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중비사 허견의 오긍골의 사흘밤 2019.06.21.금요일,맑음
숙종(1,674-1,720)은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올랐으나 그 영특한 자질은 과히 유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근심되는 일은 숙종의 나이 어리고 다시 병석에 눕게 되자 평소에 보위를 엿보던 그 무리들이 다시 준동하는 기미가 보이게 되는 일이었다.
더욱 세상의 물정이 이리 뒤치락 저리 뒤치락 하는 통에 부왕인 현종이 빈천하는 시간까지 재삼 간곡하게
당부한 말 "아버지 대신 의지하고 믿으라"하던 허적을 자기 스스로 죽이게까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허적은 무슨 까닭에 칠십 평생을 부귀로서 살아가다가 역모로 몰려서 몸에 사약 사발을 안고 죽게
되고 전 가족이 멸망하는 참화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가.
허적은 그 관직이 혁혁해서 입조 오십년인 현종 말년에는 지위가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되고 따라서 현종이 승하할 때는 고명 유신으로 숙종을 추대하여 다시 숙종의 조정에서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차차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의 세력을 펴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서인들은 이 눈치를 알고 허적을 어떻게 해서든지 치워버릴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허적에게는 아무러한 탈도 잡을 것이 없으므로 그 서자 허견의 하는 일이 암만해도 수상해 보이니
이 자의 일을 뒤쫓아 살펴 보아서 미심한 일만 있으면 당장 고변해서 처분을 내리도록 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때문에 이 일을 알게 된 허적은 그 아들에게 이런 세상 물정을 귀띔해 일러 주었다.
늘 자기의 심복을 내세워서 허견의 행동을 뒤쫓아서 내탐하게 하였다.
그러나 허적의 귀에는 허견에 대한 세상 풍설이 좋지 못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뉘 집 양가 여자를 뚜쟁이를 놓아서 빼어내다가 간통하였다느니,별별 말이 다 들리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놀랍게 들리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허견을 지목하여 복선군이라는 종친을 껴가지고 역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받는 일이었다.
허견을 불러서 주의 시키면 펄쩍뛰면서 그런 일이 절대로 없다고 하나 허적은 아들로 인해서 한시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러던 중, 허견이 또 일을 저질렀다.
허견은 전부터 역관 이동구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항상 잊지 않고 있었는데,
후에 그 딸은 역시 역관 서효남의 며느리가 되어 들어갔다.
이동구의 딸은 그 이름이 차옥이라 하고 그 아름다운 성중에도 소문이 높아서 당시 세상 사람들은 아름다운 얼굴을 비교할 때에 [이차옥이 만큼이나 예쁘구나]하였다.
허견은 항상 이차옥을 제 손안에 넣어보려고 벼르던 중 어느 날 술 취한 마음에 갑자기 이차옥을 생각하다가 드디어 온당치 못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차옥의 고모부 이시정도 역시 역관 집인데 새로 며느리를 보게 되어 잔치를 베풀자 이 잔치에 이차옥도
청함을 받아서 참례하게 되었다.
이차옥에게는 그 내종 오라비의 장가드는 잔치에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고 손님들이 차차 돌아갈 때쯤 이시정의 집에는 낯선 교정 한 사람이 들어서면서
“사동 아씨 여기 계시지요? 저 서역관댁 마님이 별안간 위중하시다 하여 모시러 왔습니다.”
이런 말을 하니 이차옥은 그 교정이 낯선 사람이지만 의심치 않고 곧 따라나섰다.
교자는 휭하니 달렸다.뒤에는 몸종이 따라섰으나 중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교정들은 교자를 메고 사동 서역관 집으로 가지 않고 오긍골 어떤 조그마한 집으로 들어가더니
“이 댁이 마님 친척 댁인데 여기 오셨다가 병환이 나셔서 이댁 건넌방에 누워 계십니다.”
하면서 그 집 마루 앞에 내려놓고 교군을 멘 채 그대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이차옥은 시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말에 마음이 황황하여 아무 정신없이 그 건넌방문을 열고 보니
그 안에는 시어머니가 누워 계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젊은 사나이가 반가이 맞았다.
