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와 농부 이야기                2019.07.24.화요일,맑음

조선의 21대왕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초래한 왕으로 비난을 받지만

조선왕 중에 제일 오래 장수한 임금으로 알려졌다.

 

영조이 하루는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조선 땅에서 내가 내린 명령이라는 것을 숨긴 체 나와 나이가 같은 백성 중에서 생년 월일과 시간이 나와 

똑같은 사람을 조사해서 찾아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 강원도에서 한 농부가 영조 임금과 생년 월일과 난 시간이 똑같은 사람을 찾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영조는 즉각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을 내려 그 농부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영조는 농부에게 '네 생년월일과 난 시간을 말해 보아라.'

농부의 말을 들은 영조는 '과연 나와 생일과 시간 모든 것이 똑 같구나. 사주에 보면 생년월일이 같은 사람은 같은 운명의 길을 가는 것으로 아는데 나는 임금이 되고 너는 벼슬도 못한 한 농부가 되었느냐.'

영문도 모르고 서울까지 올라온 이 농부는 그 때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한 농부의 대답은 참으로 걸짝이였다.

'소인도 상감마마님과 다를 봐 없습니다.상감마마님 께서는 조선 8도를 거느리고 계시지만 소인은 8도에

해당하는 아들을 8형제를 뒀습니다.상감마마님은 조선의 360고을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소인은 아들 8형제를 데리고 약간의 논과 밭을 일구며 이에 해당하는 360개의 벌통을 기르고 있습니다.

상감마마님은 수많은 백성들을 거느리고 보살피고 계십니다.

소인은 엄청난 많은 벌을 기르고 백성과 다름없이 이들 벌들을 보호하고 돌보고 있으니 소인은는 농부로

살아가지만 나름대로 대왕님과 같은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말을 들은 영조는 '네 말을 듣고 보니 참으로 나와 같은 날에 태어난 사람은 좋은 운명을 타고 난 복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 같구나.' 영조는 이 농부를 며칠간 극진이 대우하고 돌려 보냈다.


농부를 떠나 보내며 영조는 이 농부에게 어사들이 차고 다니는 마패를 줬다.

영조는 말했다. '내가 준 이 마패는 증표이니 어디를 가든지 꼭 가지고 다녀야 하며 다음 달 내가 너에게

푸짐한 상을 내리려고  한 번 더 내가 너를 부를 테니 다음 달 내가 부를 때 이마패를 꼭 가지고 와야 한다.'

 

이를 받아든 농부는 자신이 살던 농촌으로 돌아 갔다.

그런데 영조는 이 농부을 시험해 곤난한 일을 격게하려고 사람 몇 명을 뽑아 엉뚱한 일을 시켰다.

이 농부를 뒤 따라가다가 임진강을 건널 때 강도로 돌변해서 농부의 몸을 수색해서 마패를 빼앗아 강물에

던지라고 명을 내렸다.다음 달 만날 때 이 농부의 행동을 한번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농부는 고향으로 가는데 영조의 명을 받은 이들 몇 명은 배위에서 몸을 수색하다 마패가 나오자 소용없는 쇠덩이라며 빼앗아 강물에 던져버렸다.

농부는 망연자실하며 통곡을 했다.

집에 돌아온 농부는 다음 달 상감마마님을 뵈올 때 강도들이 마패를 빼앗아 강믈에 던져버렸으니 어찌한단 말인고 식구들에게도 말을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앓기 시작했다.

이를 본 아들들은 서울에 갔다 오시더니 말이 없이 앓고 있는 부친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봤지만 이 농부는

너희들이 알아야할 일이 아니라며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 째 식음을 전폐한 부친을 위하여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로 결심한 아들은 시장에 나갔다.

이것저것 골라 사던 중 잉어를 파는 한 사람으로부터 부친을 위하여 제일 큰 잉어 한 마리도 사서 시장에서 산 많은 물건과 함께 지게에 짊어지고 집에 왔다.

아들은 잉어의 배를 가르다가 커다란 쇠로 만들어진 둥근 쇳덩어리를 발견했다.

    

이를 본 아들은 잉어 몸에서 이런 물건이 나왔다며 부친에게 보여줬다.

이를 본 부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제는 살었다.

이것은 상감마마님이 다음달 다시 만나자며 나에게 주신 마패인데 이 마패를 도적들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내가 앓고 누웠다며 그제야 아들들에게 사실 말을 했다.

강물에 던져 떨어지는 마패를 잉어가 먹을 것으로 알고 삼켰던 것이다.


한 달이 지난 후 영조임금이 만나기로 약속한 그날 영조 앞에서 마패를 내놓자 이에 놀란 영조는 농부에게 지난달 내가 너에게 준 마패가 맞느냐. 그날 마패를 강물에 던졌다는 사람을 당장 불러서 묻자 이들은 틀림없이 마패를 강물에 던졌다는 말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농부는 그간에 있었던 사실을 보고했다

 농부로부터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이 농부를 후이 대접하고 상을 내리게하고 '전에도 내가 같은 말을 했지만 나와 같이 한날 한시에 태어난 사람은 그 나름대로 하늘이 복을 내린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속에 영조는 갑자기 이 농부 생각이 나서 그 농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알니 그 농부는 많은 아들들의 축복 속에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남이 부러워하는 복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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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택(金春澤)                2019.07.23.화요일,맑음

김춘택;조선후기의 문신,외척,작가다

생졸 1670년-1717년

본관; 광산

가계도;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손자

증조부; 김만중 의 문하생

부; 인경왕후의 친정 오빠인 경헌공 진구(鎭龜)

모; 정경부인 한산 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


어려서부터 종조부인 김만중에게 문장을 배웠는데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여 김수항의 탄복을 받았다고 한다.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훈신과 적장자를 우대하는 전례에 따라 일찍이 음서로 출사하여 대호군에 제수되었다.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숙빈 최씨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가 후궁 최씨를 결박해 심하게 때린 후 거꾸로 세운 큰 독 안에 가둬 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왕비 장씨의 핍박을 받는 최씨로서는 서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김춘택은 인현황후의 친정과도 친밀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소론은 김일경의 옥사 당시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 하여 영조에게 충격을 주기도 한다.


인경황후의 친정 조카로 서인이었다가 노론이 되었다.

인현황후 민씨의 복위에 공을 세웠으나,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와 간통한 뒤 정보를 빼돌려 이때문에 소론과 남인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장희재를 제거하려는 과정에서 세자에게 위협을 가하려 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된다.

고종 때 복권 되어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로 추증되고 광령군에 추봉되었다. 

 

김춘택은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노론의 환국 모의를 주도했다.

장희재의 처를 통해 남인 내부의 중요 정보를 획득하여 결국 환국에는 성공했으나 그 방법이 옳지 못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귀양까지 가야 했다.

종조부 김만중의 문집을 한자로 번역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종조부 김만중과 가문의 당파인 서인이 실각하여 자신도 수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숙종의 첫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친정 조카인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여전히 궁 출입도 자유로웠다. 이러한 배경 조건과 재물을 이용해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 직전 인현왕후 복위를 은밀히 추진하여 갑술 환국과 폐비 민씨의 복위를 성공시켰다.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를 유혹하여 간통한 뒤 그로부터 남인측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고, 갑술옥사 이후 1701년의 무고의 옥으로 남인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서인들은 노론·소론 할 것 없이 정권 탈환에 부심 했다.

노론에서는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의 손자 김춘택이 환국 모의를 주도했고,

소론에서는 승지 한구의 아들 한중혁이 주도했다.

서인들은 ‘장다리(장씨)는 한철이고 미나리(민씨)는 사철이다’ 같은 동요를 만들어 퍼뜨렸다.

노론 김만중은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를 지어 왕비 장씨를 비난하고 폐비 민씨를 옹호했다.

'사씨남정기'는 명나라의 유현이 정실부인 사씨를 내쫓고 첩인 교씨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교씨의 간악함을 깨닫고 사씨를 정실로 맞이하고 교씨를 죽인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사씨가 폐비 민씨, 교씨가 왕비 장씨를 뜻하는 것인데 훗날 실제로 이 소설의 내용대로 전개된다.

'사씨남정기'를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은 이 소설 내용이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서인들의 염원이었다.


1695년(숙종 20년) 3월 23일 우의정 민암이 숙종에게 서인들이 불령한 무리들과 불법 정치자금을 모아

환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음모에 가담했던 함이완이란 인물을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위협해 폭로하게 한 것이었다.

남인 정승 민암의 고변으로 김춘택,한중혁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3월29일, 서인의 사주를 받은 유학 김인등이 맞고변했다.

우의정 민암과 병조판서 목창명,신천군수 윤희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김인의 고변 중에 왕비의 오빠 장희재가 김해성에게 돈을 주어 김해성의 장모로 하여금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김해성의 장모는 숙원 최씨의 숙모였다.

하지만 남인 정권 아래에서 남인들을 역모로 고변한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함이완의 고변은 사실로,김인의 고변은 무고로 정리돼 가고 있었다.


장희재의 처와 내연 관계를 갖고 그로 부터 정보를 일부 빼냈는데 남인들이 이를 눈치챘다.

김춘택은 수감되고 남인은 김춘택을 물고하려 했다.

4월1일 밤에 승정원으로 갑자기 내려진 숙종의 비망기가 전세를 뒤집었다.

“군부를 우롱하고 진신을 어육으로 만드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직을 삭탈해 문외출송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절도에 안치하라"

국청에 참여한 대신들을 모두 쫓아내라는 명으로서 정권을 다시 서인으로 갈아치우겠다는 뜻이었다.

남인들이 장악한 승정원에서는 급히 복역 장계를 작성했다.

임금의 잘못된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이 복역이었다.

그러나 막 작성한 초안을 올리려고 할 때 다시 숙종의 비망기가 내려왔다.

“비망기가 승정원에 내려진 지 이미 오래돼 경고가 반이나 지났는데 전지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그 머리를 모아 서로 상의하며 (대신들을) 반드시 구제하려는 정상이 극히 분통스럽고 놀랍다.

숙직 승지와 옥당(홍문관)을 모두 파직하라.

이번 복역 의논을 집에 있는 승지와 삼사라고 모를 리 없으니 마찬가지로 모두 파직하라

승지 전원과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킨 것이다.

또한 숙종은 입직한 오위장 황재명을 가승지로 삼아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등을 쫓아내고 남구만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병권 장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숙종은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각각 서인 서문중과 신여철로 갈아치웠다. 이조판서 이현일도 유상운으로 갈아치워 문관 인사권도 서인에게 주었다.

