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만중      2019.07.16.화요일,맑음

김만중;

생볼; 1637년(인조15년)~1692년(숙종18년)

본관; 광산

호; 서포(西浦)

증조부;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

부; 충렬공 김익겸의 유복자이다.

모;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이며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윤방의 증손녀이고 이조참판 윤지의 딸

제; 김만기의 아우

숙부; 숙종의 초비인 인경왕후


김만중은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김익겸은 일찍이 1637년(인조 15) 정축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까닭에,

형 김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며 살았다.

윤씨부인은 본래 가학이 있어 두 형제들이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항상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한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고 전해진다.

궁색한 살림 중에도 자식들에게 필요한 서책을 구입함에 값의 고하를 묻지 않았으며, 또 이웃에 사는 홍문관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내어 손수 등사하여 교본을 만들기도 하였다.

'소학''사략''당률' 등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연원 있는 부모의 가통과 어머니 윤씨의 희생적 가르침은 훗날 그의 생애와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650년(효종1년), 14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52년(효종3년), 16세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1665년(현종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1666년(현종7년), 정언

1667년(현종8년), 지평,수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현종9년), 경서교정관,교리가 되었다.

1671년(현종12년), 암행어사로 신정,이계,조위봉 등과 함께 경기 및 삼남 지방의 진정득실을 조사하기 위해

   분견된 뒤에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다.

1674년(현종15년) 까지 헌납,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675년(숙종1년), 동부승지로 있을 때에 인선대비의 상복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관작을 삭탈당했다.

   30대의 득의의 시절에서 고난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에 그의 형 김만기도 2품직에 올라 있었고 그의 질녀는 세자빈에 책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2차 예송이 남인의 승리로 돌아가자, 서인은 정치권에서 몰락되는 비운을 맛보게 된 것이다.

1679년(숙종5년), 예조참의로 관계에 복귀하였다

1675년 이후 5년 뒤인 1680년(숙종6년), 남인의 허적과 윤휴 등이 사사된 이른바 경신대출척에 의해 서인들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1683년(숙종9년), 공조판서로 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에 사헌부의 조지겸,오도일 등이 환수의 청이 있자 이를 비난하다가 체직(직무가 바뀜)되었다.

1686년(숙종12년), 대제학이 되었다.

1687년(숙종13년), 장숙의 일가를 둘러싼 언사의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추국(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1688년(숙종14년)11월, 배소에서 풀려 나왔다.

3개월 뒤인 1689년(숙종15년) 2월, 집의 박진규, 장령 이윤수 등의 논핵을 입어 극변에 안치되었다가 곧

   남해에 위리안치 되었다. 이같이 유배가게 된 것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와 관련된 앙화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어머니인 윤씨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로

1692년(숙종18년), 남해의 적소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98년(숙종24년) ,그의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706년(숙종32년), 효행에 대하여 정표가 내려졌다.


김만중의 사상과 문학은 이전의 여느 문인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년에 와서 불운한 유배생활로 일생을 끝마쳤다.

그러나 생애의 전반부와 중반부는 상당한 권력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득의의 시절을 보낸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총명한 재능을 타고났으며 가학을 통해 그의 상당한 경지의 학문적 성과도 성취하였다.

그가 종종 주희의 논리를 비판했다든지 아니면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든지 하는 점은 결코 위와 같은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만중의 사상의 진보성은 그의 뛰어난 문학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문학론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후대의 평가 속에서도,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예찬론’은 상당히 주목을 받는 논설이다. 그는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한문을 ‘타국지언’으로 보고 있는 까닭에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 등의 한글 가사를,

굴원의 '이소'에 견주었다.

저서로는 '구운몽''사씨남정기' 등과 같은 소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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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석(趙師錫)        2019007.16.화요일,맑음

조사석; 조선 후기의 문신

생졸;1632~1693

본관; 양주

호; 만회(晩悔), 만휴(晩休), 향산(香山), 나계

부;형조판서 조계원

모; 신씨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사촌 동생이자 숙종 후기에서 경종 때의 소론 온건파 당수였던 조태구의 아버지이다. 노론 4대신 중 한 명이었던 조태채와 소론 4대신 중 한 명이었던 조태억은 그의 조카이다.

당적은  서인으로 노소 분당 후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아 노론에게 소론으로 분류되어 공격받았으며,

기사환국 후에는 남인에게 노론으로 분류되어 역병이 창궐하던 지역으로 유배된 뒤 배소에서 사망했다.

 

훗날, 그의 아들인 조태구가 소론 당수가 되어 경종을 수호한 전력 아래 소론의 기록인 "숙종실록보궐정오"에는 소론으로 분류되어 호평되어 있으며, 반면에 노론의 기록인 "숙종실록"을 비롯한

"소설 인현왕후전" 등에는 악평되어 있는데 이로 인해 남인으로 잘못 인지되기도 한다.


1632년, 형조판서를 지낸 조계원과 신씨 사이에서 5남 중 넷째로 태어났다.

1660년(현종 원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2년 뒤인 1662년(현종 3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검열로 있을 당시 현종이 이숙(李䎘)·박증휘(朴增煇) 등을 유배보내면서 이 일을 기록하지 말도록 했는데 이를 거부해 파직되었다.그러나 곧 파직이 거두어졌고 1672년 정언이 되었다.

이후 숙종 때 승지와 충청도수군절도사, 경기도관찰사, 수어사, 이조참판을 거쳐 1680년 예조판서,호조판서 이듬해에 대사헌과 지의금부사,한성부판윤,우참찬,이조판서,좌참찬을 거쳐 1684년 판의금부사와 병조판서등을 거쳐 1687년 우의정에 올랐다.

같은해 김만중이 조사석을 두고 항간에 조사석이 동평군 이항과 가까이 지내며 후궁 장씨와 결탁하여 출세하였다는 말이 떠돈다고 전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유배되기도 했다.

이듬해인 1688년 좌의정에 올랐고, 당시 유배되어 있던 남그만과 여성제의 서용을 청하기도 했다.

1690년 왕세자 책봉일에 하례에 참석하지 않아 숙종의 신임을 완전히 잃게 되었으며,

끝내 이것이 빌미가 되어 경신대출척 당시 김석주를 도와 무고한 남인을 살육하는데 참여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며,고성에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풍질에 걸려 12월 24일 죽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복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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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두인 (吳斗寅)        2019.07.14.일요일,맑음

오두인; 서인,해주 오씨 시조 오인유의 17세손이다.