“오, 차옥이 오래간만이요.”
하고는 일찍이 그 친정 부친 이동구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대를 마음에 항상 사모했노라고 중언부언하는데 행동이 괴상했다.
이때에야 비로소 이차옥도 이번 일이 모두 이 흉한 자의 간계로 꾸며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장 문을 박차고 도망가려고 했으나 그때 형편으로 도저히 그 독수를 면할 수없어 드디어 그 사나이에게
욕을 당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기회를 보아 나가려 했으나 철통같은 감시로 인해서 도저히 이 집을 벗어나 갈 수가 없었다.
악착을 떤다면 나갈 수도 있겠지만 이웃이 알게 되고 또 시집에게까지 알게 된다면 더욱 창피한 일이었다. 이차옥은 아주 벙어리같이 꾹 참으면서 사흘을 지냈다.
열사흘을 계속해서 그 이름도 모르는 음흉한 사나이에게 갖은 욕을 다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 밤,
그 사나이는 차비를 구해서 차옥을 집으로 데려다 준다고 이 집에서 내보냈다.
차옥은 이번에야말로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교자 안에서 자주 바깥을 살펴보았으나 밤이 깊어 지척을 분별
할 수 없는데다 교정들은 얼마나 왔는지 좀 쉬어가자고 교자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한참이 되어도 교자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궁금해서 밖을 내다보니 교정들은 한 놈 없이 다 도망가
버리고 없었다.
차옥은 얼른 밖으로 나와서 살펴보니 그 곳은 곧 사동 자기 친정집 대문 앞이었다.
일변 놀랍고 일변 반가워서 뛰어 들어갔다.
친정 부모도 이게 웬일이냐고 깜짝 놀라서 그 곡절을 물었다.
차옥은 감히 대답하지 못하다가 하인들이다 물러간 후에야 울면서 모친에게만 그간 자기가 욕을 본 경과를 이야기했다.
이 집에서는 놀랍고 분한 것을 견딜 수 없어서 그놈이 누구인 것을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인을 시켜서 그 교자의 주인을 찾게 했다.그 결과 그 교자는 야조개 어느 세물전 셋보교인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 보교를 세주었다는 세물전을 찾아가서 물어보니 사직골 사는 허대감이 빌려 갔다는 것이었다.
이동구는 벌써 그가 누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는 했으나 지금 세도재상이니 자기 같은 사람이 이런
문제를 섣불리 꺼냈다가는 도리어 되잡히기가 십상팔구요,
또 딸을 찾았고,제 시집에서는 모르고 있으므로 참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분기를 억지로 참았다.
차옥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일을 욕본 사람은 과연 허견임에 틀림없었다.
허견의 생각으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담아오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담아냈으니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견이 이차옥을 데려온 집은 청풍 부원군 김우명의 첩 예정이란 여자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청풍 부원군이라고 하면 현종 왕비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숙종으로 본다면 외조부가 되는 셈이다.
그러면 허견이 어떻게 그런 집에 그것도 남의 첩의 집에 가 있게 되었는가?
원래 예정이란 여자는 허견의 처 예형과 의형제 간으로 허견의 집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는 서인과 남인이 서로 그 행적을 내탐해서 무슨 단서를 얻어내기 위해 저편에 자기의 심복을 그편 모르게 들여보내는 것이 예사처럼 되어 있는 때다.
허견도 서인 김우명의 집안일을 내탐할 양으로,처음에는 청풍 부원군 집에 침모가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예정을 시골서 떠들어온 사람의 행색으로 들여보냈다가,차츰 김우명의 마음을 사로잡게 해서 첩으로 들어
앉게 했던 것이다.
한번 첩으로 들어앉게 되자 김우명은 예정을 슬그머니 빼내다가 새로 집을 장만해 놓고 살림을 시켜 주었다. 그러던 중 김우명은 세상을 떠났다. 늙은이의 첩실을 면하게 된 예정은 다시 허견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허견의 처는 전에 병사를 지낸 홍순민의 첩의 딸로서 그 성질이 괴벽하고 마음이 착하지 못한 편이었다.
