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마지막 단계는

위만조선으로 보다 발달된 철기문화를 가지고 이주하여

토착 고조선인들과 연합하여 국가를 건설했다.

위만조선은 진번·임둔 등의 주변 세력들을 누르고

한반도 중부 이남의 여러 세력 집단들과 중국 한과의 사이에서

중계 무역으로  부를 취했다.


BC 109년 한무제는 수륙양면으로 대군을 파견하여 위만 조선을 공격했고

수개월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BC108년, 위만 조선은 멸망하고 고조선 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

멸망의 주된 이유는 지도층이 분열로

우거가 주화파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전한 무제는 BC108년,

위만 조선을 멸망시킨 후 전한 무제는

위만  조선의 땅에 그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낙랑군,진번군,임둔군,현도군 등 한사군을 설치한다.

BC107년에 다시 예맥  지방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BC82년에 이르러  진번,임둔  양군을 폐지하여

진번군을  낙랑군에 임군군을  임둔군을 현도군에  각각 병합 시켰으며,

BC75년에는 토착민의 반발로 현도군이 요동 방면으로 옮겨졌다.

이때 현도군에 통합되었던 임둔군의 현들은

낙랑군에 편입되어 최종적으로 구 위만조선의 영역에는 낙랑군이 남게 되었다.

낙랑군은 진번·임둔의 영역에 각각 남부도위와 동부도위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신나라 왕망 시기에는 태수의 관직을 태윤으로 바꾸었는데,

평양 인근에서‘낙랑태윤장’이라 찍힌 봉니가 발굴되었다.

신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낙랑군에는 반란이 일어나

낙랑 사람 왕조가 스스로 대장군 낙랑 태수라고 칭하였다.

후한 광무제는는 서기 30년에 왕준(王遵)을 보내서 낙랑군을 다시 정복하고

패수 이남을 영토로 확정하였다.

한편 현도군은 후한 초기에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다시 무순 지방으로 이치되었다.

2세기 후반,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요동군을 중심으로 공손탁이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어

낙랑 및 현도까지 지배하였다.

이 시기 낙랑군은 고구려 및 한이 강성하여 주변 소국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다수의 민호가 삼한으로 유망하기도 하였다.

공손강은 3세기 초 낙랑군의 남쪽 현을 분리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으며

공손모·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삼한으로 유망하는 유민을 막았다.

위가가 건국된 후 명제는 238년,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유흔과 선우사를 파견하여 낙랑·대방을 평정하였다.

서진이 건국된 이후 백제 및 고구려의 공격이 가속화 되어

낙랑 및 대방군은 점차 약화되었다.

276년에는 유주를 분할하여 평주를 신설하고 낙랑·대방을 속하게 하였다.

300년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서진의 수도 낙양이 전조에 함락되자(311년) 낙랑군과 대방군은

더 버틸 힘을 상실하였다.

313년, 미천왕은 낙랑을 공격하여 2천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으며

낙랑·대방의 군벌 장통이 모용씨에게 투항한 뒤,

314년에 대방군까지 축출되면서 소멸되었다.

이후에도 모용씨 및 북위 시기에 낙랑 및 대방군은

요동 및 요서 지역에서 계속 존속되거나

이름만 존재하는 군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토착 세력들을 통솔아려 하였으나  곧 치열한  항쟁에  부딪쳐

313년 한반도로  부터  축출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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