서인이 정권을 장학하면서 의금부에 감금되었던 그는 석방된다.

이때 그는 장희재의 처와 내연관계를 갖고 그로부터 정보를 일부 빼냈는데, 환국 유도 과정에서 그의 내연관계 역시 의금부와  사헌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시중에 유포되었다.

무고의 옥 직후 그는 노론으로부터 환국의 공로자로 칭송받았지만,

노론 일부와  소론으로부터는 음모를 이용한 파행적인 정치활동을 행하였다,

부도덕한 계략을 썼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소론과 남인은 그가 장희재의 처와 간통한 것을 끈질기게 물고늘어졌고,노론에서도 그의 행동이 부적절했다며 비난 여론이 일부 나타났다. 노론의 절대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탄핵을 받다가

1697년10월, 금천으로 유배되었고,

1701년 무고의 옥에 대한 수사 중에 갑술환국 전에 장희재의 처와 간통하여 간자로 삼았었다는 증언이 발고되어 다시 소론의 공격을 받고  전라부고 부안으로 정배되었다.

1706년에는 장희재의 처와 내통한 것은  장희재를 죽이려는 목적 때문만이 아니라 장차 세자(뒷날의 경종)를 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상소가 빗발쳤는데, 우의정 김창집의 강력한 보호에도 불구하고 끝내 김춘택은  제주도로 무기 유배되었다.

1710년, 제조 민진후가 숙종에게 감률 품지를 올려 육지로 이배되었다가 1701년에 방송되었다.

고종 때에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를 추증받았으며 광령군에 추봉되었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한다.

일설에는 숙빈 최씨와도 내연 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이 주장은  이인좌의 난 때 소론과 남인 인사들에게서 주로 채택되었다.

그에 의하면 영조는 그가 무수리인 숙빈 최씨와 사통한 뒤 숙종에게 보내졌다는 것이다.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도 그가  숙빈 최씨와 사통했다는 소문이 파다 했는데,

악형을 금지한  영조였지만  영조 때 이를 언급하는 자에게는 예외로 심한 형문을 가하였다.

사생활과 과격했던 정치활동 등으로 정적은 물론 노론 내부에서도 비난 받았지만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재주와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종조부 김만중의 언문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배포하였다.

저서로 '북헌집'과 글씨 '호판 김진귀 표'가 있다.



 

⊙ 김춘택과 숙빈 최씨의 야사            2019.07.23.화요일,맑음

일부 야사에서는 영조가 김춘택의 아들이며,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영조의 외모가 숙종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조선 숙종때는 영조가 김춘택의 아들 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고,

소론과 남인 중에는 영조가 김춘택의 아들이라고 신봉하기도 하였다.

 이인좌의 난 당시 형장으로 간 소론 인사들이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영조의 면전에서 김춘택의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 왕조 실록에서 영조가 소론계 인사들을 심문 할 때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이유이다.


숙빈 최씨와 사랑을 나누던 김춘택이 임금의 씨가 아닌 자기 씨앗을 숙빈 최씨에게 잉태 시켜 태어난 것이 영조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유포 되었던 소문이었다.               

결국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왕실의 씨가 바뀌었다.'라는 내용으로

영조 집권 4년만인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다.

이인좌의 난은 보름만에 진압이 되지만 영조는 집권 내낸 190여 차례 괘서 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닌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다.

김천택은 '청구영언'을 만든 사람이며 한동안 그의 애첩이었던 영조의 어머니 최숙빈은 무수리 출신이어서

영조는 많은 가슴않이를 하였을것이라 한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중국에서는 진나라의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이지만 거상 여불위가 그의 애첩인 조희를 임신을 한 후

장양왕에게 진상을 하므로 실은 여불위의 아들이란  설이 있어 '여정'이라고 한다.

시황제의 이름은 정(政)이 되는데 지금의 정치(政治;정이 다스린다)라는 단어가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것

이라 한다.

그는 유생 460명을 생매장(갱유)했고 책들을 모아서 불태워(분서) '분서갱유'까지 하듯이

나라를 그의 마음대로 떡주무르듯이 하였다.

그는 왕이 된 후에 직위의 이름을 최고로 높은 것으로 지어(作名)야 하는데,

전설속의 삼황(3皇;천황,지황,태황(泰皇)과 오제(5帝;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당요,우순)에서 따온 황제라고 했는데,

진시황은 고유 명사가 아니고 보통 명사 인 '진나라의 최초의 황제'라는 뜻이다.


조선은 '고종 황제'라고 부르고

일본은 황제국 '일제'라고 부른다.

왕는 노란색 곤룡포를 입지만 황제는붉은색 도포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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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풍군          2019.07.21.일요일,비온뒤 흐림

밀풍군; 이탄( 李坦)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의 증손이자 종실 임창군 이혼의 장남

생졸; 1698(숙종24년)-1729(영조5년)

가계도;

 증조부; 소현세자

 증조모; 민회빈 강씨

 조부; 3남 경안군 회(장남 경선군. 차남; 경완군)

 조모; 분성군부인 허씨(허학의 딸)

 부; 임창군 이혼(장남; 임창군 이혼,차남; 임성군 엽)

 모; 응천군부인 함양박씨

     밀풍군 이탄

        정실; 군부인 청풍김씨

        소실; 군부인 임천조씨

     밀남군 이감-숙부 임성군 엽 양자로 감 

     밀원정 이용

     밀천군 이담

     밀평군 이첩

     밀운군 이훈



밀풍군은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주도한 인물로 제16대 왕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의 증손이며,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회의 손자다.

 

1723년(경종 3)과 1726년(영조 2)에 사은정사와 동지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대청외교의 주요현안을 담당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당시 반란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반란이 평정된 후 자결을 명령 받아 32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후 1864년(고종1년),신원이 복권되었다.


밀풍군은 1728년(영조 4년) 3월 이인좌, 이유익, 정희량 등이 일으킨 무신난,

일명 이인좌의 난을 통하여 역사에 부각된 인물이다.

평소 온화한 인품과 범상치 않은 외교 실력으로 종실과 신료들에게 두루 신망을 얻고 있었던 그는 영조와의 관계도 매우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반란군의 추대를 받았다는 혐의로 집권 노론의 끈질긴 탄핵을 받아 목숨을 잃었고 집안도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그로부터 2년 뒤인 경술년에 또 하나의 역모가 드러나면서 밀풍군은 영조의 근친을 제거하려는 역신들의

모략으로 희생되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반란을 주도한 남인과 소론 강경파가 그를 추대하여 영조의 오판을 유도한 다음 거사에 성공하면 여흥군 이해를 옹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밀풍군을 변호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역사는 그를 역당의 수괴로 남게 되었다.


밀풍군 이탄은 1698년(숙종24년)에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석견의 손자인 임창군 이곤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하자 왕권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독살하고 민회빈 강씨를 사사한 다음 그들의 세 아들을 제주도에 유배했다.

그 후 맏아들 경선군 이석철과 둘째 아들 경완군 이석린이 병사하고 경안군만이 살아남아 자손을 이어갔다.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과 현종,숙종은 소현세자의 후예들을 안쓰런 마음으로 후히 대접했으므로 밀풍군은 종실의 요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1719년(숙종 45년)10월 20일, 숙종은 밀풍군 이탄의 둘째 아들 이상대를 연령군 이훤의 후사로 삼고,

이름을 공이라고 지어주었다.

연령군은 숙종의 여섯째 아들로 명빈 박씨 소생이었는데,

1699년(숙종25년)에 태어났으므로 연잉군과는 다섯 살, 밀풍군과는 한 살 터울이었다.

연령군은 그해에 연잉군과 함께 부왕의 기로소 입소를 적극 권유하는 소를 올리기도 했을 만큼 효성스러웠는데 갑자기 병을 앓아 불귀의 객이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6월 숙종이 승하했을 때 연잉군은 목욕에, 밀풍군은 염습에 집사하는 등 두 사람은 종실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밀풍군은 26세 때인 1723년(경종 3년) 11월에 사은정사로 청나라에 건너가 한해 전에 등극한 옹정제를

배알했고,

1726년(영조 2년) 7월에도 사은정사, 11월에는 동지정사로 임명되어 명사변무의 해결에 진력했다.


당시 '명사'의 '희종실록'과 '양조종신록'에 인조 반정은 왕위 찬탈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때문에 조선에서는 틈만 나면 사신을 보내 '명사'의 개정을 간청했지만 청나라에서는 자구 몇 개를 고치는 것으로 생색을 낼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은 친청파였던 소현세자의 후예인 밀풍군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들을 설득하려 했던 것이다.그렇듯 대청 외교의 주요현안을 담당했던 밀풍군은 무역 분쟁의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영조를 보좌했다.


 그 무렵 조선에서 채굴한 은(銀)이 무역 대금으로 대량으로 청나라에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상인들이 은에 납을 섞어 유통하다 발각되어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따라 영조가 고심하자 밀풍군은 조정에서 은화를 주조할 때 상평통보처럼 표준을 정하면 위조를 방지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가 경제적인 지식도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1727년(영조 3년) 9월 9일, 밀풍군은 10세가 된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관례에서 종실의 대표인 주인으로 참례했다. 주인이란 임금을 대신해 상징적으로 행사를 주관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종실의 어른을 말한다.

그렇듯 영조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밀풍군은 갑자기 반역을 도모한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에 의해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면서 일생 일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소론 강경파인 준소와 남인들은 영조의 즉위와 함께 경종 대에 노론 세력 축출에 앞장섰던 김일경, 목호룡 등이 처형되고 자신들이 정계에서 소외되자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동조자들을 규합하면서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고 경종이 영조에게 시해 당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영조가 정미환국으로 민진원, 정호 등 일부 노론 대신들을 축출하고 이광좌, 조태억 등 소론 온건파인 완소를 등용함으로써 반란의 명분이 약화되자 다급하게 거사를 도모했다.

반란의 주도 세력은 이인좌를 필두로 영남의 정희량, 호남의 박필현, 경기의 권서린 등이었고, 평안병사 이사성, 총융사 김중기와 금군별장 남태징, 전라감사 정사효, 충청감사 권첨, 담양부사이자 경종의 처남 심유현 등이 동조했다.


