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甲申政變)                2019.08.05.목요일,흐림

1884년(고종 21)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개화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의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 출신의 지식인과 양반 관료들 사이에서는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서재필 등의 양반 출신 청년 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 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 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개항 이후 이들은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에 참여하면서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개화 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 세력인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 하면서도 실현 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은 부국 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 정책을 실현하되,민씨 정권과 타협 아래 청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급진 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 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고 민씨 정권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개화파는 개항 후 나라 안팎의 정세 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충의계를 통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개혁

운동의 수단으로서 당시 서구의 근대 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에게 적극 접근하였다.

특히 1880년 이래 조선 정부의 해외 시찰 정책, 즉 일본 수신사와 조사 시찰단의 파견,

청나라로 영선사 파견 등에 박영효·김옥균 등 개화파가 적극 참여함으로써 세계의 정세 흐름과 새로운

문명을 직접 확인하고 자각을 넓혀 나갔다.

또한 개화파는 양반의 자제뿐 아니라 광범한 층의 청년을 모집하여 일본의 군사 사관 학교와 게이오의숙

등에 유학하게 함으로써 근대적인 군사학과 학문·사상 등을 배우게 하였다.

박영효는 1883년 8월 외무아문 아래 박문국을 설치하여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서 개화파는 나라 안팎의 정세에 관한 소식은 물론,

구미의 입헌 군주제와 삼권 분립의 우월성 등 그들이 지향하는 개혁의 내용을 선전하였다.

그런데 민씨정권이 부분적인 개화 정책을 실현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나라의 침탈이 강화되면서,

개화파의 평화적 개혁노력은 벽에 부딪혔다.

1882년 임오군란은 수구적인 민씨 정권과 급진 개화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급속히 냉각시켰다.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출병하여 봉기를 진압한 뒤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 침략을 획책

하였고, 민씨정권은 청나라에 의지하여 정권 유지를 꾀하였다.

그들에게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가 큰 위협적 존재였다.

이 때문에 민씨 정권은 개화파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가하였다.

이런 정세 아래 민씨정권에 참여하면서 평화적으로 일대 개혁을 꾀하려던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1884년 봄 안남(베트남) 문제를 두고 형성된 청나라와 프랑스의 대립 관계는,

개화파에게 다시 한번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있는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주었다.

마침내 1884년 8월 베트남에서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 3000여 명 가운데 절반을 철수시켰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은 민씨 정권의 친청 수구 정책으로 인해 청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개화파는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정변을 계획했다.

개화파는 일본의 후원을 업고

1884년12월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군사권.재정권을 장악한 후 정강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청과의 종속 관계 청산.문벌폐지.탐관오리 처벌·경찰제도의 실시 등이었다.

그러나 청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하자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정변 실패 후 일본은 공사관이 불타고 거류민이 희생된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한성 조약을 체결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청과의 경쟁에서 불리해진 일본은 청과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은 개화파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외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이다.


한국사에서 정치 세력으로서 근대적 개혁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것은 개화파였다.

실학의 북학 사상을 계승한 이들은 문호 개방을 전후한 시기에는 박규수.오경석.유대치 등을 중심으로

그 움직임이 보다 적극화되고 조직화 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젊은 양반계급 지식인들을 핵심으로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해가며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민씨 정권의 친청 수구 정책은 날로 횡포를 더해갔고,

청국은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획책함에 따라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는 높아져갔다.

이에 따라 개화파는 정변을 통해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과의 종속 관계를 청산할 것을 결정했다.


마침 월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프랑스 전쟁이 터져 청국이 패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간섭이 약화되고

또 임오군란 이후 냉담했던 일본 공사가 다시 접근해왔다.

개화파는 일본 공사관의 후원을 확인하고 계획대로 1884년12월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우선 축하연에 참석한 민영익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국왕과 왕비를 경북궁으로 옮겨 50여 명의 개화파

군사력과 200여 명의 일본군으로 호위케 하고 수구파 우두 머리를 처단했다.

이어서 개화파들은 홍영식이 우의정,박영효가 좌포도대장,서광범이 우포도대장,김옥균이 호조참판이 되어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정강을 제정.발표했다.


정변의 실패로 이 정강.정책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중 14개 조가 뒷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하여

저술한  '갑신일록'에 실려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청국에 대한 종속 관계의 청산,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제정 및 능력에 따르는 인재의 등용,

   지조법 개혁, 탐관오리 처벌,백성들이 빚진 환상미(還上米)의 영원한 면제,모든 재정의 호조 관할,

   경찰제도의 실시,혜상공국의 혁파 등이었다.

청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지향했고,

아직 국민 국가 수립을 위한 적극적인 자세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양반 지배 체제를 청산하려 했으며,

또 뒷날의 갑오 농민 전쟁에서 요구된 농민적 토지 소유가 제기 되지는 않았으나 지조법의 개혁이 제시

되었고,왕실 경비와 정부 재정을 구분하고 호조가 국가 재정을 전담케 하며,

특권 상인의 존재를 부인한 것 등은 개화파의 국정개혁 의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국왕의 정치 혁신 조서가 내려짐과 동시에 청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퇴하자 개화파들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측은 오히려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와 1885년1월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일본에 사의를 표명하고 10만 원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 공사관 수축비를 부담하게

되었다.


한편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반도를 둘러싼 청국과의 경쟁 관계에서 다시 불리한 처지에 빠진 일본은 정세를 만회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 대사로 청국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담판하게 한 결과,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군의 철수,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서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에는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 조약을  1885년4월18일 체결했다.

 

이로써 갑신정변의 뒷마무리는 일단 끝났지만,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 문제에 있어서 청국과 같은 파병권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0년 후에 일어난 갑오 농민 전쟁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되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우선 개화파 자체가 민중 세계에 뿌리 내리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들이 지향 할 수 있었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은 부르주아적인 정치 변혁을 담당할 주체가 아직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못했다는 점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외세의 압력이라는 데에 자극을 받은 개화파들이

자주적으로 근대화를 달성하려 했으면서도 대다수가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는 민중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러한 한계에서 정변이라는 방식을 통한 위로 부터의 개혁 운동은 외세의 개입 아래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갑신정변이 민중 세계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정변이 외세,

특히 일본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갑신정변은 이렇듯 한계를 지니는 것이며,

비록 삼일천하로 끝나 버렸지만 한국사에서 근대 국민 국가의 수립을 지향한 부르주아 민족 운동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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