생졸; 1624(인조 2)~1689(숙종 15)

본관; 해주

호; 양곡(陽谷)

제향; 고향인 경기도 양성(陽城: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의 덕봉서원에 제향되었다

증조부; 병마절도사 오정방

조부; 좌찬성에 추증된 오사겸

부; 이조판서 오상

모; 병조 참판 이성길의 딸

며느리; 조선 제18대 왕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


오두인은 어려서부터 총민하였고 됨됨이가 차분하고 중후하였으며 숙부인 오숙에게 입양되어 황해도 해주에서 성장하였다.10살 때 명나라 사신인 부총 정용이 와서 오두인을 보고 예사롭지 않게 여겨 운자를 주어 시를 짓게 하니,오두인은 붓을 당겨 즉석에서 ‘한정(漢程)’이라는 글자를 써서 알지 못하게끔 비유를 하자

정용이 크게 경탄해 하며 진귀한 선물을 두터이 주었는데,오두인이 다 사양하고 다만 부채 하나만을 받으니, 정용이 더욱 중히 여기며 말하기를, “다른 날 얼마나 크게 될지 헤아릴 수 없도다.” 하고 그 시를 황화집에 실으니, 오두인의 명성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1648년(인조 26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49년(인조 27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경기도 관찰사,공조판서,한성판윤,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50년(효종1년), 사헌부 지평을 거쳐,1656년 장령,1661년(현종 2) 헌납 사간,1665년 사헌부 집의,

   1667년 부교리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5년),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아들인 오태주가 숙종의 여동생인

   명안공주의 부마가 되었다.

1680년(숙종6년), 호조 참판,1681년 도승지, 1682년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683년(숙종9년), 공조 판서에 올랐다.

   명성왕후의 상(喪) 때에 감동한 공로로 정헌대부로 승진되었고,한성판윤에 제수되었으며,

1686(숙종12년),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689년(숙종15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이해 사직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자 이세화,박태보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졸하였으나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숙종20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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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증(尹拯 )       2019.07.14.일요일,맑음

윤증;

생졸;1629년(인조7년)~1714년(숙종40년)

조부; 윤 황

부; 선거

모; 공주이씨 장백의 딸.

외조부; 성혼


아버지와 유계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와 김집에게 배웠다.

29세 때에는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에게 '주자대전'을 배웠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1663년(현종4),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숙종대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1680년(숙종 6), 김수항.민정중 등이 경연에 나오도록 청하고,박세채,조지겸 등이 거듭 출사를 권했으나

사양했다.


그는 송시열,김석주,김만기.민정중의 세도가 바뀌어야 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풀어져야만 출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일로 최신이 송시열의 죄없음을 변명한다는 핑계로 윤증의 사서를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고 했으며, 또 김수항,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했다.


한편 윤증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윤휴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안 송시열은 불쾌하게 여겼으며,

또 숙종초에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때 윤증이 남인과의 인연관계로 화를 면한 일로 해서 더욱 송시열의 의심을 받았다.

또한 아버지의 묘갈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내용중에 야유하는 뜻을 적자 이의 시정을 요구

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반목을 '회니의 반목'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송시열은 회덕에, 윤증은 이산에 산 연유로 그렇게 불렸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서인이 강·온 양파로 분리될 때 그를 지지하는 사류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송시열을 비난했으며, 사국에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의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가 젊어서 불문에

들었던 일을 끌어서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가 전부 자신에게 있다고 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윤증을 전과 같이 대우

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사림과 간관 사이에 비난과 변명의 상소가 계속되었다.

노론·소론 간의 당쟁은 계속되었고,

그가 죽은 뒤 1715년 유계가 지은 '가례원류'의 발문에 정호가 그를 비난한 것을 계기로 당쟁이 격화,

소론 일파가 거세되고 아버지와 함께 관작이 추탈되었다.

1722년(경종2), 소론 유생 김수구,황욱 등의 상소에 의하여 복관되었다.


윤증의 배사문제는 의리·명분의 껍데기를 쓰고 노론·소론 간의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양자의 사상적 견해, 정치적 노선의 차이가 놓여 있었다.

양자 모두 '주자도통주의'에 입각한 철저한 유교적 도덕정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훈척인 김익훈 등과 결탁하게 됨으로써 명분을 잃게 되고, 나아가 그 사회경제적 지향도

굴절되게 마련이었다.

말하자면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최우선의 의미를

두었던 것이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명분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다.

저서로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명재유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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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1601년(선조34년)~1681년(숙종7년)

본관; 안동

조부; 우의정 김상용

부; 호조정랑 김광환

김숭홍은 1624년(인조 2) 진사가 되고,

1636년 성균관유생으로 후금의 사신 용골대를 참살하고 그 국서를 소각할 것을 상소하였다.

음보로 기용되어 1666년(현종 7) 공조정랑, 1674년(숙종 즉위년) 장령(掌令), 이듬해 승지, 1676년 호조참판 등을 거쳐 1681년 지돈녕부사를 역임하였다.

1674년에 효종의 비 인선대비 장씨가 죽자,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1660년(현종 1) 효종의 국상 때와 같이 기년제를 주장하는 같은 서인 송시열에 반대하고, 남인이 주장하는 복제에 동조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명·청교체기의 중국 연호의 사용에 있어서도 송시열은 명나라 연호인 숭정을 주장한 반면, 김수홍은 청나라의 강희를 주장하여, 항청순절(청나라에 항거하여 목숨을 바침)한 할아버지의 뜻과 반대되는 처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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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 서인,남인을 도와 서인을 몰락시킨 장본인
생졸; 1634년(인조12년)~1984년(숙종10년)

본관; 청풍.

호; 식암

증조부;  강릉참봉 김흥우

조부;영의정 김육

부; 병조판서 김좌명

모; 어머니는 오위도총부도총관 신익성의 딸

조선 후기 이조좌랑과 우의정을 지낸 인물로 유악 남용사건과 기사환국으로 실각되었다.