1728년(영조 4년) 정월, 이인좌는 서울에 올라가 이하, 이유익 등을 만나 병력 동원 문제를 협의했고, 다시 영남으로 내려가 김홍수와 정희량과 함께 거병 날짜를 저울질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안성에 있던 봉조하 최규서가 영조에게 달려와 고변하고, 서울에서 내응하기로 했던 남태징과 김중기, 남하하려던 평안병사 이사성 등이 즉각 체포됨으로써 뒤틀리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이인좌는 3월15일, 서둘러 반란군을 이끌고 청주성을 급습하여 충청병사 이봉상과 청주영장 남연년 등을 살해하고 청주병영을 점령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오명항·박찬신·박문수에게 훈련도감 마병이 포함된 정예 군사를 내주어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관군은 서둘러 남하한 뒤 안성과 죽산 등지에서 반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고 이인좌를 생포하기에 이른다. 신천영의 지휘로 끝까지 저항하던 청주의 반란군 역시 상당산성이 함락되면서 와해되었다.

정희량이 이끌던 영남의 반란군은 3월 20일 안음에서 반란을 일으켜 거창, 합천까지 진격한 뒤 청주로 향하다가 관군의 반격으로 거창까지 밀려난 뒤 토벌되었다. 박필현이 이끌던 호남의 반란군도 전라감사 정사효의 변심으로 이렇다 할 전투조차 못한 채 죽거나 생포되었다.

당시 반란 세력들은 공공연하게 경종의 복수와 함께 밀풍군 이탄의 옹립을 부르짖었다.

그들은 영조의 등극으로 인해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삼종의 혈맥이 끊긴 것으로 보고 새 임금은

소현세자의 혈통에서 나와야 한다는 정통론을 앞세운 것이었다.

그 때문에 밀풍군은 반란 초기였던 3월 20일에 체포되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윽고 반란이 평정되자 관련 죄인들에 대한 국청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반란 주모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밀풍군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늘어놓았다.

생포된 뒤 한양으로 압송된 이인좌는 3월 26일 영조가 친국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이유익과 한세홍은 항상 밀풍군이 인망이 있다 했고, 이유익이 가서 보고 말했더니 밀풍군이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밀풍군이 자신들에게 적극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불충한 마음을 품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침묵이 부정이 아니라 긍정으로 읽히던 시대였다.


박필몽의 아들 박사관은 또 3월30일의 공초에서 맨 처음 반역 의사를 밝힌 사람은 이하였는데,

그의 사위 조덕정이 영조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소론 김일경의 외손이었으므로 영조가 즉위하자마자 역심을 품었다고 밝히고, 그가 이웃에 살던 밀풍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증언했다.

5월 2일, 임환의 증언은 더욱 강렬했다.

“심유현이 역심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밀풍군을 추대하려 했습니다. 밀풍군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늘 황포를 몸에 걸친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황포란 임금의 옷이니 밀풍군이 내심 보위에 뜻이 있었다는 뜻이다.

국청에서 그런 표현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밀풍군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영조는 적당들이 일제히 그를 거론하는 것이 간계임을 의심했지만 정황상 풀어줄 명분이 없었다. 고

심하던 5월 8일 국청을 앞두고 밀풍군에게 가벼운 칼을 씌우고 양 손에 고랑을 채우지 못하게 하며,

미리 먹을 것을 주고 땅에 자리를 깔아주라는 특명을 내렸다.

영조는 밀풍군의 처벌은 어쩔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고통만을 덜어주려 했던 것이다.


그날도 역시 밀풍군에게 유리한 진술은 나오지 않았다. 그

는 한결같이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했지만 조동규는 밀풍군이 이유익으로부터 거사가 실패하면 노량진 한강변으로 가서 배를 타고 도망쳐 외부의 반란군의 구원을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밀풍군 추대가 확실하게 본인에게 전해졌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또 이유익으로부터 평양감사 이사성과 이탄이 함께 총관이 되었으므로 입직한 가운데 익숙하게 상의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토설했다.

그때까지의 심문 결과만으로도 밀풍군은 역모 죄로 능지처사에 처하는 것이 마땅해 보였다. 하지만 영조는 다른 관련자들을 심문하면서 차일피일 처결을 미루었다. 혹시라도 그의 무죄를 증명할 만 한 증언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노론 신료들은 연일 왕법을 내세우며 역도의 수괴인 밀풍군을 처단하라고 보챘다.

그런데 6월 29일 영조가 고대하던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그날 춘천에 사는 심성연이라는 자가 나타나 역당이 추대하려던 사람은 밀풍군 이탄이 아니라 여흥군 이해라고 고변했던 것이다. 그는 오촌지간인 심상관이 역모에 필요한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들어주지 않자 어미를 통해 자신을 독살하려 했으므로 발고하는 것이라 했다

.

그가 고발한 반란 계획은 매우 자세했다.

역도들은 각각 급당,완당으로 나누어 일을 도모했는데,

급당은 이인좌·이사성·이유익 등으로 무신년에 난을 일으킨 급진세력이었고,

완당은 심상관의 가문인 청송 심씨와 음죽 목씨 등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심상관 무리가 이전부터 반역에 동조하는 무리와 ‘강아지씨혼사간선’이라는 암호로 소통하면서

큰 배를 사서 세곡을 훔치려 했고, 화폐 위조와 군기 제조, 요인 암살 등을 계획하고 10여 년 동안 실행에

옮기려 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여흥군 이해 집안에는 대대로 전해오는 은자가 있는데 이번 거사의 자금으로 쓰였다고 했다.


이와 같은 심성연의 증언은 무신난과 함께 은밀히 진행되었던 또 하나의 역모를 묘사하고 있었다.

영조는 즉시 국청을 열고 심상관을 잡아들여 심성연과 대질시켰지만 중도에 심성연의 말문이 막히면서 일방적인 무고로 결론지어졌다.

이에 실망한 영조는 그를 사형에 처했다. 그날 여흥군과 여릉군도 끌려와 심문을 받았지만 무사방면되었다. 그와 함께 밀풍군 이탄의 마지막 구명줄이 사라졌다.


1728년(영조 4년) 7월10일, 판의금 이집은 이탄의 죄명이 확실하니 왕법에 따라 처형하라고 상소했다.

그러자 이틀 뒤인 7월13일, 영조는 대신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밀풍군 이탄은 사람됨이 결코 이인좌 등과 반역할 자가 아니다. 흉적의 관문.격문에 그 이름이 낭자하지만 추대한 사람을 어찌 글에 나타내어 고할 수 있겠는가?

조덕정을 형신할 때마다 혹 밀풍에게 해로운 일이 있을까 염려했는데, 마침내 형장을 맞다가 죽었다.

조덕정은 역적 김일경의 외손이고 역적 이하의 사위인데, 그가 밀풍에 끌어댈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찌

형장을 참고 승복하지 않으려 했겠는가?

전에 비몽사몽간에 문득 밀풍과 서로 만나 흐느껴 울다가 목이 메어 놀라 깨었다.

그때에 처분하려 했으나, 조동규의 공초가 때마침 나왔으므로 결말을 짓지 못했다.

이제 조덕정이 죽었으므로 내 마음에는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이 일은 여흥군의 경우와 다르므로 그를 석방하면 조종 때에 법을 세운 뜻에 어그러질 것이니, 참작하여 부처하라.”

               

그처럼 영조는 끝까지 밀풍군을 죽이지 않고 유배형에 처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자 대신과 간관들이 크게 반발했다.

대사간 강필경은 어명의 부당함을 따지며 하루 빨리 그를 처형하라고 종용했다.

“예전부터 종신(宗臣)이 추대된 죄명을 지고도 천지 사이에서 편히 사는 자는 없었습니다.

역적의 공초와 격문이 낭자하여 엄폐하기 어려운데다가, 법이 지극히 중대하고 공론이 또한 엄하므로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로 굽힐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죄인 탄을 참작하여 부처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고 율문에 따라 처단하소서.”

이에 영조는 성인이 세상을 다스릴 때도 유언비어는 늘 있었는데, 자신은 이를 참작하여 처분한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라도 밀풍군의 삶을 유예시켜주려는 뜻에 불과했다.

경위야 어쨌든 왕권에 도전한 종친의 운명은 곧 죽음이었다. 신하들도 그런 임금의 결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역시 불충이 될 것이었다.

1729년(영조 5년) 2월 10일 도승지 조현명은 이탄이 체포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국법을 행하지 않음은

대간들의 게으른 탓이라고 질타했다.

그러자 28일 대사간 오명신은 종실이 군주로 추대되었는데 살려둔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면서 하루빨리 처단하라고 상소했다.

3월 28일 대사헌 송인명 등이 또 다시 처결을 강요하자 영조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를 자결토록 명하면서 친족들을 교화시키지 못해 흉적들의 구실을 삼게 했으니 통한스럽다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이탄이 자결할 때 독촉하지 말고, 검험할 때도 부관.의생.부리만 들어가 예를 갖추라고 명했다.

그렇듯 밀풍군 이탄은 영조에 의해 역신의 수괴가 아니라 억울한 왕족으로서 최후를 마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의금부와 사간원에서는 밀풍군이 죽자 역적에 대한 연좌법에 따라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가족들을 노적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적이란 국사범의 중죄인으로서 본인을 극형에 처하고 그 처자를 노비로 삼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말한다. 그러나 영조는 종친에 대한 신료들의 계속되는 압박에 기분이 상했는지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31년(영조 7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두 가지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조정을

뒤흔들었다.

첫 번째 사건은 무신난 잔당들의 지시를 받은 궁녀 박순정, 김순혜, 무당 태자 등이 뼛가루를 창경궁의

양화당, 세자궁, 빈궁의 침실 등에 묻고,세자와 옹주에게 타 먹이는 저주 행위를 하다가 들킨 것이었다.

영조는 그해 11월 효장세자의 갑작스레 병을 앓다가 죽은 이유가 저들이 몹쓸 것을 먹였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화순옹주도 홍진을 겪은 뒤 하혈하는 증세를 보였는데, 당시 태어난 네 명의 옹주에게도

독약을 먹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점진적으로 영조의 혈족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영조까지 몰아내 정권을 빼앗으려는 무서운 음모였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영조는 사건 가담자들을 색출하여 모조리 처형했다

 

한데 그 와중에 환관 최웅필이 궁궐에 침입하여 화약을 훔쳐 방화하려다 체포된 사건까지 일어났다.

최응필을 심문한 결과 궐내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뛰쳐나가면 은밀히 자객 이태건을 들여보내 영조를 죽이려 했음이 밝혀졌다.


일련의 두 사건은 우연히 발각되었지만 경각심을 품은 영조는 의금부에 엄중한 수사를 명했다.

그 결과 이 사건은 심성연의 고변대로 급수로 행해진 무신난의 연장선상에서 함께 이루어졌던 완수의 일환이었다.

매흉·화흉·방화로 이어진 그들의 계획은 여흥군 이해의 오촌 이엽이 구상했는데,

무신난이 실패로 돌아간 뒤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그들은 이전에 안흥에서 조세미를 탈취하여 막대한 군량을 확보하려고까지 했다.

