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주               작성일자; 2019.08.05.월요일,맑음

 

김귀주(金龜柱); 조선 후기의 정치가이다.

생졸; (1740년-1786년)

본관; 경주

가계도;

  증조부 : 김두광

  조부 : 김선경

    부 : 김하구

    모; 원주원씨-원명직의 딸

       처; 덕수 이씨-이춘빈의 딸

       아들; 김노충

      처; 반남 박씨-박사경의 딸

    동생; 정순왕후 김씨

    매제; 영조

 

김귀주는 영조의 척신(계비 정순왕후;김귀주의 누이)으로

영조 말기 외척당인 남당을 결성하여 홍봉한의 북당과 대립하였다.

민회비 강씨의 신원을 주청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의 5대손이며,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아들로, 정순왕후 김씨는 그의 누이이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 좌승지에 올랐으며 문과에 급제한 뒤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영조37년 사도세자가 평양에 무단 여행 갔을 때

당시 정승이던 정휘량과 홍봉한이 이를 말리지 않고 영조에게 알리지도 않는다는 밀봉 상소를 영조에게 직접 올리려 한다.

이후 강원도 관찰사,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외척당인 남당을 만들어서 당시 실권을 장악하던 북당의 홍봉한(정조의 외할아버지)과 대립하였다.

이들은 세손(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을 탄핵하는데 주력해 공홍(攻洪)파라고 불렸다.

이후 홍봉한을 정계에서 실각시키려 하였는데,

1770년 한유를 사주해 홍봉한을 탄핵 했으며

세손이 영조를 수가하지 않는 틈을 타 정후겸과 함께 숙부이던 김한기가 영조에게 홍봉한이 세손을 제거하고

대신 은언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고변을 한다.

홍봉한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청주에 부처 되었으나 영조가 이내 혜빈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철회한다.

이러한 대목은 김귀주 세력의 성장과 홍봉한 등 영조 계열의 척신들 간의 균형을 위한

영조의 탕평 정치의 연장선으로 여겨진다.

1755년,홍인환,정후겸 등이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 했다는 이른바 '명의록' 사건과 김귀주는 관련이 없으며,

1776년3월,정조가가 즉위하자 그는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7월에 홍인한, 정후겸에 대한 처분이 끝나자,

정조는 곧 김귀주를 혜경궁 홍씨의 건강 악화에 따른 대소 신료의 문안 과정에서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죄로 흑산도에 유배되는데

홍인한의 건을 언급하면서 정조 스스로 홍인한 -정후겸 -김귀주의 숙청은 정조가 가진 척신 척결의 연장선임을 밝히고 있다.

이후 김귀주는 홍상범의 역모 사건 때 정조에 의해 사사 시키라는 명이 떨어지나 홍국영 등의 반대로 취소된다.

1779년에는 홍국영에 의해 더 높은 형벌인 위리안치에 처해졌다.

1784년 문효세자(정조의 아들)의 왕세자 책봉으로 특사령이 내려져 유배지가 육지인 나주로 옮겨졌으나

결국 2년 뒤 돌연 사망하고 말았다.

 

                                       -정순와후를 배경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김귀주-

 

정조가 죽자 1801년 순조의 나이가 어려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지게 되자,

김귀주는 복권되고

김귀주는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그의 6촌형제 김관주가 예조참판이 되는 등 일족들은 다시 등용됐다.

그러나 1803년 정순왕후 김씨 수렴청정 이후 벽파가 몰락하면서 다시 삭탈 관작에처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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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 23대  순조 이야기               2019.08.05.월요일,맑음

순조; 이공,정조의 둘째 아들

생졸; 1790년(정조14년)-1834(순조34년).45세

재위기간; 1800년-1834,34년

능; 능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인릉(仁陵)

순조

  순원왕후 김씨; 김조순의 딸

     효명세자(추존왕 익종)

         신정왕후 조씨

            헌종; 24대

     여;이름불명

     명온공주--김현근

     복온공주

     덕은공주

   숙의박씨

     영은옹주


재위 기간 동안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확립으로 국정을 주도하지 못했으며,봉건 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어

대규모의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1800년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1804년부터 순조가 직접 국정을 관장했다.

친정 이후에도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백성의 생활은 '삼정의 문란'에 따라 도탄에 빠졌고,

크고 작은 농민 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재위 34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정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의 딸 수빈이다.

비(妃)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이다.

1800년(정조24)1월, 세자에 책봉 되었으며,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804년까지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의 폐위를 주장했던 동생 김귀주를 비롯한 벽파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조 때 집권 세력이었던 시파의 숙청에 주력했다.

또한 무너져가는 조선 왕조의 사회 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1801년1월, 오가작통법을 시행했으며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 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 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정약용,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천주교 탄압은 그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의 을해박해와 1827년에도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 당했다.

한편 수렴 청정기에 공노비를 없애고 서얼허통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순조는 1804년12월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가 장악했다.

김이익·김이도·김이교·김조순·김문순·김희순·김명순·김달순 등이 주요인물로,

 이들은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세도 정치로 뇌물수수 등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동 김씨 일족에 줄을 대는 것이 지름길이 되었다.

이에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양반 관료체제가 안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중간수탈의 가중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조세 체계도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의 중간 수탈이나 토호의 세금 전가는 주로 일반 농민층에 집중되어 지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경래 등이 봉건 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더불어 1811년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이 항쟁은 무력에 의해 이듬해 진압되었으나,

정부는 사회 경제적인 근본 수습책을 마련하지 않았으므로 이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안동김씨 세도 정권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순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했다.