예정과 허견의 사이는 마치 형의 남편과 처제의 사이와 같은 정도로 친숙했지마는 김우명이 죽은 후로 예정이 자주 허견의 집에 드나들고 나서부터는 허견의 아내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늘 허견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형은 예정의 집에다 심부름하는 계집 아이를 첩자로 들여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이 첩자가 와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며 분을 참지 못했다.
어느 날 평일과 다름없이 예정은 예형을 찾아왔다.
마침 허견은 시골에 가고 입에 없던 때였다.아무러한 눈치가 없이 종일 지내고 이내 예형의 집에서 자고
가려고 밤늦도록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정에게 돌연 청천벽력이 내렸으니 일은 이제부터 벌어지게 된것이다.
냉면으로 밤참이 들어와서 맛있게 먹고 난 후였다. 방은 더웠으나 예정은 냉면을 먹은 후라 달달 떨었다.
예형은 하인을 시켜서 강차를 끓여 오라고 호령을 하면서 예정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마 인제는 옥동자를 낳으려나 보구먼. 이렇게 더운 방에서도 춥다고 떨고 야단이니?” 이런 말을 했다.
“아이고, 형님도. 별말을 다 하시는구려, 하늘에 올라가야 별을 따지 않소.”
“왜 그래, 내가 들으니 귀동자를 낳을 만하겠던데.”
“왜 무슨 소리를 들으셨소?”
“우리 집 대감을 어째서 자네네 집 건너방에 사흘씩 묵혀 두었나?”
갑자기 예형의 얼굴에 독기가 팽창했다.예형은 계속 예정을 보고 코웃음을 치면서
“입이 광주리만 해도 할 말은 없겠지?”
“그렇지만 나는 아무 죄도 없어요.”
“요, 앙큼한 년! 그래도 변명이야?”
예형은 옆에 놓인 퇴침으로 예정의 머리통을 후려쳤다.이때에는 예정도 암상이 날대로 났다.
“왜 까닭 없는 사람을 땅땅 때리는 거예요? 어디 더 때려봐요!”
몸을 예형에게로 들이대면서 이렇게 발악을 했다.
“네깐 년은 죽여 놓아도 좋다, 그 따위 버릇을 하다가는.”
예형은 한층 더 호통을 치면서 그의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아니, 댁 대감이 어떤 년 하나를 잡아다가 놓고 이틀 사흘 그 따위 짓을 한 것을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내 말이 믿기 어렵거든 대감께 물어보라니까, 누구는 그리 허름한 줄 아우?”
“아따, 부원군의 첩실이니까 어깨가 으쓱한가 보다.
그 알뜰한 죽은 영감장이의 첩실,누가 알아준다고 으쓱거려. 그나마 누가 그 자리에 가게 해주었는데.
그러고 저러고 간에 내 말은 다른 게 아니야. 우리 집 대감이 어떻게 아무 일 없이 남의 집,
그야말로 부원군 첩실의 댁을 찾아가서 그 건넌방을 치우고 버젓이 그런 짓을 했느냐 말이다. 네가 그전부터 그 따위 짓을 하다하다 못해서 나중에는 다른 계집까지 천거를 하는 게 아니냐 말이다.”
예형은 노기충천해서 예정을 넘어뜨리니 예정은 장지에 부딪쳐 쓰러지면서 입에서 피를 쏟았다.
이 두 개가 몽땅 빠져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있던 이듬해 봄이었다. 청풍 부원군의 조카되는 김석주는 돌아간 그 숙부의 옛 정의를 생각해서 그 서숙모가 되는 예정을 가끔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다.
그러던 중 김석주는 그 서모 예정과 허견의 처 예형과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나서 예정의 이까지 빠지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김석주가 그 서숙모를 찾아와서
“지금 형편으로는 좀 거북한 일이지만 다시 허견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쪽 내막을 자세히 살펴 주시오.”