곧 대대적인 관련자 색출과 체포가 이어졌다.

혐의자의 대부분은 무신난 당시 희생당한 소론과 남인의 후예들이었다. 한데 그들의 입에서 밀풍군 이탄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당시 체포된 심익연의 진술에 의하면

이사성·정사효·이인좌 등 준소 측 인물들은 밀풍군을 위해 일을 꾸몄지만 실패하면 여흥군 형제를 위해 재차 시도하겠다고 했고, 완소 측 인물들은 밀풍군이 유약하다는 이유로 여흥군 형제를 내세웠다.

4월 16일에 심문 받은 성탁은 이인좌가 반란을 벌일 때 밀풍군을 거론한 것은 실제로 그를 추대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고 자백했다.


그처럼 죄인들은 한결같이 ‘밀풍군은 허세이고 여흥군이 실세’라고 진술했다.

이같은 정황은 여흥군 이해의 아들과 동서지간이었던 심종연과 심지연 등 청송 심씨들의 심문과 진술을

통해 보다 확실해졌다.

그때에 이르러 영조는 2년 전 심성연의 고발 내용이 사실이었음을 알고 마른 침을 삼켰다.


영조 등극 초기에 소론 강경파와 남인에 의해 벌어진 일련의 반역사건의 진상이 완전히 밝혀졌다.

무신년에 이인좌, 이사성 등이 시도한 급수는 밀풍군을 추대했고, 경술년에 권중경, 권숙경, 심상관 등이 주도한 완수는 여흥군과 여릉군을 추대했다는 것이다.

경술년의 사건에서 궁중저주사건으로 청송 심씨, 나주 나씨가, 방화미수사건으로 사천 목씨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아울러 여흥군 이해와 여릉군 이기가 교형에 처해졌고, 이엽, 이전, 이형은 물고되거나 유배되었다. 하지만 밀풍군 이탄에 대한 신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반역자들에게 추대되었음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1737년(영조 13년) 8월 28일, 대사헌 송성명과 대사간 성덕윤은 밀풍군을 처단한 뒤 노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하루빨리 국법대로 시행하라고 상소했지만 영조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 후에도 노론의 공세는 끝없이 이어지면서 영조를 괴롭혔다.

결국 26년이 지난 1755년(영조 31년) 6월에 이르러 영조는 대사간 유언민, 집의 서명응의 소청에 따라 밀풍군의 가족에 대한 징계를 허락했다.

이때 영조는 자신이 10년 동안 서로 버티어 온 것은 슬픈 마음을 견디지 못해서였는데 이제는 참기 어려우므로 윤허한다고 밝혔다.

그해 7월에는 밀풍군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던 양반 송유가 종성부로, 그의 부친은 정의현으로 유배되었다.

1864년(고종 1년)7월, 고종은 홍계희, 심환지, 김달순, 김관주, 박엽, 신의학 등과 함께 밀풍군과 여흥군을 사면하고 복권시켜 주었다.

1908년(순종1년) 4월 30일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소청에 따라 한효순, 이징옥,정인홍, 김일경, 윤휴, 윤원형 등 종래에 역신으로 규정되었던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는데 여기에는 밀풍군 이탄과 함께

무신난을 주도했던 박필현, 심유현 등이 포함되었다.



 

⊙ 조문명         2019.07.21.비온 뒤 흐림

조문명; 소론

본관; 풍양(豊壤)

호; 학암(鶴巖)

증조부; 조형(趙珩)

조부; 조상정(趙相鼎)

부; 도사 조인수(趙仁壽)

모; 김만균(金萬均)의 딸


1705년(숙종 31) 생원시에 합격하고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다.

1721년(경종 1) 수찬을 거쳐 부교리가 되어 붕당의 폐해를 통열히 논했고, 문학(文學)으로 옮겨 마침 왕세제로 책봉된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보호에 힘쓰면서 김일경(金一鏡) 중심의 소론 과격파(峻少)에 대립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지평으로 발탁되어 겸동학교수·세자시강원겸보덕을 지냈다.

다음 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에 승진되어 파붕당의 설을 제창하다가 민진원의 배척을 받았다.

이어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진출하면서 이조참의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그 해 딸이 왕세자(영조의 제1자, 사후에 孝章世子라 불림)의 빈(嬪)이 되자 호조참판과 도승지에 올라 수어사·어영대장을 겸했으며,

이듬해이인좌의 난 진압에 공이 있다 하여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2등에 녹훈, 풍릉군에 책봉되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에 이조참판 송인명과 함께 탕평론을 재천명했고,

이후 대제학 이조판서를 거쳐 1730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이 후 『경종실록』 총재관으로서 이를 완성,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본래 소론 가문 출신이었지만 당쟁의 폐를 걱정하여 붕당의 타파와 공평무사한 탕평의 실현을 정치 목표로 하였다. 또, 억강부약과 시비절충·쌍거호대를 그 실천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온건론자 중심의 노·소 연립정권을 구축하는 데 주력, 노·소론의 준론자들로부터 세상사람을 속이고 우롱한다는 배척까지 받았지만, 영조 초의 소론계의 반란[ '이인좌 난'과 계속되는 역모 적발로 불안했던 왕권의 안정과 확립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또, 노비종부법의 폐지, 조운수로의 편의를 위한 안흥목의 개척, 주전의 필요성 역설 등과 같이 민생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소론이면서도 외가와 처가가 노론 집안이어서 노론계 명사와 널리 교유하였다.

특히 송인명, 김재로 등과 매우 친밀하였다.

저서로 '학암집' 4책이 남아 있다. 

⊙ 사도세자          2019.07.21.일요일,비

사도세자; 이 선(愃).

생졸; 1735-1762년

본관; 전주(全州)

호; 의재(允寬)

가계도

영조

  영빈 이씨(映嬪李氏)

    사도세자

       경의왕후(혜경궁) 홍씨; 영의정 홍봉한의 딸

          의소세손

          정조(이산)

          청연군주

          청선군주 

       숙빈 임씨;

           은언군(이언)

           은신군(이진);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입적하여 흥선대원군으로 하여

                              제26대 고종이 탄생한다.고종은 은신군의 증손자다. 

       명빈 박씨

           은전군;


사도세자의 어머니는 선희궁 영빈 이씨며 영조에게 친자식에게 대처분을 내리자고 말한 여인이다.

한양굿이나 경기도 당굿에서는 지금도 사도세자를 별상이라며 모신다.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원혼이 신의 지위로까지 격상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사도세자는 살인자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살인 방식은 매우 끔찍하다. 내관 김한채를 죽였다.
그리고는 그의 목을 잘라 들고 궁내를 돌아다녔다. 그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목격담이다.

일부의 주장처럼 노론 집안인 친정을 비호하려는 마음에 혜경궁 홍씨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세자 본인의 입으로도 그 사건을 시인하고 내관 김한채를 위해 휼전을 내리도록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그 후에도 살인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도 죽였고 점치는 맹인도 죽였다.

그가 죽인 사람의 수는 오늘날 어지간한 연쇄살인범이 죽인 숫자보다 더 많다.


정조가 읽고는 타이틀을 '천유록'을 '대천록으로 직접 고쳐준 책 속에 사도세자 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들어있다.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다.

사도세자는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였다.


이는 영조가 직접 말한 내용이며, 세자를 폐하며 발표한 폐세자반교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선의 왕자 중에도 살인에 관여하고도 왕이 된 왕자들이 없지는 않다.

이방원과 수양대군 등이다.
그러나 그 살인은 쿠데타나 권력 다툼의 와중에 일어났으며 그 경우에도 왕자가 직접 때려서 사람을 죽인

경우는 드물다.
연산군이 포악하다 하나 직접 손으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없다.

때리다 말았고 결국 다른 사람이 죽였다.


세자가 무고한 사람을 100여 명이나 직접 살해한 경우는 동서양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그날 밤 영조는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소리친다.

그 첫마디 역시 살인에 대한 것이었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이지 않았느냐?”
영조는 ‘박살’이라고 했다. 박살은 손으로 때려서 죽이는 것 아닌가. 세자가 제 자식을 낳은 후궁을 때려서 살해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참혹한 행위가 극에 달했음에도 모두 쉬쉬했다. 병으로 한두 사람을 때려죽인 수준에서 벗어나 습관적 살인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한중록'에 의하면 어머니인 선희궁 영빈 이씨의 내인도 살해당했다.
어머니를 모시는 내인을 살해한 행위는 효를 강조하는 유교국가에서 용납될 수준이 아니건만 모두들 입을 다물었는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결국 일은 점점 심각해져 심지어 친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고 그 어머니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폐세자반교문에 나오는 선희궁 영빈 이씨의 증언이다.
“요사이 그곳에 갔다가 거의 죽을 뻔 했는데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이런데도 사도세자가 정상적으로 등극할 수 있었을까?
성리학이 통치이념인 조선에서 무고한 백성 100여 명을 직접 살해하고 친모의 내인을 죽인 자가 왕이 될 수는 없다.
맹자는 신하가 군주를 시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제선왕의 질문에, 인을 해치고 의를 해치는 자는 군주가 아니므로 군주를 시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죽여도 좋다고 한 것이다.