1819년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을 삼은 것을 계기로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했으며,

1827년에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세자는 조만영을 비롯한 풍양 조씨의 세력을 끌어들여 김노.홍기섭 등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하고,

김조순을 평안도 관찰사로 내보내는 등 안동 김씨를 멀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1830년 세자가 젊은 나이로 죽으면서 안동 김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대리 청정기에 정국을 장악했던 인물들은 유배되었으며,

순조의 안동 김씨 견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뒤 안동 김씨 일문은 풍양 조씨의 협력을 얻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져 나갔다.

순조는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정적으로 변하자 성적 방황을 거듭하다 매독으로

재위 34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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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오 의리 (壬午義理)       2019.08.04.월일일,맑음

임오의리는

영조38년인 1762년에 발생한 임오화변(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사건)에 관한 의리다.

영조가 확립한 ‘영조의 임오의리’를 말하지만,

정조가 평생에 걸쳐 수정하려고 한 ‘정조의 임오의리’도 함께 고려해 보아야야 한다.

정조와 순조대에 걸쳐 대립하는 두 가지 임오의리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가 충신과 역적(忠逆)의 기준인 동시에 정국 주도 세력의 변동을 가져온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임오의리를 막연하게 모년의리(某年義理)라고도 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다. 
영조는 임오화변 직후 사도세자 처분의 정당성을,세자가 질병으로 인해 법도를 잃었고 그 결과 변란의 기미가 급박했기 때문에 세자가 반역의 죄인이 되기 전에 부득이 사사로운 인정을 끊고 종사를 위해 결단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이것이 "의리는 의리이고 애통은 애통이니,사적 애통으로 공적 의리를 가릴 수 없다."고

하는 영조의 임오의리이다.

영조의 임오의리는 처분의 근거를 질병-실성-광패-변란 사이에 모호하게 둔 채, 더 이상 신하들 차원에서 이를 언급하거나 수정하지 못하게 한 것이 특징이다.
정조 역시 영조의 임오의리를 준수하겠다고 공언하고서야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평생에 걸쳐 이를 수정하여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지위도 왕으로 높이려

하였다.

정조의 임오의리는 사도세자가 미덕을 지녔고 대리청정 때에는 저군으로서 문(文)과 무(武)에 걸쳐 공업을 수립하였으나,부자간의 성격과 견해 차이, 그리고 역적들의 이간책에서 기인한 병 때문에 사망하였으므로 왕으로 추숭될 자격을 두루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영조의 임오의리를 수정하기 위해,

정조는 영조가 자신의 처분을 후회하며 남긴 '금등(金縢' 문서까지 제시하는 등 일련의 공론 변경 과정을

거쳤다.
정조가 급작스럽게 승하함에 따라 정조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도리어 순조대 초반 급격한 정국 변동을 거치면서 세도정치가 자리 잡게 되자,

부담스러운 의리 변경보다는 이미 확정되어 있던 영조의 임오의리가 확고하게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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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회연교               2019.08.03.토요일,맑음

오월 그믐 경연에서의 하교이다.

부친 묘소의 이장과 화성 건설 등의 과정을 거치며 정조의 왕권은 강화되었다. 이즈음 정조 16년(1792) 윤4월 27일 그 동안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영남의 남인이 대거 참여한 한 장의 상소가 정조에게 전달되었다. 대략 1만 명 이상이 연명으로 참석하였다고 하여 ‘영남만인소’라고 하는 상소였다. 상소를 받아 본 정조는 의아해 하면서 상소를 읽어 내려갔다.

“아니 이렇게 많은 인원이 무슨 일로……”

상소에는 사도세자의 신원과 함께 임오년 의리를 천명하라는 요구가 담겨져 있었다.
상소를 읽고 난 정조는 아무 말없이 상념에 잠겼다.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참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이에 정조는 다음날 승지 임제원을 불러 물었다.

“소두(疏頭)가 누구인가?”

그러자 임제원은

“이우입니다. 고 옥당 이완의 종제이고 고 교관(敎官) 이광정(李光靖)의 아들입니다.”

하여 소두의 신상을 보고하였다. 이어 정조는 명하였다.

“소두(疏頭)는 전에 올라와 읽어 아뢰도록 하라.”

이우는 국왕 앞에 나아가 엎드렸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연명한 상소인 가운데 자신이 아는 인물들을 차례대로 불렀다.

김한동·성언집·강세응·강세륜·이경유·김희택·김시찬 등이 호명되었다. 하나씩 국왕 앞에 나아가 엎드렸다. 정조는 이우에게 상소를 읽도록 하였다.

이우는 말을 시작으로 거침없이 읽어 내려갔다.

“아, 신들은 한 폭의 의리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지 이미 30여 년이 되었으나 사람을 대해서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다만 죽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이우가 상소를 다 읽었으나 정조는 아무 말을 못하였다.

상소를 들으면서 억제하느라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여 말을 하려다가 잇지 못하였다.

정조의 이런 증상은 몇 차례 이어졌다. 잠시 대전 내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정적이 깨지면서 정조는 심경을 토로하였다.

“마음이 억눌리고 막혀 말에 두서가 없어서 말하자니 먼 곳에서 온 유생들이 보는 데 좋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는 상소에 대해 대략 답변한 후 치하하는 것으로 상소에 대한 비답을 마쳤다.

“오직 나의 본뜻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서로 경계하며 천명할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너희들 영남의 진신과 유생들의 공로이다.”

사실 영남 유생들의 상소는 그 동안 정조의 머릿속에서 잠시라도 떠나지 않았던 일이다.

그렇지만 이를 하루아침에 추진할 수는 없었다. 그

러나 그 기초는 이미 사도세자의 묘소 이장으로 만들어졌다.