하고 부탁하였다.예정은 김석주가 자기에 대해 마음 쓰는 일을 늘 고마워 해 오던 터라 그만한 부탁을 안
들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정은 다시 예형을 찾아갔다.
“형님, 더러운 것은 사람의 정입니다. 그렇게 이가 부러지게 싸우고도 십년 가까이 든 정을 잊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 그대로 견디겠습니까. 기왕 일은 누가 잘했건 누가 잘못했건 그만두고 우리 형님이 그리워서 왔으니 그전대로 의지하고 삽시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그때 무슨 살이 들어서 그랬는지 그 후에 퍽 후회했네. 조금도 예전 일을 생각지 말고 앞으로는 여전히 잘 지내세. 이렇게 와서 먼저 풀어 주니 고맙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고 두 사람은 전과 같이 왕래를 했다.
김석주는 예정을 통해서 허견의 일을 어느 정도까지 알게 되었다.
<허견은 매일 만나는 사람이 벼슬아치보다도 아직 벼슬하지 않은 이들, 대개는 모양이 초라하고 자비하나 변변히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며,그 중에도 복선군이란 종실과 가장 친하다는 것,
그리고 밤중에 남의 이목을 피해서 슬그머니 왔다가는 슬그머니 나가는 사람들이 몇 사람 있다는 것.>
이런 일들을 차차 알게 된 것이다.
김석주는 곧 의관을 차리고 자비를 준비해서 상동에 사는 한성좌윤 남구만을 찾아갔다.
김석주는 예정에게서 들은 허견의 이야기를 남구만에게 대강 들려주고 이 기회에 허견을 내쫓고 서인들이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구만은 결기 있는 사나이였다. 이런 단서가 알려지지 않아 애를 쓰며 기회 있는 대로 남인을 쓰러뜨리려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곧 조정에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신이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청풍 부원군 김우명은 이미 작고했으나 그 부실 오씨(예정)가 아직 옛집을 지키고 있사온데, 오씨는 허견의 처 홍씨와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옵니다.그런데 허견의 처 홍씨는 항상
제 집에 드나드는 오씨가 그 남편과 어떠한 정사 관계가 있다고 해서 마구 때리고 싸우다가 드디어 오씨의 앞니를 몇 개나 빼어놓았다 합니다. 부원군의 첩은 비록 천인이지만 중전의 서모가 되는 분이요,
어찌 이것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한번 이 상소문이 나오자 세상은 뒤숭숭해졌다.
이튿날 허적이 사연을 밝혀서 상소했다.
<신의 서자 허견의 처는 죽은 홍순민의 첩의 딸로서 그 성품이 괴악하여 이루 말하기 어렵고 당초에 결혼 때도 속아서 결혼한 것이요. 그간 그의 결의 형제라는 예정이란 여자와 친하게 지낸다는 말은 들었어도 서로 싸웠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요. 아마 그의 성품이 흉패해서 그런 좋지 못한 소문이 나는 모양이요.>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우윤 신정이 다시 상소를 올려 이차옥의 사건을 들어내놓고 공박했다. 임금은 그 상소를 포도대장 구일에게 내주며 이 사실을 조사해 올리라 분부했다.
구일은 어명을 받들어서 당일로 허견과 차옥을 잡아가두고 문초를 해본 결과 차옥이 그 일을 전연 부인하니 마침내 무근지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남구만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세상에서 다 아는 바이지만 허견은 집에서 하는 일 없이 친구를 모아가지고 시국을 의논하는 것과 남의 집 유부녀를 겁탈하는 것으로 농사를 삼는 터입니다. 이차옥의 사건으로 말하면 허견의 아내 예형과 그의 결의형제인 예정이 증거이온대 그들을 다 젖혀 놓고 허견과 이차옥만을 불러서 물어봤으니 그 일의 진상이 드러날 리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이 윤휴가 싸고도는 때문에 결국 무소가 된 바이오나 윤휴로 말하더라도
바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공공연히 나라에서 금하는 소나무 수천 주를 베어다가 자기 집을 지었다합니다. 국법에 산 소나무 열주만 베어도 사죄에 이른다고 했는데, 법을 맡은 자가 이와 같이 하니 어떻게
백성을 조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상소를 보고 젊은 임금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즉시 형조판서 이관징을 불러
“듣자니 요즘 권문세가에서 처지를 믿고 부정한 짓을 하는 모양이니 이 사실들을 전부 밝혀내라.” 했다.