1657년(효종 8). 진사가 되었으며,

1661년(현종 2). 왕이 직접 성균관에 거둥해 실시한 시험에서 성적이 우수해 곧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1662년(현종3년). 증광 문과에 장원,전적이 된 뒤 이조좌랑,정언,지평,부교리,수찬,헌납,교리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674년 겸보덕에 이어 좌부승지가 되었다.

    당시 서인 중의 한당에 가담해 집권당이던 산당에게 중용되지 못하였다.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 허적 등과 결탁해 송시열,김수항 등 산당을 숙청하고 수어사에 이어 도승지로 특진되었다.

    남인의 정권이 강화되자 이를 제거하기 위해 다시 서인들과 제휴해 송시열을 제거하려는 남인들을 꺾어,

    이 때부터 송시열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1680년 허적 등이 유악 남용 사건(왕실에서 쓰는 장막을 사사로이 사용해 일어난 사건)으로 실각한 뒤

    이조판서가 되어,남인의 잔여 세력을 박멸하고자 허견이 역모한다고 고변하게 하여 이들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 1등으로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682년 우의정으로 호위대장을 겸직하였다.

    이어 김익훈과 함께 남인의 완전 박멸을 위해 전익대를 사주해,허새 등 남인들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는 등 음모를 꾀하였다.

1683년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음험한 수법으로 남인의 타도를 획책했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

    로부터 반감을 사서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하는 원인의 하나를 제공하였다.


사후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공신호를 박탈당했다가 뒤에 복구되었다.

경신대출척을 일으켜 남인을 숙청했다


저서로는 "식암집""해동사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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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적; 1610년(광해군2년)~1680년(숙종6년),조선 시대 탁남의 영수

본관; 양천

호; 묵재(默齋),휴옹(休翁)

증조부; 허초(許礎)

조부; 허잠(許潛)

부;부사 허한(許僩)

모; 김제(金悌)의 딸

서자; 허견


허적은 남인으로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냈으며

제1·2차 예송에서 서인과 대결했으며,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집권한 뒤 탁남의 영수가 되었다.

1633년(인조11), 사마시를 거쳐 163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홍문관부수찬을 지냈다.

1641년 의주부윤으로 관향사를 겸했다.

1645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1647년 일본의 사신 다이라를 위법으로 접대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기용되어 1653년(효종4) 호조참판,1655년 호조판서를 거쳐 1659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을 둘러싸고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 등 서인의 기년설(만1년)에 맞서,허목,윤휴 등과 함께 3년설을 주장했으나 결국 기년설이 채택되어 남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그뒤 호조판서·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662년(현종 3) 진주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4년 우의정이 되어 사은 겸 진주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668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167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송시열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가 죽어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

(9개월)을 반대하고 기년설을 주장했다.

이번에는 기년설이 채택되어 남인이 득세함으로써 영의정에 복직하여 남인정권을 수립했다.

그뒤 남인은 송시열 등의 처벌문제로 청남과 탁남으로 분열되었는데, 그는 온건파인 탁남의 영수가 되어

허목 등의 청남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1676년(숙종 2) 사은 겸 진주변무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오도도체찰사가 되었다.

1678년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사용하도록 했으며,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1680년 할아버지 허 잠이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궁중의 유악을 함부로 사용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다.

같은해 서인인 김석주,김익훈 등이 그의 서자 허 견이 종실인 복창군 형제와 함께 역모한다고 무고함으로써 윤휴 등과 함께 사사되었으며,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실각했다(경신대출척).

후일 1689년, 숙종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김익훈 등을 죽이고,그의 관작을 추복했다.



 

⊙ 우암 송시열        2019.07.14.일요일,맑음

송시열; 1607(선조 40)∼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부; 송갑조

모; 봉사 곽자방의 딸 선산 곽씨

처;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고,12세 때 아버지로 부터 주자,이이,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연산의 김장생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625년(인조3),19세때 한산 이씨와 혼인하여 26세(1632)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뒤에 회덕의 송촌,비래동,소제 등지로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송시열은 장령 등의 관직으로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는 정치적 소신을 진술한 것인데,

화친 명나라로 이적 청나라를 밝힘으로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

되는 계기가 되었다.

1650년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 일파가 물러났다.

1655년(효종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8년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5월, 효종이 급서한 뒤,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국구 김우명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송시열은 현종 15년 간 거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1668년(현종9) 우의정에,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이다.


재야에 은거한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으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송시열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삭출되었다.


1675년(숙종1)정월,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중에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숙종8) 김석주,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 타진하고자 한 '임술삼고변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 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1월(숙종),숙의 장씨(장희빈)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 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다

이 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 서원만 37개소였다.

영조,정조대에 노론의 집권하에 송시열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송시열은 김장생을 계승한 예학의 대가로서 중요한 국가 전례 문제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 때문에 예학적 견해 차이로 인한 예송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659년 5월 효종이 죽자,계모인 자의대비 상복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기년(朞年: 만 1년)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인조의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 때 윤휴는 '의례' 상복편의 소설인 “제일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 ”는

근거에 의하여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를 입는다는 설에 의하여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의례'의 소설에 “서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 ”는 예외 규정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서자는 첩자의 칭호이기도 하고,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국왕의 상에 친속들이 3년복을 입는 것은 신하로서의 복을 입는 것인데,

어머니인 대비는 아들인 왕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설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태화 등 대신들은 '의례'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 기년설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660년 3월 허목이 또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윤선도는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드는 설”이라고 공격하였다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참최는 두 번 입지 않는다’는 설과 서자가 첩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설을 논증

하고, 차장자설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였다.

 제1자가 죽고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간주하는 경우는 제1자가 미성년에 죽었을 때뿐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고,

윤선도 등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제기되어 서인들은 송시열의 설에 따라
대공복(9개월복)을 주장하여 시행되었으나 영남 유생 도신징의 상소로 다시 기년복으로 번복되었다.

그 결과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파직 삭출되었다가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에 근거를 두고 전개되기는 했으나, 대체로 “제왕가의 예도 사서인과 다르지 않다.”는 성리학적 보편주의 예학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에 즉위, 종묘를 주관했던 효종의 제왕적 특수성과는 관계없이 차자라는 출생의 차서만이

중시되었다. 이 때문에 송시열의 본의와는 달리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대 북벌론의 중심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문제로 효종과 비밀 대담을 가지기도 했고,

왕과 비밀 서찰을 교환하기도 하였다.그러나 그들의 북벌 계획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효종과의 비밀 대담이나 서신 왕래에서 송시열이 건의한 것은 극히 이념적이고 원론적인 것이었으며,

실제적 대책은 아니었다.