이에 정조는 영남 유생들의 의사는 지지하면서 그것의 실행에 있어서는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비답을 내렸다.

그런데 영남 유생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제2차 영남만인소가 얼마 후에 제출되었는데,

여기서도 유생들은 정조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정조의 대답은 똑같았다.

영남 유생의 두 차례에 걸친 만인소를 통해서 이제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여론 조성에 성공하였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였다.

정조1800년(정조24년)5월30일, 내의원 책임자들을 불러들인 상황에서 정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장황
하게 강조하였다.

“오늘 연석에서 하교한 것은 맨 먼저 고금의 의리가 시대 상황에 따라서 다른 것을 말했고 다음은 규모,

그 다음은 인물을 등용한 문제, 그 다음은 가르침을 펴고 가르침을 따르게 하는 방안에 대해 말하면서

여러 번 되새기고 반복하였는데, 마디마다 세교를 부식하고 구절마다 고심을 드러내었다.”

이를 오회연교라 한다.


오회연교는 많은 발언이 있었는데 중요한 것을 몇 가지만 지적해 보면,

일단 사도세자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임오화변에 대해 노론들은 책임이 있다는 것과,

재상을 임명할 때는 8년 단위로 한다는 점과

세도를 바로 잡겠다는 것인데 여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경고성 발언도 포함되었다.

그간 정조를 반대하던 노론세력들은 이를 수긍한다면 모두 죄인이므로 백기를 들어야 하였다.

그러나 이를 수긍할 수는 없었다.

이서구는 정조가 제시한 의리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풍속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은 그 또한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오랜 세월을 두고

변함없이 밀고 나가는 도를 견지한 뒤에야 비로소 차츰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이서구를 강경하게 다스리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김이재가 정조의 측근세력인 소론의 이시수를 비난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정조는 김이재를 사주한 배후 조정자에게 처음에는 자수하도록 하였으나 자수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정조는 심환지 등과 마주앉았다.

정조는 심환지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을 말하였다.

“크거나 작은 일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것까지도 다 차츰 피곤해지는데

조정에서는 두려울 ‘외(畏)’ 자 한 자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나의 가슴 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선 경들 자신부터 임금의 뜻에 부응하는 방도를 생각하도록 하라.”

그러자 심환지는 정조의 견해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정조는 수긍하는 뜻을 비쳤다.

“경 또한 늙었지만 저번 연석의 분부 속에 자기 자신을 경멸하면 남이 따라서 경멸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 또한 경들이 스스로 반성할 점이다.”

결국 심환지 당신도 잘못한 것이 있으니 반성하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당시 노론계 벽파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심환지까지 불러 반성하라는 등 점차 정조가 의도한 것이

추진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늘도 야속하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28일 정조는 경춘헌에서 승하하였다.

이로써 정조가 추진하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 벽파와 시파               2019.08.03.토요일,맑음

시파,벽파 분립에 관한 문헌상으로는 세 가지가 분류된다.

첫째, 분파의 기미가 정조4년(1780년)부터 있다가 정조12년(1788년)에 정민시의 상소를 통해 처음으로

        시파.벽파의 호칭이 나타났다는 설

둘째, 영조 만년에 척신 사이에 남당과 북당의 갈림이 있었는데,

        정조대인 1795년 이후로 남당에 가까웠던 자들이 벽파,북당에 가까웠던 자들이 시파로 분립했다는 설

셋째, 기원은 남당과 북당에 있으나,정조 8년(1784년)부터 시파,벽파의 호칭이 쓰이기 시작했다는 설

   이들에 따르면 시파.벽파 분립의 표면화는 정조의 탕평정책이 성숙되어 가는 시기인 정조 12년-19년

   사이인 것이 분명하다.그리고 영조대의 남당,북당과의 연계는 반드시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노론 우위에 대한 입장 문제가 두 분파에 공통되어 이러한 연계 제시가 있었던 것이다.

   시파,벽파가 표면화된 뒤 사색은 명색만 남고 정국은 이 두 파로 재편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분립은

   공공연해졌다.특히 시파의 부각에 위기를 느낀 벽파의 결집,공세가 두드러지는 경향이었다.


1. 시파(時派)조선 후기 정조가 준론 탕평 정책(강경론을 앞세운 탕평정책)을 통해 기존의 노론 우위의

    정국에 변화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을 때 지지를 표명한 정파이다.

    영조대에 취해진 탕평책은 붕당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없애고자 타협을 종용하는 것을 특징이다.

    당시 대립하던 노론,소론 중에 온건론자들이 이를 지지,그 정국이 완론탕평이다.

    그 완론탕평을 탕평당이라 불리기까지 하였다.

    영조대의 완론탕평은 이처럼 붕당간의 병진(같이 앞으로 나아감)을 기본 방침으로 하였다.

    그러나 기반 확보 과정에서 노론의 우위를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탕평정책은 노·소론간에 청류를 자처하는 부류의 반대에 부딪혔다.

    영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혼인 관계로서

    특히,온건한 노론계 대신들과 유대를 맺어 지지 세력으로 삼게 되었다.

    완론탕평으로 붕당간의 격심한 대립은 일단 수습되었으나 혼인 관계를 수단으로 지지 세력을 확보한

    나머지 정국 운영에 척신의 비중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탕평당계 척신들은 영조대 중반에 와서 일세를 이루어 남당(南黨)이라 불리면서

    청류 세력의 동당(東黨)과 대립하였다.

    또한,청류적 정치관을 가진 사도세자와의 반목도 심하였다.