며칠 후 이관징이 임금께 아뢰었다.
“사실을 조사해 본 결과 허견의 집일은 지각 없는 낭속들이 터무니 없이 떠들어서 소문이 났던 바이오며,
윤휴의 집은 살펴보니 그 집은 새로 지었으나 모두가 헌 재목으로 지었습니다.”
이때에 임금은 남구만이 두 번이나 올린 상소가 전혀 무근지설을 무소해서 남을 헐뜯으며 임금을 속인 것
이라 하여 그 자리에서 남구만의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바로 이 무렵 강화도의 계선돈대를 쌓는 역사가 있어서 팔도의 승군들을 불러 모아 일을 시키고
수사 이우가 이 일을 감독하게 되었다.
하루는 이우가 병조판서 김석주에게 무명인의 투서를 올려 보내왔다.
김석주는 그 편지를 보고 그대로 쥐고 있을 수 없다 하여 조정에 내보였다.
그 투서의 내용은 시국을 비방하고 현 조정을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슬프다. 이때는 정히 나라가 위태하기 짝이 없는 시기로구나. 임금은 유충하신 중에 다병유약하고 국정은 몇 사람의 재상의 손에서 마음대로 농권되니 백성은 모두 도탄에 빠져서 민심은 점점 불안하여 장차 내란이 일어날 것이니, 남의 나라를 막기 위해 돈대를 쌓는 것은 도리어 우스운 일이로구나.
제공은 이런 일을 치우고 승군을 수백 명 모집해 가지고 도성으로 들어가 삼개에서 기다리라,
그러면 의군은 승군과 합세해 가지고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을 추대해서 거사 하려는 터이다.>
이 글을 보던 모든 사람은 창황망조해서 그날로 어전 회의를 열어가지고 선후책을 강구하기에 급급했으니 사태는 목첩 간에 긴박한 듯이 보였다. 우선 투서한 사람을 찾고자 이우를 문초하였다.
이우의 말에 의하여 사십세 넘은, 키가 크고 수염이 많은 자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수소문할 때 또 대궐 근처에 누가 익명서를 던지고 갔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서인과 남인의 감정은 당장 폭발할 듯이 극도로 팽창되었다.
이러한 중에 허적과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허목이 상소를 올렸으니,
그 상소는
<영의정 허적은 선왕의 고명 유신으로 주상을 도와야 할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색을 가려서 사람을 쓰고 그 교만과 사치가 날로 심한 중에 요즘에는 내시와 궁녀들과도 연결하여 전하의 동정을 시시로 내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자 허견은 아비의 세력을 믿고 양가의 부녀자를 겁탈, 간음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만 조정에서는 그 누구 한 사람 탄핵하는 사람이 없고, 혹시 여론을 일으키는 자가 있어도 번번이 바른 말하는 사람만이 귀양 가고 죄를 입으니 이같이 하다가는 종묘사직이 위태해질 것입니다. 급히 상당한 조처를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임금은 이 상소를 보고 곧 노염을 지으며
“한동안 아무 일이 없더니 또 남구만 같은 자가 생겼구나. 이 무슨 주제넘고 쓸데없는 짓이냐.
영의정 허적은 나라의 기둥인데, 그를 해치려는 자가 누구냐?”
이런 말을 하고 도리어 허목을 귀양 보냈다.
숙종이 허적에 대하여 믿고 의지하는 마음은 이만치 깊고 두터웠던 것이다.
허적의 처지가 이와 같이 반석처럼 튼튼해지자 허견의 방종함은 날로 심해서 뜻있는 자가 차마 그 분노를
견딜 수 없었다. 이제는 공공연하게 남의 집 부녀를 겁탈하고 궐내를 출입하고 무기를 대량으로 만든다는 소문이 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그 누구 한 사람도 감히 입을 열어 탄핵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형편을 돌아보던 김석주는 드디어 직접 탑전에 나아가 아뢰었다.