북벌론은 1659년 봄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나, 당시 형편으로는 즉각적인 북벌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양민의 부담이 컸던 급료병(직업군인)을 줄이고 민병(농민군)을 활용하자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효종의 양병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북벌의 실제 준비보다 그것이 내포한 이념성을 강조하였다.

명나라를 향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의 복수설치 문제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이며, 그것이 모든 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춘추대의의 관념에서 나온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강력한 이념이 국내 정치에서 부패와 부정을 억제하고 기강의 확립과 행정의 효율을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벌 이념은 송시열 자신과 그 일파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대의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효종의 죽음과 함께 침묵되었다가 숙종 초기에 다시 제창되었는데,

효종대에 송시열의 북벌론은 그 이념성과 함께 부국안민의 정책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숙종대에 국가의 전례 문제와 결부되어 다시 제창된 존주론에는 오직 당쟁에서 대의명분을 장악하기 위한 이념성만이 강조되었다.

 

송시열은 문장과 서체에서도 뛰어났다.

문장은 한유.구양수의 문체에 정자.주자의 의리를 기조로 했기 때문에 웅장,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다. 특히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

영릉지문(효종릉의 지문)은 명문으로 손꼽힌다.

 

송시열은 학계와 정계에서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김장생.김집 문하에서 동문 수학한 송준길.이유태.유계.김경여.윤선거.윤문거.김익희 등으로 이들과 함께

세칭 산당으로 불렸다. 한때는 남인 권시.윤휴 와도 절친한 적이 있었다.

벼슬에 나아간 뒤에는 김상헌의 손자들인 김수증.김수흥.김수항 형제들.민정중.민유중 형제.이후원.이시백 등 서인 권문세가 인사들과 정치를 같이하였다.

소론계인 남구만.박세채.이경석과도 친했으나 뒤에 당이 갈려 멀어졌다.


송시열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에서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경석.윤휴 및 윤선거.윤증 부자와의 알력은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당쟁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사돈인 권시와도 틈이 생기고,이유태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평생의 동반자였던 송준길마저도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 문제로 마침내 노소 분당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 외에 김창협.이단하.이희조.정호.이선.최신.송상민 등이 뛰어난

제자로 일컬어진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윤봉구.황이간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존주대의 이념이 계승되어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송시열에 의해 재정비된 정통성리학의 체계와 광범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 이념으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송시열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경례의의''심경석의''찬정소학언해''주문초선''계녀서'등이 있다.

문집은 1717년(숙종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이라 하였다. 이후 1787년(정조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보완하여 평양 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이라 명명하였다.




 

⊙ 궁중비사 허견의 오긍골의 사흘밤            2019.06.21.금요일,맑음

숙종(1,674-1,720)은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올랐으나 그 영특한 자질은 과히 유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근심되는 일은 숙종의 나이 어리고 다시 병석에 눕게 되자 평소에 보위를 엿보던 그 무리들이 다시 준동하는 기미가 보이게 되는 일이었다.

더욱 세상의 물정이 이리 뒤치락 저리 뒤치락 하는 통에 부왕인 현종이 빈천하는 시간까지 재삼 간곡하게

당부한 말 "아버지 대신 의지하고 믿으라"하던 허적을 자기 스스로 죽이게까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허적은 무슨 까닭에 칠십 평생을 부귀로서 살아가다가 역모로 몰려서 몸에 사약 사발을 안고 죽게

되고 전 가족이 멸망하는 참화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가.

허적은 그 관직이 혁혁해서 입조 오십년인 현종 말년에는 지위가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되고 따라서 현종이 승하할 때는 고명 유신으로 숙종을 추대하여 다시 숙종의 조정에서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차차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의 세력을 펴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서인들은 이 눈치를 알고 허적을 어떻게 해서든지 치워버릴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허적에게는 아무러한 탈도 잡을 것이 없으므로 그 서자 허견의 하는 일이 암만해도 수상해 보이니

이 자의 일을 뒤쫓아 살펴 보아서 미심한 일만 있으면 당장 고변해서 처분을 내리도록 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때문에 이 일을 알게 된 허적은 그 아들에게 이런 세상 물정을 귀띔해 일러 주었다.

늘 자기의 심복을 내세워서 허견의 행동을 뒤쫓아서 내탐하게 하였다.

그러나 허적의 귀에는 허견에 대한 세상 풍설이 좋지 못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뉘 집 양가 여자를 뚜쟁이를 놓아서 빼어내다가 간통하였다느니,별별 말이 다 들리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놀랍게 들리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허견을 지목하여 복선군이라는 종친을 껴가지고 역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받는 일이었다.

허견을 불러서 주의 시키면 펄쩍뛰면서 그런 일이 절대로 없다고 하나 허적은 아들로 인해서 한시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러던 중, 허견이 또 일을 저질렀다.

허견은 전부터 역관 이동구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항상 잊지 않고 있었는데,

후에 그 딸은 역시 역관 서효남의 며느리가 되어 들어갔다.

이동구의 딸은 그 이름이 차옥이라 하고 그 아름다운 성중에도 소문이 높아서 당시 세상 사람들은 아름다운 얼굴을 비교할 때에 [이차옥이 만큼이나 예쁘구나]하였다.

허견은 항상 이차옥을 제 손안에 넣어보려고 벼르던 중 어느 날 술 취한 마음에 갑자기 이차옥을 생각하다가 드디어 온당치 못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차옥의 고모부 이시정도 역시 역관 집인데 새로 며느리를 보게 되어 잔치를 베풀자 이 잔치에 이차옥도

청함을 받아서 참례하게 되었다.

이차옥에게는 그 내종 오라비의 장가드는 잔치에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고 손님들이 차차 돌아갈 때쯤 이시정의 집에는 낯선 교정 한 사람이 들어서면서

 “사동 아씨 여기 계시지요? 저 서역관댁 마님이 별안간 위중하시다 하여 모시러 왔습니다.”

