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다피 사망              2020.02.16.일요일,맑음

가다피(생졸;1942년6월7일~2011년10월20일)는 리비아의 국가원수,국가평의회 의장,총리,국방장관이다.

1551년,리비아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이래 리비아의 최장기 국가 지도자였으며,

2011년2월에 시작된 아랍의 민주화 시위의 영향을 받아

2011년10월20일,

자유 리비아군에 체포되어 한 시민군이 쏜 총상으로 고향 시르테에서 사살되었다.


1942년에 리비아 시르테 주 시 시르테로 근처의  유목인인 베드인족의 일파인 카다피 부족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베두인식 이슬람 종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가난한 환경에서 여러 형제와 친척들과 함께 성장했으나 그는 공부와 출세에 대한 의욕,

욕망이 남달랐다고 한다.

1952년 10살 때,

방송으로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 등이 이집트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

하자 여기에 영향을 깊게 받아 그의 아랍 사회중의 및 민족주의 의념을 따랐다.

이때부터 카다피는 나새르의 영향을 받아 아랍세계를 통일해 기독교 세계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56년에는 수에즈 사태에서는 반이스라엘 시위에 참가했다.  

1963년,

벵가지의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 사관학교에 입교해 재학 당시부터 동료 생도들과 왕정 타도를 목표로 하는 자유 장교단을 조직했다.

1965년,

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1년 간 영국으로 유학 겸 파견 근무를 하게 되었고,

귀국 후 첫 보직으로 통신 부대 장교로 부임하였다.

나중에 그리스 아테네의 헬리나 군사학교와 영국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69년9월1일,

국왕 이드리스 1세가 신병 치료차 터키에 체류 중이던 틈을 타

가다피는 육군 중위로 동료 장교들과 함께 수도 트리폴리를 공격하면서 무혈 쿠테자로

정권을 잡는데 성공 하였다.

국왕 이드리드 1세는 객지에서 퇴위 당해 터키로 망명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카다피는 쿠데타 직후 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대령으로 승격했다.

9월11일에 잠정헌법을 공포한 이후 신생 리비아 공화국의 최고 정치기구인 혁명지도평의회의장에 취임했다.

쿠데타 이후 리비아는 왕조가 교체되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1969년9월1일,

리비아 '비상 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비상혁명 위원장이 되면서 그는 총리와 국방장관과

국가평의회 의장(의회 의장)과 국가 원수를 모두 겸직한다.

1972년,

2년만에 총리직과 국방 장관직은 내놓고 국가 원수 겸 국가 평의회 의장으로 머물렀다.

1974년,

정치 이론을 연구하는 데 전념하여 혁명 평의회의 의장 권한을 2인자에게 잠시 위임하였고,

이슬람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문화 대혁명을 주도했다.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의해 음주를 금지시키고  독자적인 직접 민주주의를 구상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 이론을 집대성한 1975년에 발간된 '녹색서'에서 잘 밝혀져 있다.

1977년3월2일, 비상 혁명위원회는 해산되었다.

소위 '인민주권 확립선언'을 공포한 후 초대 전국 인민 위원회 서기장에 취임했다.

1978년부터 1979년까지는 리비아와 국경을 접한 차드와의 전쟁에 나섰지만 차드-프랑스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만다.

1979년,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대신 오로지 혁명 지도자라는 명예 직함만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의 국가 원수이자

리비아의 모든 국가 업무는 카다피의 지도 하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반미 주의를 주창하여 미국 군사 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 자본을 추방했으며,

이탈리아,프랑스인 등을 추방했다.

외국의 석유 회사들을 추방하고 석유를 국유화했다.

또한 도로와 해운, 항만, 항공 등의 기반시설도 국유화와 국영화로 전환시켰다.


카다피 정권은 반미주의에 입각하여 미국과 성방권을 상대로 로커비 사건(팬암항공기 폭발) 등 수차례의 테러를 감행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은 리비아를 테러리스트 국가로 지목하면서 리비아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1986년, 미국 공군,해군이리비아를 공습했지만 국제 사회는 미국을 규탄,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아랍 민족주의자였던 카다피는 중동 지역에 단일 아랍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로 이집트와 아랍 연합 구성에 합의했으나,

중동 전쟁 이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추진한 평화 정책에 반발하여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1980년,

시리아와의 합방을 선언했으나 곧이어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나 합방은 무산되었다.

그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이란 호메이니에게 싸움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으나,

사담 후세인,호메이니 모두 거절하였다.

이란-이라크간의 전쟁을 관망하였다.

2003년,

미국의 부시 대통령 등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이라크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유럽과 서방 세계에 개방을 선언하고,외부의 학술 연구단의 출입을 완화시키기도 했다.

2004년,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시켰으며,

2006년,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2008년9월,

라이스 미국무장관은 트리폴리를 방문하여 카다피와 회담하였다.

또한 과거 이탈리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 사과를 받아들였다. 

 
카다피 퇴진 시위

42년간 지속되어온 카다피의 장기집권으로 인하여, 카다피에게 반기를 든 시민군으로부터 그의 정치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반정부 시위 직후 리비아 시민군은 벵가지 등의 도시를 장악 후 나토의 지원을 얻어 트리폴리 시를 점령했다.

이후 카다피의 리비아 정부군이 트리폴리를 빼앗기자 카다피는 시르테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카다피가 사망할 당시 상황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결국 리비아 시민군에게

체포당하던 중 한 시민군이 쏜 총상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아랍 사회주의에 근거하여

이집트,시리아와 함께 아랍 공화국 연방 건설을 추진하엿으며,리비아 대수로를 건설하였다. 유전을 개발하고 아프리카의 빈국에서 1인당 GDP 1만달러의 경제 부국으로 탈바꿈 시킨

강력한 지도자였다.

당시 리비아의 노동 복지는 아프리카와 중동을 통틀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으며,

교육,의료가 전면적으로 무상이었다.

그는 파레스타인과 아프리카 내에 존재하는 흑인 해방운동을 비롯한 세계의 혁명 단체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기도 했다.

카다피는 오사마 빈 라덴을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카다피와 빈 라덴과의 관계는 빈 라덴이 국제 사회의 수배를 받기 시작한 1998년3월로

거슬러 올라오는데, 이 시기는 빈 라덴에 대한 인터폴의 첫 체포영장이 발부된 시점이었다. 이 영장은 카다피가 이끄는 리비아 정부의 청구로 발부되었는데,

그 이유는 빈 라덴의 알 카에다가 카다피의 고향인 리비아 시르테에서 독일 정보기관 요원 부부에 대한 살해를 저지른 혐의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전후로 카다피는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에 대해 증오하게 되었다.

1인 독재를 추구한 카다피는 알 카에다 등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도 강력하게 탄압했으며

이에 맞서 알 카에다는 수차례 카다피 암살을 시도했다.

2001년,9.11 테러 이후에 카다피는 미국의 빈 라덴 색출 작전에 협조하며 알 카에다와 줄곧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2011년,리비아 봉기가 일어나자, 카다피는 이 사건의 배후로 알 카에다를 지목할 정도로

알 카에다에 대한 심한 반감을 드러냈다.


2009년2월부터2010년1월까지,

아프리카 연합 의장을 지냈으며,

1551년 리비아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이래로 리비아의 최장기 국가 지도자였다.

그러나 2011년 초에 시작된 아랍의 민주화 시위의 영향을 받아

2011년2월,

가다피 정권에 대항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며,

2011년8월22일,

자유 리비아군이 크리폴리에 진입하여 그의 아들 둘을 생포했다.

2011년10월20일, 고향 시르테에서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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