여 상계군과 홍국영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처분을 요구하는 언문 하교문을 승정원에 내렸다.
정조 3년 당시 상계군이 홍국영 등에 의해 완풍군에 봉작된 일과 가동궁
또는 왕위 후계자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일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그의 작위는 즉시 폐작되어 그때부터 "역적 담"으로 불리게 된다.
정순왕후가 역적의 가족들도 처분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은언군 일가는 강화도로 유배된다.
삼사는 합계하여 상계군의 일가를 공격했고, 정조는 계속 거부하였으나 삼사의 합계에 밀려 은언군 인 일가의의 유배를 승인하였다.
이후 정조는 직접 상계군 사건에 대한 언급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상계군에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 말도록 신하들에게 계속 부탁하였다.
시신은 한성부 북부 연희방 연희궁 근처(현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2호선 신촌역 2, 3번 출구와
연세대학교 정문 주변)에 매장되었으며,
후에 사사된 부인 군부인 신씨도 합장되었다.
철종 즉위 후 1854년(철종 5)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으나, 후일 그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생모 상산군부인 진천 송씨와 아내 평산군부인 신씨는 양제궁 나인 서경의의 외할머니 조씨 노인의 권고로
주문모 신부의 입국 전 천주교에 입교했으며,주문모 입국 후 세례를 받고 모두 마리아라는 교명을 받았다. 이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활동 중
1801년(순조 1) ,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실이 적발되어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고,
아버지 은언군도 그해 사사령을 받고 강화도 유배소에서 사사되었다.
1894년(철종 즉위년),이복 조카인 이원범이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면서,
철종의 즉위를 주관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상계군 내외가 복작되고,
이해 가덕대부로 복작되었다. 1858년(철종 9) ,정1품 현록대부에 증작되었다.
이때 순원왕후의 명으로 과거 상계군 사건에 대한 기록이 대거 세초,각자,말소되었다.
이후 철종 때와 고종 때 상계군 일가 관련 기록 및 은언군 관련 기록이 대량으로 세초되어 유실되었다.
한때 1801년 순조 즉위년,은언군이 야밤에 함께 강화도를 탈출하려던 철득이 한때 그의 아명으로 여겨졌지만, 후일 1970년 조선왕조실록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1801년에 은언군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하려다가 체포된 다른 인물로 확인되었다.
이는 상계군의 사후 15년 뒤에 발생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