“허적은 늙은 간흉이요, 허견은 젊은 역적이오니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오면 훗날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시고 의심의 귀추를 따라서 곧 그들의 생활 이면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허적 부자를 의심하면서 곧 별군직 이입신과 어영장 박빈을 비밀히 불러서
“복선군과 허적 부자의 사생활을 밤낮으로 살펴서 알아 올리라.” 분부를 내렸다.
이들은 각각 그 맡은바 집 부근으로 다니면서 동정을 살피는데, 그동안 이입신은 당당한 벼슬아치면서도
남루한 의복에 교군처럼 차리고 여러 차례 복선군 집에 출입했는지라 궁비들과도 차츰 낯이 익게 되었다.
어느 날 새벽 찬서리를 맞고 덜덜 떨면서 복선군 궁 행랑채 아궁이 앞에서 불 때는 궁비 앞으로 가서 손을
째며 이죽이죽 말을 붙이는데, 의외에도 여기서 이상한 일을 듣게 되었다.
“아니 손끝은 왜 그렇게 다쳤소. 퍽 아프시겠구려.”
“바느질이 세차서 바늘 끝에 찔린 게 덧나서 그래요.”
“바느질은 침모가 할 게 아닌가?”
“한 두 벌이라야지요.”
“아니 무슨 혼수 바느질이요?”
“아니요.”
“그럼?”
“글쎄, 무엇에 쓸 것인지 군복을 한가위에 백 벌을 만들랬어요. 그래가지고는 꼭 밤에만 짓는 거예요.
그래서 거의 마쳤는데 또 몇 백 벌을 지을지 모른다고 하니 그 바느질을 어떻게 해낼지 모르겠어요.”
“아니, 그것은 무엇에 쓴답디까?”
“낸들 아우.”
“그래 그것은 모두 궁대감께서 하시는 일이지?”
“그렇지도 않은가 봅디다. 저 어느 정승의 아드님이라나 그분께서 옷감을 가져온다는데 그분은 꼭 밤에만 왔다가 돌아가시지요.”
이입신은 크나 큰 수확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김석주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낱낱이 고했다.
이날 영의정 허적의 집에서는 조부 허잠의 충정공 시호를 받는 날이었다.
이제 그의 손자 허적이 나라의 중신이 되었으므로 그 공으로 조부까지 시호를 받게 된 것이다.
허적의 집에서는 이날 아침부터 사당에 차례를 지내고 원근 친척과 고구들을 청해서 굉장한 잔치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은 아침 후에 별안간 비가 내리므로 잔치 집에서는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준비해 놓은 음식이며 이미 초청한 손님이며 아무리 해도 하루도 연기할 수가 없었다.그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하려고 우선 비를 막을 수 있는 준비로서 궁중의 차일을 빌려내다가 쳐 놓고 빈객들을 대접하는 일에
분망했다. 이런 일을 모르는 임금은 비 오는 날에 잔치를 치를 허영상집 일을 생각하고 근신에게
“오늘 허영상댁 잔치라는데 비가 와서 안 되겠다.궁중 차일을 내어 보내주라.” 이런 말을 하였다.
이때 옆에 있던 내시가 아무 생각 없이
“궁중 차일은 벌써 영상댁에서 내어 갔습니다.” 하고 대답해 아뢰었다.
젊은 임금은 불시에 자기의 승낙 없이 가져간 것이 몹시 불쾌했다.
“나라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다니 될 말이냐. 괘심한 일이로구나.”
다음 순간 허적에게 대한 의심이 부쩍 일어났다.이러는데 김석주가 급히 입궐하여 이입신이 내탐한 정보를 아뢰었다. 임금은 곧 무감을 허적의 집에 보내어 그 빈객들을 조사케 했다.