사도세자는 왕이 되면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올 것이 예고된 사람일 뿐이었다.
영조조차 이렇게 친제 묘지문에서 말한다.
“아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시절에 이런 자, 나 듣지 못했다.
세자의 이런 패악은 일찍이 전라도에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가?
전라도 용안(익산)현감이던 이정은 그 소문을 상소하면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세자의 그 패악이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백성들은 수군거리고 희생자는 늘어나기만 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장인인 홍봉한은 사건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대신들은 세자를 비호하면서 병으로 인해 생긴 아무것도 아닌 사건인 것처럼 말한다.
신하들은 사도세자가 왕이 되면 그의 습관적 살인이 모두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 기대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세자는 죄책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고한 백성을 더 죽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아버지 영조에게 반발해 두 번이나 우물에서 투신자살 소동을 벌인 불효를 저질러도 영조가 너무 심하게 대했기 때문이라 말하고,
죄 없는 백성을 무수히 죽여도 병에 의한 것일 뿐이며 기본적으로 세자의 자질은 훌륭했다고 설명한다.
친어머니가 영조의 신변이 위험하니 세자를 죽이자고 말해도 오히려 궁중의 여인이 국본을 흔들었다고 말하고 만다.
당시 신하들이 한 이야기다. 당시 신하들의 태도도 문제가 많지만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은 그 태도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세자의 살인은 제대로 언급되지 않을까? 그 출발점은 『승정원일기』가 삭제된 영조52년 2월일 것이다.
정조의 효심은 아버지를 흉악한 살인마로 내버려 둘 수 없었고 그래서 일기는 오려지고 세검정에서 씻겨 사라졌다.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승정원일기』는 사도세자 관련 부분에서는 유독 너덜너덜하다.
오려지고 통째로 찢겨져 나갔다. 찢겨져 나간 곳이 100여 곳이 넘는다. 여기에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이 있었을 것이다. 『승정원일기』 곳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아래 한 장은 칼로 삭제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此下一張刀削 丙申因傳敎洗草]”
그 후 민간기록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정조는 『현륭원지』를 작성하면서 단 한군데에서도

사도세자의 비행을 언급하지 않는다.
현륭원지』를 읽은 사람이 어찌 사도세자가 흉악한 연쇄살인범임을 알겠는가?
게다가 영남학자들은 만인소를 올리면서 사도세자 의 억울함을 밝히겠다고까지 했으니...
역사의 조작을 반드시 악인이 하는 것만은 아님을 잘려나간 『승정원일기』는 잘 말해준다.
진실을 오려내는 역사조작을 효심 가득한 계몽군주 정조가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래서 오늘날 경기도당굿에서는 수많은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도세자를 신처럼 모시며,
방송 드라마는 당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그려 시청자들은 눈물로 그를 동정하게 되었다.
시중 서점에는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도세자는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역사서까지 진열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가 당쟁에 사로잡혀 자식을 죽였다는 설명도 별다른 의심 없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효심 가득한 정조가 저지른 역사조작, 250년이 지난 지금도 얼마나 성공적인가?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퍼와봅니다.
역사의 조작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지만, 사실 저걸 조작이라고 하기엔 실록에 그 정황이 너무 노골적으로 나와있지요.
아래는 정조가 세손시절 승정원 일기의 내용을 지워달라 애원하는 기사입니다.
 왕세손(후에 정조)이 수은묘(垂恩廟:사도세자의 묘)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재실(齋室)에 나가 여러 대신(大臣)들을 소견(召見)하고 하령하기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경들을 소견하였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목메어 스스로 견디지 못하다가 하령하기를,
“그때의 처분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랴마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말이 많이 실려 있어서 세상에 전파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데, 이제 내가 구차하게 살아서 지금에 이른 것도 이미 사람의 도리로 견딜 것이 아니거니와, 완고하게 아는 것이 없는 체한 것은 다만 대조(大朝)께서 위에 계시고 또 그때의 처분에는 감히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 그지없는 아픔을 생각하면 어찌 일찍이 먹고 숨쉬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늦추어진 적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 또 대조의 명을 받아 외람되게 송사(訟事)를 듣고 판단하는 책임을 맡았으니, 모년(某年)의 일기(日記)를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을 버려두고 태연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아들의 도리이겠는가? 지금의 의리로는 모년의 일에 대하여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다시는 눈을 더럽히고 이[齒]에 걸지 말아야 옳을 것이다. 사초(史草)로 말하면 명산(名山)에 감추어 만세(萬世)에 전하는 것이므로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마는, 일기는 이것과 달라서 그것이 있든 없든 관계되는 것이 없다. 이제 이것을 내가 청정(聽政)한 뒤에도 둔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백료(百僚)를 대하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많으나 억제하고 차마 말하지 못한다.”
하고는 눈물이 비오듯하니, 좌우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정조가 세손 시절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사도세자에 관한 기록을 지워달라 애원하는 장면.
사초는 감히 어떻게 해달라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일기는 중요치 않으니 지워달라 울며 애원합니다.
그러나 영조는 이 요구를 거절하는 듯...하다가 결국 일기를 세초해버립니다.)
임금(영조)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이번에 하교한 것은 나라를 위하고 충자(沖子)를 위한 것이나,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비사(秘史)는 의논할 수 없더라도, 《정원일기(政院日記)》로 말하면 천인(賤人)들도 다 보고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 것이다. 사도(思悼)가 어두운 가운데에서 알면 반드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유족(裕足)을 끼치는 뜻이겠는가? 비사가 이미 있으니 일기가 있고 없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오늘 시임(時任)·원임(原任)이 마침 입시(入侍)하였으므로 이미 하교하였다. 승지(承旨) 한 사람이 실록(實錄)의 예(例)에 따라 주서(注書) 한 사람과 함께 창의문(彰義門) 밖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洗草)하라. 내 마음은 종통(宗統)에 대하여 광명(光明)하나 이 일은 수은(垂恩)에게 차마 못할 일이었으니, 이번 하교는 병행하여도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일기를 보더라도 다시 그 글을 들추는 자는 무신년의 흉도(凶徒)의 남은 무리로 엄히 징계할 것이다. 다들 반드시 이 말에 따르고 국법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
(정확히 말하면 정조가 직접 조작을 한 건 아니고 세손시절 영조에게 간청을 해 허락을 얻어낸 것이지요.
또,사도세자가 왕손의 어미, 즉 후궁을 때려죽인 것에 대한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대화 역시 실록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세자가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세자가 죽인 여인)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代理)하는 저군(儲君)이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禁川橋) 위에서 대죄하였다. 』
(재미있는 건 이 직후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행실을 옹호해주기 급급하고,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지적하는 게 아닌 이 일을 고한 나경언을 죽여야한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제목은 역사 조작이라 이야기 했고 그에 대한 지적을 본문으로 이야기 했지만,
조작하려고 해도 결국에 기록이 남는 것이 또 역사인듯 싶습니다.
이렇게 기록이 다 남아있는 걸 보면요.

이복형인 효장세자(진종으로 추존)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10세 때 혼인해 곧 별궁에 거처하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매우 영특해 3세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우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떼었다. 또한, 글씨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10세 때에는 이미 정치에 대한 안목이 생겨 집권 세력인 노론들이 처결한 바 있는 신임사화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1749년(영조 25)에 부왕을 대신해 서정을 대리하게 되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영조에게 그를 무고하였다.

성격이 과격한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크게 꾸짖으니 마침내 그는 격간도동이라는 정신질환에 걸렸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한 나라의 서정을 맡고서도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그 병의 증상에 대해 그의 장인인 홍봉한은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하였다.

1761년에 계비 김씨의 아비인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영조는 마침내 나라의 앞날을 위해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 않자, 그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하였다.

장조가 죽은 뒤 영조는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 때는 친히 나아가 스스로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고, 1899년에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사도세자가

태어나고 막 돌이 되자마자 왕세자에 책봉. 영조는 나이 마흔에 얻은 사도세자가 너무나도 이쁘고 대견스러워서 왕세자로 책봉했으나 이것부터가 사도세자에겐 비극의 시작. 사도세자가 왕세자가 되면서 생모와 떨어져 동궁전에 기거하게 되었고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이 사도세자의 시중을 듬. 궁인들은 세자의 생모 영빈이씨가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헐뜯고 업신여겼으며 세자는 이곳에서 어머니의 사랑도 제


대로 받지 못한채 자람 

경종 시절 온갖 고생을 겪으며 믿을 건 자신밖에 없다는걸 알고 완벽주의자가 된 영조는 사도세자도 그렇게 완벽한 왕으로 만들기 위해 엄격하게 키움. 사도세자가 4살때부터 구박하기 시작했으며 사람들 앞에서 세자를 망신주기를 반복함. 날씨가 좋지 않으면 사도세자가 덕이 없어서 그런거다라고 까서 9살의 사도세자는 항상 오늘 날씨가 어떤지를 물어봄 

공식적인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정성왕후(사도세자는 영빈 이씨에게 태어난 즉시 정성왕후의 자식으로 입적됨)가 병환이 깊어지자 사도세자는 인삼물을 손수 떠먹이며 통곡하였는데 영조가 들어오자 울던것도 멈추고 방 구석에 쳐박혀 벌벌 떰. 영조가 어린 사도세자를 정신적으로 심하게 학대했다는걸 보여주는 대목.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질문을 던져 사도세자가 뭔 대답을 하던 별 시덥잖은 이유로 질책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한 문제하고 한 무제 중에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묻자 사도세자가 "한 문제입니다"라고 답하자 "이는 나를 속이는 답변이다! 너는 분명 무제를 통쾌히 여기고 있을 텐데 어째서 문제가 낫다고 하느냐?" 라고 강하게 질책함 
그리고 “너는 앞으로 문제·경제의 반 정도만으로 나를 섬겨도 족하다. 내가 매양 한나라 무제로 너를 경계했는데, 너의 시 가운데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는 글귀가 있어 기(氣)가 크게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며 갈굼 

영조는 자주 자신이 왕권에 욕심이 없다는걸 어필하기위해 선위쇼를 벌이곤 했는데 이때마다 애꿎은 고생을 한게 사도세자 
영조는 사실 왕권을 남에게 줄 생각이 전혀 없지만 정치적 용도로 선위쇼를 벌였고 그때마다 사도세자는 바닥에 엎드려 명을 거두어 달라고 빌어야만 했음. 사도세자가 15살때 영조는 선위쇼를 벌이고 사도세자와 신하가 반대하자 그럼 선위말고 대리청정이라도 해 라고 해서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게 됨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 "나는 앉아서 지켜보겠다. 세자 너는 신하들 말에 그냥 알았다 하지 마라.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다시 물어보고 의견을 참작한 다음 결정해라." 라고 해놓고 사도세자가 뭔 결정을 하면 "너의 말이 맞긴 한데, 애초에 그거 내가 한 건데 왜 니 멋대로 해? 나에게도 물어봐야 될 거 아니냐." 라고 꾸짖음. 그리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일을 처리함 
그래서 사도세자가 모든일을 다 영조에게 아뢰고 어떻게 할지 물어보면 그런것도 자기 스스로 결정 못하고 물어본다고 깜. 이에 사도세자는 눈물을 흘리다 혼절하고 궁인들에게 실려나가기 여러번이었고 신하들은 보다못해 그만좀 세자를 구박하라고 영조에게 항의함 