이런 말을 하니 이차옥은 그 교정이 낯선 사람이지만 의심치 않고 곧 따라나섰다.

교자는 휭하니 달렸다.뒤에는 몸종이 따라섰으나 중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교정들은 교자를 메고 사동 서역관 집으로 가지 않고 오긍골 어떤 조그마한 집으로 들어가더니

“이 댁이 마님 친척 댁인데 여기 오셨다가 병환이 나셔서 이댁 건넌방에 누워 계십니다.”

하면서 그 집 마루 앞에 내려놓고 교군을 멘 채 그대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이차옥은 시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말에 마음이 황황하여 아무 정신없이 그 건넌방문을 열고 보니

그 안에는 시어머니가 누워 계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젊은 사나이가 반가이 맞았다.

“오, 차옥이 오래간만이요.”

하고는 일찍이 그 친정 부친 이동구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대를 마음에 항상 사모했노라고 중언부언하는데 행동이 괴상했다.

이때에야 비로소 이차옥도 이번 일이 모두 이 흉한 자의 간계로 꾸며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장 문을 박차고 도망가려고 했으나 그때 형편으로 도저히 그 독수를 면할 수없어 드디어 그 사나이에게

욕을 당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기회를 보아 나가려 했으나 철통같은 감시로 인해서 도저히 이 집을 벗어나 갈 수가 없었다.

악착을 떤다면 나갈 수도 있겠지만 이웃이 알게 되고 또 시집에게까지 알게 된다면 더욱 창피한 일이었다. 이차옥은 아주 벙어리같이 꾹 참으면서 사흘을 지냈다.

열사흘을 계속해서 그 이름도 모르는 음흉한 사나이에게 갖은 욕을 다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 밤,

그 사나이는 차비를 구해서 차옥을 집으로 데려다 준다고 이 집에서 내보냈다.

차옥은 이번에야말로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교자 안에서 자주 바깥을 살펴보았으나 밤이 깊어 지척을 분별

할 수 없는데다 교정들은 얼마나 왔는지 좀 쉬어가자고 교자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한참이 되어도 교자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궁금해서 밖을 내다보니 교정들은 한 놈 없이 다 도망가

버리고 없었다.

차옥은 얼른 밖으로 나와서 살펴보니 그 곳은 곧 사동 자기 친정집 대문 앞이었다.

일변 놀랍고 일변 반가워서 뛰어 들어갔다.

친정 부모도 이게 웬일이냐고 깜짝 놀라서 그 곡절을 물었다.

차옥은 감히 대답하지 못하다가 하인들이다 물러간 후에야 울면서 모친에게만 그간 자기가 욕을 본 경과를 이야기했다.

이 집에서는 놀랍고 분한 것을 견딜 수 없어서 그놈이 누구인 것을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인을 시켜서 그 교자의 주인을 찾게 했다.그 결과 그 교자는 야조개 어느 세물전 셋보교인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 보교를 세주었다는 세물전을 찾아가서 물어보니 사직골 사는 허대감이 빌려 갔다는 것이었다.

이동구는 벌써 그가 누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는 했으나 지금 세도재상이니 자기 같은 사람이 이런

문제를 섣불리 꺼냈다가는 도리어 되잡히기가 십상팔구요,

또 딸을 찾았고,제 시집에서는 모르고 있으므로 참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분기를 억지로 참았다.

차옥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일을 욕본 사람은 과연 허견임에 틀림없었다.

허견의 생각으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담아오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담아냈으니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견이 이차옥을 데려온 집은 청풍 부원군 김우명의 첩 예정이란 여자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청풍 부원군이라고 하면 현종 왕비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숙종으로 본다면 외조부가 되는 셈이다.

그러면 허견이 어떻게 그런 집에 그것도 남의 첩의 집에 가 있게 되었는가?

원래 예정이란 여자는 허견의 처 예형과 의형제 간으로 허견의 집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는 서인과 남인이 서로 그 행적을 내탐해서 무슨 단서를 얻어내기 위해 저편에 자기의 심복을 그편 모르게 들여보내는 것이 예사처럼 되어 있는 때다.

 

허견도 서인 김우명의 집안일을 내탐할 양으로,처음에는 청풍 부원군 집에 침모가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예정을 시골서 떠들어온 사람의 행색으로 들여보냈다가,차츰 김우명의 마음을 사로잡게 해서 첩으로 들어

앉게 했던 것이다.

한번 첩으로 들어앉게 되자 김우명은 예정을 슬그머니 빼내다가 새로 집을 장만해 놓고 살림을 시켜 주었다. 그러던 중 김우명은 세상을 떠났다. 늙은이의 첩실을 면하게 된 예정은 다시 허견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허견의 처는 전에 병사를 지낸 홍순민의 첩의 딸로서 그 성질이 괴벽하고 마음이 착하지 못한 편이었다.

예정과 허견의 사이는 마치 형의 남편과 처제의 사이와 같은 정도로 친숙했지마는 김우명이 죽은 후로 예정이 자주 허견의 집에 드나들고 나서부터는 허견의 아내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늘 허견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형은 예정의 집에다 심부름하는 계집 아이를 첩자로 들여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이 첩자가 와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며 분을 참지 못했다.

어느 날 평일과 다름없이 예정은 예형을 찾아왔다.

마침 허견은 시골에 가고 입에 없던 때였다.아무러한 눈치가 없이 종일 지내고 이내 예형의 집에서 자고

가려고 밤늦도록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정에게 돌연 청천벽력이 내렸으니 일은 이제부터 벌어지게 된것이다.

냉면으로 밤참이 들어와서 맛있게 먹고 난 후였다. 방은 더웠으나 예정은 냉면을 먹은 후라 달달 떨었다.

예형은 하인을 시켜서 강차를 끓여 오라고 호령을 하면서 예정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마 인제는 옥동자를 낳으려나 보구먼. 이렇게 더운 방에서도 춥다고 떨고 야단이니?” 이런 말을 했다.

“아이고, 형님도. 별말을 다 하시는구려, 하늘에 올라가야 별을 따지 않소.”

“왜 그래, 내가 들으니 귀동자를 낳을 만하겠던데.”

“왜 무슨 소리를 들으셨소?”

“우리 집 대감을 어째서 자네네 집 건너방에 사흘씩 묵혀 두었나?”

