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오 농민 운동          2019.09.12,목요일,비

1894년 동학에 기반을 둔 근대화 운동으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개혁 지도자를 중심으로 봉건 사회

해체 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한 근대화 운동이며,

동학난,동학 혁명,동학 혁명 운동,동학 농민 전쟁이라고도 한다.
1894년1월에 봉건 체제에 대항한 고부 농민 봉기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전봉준은 무장에서 손화중.김개남과 함께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고,탐관 오리의 숙청과 보국 안민을 위해 일어 서자는 내용의 창의문을 발표했다.
1894년6월,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하고 개화파의 연립 정권을 수립 시키자,동학 농민군의 지도부는 삼례에서 재봉기했다. 남접.북접 연합군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패퇴하고 말았다.


19세기 후반의 조선 봉건사회는 농업 생산력 및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지주제가 확대되고,

농촌 사회는 지주.부농.소농.빈농.임노동자라는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고 있었다.

특히 지주제와 봉건 체제는 직접 생산자인 농민에게 부담이 가중됨에 따라 1860년대부터 군현을 단위로 한 농민 항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농민 항쟁에 대해 정부는 봉건 체제의 두 축인 지주제와 신분제를 개혁하지 않고 단지 현상적인

부세 제도의 부분적인 수정을 통하여 이를 무마하려 했다.


한편 개항을 계기로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봉건체제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고 확대 되어갔다.

개항 이후 불평등 무역 구조 속에서 소수의 지주.부농층은 대일 미곡 수출을 통하여 이익을 얻어 토지를

사 모으고 지주제를 강화 시켜갔다.

이에 반해 대다수 농민들은 지주제의 강화와 상인층과 지주들의 고리대의 수탈로 더욱 몰락하게 되었다.

영세 수공업자,상인층도 외국 상인의 침투에 따라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다.


농민 전쟁의 진원지인 호남 지방은 전통적으로 대지주에 의한 봉건적 수탈이 심하고,

강경·법성포·줄포·논산포 등의 포구·개항장은 대일 미곡 수출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미곡 무역에 편승한 지주층의 지주제 강화로 인해 소농,빈농층이 몰락했으며,

농촌사회 내부의 분화 및 계급 대립이 전면에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의 교세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봉건 사회를 변혁하려는 일군의 혁명적 지식인들과 결합하게 되었다.

호남 지역에서는 유형원의 학문적 전통을 잇는 부안 동림 서원과 강진에 유배되었던 정약용 등 실학자의

진보적 사상이 몰락 양반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유포되고 있었다.

농민 전쟁의 지도자인 전봉준도 그중의 한 인물이다.

이들은 기존의 군현 단위의 농민 봉기가 가진 지방적 분산성을 극복하고 체제 개혁을 위한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발전 시키기 위해서는 각지의 농민들을 조직.동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광범위하게 교세를 확장하던 동학 조직을 주목했다.


동학은 몰락 양반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

후천 개벽을 통하여 만민 평등의 지상 천국을 건설하려 했다.

동학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으로는 '무위이화'라는 관념적 차원에 머물렀으나 만민 평등의 원리를 기반

으로 한 반봉건 의식과 척왜양이라는 반침략의 민족 논리를 바탕으로 깔고 있었다.


동학 교단은 1892년11월 삼례 집회와 1893년3월 보은 집회에서 교조 신원 운동이라는 종교적 운동을

벌였다. 이때 전봉준 등 남접 세력은 동학 조직을 이용하여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민족적,계급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혁명을 기도했다.

이들은 교조 신원 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금구 집회(1893.3)를 소집,

'척왜척양'과 '수령의 불법 침학 반대'를 외치면서 사회 혁명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갑오 농민 전쟁은 전통적으로 봉건 지배층의 수탈이 심한 고부에서 1894년1월에 일어난 고부 농민 봉기

에서 비롯되었다.

고부 지역은 1880년대 말경 부터 봉건 정부 스스로도 궁장토의 확대와 균전수도 문제와 같이 농민들의

토지나 지대를 수탈하여 지주제를 확대.발전 시키고 있었다.


1892년,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온갖 부당한 수단을 동원하여 세금을 거두어 들이면서 농민들을

착취하자 고부 농민들은 1893년11월경에 조병갑에게 민장을 제출하여 시정을 요구 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이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최경선,정익서,김도삼 등 농민 지도자들은 봉기를 계획하고 비밀리에 각

마을의 집강에게 사발 통문을 돌렸다.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하고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한다'는 등 행동 방침을 결정

했다.그러나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전임됨에 따라 사발 통문 결의는 보류하게 되었다.


전봉준은 1893년12월,60여 명의 고부 농민을 거느리고 새로 온 고부 군수 이은용에게 고부군의 폐정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군아의 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1894년1월9일,조병갑이 다시 고부 군수로 재부임하게 되자 사발 통문 결의 사항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1894년1월11일,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습격해 아전을 처벌하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장한 후 불법 수탈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수세를 군량으로 확보하였다.

정부는 수습책으로 고부 군수를 새로 임명하여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여 조사토록 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은 일단 해산하였다.

이처럼 고부 농민 봉기는 아직 국지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지만,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봉건적인 폐정을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농민 봉기를 일으키려고 했다.