    세자인 사도세자가 사사된 뒤에 영조가 후회하면서 세손(훗날의 정조)의 보호를 부탁한 것도 척신인

    홍봉한 등으로,이들도 북당(北黨)이란 일세로 남당과 대립하였다.

    북당은 세손 보호의 임무를 명분으로 삼았지만,한편으로는 남당으로부터 노론의 우위를 방기(내버려둠)

    하고 시세에 편승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는 탕평책을 계승하면서도 사대부의 의리와 명절을 중요시해온 청류들을

    대폭 기용하였다.

    정조는 노론의 우위 여부를 문제삼는 기존의 척신당의 틈바구니에서 체제 확립의 한계를 직시하였다.

    이로써 그간 양척신당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정계의 중심부로 대폭 끌어들여,이른바 준론탕평 또는

    청류탕평을 펴게 되었다.

    청류는 영조 말에 동당 또는 청명당을 이루어 척신당을 비판하던 노론계 인사(김종수,김치인·이명식·

    유언조·尹蓍東·남유용·서유린·송인명·정존謙 등)가 주축이었다.

    그러나 다른 당색도 배제하지 않은체 정조 스스로 규장각 및 초계문신제도를 통해 비노론계의 진출을

    활성화 시켜 갔다.

    1788년(정조12년)에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 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노론과 남인의 보합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이에 호응한 영남 남인들이 1792년에 그간 노론의 우위 아래 금기되다시피 한 임오의리 문제를  

    제기하여 노론을 크게 당혹시키는 형세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노론 내부의 시파,벽파의 분열은 이러한 형세 변화를 배경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즉,청류 가운데서도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부류가 다시 시류(時流)에 편승하는 무리라는 뜻으로 시파로

    지칭되었다.

    정조가 죽은 뒤,어린 군주 순조가 즉위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이에 김용주,김관주,김일주 등 계비의 형제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해 반정조적 입장에서 벽파와 결탁,

    시파에 대한 탄압이 가해졌다.

    1803년(순조3년)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면서 시파의 경주 김씨 가문과 벽파에 대한 반격이 가해

    졌다.

    순조대 이후의 시파,벽파 대립은 서로 다른 정파를 보합시키려는 국왕의 입장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

    전개되었으므로 대립이 극단화하고 감정화되는 양상을 현저하게 보였다.


2. 벽파(僻派)는 정조 즉위 후 외척을 배제하고 노론,소론 및 남인의 청류를 등용한 후 1792년 남인들이

    사도세자 문제를 재론하였다.

    집권 노론 층은 기왕의 입장을 확인하면서 노론의 정치적 우위를 관철시키고자 했는데 이를 벽파라 한다.
    벽파와는 반대로 왕의 정책을 지지하던 일부 노론세력을 시파로 부른다.
    벽파는 정조대에는 불리하였으나,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1804년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정순왕후가 죽으면서 시파의 반격으로 다수의 벽파가 축출되었고

    1807년 완전히 패배하여 시파가 실권을 잡았다.

    영조는 붕당간의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완론탕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지지하는 노론계 대신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자신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

    정순왕후(영조의 계비 김씨)의 형제인 김귀주를 중심으로 결집한 이들은 남당으로 불린 척신당을 형성

    했다. 한편 죽은 사도세자의 장인으로서 세손(훗날 정조)의 보필을 맡게 된 홍봉한 일파는 북당으로,

    남당과 대립하며 또다른 척신당을 이루었다.

    당시의 양당은 1762년(영조38년)의 사도세자 사건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가 정치관에 있어 영조와는 차이가 있었으며 집권 노론 척신당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던 만큼 대부분의 노론은 국왕으로서의 자질에 큰 하자가 있는 사도세자를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이었으므로 당시 노론 대신의 처신도 큰 잘못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한 반면 일부 비판적인 노론 및 소론과 남인은 사도세자가 개인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죽일 만한 죄는 되지 않았는데 정국의 전권을 장악했던 노론의 집권 주류가 모함하여 죽게 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정파의 분립으로 구체화된 것은 정조대에 이르러서였다.

    정조는 즉위 후 왕권확립을 위해 의리와 명절을 강조하는 준론 세력을 중심으로 탕평을 실시하여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노론,소론 및 남인의 청류(淸流)를 등용했다.

    아울러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도를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여 이들을 자신의 친위학자군으로 삼았다.

    1788년(정조12년)에는 남인 채제공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비노론계가 중앙 정계에 많이 진출하게 되고,

    1792년(정조16년)에는 영남 남인들이 사도세자사건의 명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노론 집권층은 왕권 강화 정책에 의해 입지가 축소되고 있었는데다가 사도세자 문제가 재론됨으로

    정치적 정통성 마저 위협 받게 되었다.

    그러자 강경파를 중심으로 사도 세자 사건과 관련된 기왕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노론의 정치적 우위를

    확실히 관철시키고자 했는데,이들이 벽파를 형성했다.

    벽파의 주류는 역시 노론이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심환지였다.

    그는 신임의리의 고수를 표방하고 이에 위배되는

    남인 계열의 채제공,이가환,이승훈과 소론계의 서명선을 성토에 앞장서 공격하여 벽파의 선봉으로 인정

    되었고 이후 영수가 되었다.

    이러한 벽파와는 반대로 우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는 타 당파의 정계 진출도 무방하다는 생각에서 왕의
    정책을 지지하는 일부의 노론세력이 있었는데,이들은 노론의 우위를 방기하고 시류에 편승하는 무리라고
    하여 벽파에 의해 시파로 불렸다.

    벽파는 정조대의 정국 구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삼고 자파의 김관주 등을 조정에 진출시키는 한편,

    벽파의 정국 운영에 장애가 되는 시파 세력을 비롯한 노론계 인물들을 의리에 배치되고 사도세자 추숭을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대거 정계에서 축출했다.