갑자기 예형의 얼굴에 독기가 팽창했다.예형은 계속 예정을 보고 코웃음을 치면서

“입이 광주리만 해도 할 말은 없겠지?”

“그렇지만 나는 아무 죄도 없어요.” 

“요, 앙큼한 년! 그래도 변명이야?”

예형은 옆에 놓인 퇴침으로 예정의 머리통을 후려쳤다.이때에는 예정도 암상이 날대로 났다.

“왜 까닭 없는 사람을 땅땅 때리는 거예요? 어디 더 때려봐요!”

몸을 예형에게로 들이대면서 이렇게 발악을 했다.

“네깐 년은 죽여 놓아도 좋다, 그 따위 버릇을 하다가는.”

예형은 한층 더 호통을 치면서 그의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아니, 댁 대감이 어떤 년 하나를 잡아다가 놓고 이틀 사흘 그 따위 짓을 한 것을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내 말이 믿기 어렵거든 대감께 물어보라니까, 누구는 그리 허름한 줄 아우?”

“아따, 부원군의 첩실이니까 어깨가 으쓱한가 보다.

그 알뜰한 죽은 영감장이의 첩실,누가 알아준다고 으쓱거려. 그나마 누가 그 자리에 가게 해주었는데.

그러고 저러고 간에 내 말은 다른 게 아니야. 우리 집 대감이 어떻게 아무 일 없이 남의 집,

그야말로 부원군 첩실의 댁을 찾아가서 그 건넌방을 치우고 버젓이 그런 짓을 했느냐 말이다. 네가 그전부터 그 따위 짓을 하다하다 못해서 나중에는 다른 계집까지 천거를 하는 게 아니냐 말이다.”

예형은 노기충천해서 예정을 넘어뜨리니 예정은 장지에 부딪쳐 쓰러지면서 입에서 피를 쏟았다.

이 두 개가 몽땅 빠져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있던 이듬해 봄이었다. 청풍 부원군의 조카되는 김석주는 돌아간 그 숙부의 옛 정의를 생각해서 그 서숙모가 되는 예정을 가끔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다.

그러던 중 김석주는 그 서모 예정과 허견의 처 예형과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나서 예정의 이까지 빠지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김석주가 그 서숙모를 찾아와서 

 “지금 형편으로는 좀 거북한 일이지만 다시 허견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쪽 내막을 자세히 살펴 주시오.”

하고 부탁하였다.예정은 김석주가 자기에 대해 마음 쓰는 일을 늘 고마워 해 오던 터라 그만한 부탁을 안

들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정은 다시 예형을 찾아갔다.

“형님, 더러운 것은 사람의 정입니다. 그렇게 이가 부러지게 싸우고도 십년 가까이 든 정을 잊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 그대로 견디겠습니까. 기왕 일은 누가 잘했건 누가 잘못했건 그만두고 우리 형님이 그리워서 왔으니 그전대로 의지하고 삽시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그때 무슨 살이 들어서 그랬는지 그 후에 퍽 후회했네. 조금도 예전 일을 생각지 말고 앞으로는 여전히 잘 지내세. 이렇게 와서 먼저 풀어 주니 고맙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고 두 사람은 전과 같이 왕래를 했다.

김석주는 예정을 통해서 허견의 일을 어느 정도까지 알게 되었다.

 <허견은 매일 만나는 사람이 벼슬아치보다도 아직 벼슬하지 않은 이들, 대개는 모양이 초라하고 자비하나 변변히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며,그 중에도 복선군이란 종실과 가장 친하다는 것,

그리고 밤중에 남의 이목을 피해서 슬그머니 왔다가는 슬그머니 나가는 사람들이 몇 사람 있다는 것.>

이런 일들을 차차 알게 된 것이다.

김석주는 곧 의관을 차리고 자비를 준비해서 상동에 사는 한성좌윤 남구만을 찾아갔다.

김석주는 예정에게서 들은 허견의 이야기를 남구만에게 대강 들려주고 이 기회에 허견을 내쫓고 서인들이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구만은 결기 있는 사나이였다. 이런 단서가 알려지지 않아 애를 쓰며 기회 있는 대로 남인을 쓰러뜨리려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곧 조정에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신이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청풍 부원군 김우명은 이미 작고했으나 그 부실 오씨(예정)가 아직 옛집을 지키고 있사온데, 오씨는 허견의 처 홍씨와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옵니다.그런데 허견의 처 홍씨는 항상

제 집에 드나드는 오씨가 그 남편과 어떠한 정사 관계가 있다고 해서 마구 때리고 싸우다가 드디어 오씨의 앞니를 몇 개나 빼어놓았다 합니다. 부원군의 첩은 비록 천인이지만 중전의 서모가 되는 분이요,

어찌 이것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한번 이 상소문이 나오자 세상은 뒤숭숭해졌다.

이튿날 허적이 사연을 밝혀서 상소했다.

<신의 서자 허견의 처는 죽은 홍순민의 첩의 딸로서 그 성품이 괴악하여 이루 말하기 어렵고 당초에 결혼 때도 속아서 결혼한 것이요. 그간 그의 결의 형제라는 예정이란 여자와 친하게 지낸다는 말은 들었어도 서로 싸웠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요. 아마 그의 성품이 흉패해서 그런 좋지 못한 소문이 나는 모양이요.>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우윤 신정이 다시 상소를 올려 이차옥의 사건을 들어내놓고 공박했다. 임금은 그 상소를 포도대장 구일에게 내주며 이 사실을 조사해 올리라 분부했다.

구일은 어명을 받들어서 당일로 허견과 차옥을 잡아가두고 문초를 해본 결과 차옥이 그 일을 전연 부인하니 마침내 무근지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남구만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세상에서 다 아는 바이지만 허견은 집에서 하는 일 없이 친구를 모아가지고 시국을 의논하는 것과 남의 집 유부녀를 겁탈하는 것으로 농사를 삼는 터입니다. 이차옥의 사건으로 말하면 허견의 아내 예형과 그의 결의형제인 예정이 증거이온대 그들을 다 젖혀 놓고 허견과 이차옥만을 불러서 물어봤으니 그 일의 진상이 드러날 리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이 윤휴가 싸고도는 때문에 결국 무소가 된 바이오나 윤휴로 말하더라도

바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공공연히 나라에서 금하는 소나무 수천 주를 베어다가 자기 집을 지었다합니다. 국법에 산 소나무 열주만 베어도 사죄에 이른다고 했는데, 법을 맡은 자가 이와 같이 하니 어떻게

백성을 조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상소를 보고 젊은 임금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즉시 형조판서 이관징을 불러

“듣자니 요즘 권문세가에서 처지를 믿고 부정한 짓을 하는 모양이니 이 사실들을 전부 밝혀내라.” 했다.

