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건국       작성일자; 2020.05.13.수요일,맑음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BC2333년으로 전하며

BC194년 위만이 단군 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 조선을 세운 뒤

연으로 부터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연에 이어 진이 세워지고 연이 망하고

BC222년에 진()나라가 고

조선을 BC108년에 멸망한 요하,요동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 지방에 걸쳐

비파형동검 문화를 공동 기반으로 지역 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 집단의 시조 설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 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에 들어와 주()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고조선 지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 예() 의 만류로 그만 두기한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

중국의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을 원정한 다음 요동 지방에 요동군을 설치하고

장새를 쌓고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오므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고

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 BC222년,

진()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이 즉위할 무렵 진()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로

재조정하였다.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 고조선 세력을 함께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고

중국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는

남쪽의 진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 남려()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 진출을 본격화하자 

양측은 긴장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109년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 역계경은 강화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 노인, 상, 한음, 이계상 삼, 장군 왕겹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 성기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가 BC 108년이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삼한 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8조 법을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조선의 멸망과 한사군 설치  (0) 2020.04.22
위만 조선 건국  (0) 2020.04.14
한민족의 시원  (0) 2020.04.14
인류의 4대 문명  (0) 2020.04.14
철기 시대  (0) 2020.04.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