. 영조는 지나치게 강박증에 깐깐한 성격이라 자기가 보기 싫은걸 보면 눈을 씼고 듣기 싫은 걸 들으면 귀를 씼곤 했음. 한번은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밥 먹었느냐라고 묻고 사도세자가 네라고 대답하자 사도세자 보는 앞에서 귀를 씼음. 또 영조는 자식들에 대해 좋아하는 자식은 지나치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자식은 지나치게 싫어하는등 호불호가 심했는데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는 후자. 
아버지에게 미움받는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는 서로 우리 남매는 아버님 귀 씻을 물이다라며 위로하던 사이였고 사도세자는 화협옹주를 유독 애달파하며 챙겼으나 사도세자가 18세일때 홍역이 돌아 화협옹주가 사망함. 
사도세자도 이때 홍역을 앓았었는데 영조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못했다는 이유로 눈 내리는 한겨울에 3일동안 석고대죄를 시킴. 그리고 화협옹주가 사망한지 2주도 안되어 영조는 다시 한번 선위쇼를 벌였고 누이를 잃은 슬픔과 홍역앓이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사도세자는 무려 10일간 또 눈밭에서 석고대죄를 하게됨.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자신이 시를 읽는동안 너가 눈물을 흘리면 효성이 있다는걸로 판단하고 전교를 거두겠다고 하고 사도세자는 애를 써서 눈물을 흘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석고대죄가 소극적이라고 화를 냈고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위해 머리를 바닥에 쾅쾅 찧어 피범벅이 되어야 했음.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가 병이 들어 앓아눕자 사도세자는 당연히 어머니의 병문안을 감. 여기서 자기의 누이인 화완옹주를 만남. 화완옹주는 화협옹주와는 달리 영조가 엄청나게 이뻐하는 딸이었음. 화완옹주도 영빈이씨의 자식이니 병문안을 온거고 사도세자와 화완옹주 둘이 만난건 우연이었는데 이를 본 영조는 엄청나게 화를 내며 사도세자보고 꺼지라고 함. 사도세자는 허겁지겁 창문을 넘어 달아났고 영조는 동궁을 나와 청휘문 안에 들어올 생각도 말라고 꾸짖음. 사도세자도 이에 폭발해서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이런 대접을 받으니 억울해서 약먹고 자살하겠다고 울부짖다가 여러사람들이 말려서 겨우 진정됨. 영조는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딸" 화완옹주가 "자기가 가장 증오하는 아들" 사도세자가 함께 있는것도 극도로 싫어함. 
이로인해 정신질환이 생긴 사도세자는 동궁전에 있지 않고 취선당에 음식을 만드는 곳인 밧소주방에 자주 멍하니 서있곤 함. 그곳이 깊고 고요하여 마음이 평온해진다는 이유였음. 그때 영조가 갑자기 이곳에 들이닥쳐 사도세자보고 술을 마셨다고 닥달함. 당시 영조는 금주법을 내려 술을 엄하게 금지하고 있었고 사도세자가 옷이 풀어헤쳐진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에 술을 먹었다고 단정한것임. 겁에질린 사도세자는 술 먹지도 않았는데 먹었다고 자백했고 이를 보다 못한 사도세자의 보모 최 상궁이 "술을 먹었으면 술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소서" 라고 항의하기도 함. 사도세자는 이에 최상궁보고 "먹고 아니 먹고 내 먹었노라 아뢰었으면 자네 감히 말을 할까 싶은가. 물러가라" 라고 꾸짖었고 이에 영조는 "어른 앞에서는 견마도 꾸짖지 못 하는데 너는 어떻게 내 앞에서 최상궁을 꾸짖는거냐" 라고 사도세자를 꾸짖음. 그리고 신하들을 시켜 사도세자를 '훈계'하라고 지시함. 이에 원통함이 터진 사도세자는 자신을 훈계하러 온 신하들에게 욕을 하며 쫒아내는데 이 와중에 촛대가 쓰러져 화재가 남. 영조는 이를 사도세자가 일부러 방화했다고 생각해서 사도세자를 신하들 앞에 세워놓고 "네가 불한당이냐?" 라고 꾸짖음. 
사도세자는 겁에질려 아무말도 못하고 그 굴욕을 감수한뒤 억울함에 나 이렇게는 도저히 못살겠다며 낙선재 우물에 몸을 던짐. 간신히 신하와 나인들이 몰려들어 건져내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음.

영조는 사도세자의 생일인 매년 1월 21일마다 신하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사도세자를 세워 놓고 깜. 생일때마다 생일상은 커녕 영조에게 욕을 먹으니 세자는 생일때마다 전전긍긍함. 하도 이에 시달리다보니 사도세자 사망 2년 전 생일에는 서러움이 폭발해서 상욕을 하며 화내고 서러워하며 살아 뭣하겠냐며 세손 남매가 문안을 와도 부모도 모르는 것이 자식을 어찌 알겠냐 만나보지도 않음. 

사도세자는 세자의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해 1760년 세자가 온양으로 거동할때는 호위병력이 고작 500명뿐이었고 세자의 뒤를 따르는 세자의 사부와 빈객들도 한명도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일국의 세자의 행차가 고작 이정도냐? 라는 탄식을 하기도 함. 이때 여름에 가뭄이 심했는데, 영조는 이것 역시 모두 다 세자 때문이라며 욕설을 했고 사도세자는 견디지를 못함. 
사도세자는 좁거나 어두운 데 혼자 있으면 극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강박증인 의대증에 걸렸음. 
옷을 입으면 영조에게 가서 질책을 들어야 하는데 그러한 상황이 계속되니 아예 옷 입는거 자체를 두려워함. 한 벌을 제대로 갈아입지를 못하고 옷을 불사르기도 하며 옷이 귀신인지 아닌지 걸어두기도 함. 
사도세자도 자신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걸 잘 알고 있어서 장인과의 편지등을 통해 자신이 정신병에 걸린것을 한탄함.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합니다” 
경종시절에 온갖 죽을 고비를 다 겪었다는 영조도 고작 4년만 참으면 되었으며 선조에게 핍박받았다는 광해군도 10년만 참으면 되었음. 하지만 사도세자는 하필 영조가 조선왕중에서도 역대급으로 장수하였기에 자기가 뒤주에 갇혀 죽을때까지 20년 이상을 영조의 갈굼속에서 살았음. 
심지어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임오화변이 있은지로부터도 14년이 더 지나서야 영조가 죽음.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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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장세자(추존왕 진종)          2019.07.21.일요일,비

효장세자(孝章世子); 이 행(緈)

생졸; 1719년(숙종45년)~1728년(영조4년)

1719년(숙종 45년) 2월15일, 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빈 이씨는 이준철의 딸로 동궁전 나인이었는데 영조가 왕자 시절 사가로 불러들여 첩으로 삼았다.

효장세자는 숙종의 첫 손자이자, 그의 생전에 태어난 유일한 손자였지만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상중에 태어난 탓에 '숙종실록'과 '경종실록'에 출생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노론과 소론이 각축전을 벌이던 경종대 후반, 왕세제로 책봉된 연잉군 이금은 목호룡의 고변으로 벼랑 끝까지 내몰렸지만 이복형 경종의 강력한 비호로 인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갖은 고난을 감내하고 보위에 오른 뒤에도 그는 정적인 소론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1728년(영조 4년) 3월 이인좌, 정희량, 박필현 등 소론 급진파인 준소와 남인이 합세하여 무신난을 일으켰다. 갑작스런 반란에 영조는 크게 당황했지만 곧 북상하던 이인좌의 반군을 제압하고 영남과 호남의 잔당까지 평정함으로써 사태를 조기에 수습했다.

한데 그해 11월 외아들 효장세자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홀연 세상을 떠났다. 효장세자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심지가 굳었으며 효성이 지극했으므로 그를 잃은 영조의 슬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30년(영조 6년) 3월, 궐내에서 매흉 흔적이 발견되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수사 결과 무신난에 연계된 소론과 남인 일파의 조종을 받은 궁녀들이 창덕궁 일대에 인골과 저주물을 묻어놓았고, 과거에는 그런 흉물을 음식물에 섞어 세자와 갓난 옹주들에게 먹인 사실이 밝혀졌다. 비로소 효장세자의 사망 원인을 알게 된 영조는 분개하여 그 동안 펼쳐왔던 탕평책을 철회하기에 이른다. 그로 인해 정국은 노론의 일방독주로 귀결되었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로 추락하고 말았다.


1720년(숙종 46년)에 경종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병약하여 원자를 얻지 못하자 후계와 관련된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심해졌다. 이듬해인 1721년(경종 1년) 8월 연잉군이 노론의 적극적인 공세에 힘입어 왕세제가 되었다. 그와 함께 이씨는 내명부 종5품 소훈(昭訓)이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해 10월 노론은 조성복의 상소를 통해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면서 정쟁을 격화시켰다. 그 결과 12월 소론 강경파였던 김일경의 탄핵으로 조성복과 이를 배후에서 조종한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1722년(경종 2년) 3월 연잉군의 측근이었다가 변심한 목호룡이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그 과정에서 소훈 이씨가 죽었다고 고변했다. 이를 기화로 노론 4대신이 처형당하고 수많은 노론 인사가 축출되면서 소론이 정권을 잡았다. 이 사건이 영조가 평생 노론으로부터 의리론으로 발목을 잡히게 된 신임사화이다. 1724년(경종 4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희생자들의 혐의는 모두 목호룡의 무고로 치부되었고, 이씨의 죽음에 대해서도 흐지부지 넘어갔다. 이때 소훈 이씨는 내명부 정4품 소원(昭媛)에 추증되었고 아들 이행은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


1725년(영조 1년) 2월 25일, 우윤 심정보가 경의군을 왕세자로 봉하자고 상소했지만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튿날에는 예조판서 민진원이 재차 세자 책봉을 간청했다.

“지금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니, 제일 먼저 힘써야 할 것은 일찍이 국본을 정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영조는 그와 같은 신료들의 연이은 간청에도 가타부타 뜻을 밝히지 않고 고심하는 자세를 취하더니, 그날 밤 4경에 갑자기 2품 이상 육조의 장관과 양사·옥당을 소환한 다음 경의군 이행을 왕세자로 봉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이틀 뒤인 27일에는 왕세자의 생모인 소원 이씨를 내명부 정1품 정빈(靖嬪)으로 추증했다. 이는 세자 책봉이 노론 정파의 뜻이 아니라 군왕인 자신의 의지라는 것을 내외에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해 3월 20일, 인정전에서 왕세자의 책봉례가 거행되었다. 그때부터 효장세자는 7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연에 참여하여 제왕수업을 받았다. 그해 3월 26일자 실록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왕세자가 빈객과 상견례를 행했는데, 모습이 의젓하고 행동이 침착했으므로 보는 사람이 흠모하여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해 11월 26일 호조판서 신사철은 명나라 사신이 세자를 만나본 다음 극구 칭찬했다는 말을 영조에게 전했다.