며칠 후 이관징이 임금께 아뢰었다.

“사실을 조사해 본 결과 허견의 집일은 지각 없는 낭속들이 터무니 없이 떠들어서 소문이 났던 바이오며,

윤휴의 집은 살펴보니 그 집은 새로 지었으나 모두가 헌 재목으로 지었습니다.”

이때에 임금은 남구만이 두 번이나 올린 상소가 전혀 무근지설을 무소해서 남을 헐뜯으며 임금을 속인 것

이라 하여 그 자리에서 남구만의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바로 이 무렵 강화도의 계선돈대를 쌓는 역사가 있어서 팔도의 승군들을 불러 모아 일을 시키고

수사 이우가 이 일을 감독하게 되었다.

하루는 이우가 병조판서 김석주에게 무명인의 투서를 올려 보내왔다.

김석주는 그 편지를 보고 그대로 쥐고 있을 수 없다 하여 조정에 내보였다.

그 투서의 내용은 시국을 비방하고 현 조정을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슬프다. 이때는 정히 나라가 위태하기 짝이 없는 시기로구나. 임금은 유충하신 중에 다병유약하고 국정은 몇 사람의 재상의 손에서 마음대로 농권되니 백성은 모두 도탄에 빠져서 민심은 점점 불안하여 장차 내란이 일어날 것이니, 남의 나라를 막기 위해 돈대를 쌓는 것은 도리어 우스운 일이로구나.

제공은 이런 일을 치우고 승군을 수백 명 모집해 가지고 도성으로 들어가 삼개에서 기다리라,

그러면 의군은 승군과 합세해 가지고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을 추대해서 거사 하려는 터이다.>

이 글을 보던 모든 사람은 창황망조해서 그날로 어전 회의를 열어가지고 선후책을 강구하기에 급급했으니 사태는 목첩 간에 긴박한 듯이 보였다. 우선 투서한 사람을 찾고자 이우를 문초하였다.

이우의 말에 의하여 사십세 넘은, 키가 크고 수염이 많은 자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수소문할 때 또 대궐 근처에 누가 익명서를 던지고 갔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서인과 남인의 감정은 당장 폭발할 듯이 극도로 팽창되었다.


이러한 중에 허적과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허목이 상소를 올렸으니,

그 상소는

<영의정 허적은 선왕의 고명 유신으로 주상을 도와야 할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색을 가려서 사람을 쓰고 그 교만과 사치가 날로 심한 중에 요즘에는 내시와 궁녀들과도 연결하여 전하의 동정을 시시로 내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자 허견은 아비의 세력을 믿고 양가의 부녀자를 겁탈, 간음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만 조정에서는 그 누구 한 사람 탄핵하는 사람이 없고, 혹시 여론을 일으키는 자가 있어도 번번이 바른 말하는 사람만이 귀양 가고 죄를 입으니 이같이 하다가는 종묘사직이 위태해질 것입니다. 급히 상당한 조처를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임금은 이 상소를 보고 곧 노염을 지으며

“한동안 아무 일이 없더니 또 남구만 같은 자가 생겼구나. 이 무슨 주제넘고 쓸데없는 짓이냐.

영의정 허적은 나라의 기둥인데, 그를 해치려는 자가 누구냐?”

이런 말을 하고 도리어 허목을 귀양 보냈다.

숙종이 허적에 대하여 믿고 의지하는 마음은 이만치 깊고 두터웠던 것이다.

허적의 처지가 이와 같이 반석처럼 튼튼해지자 허견의 방종함은 날로 심해서 뜻있는 자가 차마 그 분노를

견딜 수 없었다. 이제는 공공연하게 남의 집 부녀를 겁탈하고 궐내를 출입하고 무기를 대량으로 만든다는 소문이 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그 누구 한 사람도 감히 입을 열어 탄핵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형편을 돌아보던 김석주는 드디어 직접 탑전에 나아가 아뢰었다.

“허적은 늙은 간흉이요, 허견은 젊은 역적이오니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오면 훗날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시고 의심의 귀추를 따라서 곧 그들의 생활 이면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허적 부자를 의심하면서 곧 별군직 이입신과 어영장 박빈을 비밀히 불러서

“복선군과 허적 부자의 사생활을 밤낮으로 살펴서 알아 올리라.” 분부를 내렸다.

이들은 각각 그 맡은바 집 부근으로 다니면서 동정을 살피는데, 그동안 이입신은 당당한 벼슬아치면서도

남루한 의복에 교군처럼 차리고 여러 차례 복선군 집에 출입했는지라 궁비들과도 차츰 낯이 익게 되었다.

어느 날 새벽 찬서리를 맞고 덜덜 떨면서 복선군 궁 행랑채 아궁이 앞에서 불 때는 궁비 앞으로 가서 손을

째며 이죽이죽 말을 붙이는데, 의외에도 여기서 이상한 일을 듣게 되었다.

“아니 손끝은 왜 그렇게 다쳤소. 퍽 아프시겠구려.”

“바느질이 세차서 바늘 끝에 찔린 게 덧나서 그래요.”

“바느질은 침모가 할 게 아닌가?”

“한 두 벌이라야지요.”

“아니 무슨 혼수 바느질이요?”

“아니요.”

“그럼?”

“글쎄, 무엇에 쓸 것인지 군복을 한가위에 백 벌을 만들랬어요. 그래가지고는 꼭 밤에만 짓는 거예요.

그래서 거의 마쳤는데 또 몇 백 벌을 지을지 모른다고 하니 그 바느질을 어떻게 해낼지 모르겠어요.”

“아니, 그것은 무엇에 쓴답디까?”

“낸들 아우.”

“그래 그것은 모두 궁대감께서 하시는 일이지?”

