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홍립       2018.12.14.금요일, 맑음

강홍립; 조선 중기의 무신

생졸;   1560년(명종15)~1627(인조5년)

본관은 진주.

 

강홍립은 선조 22년에 진사가 되고 1597년에 알성문과로 급제하여 설서, 검열을 거쳐

선조 38년에 도원수 한준겸의 종사관이 되었고, 같은 해 진진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광해군 즉위년에 보덕,이듬해 한성부 부윤,1614년에 순검사를 역임하고 1618년 진령군에 봉해졌다.
이 해 명 나라가 요동을 침범한 후금을 토벌코자 조선에 원정을 요청하자,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의 천거로 도원수로 임명되었으며,

광해군의 간곡한 청에 의해 오직 한사람이라도 덜 상케하여 국리를 도모,

향배 하라는 밀지를 받들어 부원수 김경서와 함께, 13,000여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밀지대로 그 뜻을 따랐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에서 화의를 주선하여 재난의 확대를 미연에 방지한 바 있으나,

국내의 정변과 더불어 외교 방침의 변화는 장군의 애국충절도 빛을 보지 못하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죽은 뒤에 복관되었다.
관악이 낳은 인헌공 이후의 큰 인물로 한 시대의 영웅이요 시운을 얻지 못한 풍운아 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난곡에 있는 강씨 묘역에는 강홍수,강신,강락,강홍립 등의 묘가 있으며,

강사상의 묘는 그 신도비와 같이 남아있다 .

 

강홍립은 광해군의 장수다.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하여 조선에 원병을 요청해왔다.

광해군은 명의 요청을 거절 할 수 없어 강홍립을 오도 도원수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기로 한다.

후금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전세를 보아 행동하라고 한다.

광해군 11년 1619년 부차전투에서 크게 폐하여 광해군의 밀명에 의해 후금에 투항하여 후금에

억류되어 돌아 왔으나 광해군이 쫓겨난 뒤 후금에 항복한 장수로서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1597년(선조 30) 문과에 급제하여 1605년 진주사의 서장관으로 명(明)에 다녀왔다.

1618년(광해군 11) 광해군에 의해 진녕군에 봉해졌다.

 

이무렵 명은 후금이 변경에 침입하는 등 세력을 크게 확장하자 조선에 원병을 청해왔다.

광해군은 명의 요청을 거절 할 수 없어 강홍립을 오도 도원수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으나 후금과의

관계를 의식하여 전세를 보아 행동하라는 지시를 함께 내렸다.

이에 부원수인 김경서와 더불어 1만3,000여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다.
1619년 명나라 제독 유정의 군과 합류했으나

부차 전투(1619년 광해군 11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만주의 부차에서 후금의 군대와 싸우다가 패배한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광해군의 비밀 지시에 따라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했다.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그는 김경서와 함께 계속 억류되었다.

          

                      

                                                                            강홍립의 묘

 

임진왜란 뒤 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가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 뒤,명나라의 변경을 자주 침략했다.

그러자 명나라는 날로 강대해지는 후금을 치기 위해 만주로 출병하면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내키지 않으나,명분상 거절할 수 없어 1618년에 강홍립을 도원수, 김응서를 부원수로 삼고

1만여 명의 군대를 출병시켰다. 이때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결정하라는 비밀지시를 했다.

조선군은 포수 3,500명과 사수 6,500명이 평안도 창성에서 대기했고,

 명군은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조선에 왔던 양호가 1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출했다.

이듬해 2월 명군의 4개대 가운데 하나인 남로군이 조선군과 합류해 노성(지금의 라오청)으로 향했다.

3월 1일에 남로군을 제외한 3군의 명군이 후금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모두 대패했고,

뒤이어 북상하는 조명 연합군이 노성에서 60리 떨어진 부차에서 패하여 조선군은 선천 군수 김응하와

운산군수 이계종 등이 전사했다.

이에 강홍립은 광해군에게 받았던 밀지에 따라 후금군에게 조선의 출정은 본의가 아니였음을 알리며

항복했고,이에 후금은 조선에 대한 보복행동을 하지 않았다.

즉 광해군이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처해가는 외교정책을 추진했으므로 후금의 조선침략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先導)로서 입국하여 화의를 주선했다.

그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으나,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했다.

죽은 뒤에 복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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