“칙사가 세자를 보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역관에게 말하기를 귀국의 세자는 중국에서도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는데, 내가 돌아가서 황제께 말씀드리면 반드시 내려주는 물품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효장세자는 아버지 영조를 빼닮아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했다. 어느 날 젊은 내관 두 사람이 말다툼하면서 시끄럽게 굴자 세자는 나이 많은 중관을 부르더니 그들을 가리키며 다시는 자신을 모시지 못하게 하라고 일렀다. 중관이 까닭을 물으니 세자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전에 내 앞에서 서로 다투어 공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중관은 세자에게 그와 같은 처분은 임금에게 여쭈어야 한다면서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겠다고 달랬다. 세자는 평소 중관과 함께 학문에 몰두할 뿐 젊은 내관들과 가볍게 어울리지 않았다. 호기심 많을 나이인데도 장난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신기한 물건이 있으면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

어느 날 서운관에서 탁상시계인 문신종(問辰鐘)을 바치자 그냥 서당에 놓아두었다. 한데 젊은 내관이 그것을 구경하다 잘못 건드려 고장이 나버렸다. 영조가 서당에 찾아왔을 때 중관이 그 일을 고하면서 내관을 처벌해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영조는 우연히 일어난 불상사이니 문책하지 말라고 명하자 곁에 있던 세자가 빙그레 웃었다. 영조가 까닭을 물으니 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하찮은 물건 때문에 내관을 처벌하라는 것이 가소로워 웃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영조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즐거워했다.

“세자의 도량이 너그러워 이처럼 용납하니 우리 동방의 복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30년(영조 6년)에 3월, 효명세자의 사인이 밝혀지면서 한동안 조용하던 조정에 피바람이 불었다. 영조가 궐내에 행차하다가 여러 전각 근처에서 흉물이 묻혀있는 흔적을 발견하고 의금부에 조사를 명했던 것이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소론 일당의 지시를 받은 궁녀 박순정, 김순혜, 무당 태자 등이 과부 이세정으로부터 건네받은 사람의 뼛가루를 창경궁의 양화당, 동궁, 빈궁의 침실 등에 묻었고, 예전부터 그것을 왕세자와 여러 옹주의 음식에 타 먹였던 것이다. 영조는 비로소 효장세자의 죽음이 저들의 지속적인 매흉(埋兇)과 화흉(和凶) 탓임을 알게 되었다. 그달 9일자 실록의 기사에는 분개한 영조의 목소리가 가감없이 실려있다.

‘저번에 거동했을 때 내전을 경계하며 지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비로소 수상한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빈궁으로 가는 길에 곧 그 흔적을 붙잡게 되었는데, 대체로 창경궁 근처는 한 조각도 깨끗한 땅이 없었다. 그래서 박순정에게 매흉한 곳을 가리키도록 하고 파보았더니 뼛가루와 뼛조각 및 쇠기름 같은 물건들이 곳곳에 있었고 빈궁 및 옹주방의 담장 밖에도 모두 묻은 데가 있었다. 이 얼마나 흉악한 속셈이란 말이냐.’

궐내에서 매흉과 화흉을 주도한 박순정은 효장세자를 두 살 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 보살폈던 최측근 궁녀였으니 영조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효장세자가 요양을 위해 거처를 옮겼을 때도 계속 따라다니며 독수를 펼쳤다.

그녀가 세자에게 먹인 뼛가루의 재료는 대현산의 여러 무덤에서 채취했거나 길가에 거적으로 말아놓은 시체, 혹은 불에 탄 사람의 해골이었다. 끼니 때마다 그처럼 비위생적인 흉물을 섭취한 효장세자는 단기간에 위중한 상태에 빠져들었고, 병의 원인을 알 리 없는 의관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효장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박순정 일당은 세자의 동복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에게도 화흉을 저질렀다. 그 무렵 화순옹주는 홍진과 함께 하혈 증세로 시달렸다. 박순정은 새로 태어나 강보에 싸인 네 명의 옹주에게도 독약을 먹였다고 자백하여 영조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사건 당일 영조는 대신들과 사헌부, 사간원, 의금부 당상, 좌·우포도대장을 불러들인 다음 새벽 3시에 국청을 열고 죄인들을 심문했다. 그리하여 주모자 박순정과 이세정, 그들을 도와 궐내에 흉물을 묻거나 죽에 타서 먹인 시비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듬해 10월까지 계속된 수사에서 전라감사 정사효의 군관을 지냈던 박도창과 정사효의 첫째아들 정도륭, 둘째아들 정도중 등이 배후인물로 밝혀졌다. 모두가 지난 무신난의 역도들과 관련된 인사들이었다. 박도창은 여종 하복랑을 궁궐로 들여보내 궁녀들에게 흉물을 넘겨주었고, 소요되는 비용은 정도륭이 지원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소론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론을 제거해야 하고, 노론을 제거하려면 그들이 받드는 영조를 제거해야 했다. 바로 그 시작이 임금의 피붙이인 세자와 옹주들의 제거였다.

엽기적인 매흉·화흉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던 4월 중순, 19세의 어린 환관 최웅필이 한밤중에 궁궐에 침입하여 화약을 훔쳐 방화하려다 기찰하던 군사에게 체포되었다. 부쩍 의심을 품은 영조가 앞서의 사건 관련성을 의심하여 엄중한 심문을 명했다. 심한 매질을 견디지 못한 최응필은 자신이 정사효의 일가붙이인 남인 박재창의 지시에 따라 일단의 노비들을 궐내에 잠입시켜 불을 지르고, 궁인들이 놀라 뛰쳐나가면 자객 이태건으로 하여금 임금을 죽이려 했다고 자백했다.

연이어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은 궁궐 안에 해코지를 하면서 불을 지르거나 저주물을 묻어 영조의 피붙이들을 제거함으로써 왕실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온건한 방법[緩手]의 역모였다. 여흥군 이해의 오촌 이엽이 구상한 이 계획은 급진적 방법[急手]의 역모인 무신난이 실패로 돌아간 뒤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겨진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영조 등극 초기에 소론 강경파와 남인에 의해 벌어진 복잡다단한 역모의 진상이 완전히 밝혀졌다. 무신년에 이인좌, 이사성 등이 시도한 급수는 밀풍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경술년에 권중경, 권숙경, 심상관 등이 주도한 완수는 여흥군 이해나 여릉군 이기를 염두에 두고 효장세자를 살해함으로써 목표에 한 발자국 다가섰지만 눈썰미가 남달랐던 영조에 의해 꼬리가 잡혀 일망타진되고 말았던 것이다.


황제의 이름으로 남다

1735년(영조 11년) 3월 16일, 영조는 맏며느리 조씨를 현빈(賢嬪)으로 책봉했다. 현빈은 그 후 사고무친한 대궐에서 한많은 세월을 보내다 1752년(영조 28년) 11월 초순, 돌연 병석에 눕더니 남편의 기일을 하루 앞둔 14일에 창덕궁 의춘헌에서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회고에 의하면 본래 효장세자의 기일과 현빈의 어머니의 기일이 같은 날이었다. 그 때문에 현빈은 매년 11월이 되면 오면 음식을 삼갔으므로 토황증이 여러 해 누적되어 병을 얻었다고 한다.

그녀는 평소 시아버지 영조에게 효성을 다했는데, 방안의 의자가 차가울까 염려하여 요를 깔아놓아 따스하게 덥혔고, 늘 영조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수라상에 올리곤 했다. 영조는 죽은 현빈의 처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삶은 밤이 소반에 담겨있는 것을 보고 더욱 애달파했다. 그녀는 몸이 아파서 밤을 삶아놓고도 바치지 못했던 것이다.

“아, 슬프다. 무신년에 눈물에 뒤범벅이 되어 효장의 행록을 지었는데, 이제 이 효부의 행록을 또 다시 눈물에 뒤범벅이 되어 쓰는구나. 멀리 푸른 하늘을 바라보니 억장이 무너진다. ……임신년 정월 11일에 시호를 효순(孝純)으로 내렸다. 불쌍한 나의 효부여! 걸맞는 시호를 얻었도다. ……내가 늙은 나이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들과 며느리의 행록을 지었으니 감회가 어떠하랴. 그러나 옛 슬픔과 지금의 슬픔으로 이 아픈 마음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눈물 흘리고 오열하며 쓰노라니 밤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깊으냐!”

효장세자는 훗날 이복동생 사도세자가 폐서인되면서 세손이 양자로 입적되자 승통세자(承統世子)라는 별호를 얻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9일 정조는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를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현빈을 효순왕후(孝純王后)로 추숭했다.

1908년 대한제국 황제 순종에 의해 진종은 소황제(昭皇帝), 효순왕후는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함께 추존되었다. 어린 나이에 부부로 맺어졌다가 1년만에 사별한 효명세자와 현빈은 그처럼 황제와 황후로 대접받았지만, 그들의 잃어버린 삶은 무심한 세월 속에서 진토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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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좌의 난                  2019.07.21.일요일,비

영조가 즉위한 지 4년인 1728년, 소론계 강경파가 남인을 끌어들여 일으킨 이인좌의 난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붕당 간 정쟁이라는 성격을 띤다. 숙종 말기부터 진행된 세자 대리청정과 세제 책봉 논란, 경종 독살설 및 영조의 왕위 계승 부당성 시비, 이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갈등이 누적돼 반란의 형태로 분출된 것이다.

반란이 일어난 해가 무신년이었기 때문에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무신란의 발단은 숙종 43년인 1717년7월의 정유독대(丁酉獨對)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숙종은 노론의 당수인 좌의정 이이명과 독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후일 알려진 바로는 숙종은 이 자리에서 숙빈 최씨 소생인 연잉군(영조)이 세자 윤(昀,경종)의 뒤를 이을 수 있도록 이이명에게 각별히 부탁했다.

숙종은 희빈 장씨가 사사된 이후 그 소생인 세자 윤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희빈 장씨에 대한 반감이 남아 있었고, 그럴수록 연잉군에 대한 기대도 컸다.

독대 직후 숙종은 안질 등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세자의 대리청정 의사를 밝혔고, 이에 따라 세자 윤은 8월부터 숙종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했다.

당시 세자 윤을 보호하던 소론은 숙종이 세자의 실책을 유도해 합법적으로 연잉군의 왕위 승계를 앞당기려는 조치가 아닌지 의구심이 생긴다.

3년 뒤 숙종이 타계하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인 1721년 노론은 경종을 밀어붙여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성사시켰다.

경종이 후사가 없고, 병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내친 김에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추진하다가 소론의 반격으로 역풍을 맞는다.