이날 잔치에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사람은 종친으로는 복선군 형제요,서인편으로는 오두인, 이단상, 김만기 등 몇 사람뿐, 그 외에는 전부가 남인의 재상들뿐이었다. 그 중에도 훈련대장 유혁연이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다른 손들의 이목을 집중케 했다.
무감은 이 형편을 정찰하고 대궐로 들어가 위에 아뢰었다.
즉시 내시가 허적의 집으로 나와서 왕명을 전하고 유혁연과 김만기를 곧 입시하라고 말했다.
위에서 병조를 통하지 않고 직접 훈련대장을 부르는 일은 나라에 변고가 있기 전에는 없는 일이다.
훈련대장이 입시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그대로 안연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부제학 유명천이 벌떡 일어서면서 주인 허적을 보고
“대감,대궐의 수비하는 책임자를 불러들이니 수상하옵니다.
삼공이 들어가 일을 무마시킵시오.” 하고 권했다.
허적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고 앉았다가
“작년 가을부터 상감이 우리들을 경계하시는 눈치더니 그동안 또 무슨 말이 들어간 모양일세.”
하고는 유명천의 권고로 우의정 민희(閔熙)와 같이 예궐하였다.
내전 궐문에 이르러 승지에게 알현할 것을 전하니 승지가 들어갔다가 나와서
“시방 대할 까닭이 없으니 그대로 물러가라고 하시오.” 하였다.
영의정은 우의정의 얼굴을 돌아보고 우의정은 영의정의 얼굴을 돌아보며 모두 흙빛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허적은 허견을 불러 앉혀 최근에 어떠한 일을 했던가를 물어보았으나 허견은 대답이 없었다.
허적은 하룻밤을 그대로 밝히고 날이 밝자 곧 민희를 청해서 만났다.
“대감, 이게 어떻게 된 셈이요?” 민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낸들 알 수 있소. 시운이 지나서 남인이 몰살을 당하는 판인가 보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죄를 당할 일은 없었소이다.”
“죄 없으면 관계치 않겠지.”
“그런데 또 기막힌 일이 있소이다.”
“무슨 일이요?”
“훈련대장 유혁연 집에 밤사이에 두 세 차례 사람을 보냈는데 아침까지 퇴궐치 않았다 해서 친한 무감을
통해 알아보니 어제 저녁으로 의금부로 넘어갔다 하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허적은 유혁연이 잡혀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웬일이요?”
“하, 글쎄 낸들 알 수 있소이까? 꼭 미칠 것만 같소이다.”
이런 걱정을 하는 가운데 또 하루가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궐내로부터는 하등 처분이 내리지 않았다.
한편 김석주는 그동안 자기의 심복 정원로를 시켜서 또 상소를 올리게 했다.
<허견은 유혁연과 그밖에 여러 동지를 규합해 가지고 역모를 하여 장차 복선군을 추대하려 하던 일이 최근에 알려졌는데, 불일내로 거사할 모양이니 속히 처분하시옵소서.>
임금은 더 참고 기다리지 않았다. 허적이 가평 고을로 내려가 숨어 버리려고 황황히 가사를 정돈하고 있는데 돌연 의금부 나졸들이 집을 에워싸고 들어왔다. 허적이 의금부로 붙들려 간 뒤에 허견도 도망 갔다가 붙들리고, 복선군도 붙들리고 따라서 그 동지로 혐의 받던 자들도 모두 붙들리니 그 수효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 후 임금은 일곱 군데에 국문처를 베풀고 그들을 엄중 국문한 결과 이번 역옥 사건에 주범이 되는 허적
부자,유혁연,복선군,윤휴,민희,오시수,이태서 등은 모두 처참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귀양 보냈다.
이것이 숙종 육년 경신년의 일이므로 이 일을 경신대옥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는 반면에는 김석주와 정원로는 역모를 고변했다는 그 공로로써 보사훈을 받게 되었으며, 허적의 내각이 쓰러지는데 따라서 김수항으로 영의정을 삼으니 좌우영상과 육조판서가 모두 서인이 임명되어 어제까지 기세충천하던 남인들은 멸망하고 서인의 세력이 조정을 뒤덮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