    또한,1801년에 시작된 천주교 탄압을 이용하여 남인 세력을 제거했으며 정조가 설정한 왕권 중심 군사적

    구도의 핵심이며 시파 세력인 김조순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장용영을 혁파했다.

    그러나 1804년(순조4년)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정순왕후가 죽으면서 벽파와 경주 김씨 세력은

    김조순이 주도하는 시파의 반격을 받았다.

    김달순이 사사당하고 김관주가 유배되는 등 다수의 벽파가 축출되었으며,

    마침내 1807년,이경신의 옥사를 계기로 벽파는 완전히 패배하고 김조순의 안동 김씨가 실권을 잡았다.

    이로부터 왕권이 유약해지면서 왕권 문제를 초점으로 하여 발생한 정쟁이라고 할 수 있는 시파,벽파의

    분파는 끝나고,이후 정국은 극소수의 노론 중 이름있는 외척 가문 중심으로 전권이 장악되는 세도정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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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신분 계급                  2019.08.03.토요일,맑음

중인은 조선 시대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있던 신분 계급이다.
조선 시대의 신분은 크게 양인과 천민으로 나뉘고,

  '양인'은 다시 양반, 중인, 상민으로 나눈다.
    그중 중인에는 양반을 도와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 의학이나 법률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 외국과

    교류할 때 외국 사람과의 통역을 맡은 역관 등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기술 교육이 상대적으로 천대받았다.

중인은 일반적으로 양반 사대부 계층에 비하여 차별 대우를 받았고,

중인의 신분과 직업은 세습되었다.

중인은 육조와 삼사 등의 일반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고, 관직 승진에도 제한이 있었다.

또한 지방 양반의 명단에 등록되지 못하였고,

향교에서도 양반의 아래에 앉아야 하는 등 양반에 의해 천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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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2019.08.03.토요일,맑음  

상계군 이담;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정조의 이복 조카 이자 철종의 백부가 된다.

초명; 이준(李濬) 이며 뒤에 담(湛)으로 개명하였다

생졸; 1769년-1786년

본관; 전주 이씨

묘소; 실전되어 위치를 알수 없다.

가계도;  

   조부: 추존 사도세자(생졸;1735 ~ 1762)

   조모: 숙빈 임씨(생졸; ? ~ 1773)

     양부: 정조

     양모: 원빈홍씨

     생부: 은언군(생졸; 1754-1801)

     생모: 상산군부인 송씨(생졸; 1753 10 15-1801.03.17)-천주교 세례명; 마리아

         장남; 상계군 이담;(생졸;1769-1786)

             부인 : 군부인 신씨(생졸;1769-1801), 평산인 신오(申王+奧)의 딸.

                    양자 : 익평군 이희(생졸; 1824년-1863년), 생부는 그의 서제 풍계군 이당

              첩 : 이름 미상, 궁인 출신

                    아들 : 이름 미상, 요절

         동생: 이창순(생졸년 미상)


         동생: 이창덕(생졸년 미상)

         동생: 이   당(생졸;1783-1826)

         여동생 : 이씨(생졸; ? -1872년),참봉 한각신에게 출가.

      생서모: 전산군부인 이씨(생졸;1764-1819), 전주인 이덕희의 딸.

         이복 동생 : 전계대원군(생졸;1785-1841)

      생서모: 이름 미상

         이복동생: 이성덕(생졸;1775-1817.11.27)

         이복동생: 이철득(생졸;1780-?)

외조부 : 송낙휴(생졸년미상)

외조모 : 능성 구씨(생졸년 미상)

외외증조부 : 구선원,구선복의 사촌


상계군 이담은 영조의 증손자며 사도세자의 손자이자 생부 은언군 이인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송낙휴의 딸로 상산군부인 진천 송씨다.

증조 할아버지인 영조가 살아 생전인 1769년(영조45년)에 한성에서 상계군 이담이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준(濬)이다.



아래로 친동생으로 이창순,이창덕,이당,한각신에게 시집간 여동생 1명이 태어났다.

이 중 풍계군 이당은 아버지 은언군의 다른 첩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풍계군 이당은 아버지 은언군의 이복 동생인 경빈 박씨  소생인 은전군 이찬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밖에 1821년에 사망한 이름 미상의 서모에게서 이성득,이철득이 태어났고,

서모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에게서 요절한 이복 동생과 철종의 생부인 이복 동생 전계 대원군이 태어났다.



상계군 이담의 부인은 통덕량을 지낸 신오(申王+奧)의 딸로 군부인 평산 신씨다.

상계군 이담에 관한 유년기와 소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상계군 이담은 생모가 상산군부인 송씨가 아니라 생부인 은언군과 어느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상계군 역시 궁녀에게서 자손을 보았으나,

철종 때와 고종 때 승정원 일기와 일성록에서 은언군의 가족과 상계군 관련 기록들을 대량으로 세초해

    버려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종친부에 의해 왕세자의 손자,서손들에게 봉작되는 군작위와 도정의 작위가 내려졌어야 했으나,

영조 때 봉작이 내려졌다는 기록은 없다.



1779년(정조3년),정조의 계비며 홍국영의 누이인 원빈 홍씨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홍국영,송덕상 등에 의해 이복 백부 정조의 양자로 내정되었다.


   당초 은언군은 홍국영의 제의를 사양했지만,홍국영의 거듭된 부탁으로 아들 상계군 이담을 일단 정조와  

   후궁 원빈 홍씨의 양자로 입양,출계되었다.

   홍국영이 왜 은언군의 아들을 선택했는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있다.