여기에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안핵사의 폭압이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 처리를 빌미로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 폭도로 몰아 처벌하는 등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켰다.


고부에서 일어난 1차 농민 운동은 일단 해산한 후, 전봉준은 무장으로 가서 3월 초순부터 손화중,김개남과 함께 농민군을 조직했다.약 15일 동안 4,000여 명의 농민군을 규합한 전봉준은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

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첫 창의문을 발표했다.

이어 무장·고창·흥덕·태인·정읍·김제·금구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백산에 집결했다.

1894년3월25일,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여 농민군을 정비했다.

연합 부대의 대장에는 전봉준이 추대되고, 손화중과 김개남이 부대장이 되어 서울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타도하고 외래 침략자들을 내쫓을 것을 제시하며 고통받는 민중과 봉건 통치 지배의 하수인인

아전까지도 힘을 합해 일어나자는 내용의 격문을 전국에 띄웠다.

백산에서 편성된 농민군은 4월7일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격파한 후,

정부군과 정면 대결을 피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 남쪽으로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장성 등지를 공략했다. 진격하는 곳마다 관청을 습격하여 감옥에 갇힌 백성들을 석방하고 무기를 압수하였으며,탐학 관리를 비롯한 양반,지주,부호들을 징계하고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정부는 4월2일, 홍계훈을 양호 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병을 현지로 파견했으나 장성의 황룡시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병의 선발대는 농민군에게 격파 당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장성을 떠나 북상길에 올라 원평·정읍을 거쳐 4월 27일(양력5.31) 전주성에 입성했다.

    

전주성이 점령되자 정부는 자력으로 농민군과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4월29일에 청에 원병을 청했다.

청군과 일본군은 농민 전쟁을 구실로 조선에 들이 닥쳤다.

그러나 농민군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여 이를

받아 들이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정부측은 이에 응하여 5월7일(양력6.10),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을 양도해 주며 사태 진전을 당분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러나 전주 화약 이후 정부의 폐정 개혁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자,농민군은 폐정 개혁을 전라도에서 집행하기 위해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사업에 착수했다.

전봉준은 금구 원평에 본거를 두고 전라우도를,김개남은 남원에 본거를 두고 전라좌도를 통할했다.

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지방 통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이속과 행정의 말단 조직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무기와 군량을 모으는 한편,삼정 업무를 관장하고 민간의 사송을 처리해 나갔다.

집강소를 운영하는 주체는 신분적으로 하층민, 경제적으로 소작농민, 토지 없는 농민이 중심이었다.

집강소가 설치된 후 농민군의 조직은 크게 확장되어 양반 유생과 이서층들도 참가했으며 무기와 군량을

모으고 무기의 조작법을 익히는 등 군사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충청도의 동조 세력과 북접에 전면적인 호응을 요구하는 등 본격적인 반침략.반봉건 전쟁을 준비해 갔다.전라도 농민군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경기도 죽산·안성, 경상도 하동·진주, 강원도 홍천 등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고 있었다.

    

2차 농민 운동은 1894년6월21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는 한편,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시켰다.

이어 갑오개혁이 추진되어 봉건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했으므로 농민군의 지도부는 군량과 군기를 정비하면서 삼례에 투쟁 본부를 두고 재봉기를 확정했다.

전봉준은 '동도 창의소'란 이름으로 반침략 항일 투쟁에 거병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하여 농민군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 반침략투쟁이 농민군의 주요한 과제로 되었다. 그

리고 전봉준은 종전 제1차 봉기 때 반대하던 입장을 지녔던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했다.

1894년9월 하순, 논산에 모인 남접,북접 연합군은 공주를 향해 북상을 개시했다.

당시 공주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거점이었다.

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효포·우금치 등지에서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논산 전투에서도 농민군은 다시 패퇴했고, 금구·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핵심 부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황해도·경상도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양반·부호·관료·이서층이 조직한 민보군에 의해 철저히 괴멸되었다.

민보군·수성군들은 도주한 농민군의 집에 방화하고, 귀순한 동학도들까지도 체포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농민군 세력을 초토화했다.

                

1894년 갑오 농민 전쟁은 조선 후기 농민 항쟁을 통한 농민들의 각성과 성장을 바탕으로,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제·반봉건투쟁

이었으며, 이른바 봉건 지배층의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 노선과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 노선의 대결이었다.

농민군이 지향한 방향은 봉건적인 생산 관계와 수탈을 제거하고 소상품 생산자로서의 자립 발전을 보장해

주는 농민적 토지 소유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지향은 일련의 투쟁 과정을 통하여 혁명의 방향으로 다듬어지고 발전해갔다.

탐관 오리의 제거,민씨 정권의 타도와 봉건적 폐단의 시정,봉건 제도의 폐지,친일 정권의 타도와 식민지화의저지로 운동과 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 시켜 나갔다.

특히 제2차 농민 전쟁을 통하여 일본 침략 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제·반봉건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당시 갑오정권과 일본 세력 및 보수유생들에 의해 철저히 압살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농민  전쟁은 투쟁 과정을 통하여 농민 대중에게 봉건 지배층과 일본 침략 세력의 본질을 알게

했으며,그들을 민족적,계급적으로 더욱 각성시키는 한편 광범한 대중을 반제·반봉건 투쟁 세력으로 강화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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