“그렇지도 않은가 봅디다. 저 어느 정승의 아드님이라나 그분께서 옷감을 가져온다는데 그분은 꼭 밤에만 왔다가 돌아가시지요.”

이입신은 크나 큰 수확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김석주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낱낱이 고했다.

이날 영의정 허적의 집에서는 조부 허잠의 충정공 시호를 받는 날이었다.

이제 그의 손자 허적이 나라의 중신이 되었으므로 그 공으로 조부까지 시호를 받게 된 것이다.

허적의 집에서는 이날 아침부터 사당에 차례를 지내고 원근 친척과 고구들을 청해서 굉장한 잔치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은 아침 후에 별안간 비가 내리므로 잔치 집에서는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준비해 놓은 음식이며 이미 초청한 손님이며 아무리 해도 하루도 연기할 수가 없었다.그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하려고 우선 비를 막을 수 있는 준비로서 궁중의 차일을 빌려내다가 쳐 놓고 빈객들을 대접하는 일에

분망했다. 이런 일을 모르는 임금은 비 오는 날에 잔치를 치를 허영상집 일을 생각하고 근신에게

“오늘 허영상댁 잔치라는데 비가 와서 안 되겠다.궁중 차일을 내어 보내주라.” 이런 말을 하였다.

이때 옆에 있던 내시가 아무 생각 없이

“궁중 차일은 벌써 영상댁에서 내어 갔습니다.” 하고 대답해 아뢰었다.

젊은 임금은 불시에 자기의 승낙 없이 가져간 것이 몹시 불쾌했다.

“나라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다니 될 말이냐. 괘심한 일이로구나.”

다음 순간 허적에게 대한 의심이 부쩍 일어났다.이러는데 김석주가 급히 입궐하여 이입신이 내탐한 정보를 아뢰었다. 임금은 곧 무감을 허적의 집에 보내어 그 빈객들을 조사케 했다.

이날 잔치에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사람은 종친으로는 복선군 형제요,서인편으로는 오두인, 이단상, 김만기 등 몇 사람뿐, 그 외에는 전부가 남인의 재상들뿐이었다. 그 중에도 훈련대장 유혁연이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다른 손들의 이목을 집중케 했다.

무감은 이 형편을 정찰하고 대궐로 들어가 위에 아뢰었다.

즉시 내시가 허적의 집으로 나와서 왕명을 전하고 유혁연과 김만기를 곧 입시하라고 말했다.

위에서 병조를 통하지 않고 직접 훈련대장을 부르는 일은 나라에 변고가 있기 전에는 없는 일이다.

훈련대장이 입시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그대로 안연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부제학 유명천이 벌떡 일어서면서 주인 허적을 보고

“대감,대궐의 수비하는 책임자를 불러들이니 수상하옵니다.

삼공이 들어가 일을 무마시킵시오.” 하고 권했다.

허적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고 앉았다가

“작년 가을부터 상감이 우리들을 경계하시는 눈치더니 그동안 또 무슨 말이 들어간 모양일세.”

하고는 유명천의 권고로 우의정 민희(閔熙)와 같이 예궐하였다.

내전 궐문에 이르러 승지에게 알현할 것을 전하니 승지가 들어갔다가 나와서

“시방 대할 까닭이 없으니 그대로 물러가라고 하시오.” 하였다.

영의정은 우의정의 얼굴을 돌아보고 우의정은 영의정의 얼굴을 돌아보며 모두 흙빛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허적은 허견을 불러 앉혀 최근에 어떠한 일을 했던가를 물어보았으나 허견은 대답이 없었다.

 허적은 하룻밤을 그대로 밝히고 날이 밝자 곧 민희를 청해서 만났다.

 “대감, 이게 어떻게 된 셈이요?” 민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낸들 알 수 있소. 시운이 지나서 남인이 몰살을 당하는 판인가 보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죄를 당할 일은 없었소이다.”

 “죄 없으면 관계치 않겠지.”

 “그런데 또 기막힌 일이 있소이다.”

 “무슨 일이요?”

 “훈련대장 유혁연 집에 밤사이에 두 세 차례 사람을 보냈는데 아침까지 퇴궐치 않았다 해서 친한 무감을

통해 알아보니 어제 저녁으로 의금부로 넘어갔다 하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허적은 유혁연이 잡혀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웬일이요?”

“하, 글쎄 낸들 알 수 있소이까? 꼭 미칠 것만 같소이다.”

이런 걱정을 하는 가운데 또 하루가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궐내로부터는 하등 처분이 내리지 않았다.

 

한편 김석주는 그동안 자기의 심복 정원로를 시켜서 또 상소를 올리게 했다.

<허견은 유혁연과 그밖에 여러 동지를 규합해 가지고 역모를 하여 장차 복선군을 추대하려 하던 일이 최근에 알려졌는데, 불일내로 거사할 모양이니 속히 처분하시옵소서.>


임금은 더 참고 기다리지 않았다. 허적이 가평 고을로 내려가 숨어 버리려고 황황히 가사를 정돈하고 있는데 돌연 의금부 나졸들이 집을 에워싸고 들어왔다. 허적이 의금부로 붙들려 간 뒤에 허견도 도망 갔다가 붙들리고, 복선군도 붙들리고 따라서 그 동지로 혐의 받던 자들도 모두 붙들리니 그 수효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 후 임금은 일곱 군데에 국문처를 베풀고 그들을 엄중 국문한 결과 이번 역옥 사건에 주범이 되는 허적

부자,유혁연,복선군,윤휴,민희,오시수,이태서 등은 모두 처참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귀양 보냈다.

이것이 숙종 육년 경신년의 일이므로 이 일을 경신대옥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는 반면에는 김석주와 정원로는 역모를 고변했다는 그 공로로써 보사훈을 받게 되었으며, 허적의 내각이 쓰러지는데 따라서 김수항으로 영의정을 삼으니 좌우영상과 육조판서가 모두 서인이 임명되어 어제까지 기세충천하던 남인들은 멸망하고 서인의 세력이 조정을 뒤덮게 되었다.


 

⊙ 조선의 왕릉-개풍 후릉        2019.06.21.금요일,맑음

위치; 경기도 개풍군 흥고면 흥교리

소개; 북한에 위치한 개풍 후릉은 조선 제2대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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