   원빈 홍씨의 상에 세자의 중손의 예에 따라 종2품 소의대부에 임명되고,

   같은 날 왕족으로서의 처음 봉작명인 완풍군에 봉작되었다.

   완풍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과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풍산에서 한글자씩 따온 것이라 한다.

   많은 기록들이 이 완풍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홍국영임을 지적하고 있다.


   같은 날,이복 둘째 큰아버지 정조의 후궁인  원빈홍씨가 갑자기 사망했다.

   원빈홍씨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고 병사하자,

   홍국영은 상계군을 원빈홍씨의 양자로 들이고 그를 자신의 외조카라 칭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다른 후궁에게서 자녀를 생산할 수 있음을 들어 일각에서는 반대하였다.

   1780년 다시 상계군으로 개봉되었고 이름은 이준(李濬)에서 이담(李湛)으로 개명되었다.

   이것이 결국 화근이 되어 역모로 몰리게 되었다.

    원빈의 오빠 홍국영에 의하여 원빈의 양자가 되어 완풍군에 봉하여졌다.

   곧이어 상계군으로 개봉되면서 왕의 후계자로 추대 되려 하였으나,

   홍국영의 마음에 들지 않아 오히려 모반죄로 몰려 유폐되고,

   이 결과 1786년 음독 자살하고 말았다.


















   한때 왕의 잠재적 후계자로 지명되어 가동궁(假) 으로도 불렸다.


1786년(정조10년)11월,신오의 딸 군부인 신씨와 혼례를 치른 뒤 의문의 음독 사망하는데,


    자살설 외에도 아버지 은언군에 의한 독살설과 홍국영 일파에 의한 독살설이다.
1849년(철종 즉위년), 이복 백부인 상계군 이담은 복권되고

1858년(철종9년),현록대부에 추증되었다.


당일 정조에 의해 원빈의 빈전 수빈관에 임명되고 수묘관에 내정되었다.

그는 원빈홍씨 상중에 빈전 수빈관과 대전관으로 참여하였고, 탈상 후 인명원 수원관에 임명되었다.

홍국영은 그를 자신의 생질이라 칭하였지만,상계군은 홍국영과 마음이 맞지 않아 갈등하였다.

당시 정조는 20대의 나이였고 완풍군을 양자로 들인 일과 가동궁으로 부르게 한 일로 결국 역적으로 지목

되어 1779년 홍국영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흑두봉조하가 되었다.

 

이후  김치인은 홍국영과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송시열의 후손인 송덕상의 처벌도 주장하면서 노론 대신들은 완풍군을 반역자로 공격하였으나 정조는 듣지 않았다.


1780년(정조4),의정부 우이정 이휘지 등의 청으로 인조반정 공신 완풍군에 봉군된 이서와 작호가 중복된다는 이유로, 작호는 완풍군에서 상계군으로 고쳤고,이름도 준에서 담으로 개명하였다.


1784년(정조 8),정조친히 상계군의 혼처를 찾았다.

그러나 신하들은 회피하며, 상계군의 혼처를 찾는 영조의 명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

사대부 안광집의 딸이 결정되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통덕랑 신오의 딸이 낙점되었다.

1784년 사옹원부제조가 되고 ,특명으로 숭헌대부로 가자되고,다시 가덕대부로 승작되었다.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가 연달아 죽은 해에,

그는 혼례를 올린 직후 독약을 마시고 음독사했는데, 자살설과 홍국영의 독살설, 생부 은언군 이인이 독살했다는 설 등이 있다.


외조부 송낙휴에 의하면 사망 직전에도 그는 건강했는데 갑자기 사망했다 한다.

최종 관직은 가덕대부 상계군이었다.

한편 그의 혼례를 주관하던 김우진은 상계군 사후, 상계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밖에 영조,정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구선복 등도 평소 원한을 샀다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다.

예조판서 서유린은 상계군이 죽었다는 보고를 꺼렸으나,

결국 상계군의 사망 소식이 궁궐에 알려지게 되었다.

장례식은 정조의 특명으로 친왕손의 예대로 예장하였다.

 

한편 그의 외할아버지 참봉 송낙휴는 상복을 입고 상계군이 파양된 것에 대해 원망,앙심을 품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그리고 사망 직전 "심상철이 살면 나도 살고 김정승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라는 말을 한 뒤 며칠 후 급사했다는 것이었다.

송낙휴는 또 "구이겸이 황해 병사로 있을 때 후히 선물을 바치고 편지에 소인이라고 지칭한 것을 일찍이

목격하였습니다.

담은 평소에 병이 없었는데, 김 정승에 대해 말한 후 며칠 있다가 갑자기 죽었으니, 의심스럽습니다."하고

고변했다.

영의정을 지낸 김상철이었다.

송낙휴는 또 상계군을 추대하는데 자신의 처당숙인 무관 구선복이 가담했다고 고변,

구선복과 그의 아들 황해도 병마절도 구이겸, 송낙휴의 처남이며 6촌동생 구이겸에게 자기 아들을 양자로 보냈던 충청도병마절도사 구명겸 등이 체포되어 추국당한 뒤 처형되었다.

이어 노론,남인,소론 내에서 모두 홍국영에 대한 노륙을 청하는 상소와 함께 그에게도 죄를 줄 것을 청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이어  12월1일 정순왕후가  언문교서를 직접 발표하여 상계군과 홍국영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처분을 요구하는 언문 하교문을 승정원에 내렸다.

정조 3년 당시 상계군이 홍국영 등에 의해 완풍군에 봉작된 일과 가동궁

또는 왕위 후계자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일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그의 작위는 즉시 폐작되어 그때부터 "역적 담"으로 불리게 된다.