소론계 강경파인 김일경 등이 노론 대신들의 역모죄를 부각시킨 상소를 올린 이후 노론 4대신이 귀양을 가고, 60여 명이 처벌을 받았다. 이를 신축옥사(辛丑獄事)라고 한다.

당시 노론이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도한 것은 결과적으로 영조에게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무신란 주모자들은 영조가 신하에 의해 선택된 택군의 방식으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부당하다며 반란의 명분 중 하나로 삼았기 때문이다.


신축옥사를 통해 정권을 잡은 소론은 이참에 노론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1722년 임인옥사를 일으킨다.

당시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은 노론의 명문가 자제들이 경종을 몰아내려 한다고 고변을 올렸다.

고변에는 경종을 해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삼급수까지 언급되어 있었다.

자객을 보내 시해하는 대급수, 음식에 독을 타 독살하는 소급수, 숙종의 전교를 빙자해 경종을 폐위시키는 평지수가 그것이다.

이 일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이 처형되고, 170여 명이 죽거나 형벌을 받았다.

이처럼 1721년부터 1722년까지 일어난 노론에 대한 소론과 경종의 보복을 신임옥사라고 통칭한다.


그러던 차에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1724년의 일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그해 8월 경종이 몸져누웠는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약재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왕세제 궁에서 게장과 생감을 준비했고, 경종은 모처럼 수라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경종이 이튿날부터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사망 과정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영조(재위기간 1724~1776)가 즉위하고, 노론이 집권하면서 경종 독살설이 널리 퍼져 나갔다. 이는 무신란의 주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영조는 즉위 2년째인 1725년, 신임옥사를 무고에 의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노론 4대신을 신원했다.

또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형한 것을 비롯해 소론의 중진들을 축출했다.

하지만 신임옥사를 겪은 노론은 소론에 대한 더 가혹한 조치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에 염증을 느낀 영조는 특정 당파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왕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따라 오히려 소론계 온건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것이 1727년의 정미환국이다.

무신란 주모자들이 거사를 일으키려 준비하던 시점이 바로 이때였다.

하지만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자 반란의 명분이 약해지면서 일부 동조자들은 무리에서 이탈하고,

최규서 등의 고변으로 모반 계획이 알려졌다.

이에 영조가 모반 가담자를 색출할 것을 지시하자 반란 주모자들은 곧바로 군사를 일으켰다.

반란을 처음 도모한 것은 신임옥사가 무고에 의한 사건으로 규정될 당시였다.

소론 축출에 위기 의식을 느낀 이인좌,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 소론계 강경파 인사들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남인들을 포섭하고, 팔도의 명망 있는 인사들을 규합하며 세를 불려 나갔다.

이들은 영조의 왕위 계승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밀풍군 탄(坦)을 내세워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고,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절을 하며 경종을 위한 복수를 다짐했다.

이들은 경종 독살설을 퍼뜨리며 반란 세력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규합했으며, 이로 인해 전국 곳곳에는 독살설과 관련된 흉서나 괘서가 나돌았다.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격문도 붙었다. 반란군은 충청, 호남, 영남, 경기, 평안도 등 전국에 걸쳐 조직됐고, 노비나 화적은 물론 양반들까지 가세했다. 목표는 영조 제거와 노론 타도, 그리고 소론과 남인의 연합 정권 구축이었다. 이를 무신란 또는 ‘이인좌의 난’이라고 부른다.

반란은 영조 4년인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반란군은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성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성으로 진입했다. 성내에 반란군에 호응하는 인사들이 있어 성은 일거에 함락됐다. 충청 병사 이봉상과 영장 남연년 등이 이 과정에서 살해됐다.

반란군은 이곳에서 이인좌를 대원수로 삼았고, 청주 주변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붙여 동조 세력을 모집했다. 이어 반란군은 목천을 거쳐 진천까지 북상했다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대원수 이인좌는 경기 안성으로, 부원수 정세윤은 죽산으로 각각 부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이즈음 정부의 진압군을 맡은 도순무사 오명항은 첩자를 이용해 진압군이 직산으로 갈 것처럼 반란군 쪽에 퍼뜨리고, 실제로는 안성으로 향했다. 안성에 있던 반란군은 예상치 못했던 진압군의 기습을 받고 패퇴하였다. 반란군 일부는 근처 청룡산으로 피신했으나 또다시 진압군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다. 곧이어 진압군은 죽산으로 향해 정세윤이 이끄는 반란군을 무찌르고, 부원수 정세윤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안성에 이어 죽산에서도 반란군이 패배하자, 이인좌는 진압군을 피해 달아나다가 끝내 사로잡혀 한성으로 끌려갔다.

호남에서는 태인 현감 박필현이 3월 19일 난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무장에서 유배 중이던 육촌 형제 박필몽이 나타나지 않은데다, 전라 감사 정사효도 동조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무산됐다.

박필현은 진압군에게 쫓기다 경상도 상주에서 붙잡혀 참수됐다.

또 이인좌가 청주성에서 북상할 즈음, 영남에서는 정온의 4대손인 정희량이 미리 약속한 대로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와 함께 안음(경남 안의)에서 반란군을 일으켰다.

이들은 안음에 이어 거창, 합천, 함양 등 네 개 군현을 차지했다.

그러나 함양을 거쳐 이인좌의 군대와 합류를 시도하다 진압군에 의해 막힌 뒤 4월 2일 선산 부사 박필건에게 진압됐다. 이로써 왕권 교체를 기도한 무신란은 실패로 끝났다.

영조는 즉위 직후 무신란을 겪으면서 어느 한 당파에만 국정을 전적으로 맡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는 곧 영조가 탕평책을 기반으로 정국 안정과 왕권 강화를 추진할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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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미환국         2019.07.21.일요일,비

1727년(영조3년),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당색이 온건한 인물로 인사를 개편한 정국으로

영조는 즉위하면서부터 극심한 당쟁의 폐해를 통감하고 송인명·조문명 등의 말을 들어 탕평책을 펴나가고자 하였다.

사건은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측에서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서 발단하였다.

먼저 이의연이 지난날 세제(영조) 건저를 주장하다가 처벌된 신하들을 신원하자고 성급하게 청했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혀 오히려 귀양을 가고 말았다.

또한, 송재후는 김일경이 대찬한 임인옥사에 대한 교문의 초고 중 3건의 문구를 들어 “세제시절의 영조를 모욕한 것이니 단죄할 것”을 상소하였다.

3건의 문구란 모두 영조에 관련된 것으로서 소론 김동필도 그의 불온함을 지적한 일이 있었다.

이 김일경의 교문문제에 대한 상소는 각처에서 연달아 들어왔다.

영조는 김일경을 잡아들여 친국했고, 김일경은 끝내 불복해 처단되었다.

또한, 임인고변으로 공신이 된 목호룡의 고변문구 중에도 영조에 저촉된 사실이 있었는데, 이 때 와서 김일경과의 공모혐의로 국청에서 심문을 받다가 불복하고 죽었다.

영조는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인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단한 뒤, 경종 1년 김일경이 노론4대신(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한 신축소에 연명한 이진유 등 6인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노론측의 잇단 소론대신들에 대한 논핵으로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의 소론대신들이 쫓겨나고 대신 민진원·정호 등 노론이 소환되어 조정에 들어섰다.

노론이 정권을 잡자, 신임사화 때에 처단된 노론4대신과 그 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4대신이 복관되어 시호를 받았다.

정호·민진원 등 노론측은 '임인옥안'을 번안해 당시에 자복한 사람들까지 신원했음에도 소론에 대한 보복을 계속 고집하였다.

영조는 당습을 꺼려 무욕을 밝히고 원통한 것을 풀어주면 그만이지 보복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1727년 영부사 민진원, 우의정 정호 이하 여러 노론들을 파면하고,

영조 1년에 파면했던 이광좌·조태억을 기용해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참여시켰다.

이 해가 정미년이기 때문에 ‘정미환국’이라 한다.

                

이 결과 탕평파인 지평 조현명은 신임사화 때 남형을 많이 저지른 것은 소론의 잘못이고,

영조 즉위초에 보복에만 급급했던 것은 노론의 잘못인데,

노론과 소론을 공정하게 등용하지 않음은 잘못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성립되었으며,

이들은 다시 번안된 '임인옥안' 문제를 들고 나와 영의정 이광좌, 대사헌 김시환 등이 4대신의 잘못을 논핵하였다.

이에 영조는 전일의 죄명을 모두 씻어주고 관작만을 삭탈하는 선에서 일단 매듭을 지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영조 4년에 일부 소론과 남인의 과격분자들이 경종을 위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권교체를 기도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이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영조는 노론·소론을 막론하고 당파심이 강한 자를 제거해 당쟁을 조정하고 폐해를 막으려는 탕평책을 펴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점차 노론이 조정에 들어오고,

영조 17년에는 '임인옥안'을 불태우고 영조는 친히 '대훈 大訓'이라는 글을 지어 종묘에 고하는 한편 나라

안에 반포하였다.

이와 같이 '임인옥안'을 놓고 번복을 거듭한 것은 결과적으로 영조의 탕평책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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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봉휘(柳鳳輝)              2019.07.21.일요일,비

유봉휘;

생졸; 1659년(효종10년)~1727년(영조3년)

본관; 문화

호; 만암(晩菴)

부; 영의정 유상운(尙運)


1684년(숙종10년) 진사가 되고,

1699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문학·지평·정언·수찬·이조정랑·헌납·부교리 등을 거쳤다.

1710년 대사간으로 재직시 진휼을 위해 백성들에게 제공하는 곡식의 다소에 따라 관직을 상으로 주었기

  때문에 당상관이 범람하게 되었다며 납속수직 폐지를 주장했다.


부제학·이조참의·승지·동의금 등을 역임한 후,

1721년 행사직이었을 때 노론 4대신이 중심이 되어 연잉군(훗날 영조)을 세제로 책봉한 것에 대해 시임대신

  조태구가 참여하지 않는 등의 절차상의 문제점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연잉군은 세제 책봉을 사퇴하려 했고, 노론들은 유봉휘를 국문하자고 주장하여 세제책봉을 둘러싼

 노소론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해 10월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12월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후 세자빈객·대사헌·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후에

1724년(영조 즉위) 영조의 탕평책 실시에 의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725년 노론 측에 의해 세제 책봉 때의 상소와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경원에 유배되었다. 노론은 그가 유배지에서 죽은 후에도 역율에 따라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노비로

  삼을 것을 요구했을 정도로 유봉휘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1727년7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자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1755년 나주 괘서 사건으로 소론 명문이 거의 몰락하는 가운데 다시 역율로써 추형(일정한 지역 밖으로

   내쫓는 형벌;追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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