정순왕후가 역적의 가족들도 처분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은언군 일가는 강화도로 유배된다.

삼사는 합계하여 상계군의 일가를 공격했고, 정조는 계속 거부하였으나 삼사의 합계에 밀려 은언군 인 일가의의 유배를 승인하였다.

이후 정조는 직접 상계군 사건에 대한 언급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상계군에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 말도록 신하들에게 계속 부탁하였다.


시신은 한성부 북부 연희방 연희궁 근처(현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2호선 신촌역 2, 3번 출구와

연세대학교 정문 주변)에 매장되었으며,

후에 사사된 부인 군부인 신씨도 합장되었다.

철종 즉위 후 1854년(철종 5)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으나, 후일 그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생모 상산군부인 진천 송씨와 아내 평산군부인 신씨는 양제궁 나인 서경의의 외할머니 조씨 노인의 권고로

주문모 신부의 입국 전  천주교에 입교했으며,주문모 입국 후 세례를 받고 모두 마리아라는 교명을 받았다. 이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활동 중

1801년(순조 1) ,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실이 적발되어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고,

아버지 은언군도 그해  사사령을 받고 강화도 유배소에서 사사되었다.


1894년(철종 즉위년),이복 조카인 이원범이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면서,

철종의 즉위를 주관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상계군 내외가 복작되고,

이해  가덕대부로 복작되었다. 1858년(철종 9) ,정1품 현록대부에 증작되었다.

이때 순원왕후의 명으로 과거 상계군 사건에 대한 기록이 대거 세초,각자,말소되었다.

이후 철종 때와 고종 때 상계군 일가 관련 기록 및 은언군 관련 기록이 대량으로 세초되어 유실되었다.

 

한때 1801년 순조 즉위년,은언군이 야밤에 함께 강화도를 탈출하려던 철득이 한때 그의 아명으로 여겨졌지만, 후일 1970년 조선왕조실록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1801년에 은언군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하려다가 체포된 다른 인물로 확인되었다.

이는 상계군의 사후 15년 뒤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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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 조선 후기 정조시대 문신

생졸; 1748년(영조24년)-1781(정조5년).34세

본관; 풍산

부; 판돈녕 부사 홍낙춘


조선 후기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세도 정권을 장악 했던 문신으로 

1771년 정시 문과에 급제했고,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 시강원에 소속되어 뒤에 정조가 되는 세손을 보호하는 데 힘써 세손의 신임을 얻었다.

정조가 즉위하고 곧 도승지에 올라 정책 결정을 통제했으며,군사권까지도 장악하는 벼슬에 올랐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최초의 세도 정치을 이루었다.

기반이 약해 곧 실각했다.

1780년 왕후 독살 기도에 연루된 혐의로 탄핵을 받아 가산을 몰수당하고 강릉으로 추방 되었다가 34세로 병사했다.


1771년(영조47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세자 시강원 설서가 되었다.

이어 세자 시강원 사서로서 서명선,정민시 등과 함께 세손(훗날 정조)을 보호하는 데 힘써 세손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776년 노론 청명당 계열의 김종수 등과 연계하여 세손의

승명(임금의 명) 대리를 반대하던 정후겸,홍인한,김귀주 등을 탄핵하여 실각시키고,

홍상간,윤양로 등을 처형시켰다.

그해 정조가 즉위하자 동부승지로 숙위 대장을 겸임했고 곧 도승지에 올라 정책 결정을 통제했으며,

금위대장,훈련대장 등을 거쳐 오영도총숙위가 되어 군사권을 장악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최초의 세도정권을 이루었다.


1778년(정조2년)에는 누이를 원빈홍씨으로 삼게 하여 정권을 굳게 다졌다.

그러나 원빈이 1년 만에 죽자 김시묵의 딸인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핍박함으로써 왕실 세력의 미움을 받았으며,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이담(湛)을 원빈홍씨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에 봉하고 세자로 책봉 시키려다가

여의치 않자 모반죄로 몰아 제거하는 등 세도정권의 유지에 급급했다.

이조참의,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다가

1779년 9월 정조의 은퇴 권유로 조정에서 물러나 봉조하(조선 시대, 전직 관원 예우하여 종이품 관원 퇴직한 특별히 내린 벼슬)가 되었다.

1780년 왕후 독살 기도에 연루되었다 하여 정민시,서명선,유언호,김종수 등의 탄핵을 받아 가산을 몰수당하고 강릉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실의에 잠겨 지내다가 34세로 병사했다.

송시열의 후손인 송덕상, 민우수의 문인 김종후 등의 지원을 받아 노론 청류를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했으나, 전횡을 일삼고 나아가 스스로 외척이 되어 독주함으로써 여타 외척세력 및 노론,소론,남인 모두와 대립했다. 특히 정조의 준론 탕평책 구상 추진에 장애가 되면서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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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2019.08.02.금요일,맑음

채제공(蔡濟恭); 규장각제학·예문관제학·한성판윤·강화유수, 우의정, 영의정

생졸; 1720년(숙종46년)-1799년(정조23년)

본관; 평강

5대증조; 효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채유후

증조부; 채시상

조부; 채성윤

부; 지중추부사 채응일

모; 이만성의 딸이다.


1735년(영조 11) 15세로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 한림회권 때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선발되어 청요직인 예문관사관직을 거쳤다.

1751년에는 중인(中人)의 무덤이 있는 산을 탈취했다 하여 1년 이상 삼척에 유배되었다.

1753년에 충청도 암행어사로 균역법의 실시 과정상의 폐단과 변방 대비 문제를 진언하였다.

1755년 나주 괘서 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으로 활약했고,그 공로로 승정원 동부 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대사간을 거쳤고,

'열성지장'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에 도승지로 임명되었다.

이 해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하여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했다 한다.


이후 대사간·대사헌·경기감사를 역임하던 중

1762년 모친상으로 관직을 물러나자,

이 해 윤5월에 사도세자의 죽음이 있었다.

복상 후 1764년부터 개성유수·예문관 제학·비변사 당상을 거쳐 안악 군수로 재임 중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767년부터 홍문관 제학·함경도 관찰사·한성 판윤을,

1770년부터는 병조·예조·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772년 이후 세손우빈객·공시 당상이 되었다.

1775년 평안도 관찰사 재임시에 서류통청은 국법의 문제가 아니므로 풍속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상소로 인하여 서얼 출신자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의 깊은 신임과 함께 약방 제조로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했고,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좌참찬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3월에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어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하였다.

또한 정조 특명으로 사노비의 폐를 교정하는 절목을 마련하여 정1품에 이르렀다.

이 사노비절목은 점차 사노비의 수효를 감소시켜 1801년(순조 1)의 사노비 혁파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후 규장각 제학·예문관 제학·한성 판윤·강화 유수를 역임하였다.

1780년(정조 4) 홍국영의 세도가 무너지고 소론계 공신인 서명선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서자,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의 신원에 대한 과격한 주장으로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의 연관,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했다는 죄목으로 집중 공격을 받아 이후 8년 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1788년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었고,이 때 황극을 세울 것,당론을 없앨 것,의리를 밝힐 것,탐관오리를 징벌할 것,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였다.

이후 1790년 좌의정으로서 행정 수반이 되었고, 3년 간에 걸치는 독상으로서 정사를 오로지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이조 전랑의 자대제 및 당하관 통청권의 혁파,신해통공 정책 등을 실시했으며, 반대파의 역공으로 진산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793년에 잠깐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일의 영남 만인소에서와 같이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을 주장하여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그 뒤는 주로 수원 성역을 담당하다가 1798년 사직하였다.


문장은 소(疏)와 차(箚)에 능했고, 시풍은 위로는 이민구·허목, 아래로는 정약용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또한, 학문의 적통은 동방의 주자인 이황에게 시작하여 정구와 허목을 거쳐 이익으로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였다.

때문에 양명학·불교·도교·민간신앙 등을 이단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상도 수기치인의 측면에서 선용할 수 있다면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천주교 '서학(西學)에 대해서도 패륜과 신이적 요소를 지닌 불교의 별파로서, 이적(夷狄)인 청나라 문화의 말단적인 영향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서학을 믿는 자에 대하여 역적으로 다스리라는 요구를 당론이라 배척하고, 정조의 뜻을 받들어 척사를 내세우면서도 교화우선 원칙을 적용하려 하였다.

자신의 시대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로 생각했으나, 제도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강조, 중간수탈 제거, 부가세 폐단의 제거들을 추진하고 간리의 작폐를 없앰으로써 국가재정 부족을 타개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상업 활동이 국가 재정에 필요함을 인식했으나 전통적인 농업우선 정책을 지켰다. 또한,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사족 우위의 신분질서와 적서의 구별을 엄격한 의리로서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영조연간 청남의 지도자인 오광운과 강박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채팽윤과 이덕주에게서 시를 배웠다.

친우로는 정범조·이헌경·신광수·정재원·안정복 등이 있고, 최헌중·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이 그의 정치적 계자가 된다.

순조 때 유태좌가 청양에 그의 영각을 세웠고,

1965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홍가신·허목·체제공을 모시는 도강 영당이 세워졌다.

저서로 '번암집' 59권이 전하는데, 권두에 정조의 친필어찰 및 교지를 수록하였다.

그는 '경종내수실록'과 '영조실록''국조보감'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1799년 1월 18일에 사망, 3월 26일에 사림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묘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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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선                    2019.08.02.금요일,맑음

서명선;

생졸;1728(영조4년)-1791(정조15년)

본관; 대구

증조부;남원부사 서정리

조부; 참찬 서문유

부; 이조판서 서종옥

모; 이집(李㙫)의 딸


1753년(영조 29) 생원이 되고, 1763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곧 홍문관부교리에 처음으로 제수되고, 다음날 왕의 특명에 의해서 교리가 되었다.

1764년 홍문관 관원들이 올린 소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홍낙명 등 8인과 함께 갑산부에 일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재기용되어 사헌부지평·사간원헌납, 부교리·풍산만호·홍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767년 지제교의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에서 우등해 말을 하사 받았고,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였다.

이 후 부교리·승지를 거쳐

176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삼촌이 피체되자 연루되어 체직당하였다.

   이어서 이조참의·대사성·대사헌·승지·부제학을 역임하고 이조참판이 되었다.

1775년 일시 한직에 밀려났으나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홍인한 일파를 탄핵,

   세손의 대리청정을 시행할 수 있도록 크게 노력하였다.

    이 때의 공으로 세손에 의해 발탁되어 예조판서·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정조가 즉위하자 더욱 중용되어 수어사·총융사를 겸임해 군사권까지 장악했고, 우참찬·판돈녕부사를 거쳐 1777년(정조 1) 우의정, 다음 해 좌의정, 그 다음 해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780년 일시 한직에 물러났다가 곧 좌의정·영의정을 역임하였다. 1783년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1791년 영중추부사로 죽었다.

영조대 중반까지는 은인 자중해 크게 현달하지 못했으나, 영조 말년에는 세손의 대리청정을 위해 진력을 한 결과 정조에 의해 중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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