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중비사  경종(景宗)    2019.07.18.목요일,맑음

동궁(훗날 경종)이 대리청정을 받은 후에도 종종 자리에 눕게 되자 제당들은 동궁의 건강이 좋지 못하니

아우로 자리를 바꾸자고 여러 차례 여론을 일으켰던 것이다.

동궁이 국정을 대리하게 되어 4년이 지나간 해,

숙종은 그해 유월 팔일 드디어 60세의 나이로 빈천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숙종이 재위 46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서 동궁이 즉위하니 이가 곧 경종이다.


경종(1,720년~1,724년)은 4년간이나 국정을 대리한 경험이 있으므로 정사가 그다지 서툴지 않았다.

그러나 원체 약질이어서 자주 병석에 눕게 되니 차츰 정신까지 흐려져서 의식이 똑똑치 못한 때가 많았다.

며칠에 한번씩 의식이 회복되는 때를 타서 공사를 처단하게 되니 궁정이 침체되고 백반 정령이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따금 경종은 의식이 회복되면

“내가 병들어 누워서 국정을 돌아보지 못했으니 나라 일이 오죽 문란하랴. 어서 밀린 공사를 들여다 곧 처단해 치우리라.” 이렇게 말하다가도 산적된 공사를 대하고 보면 그만 진력이 나서

“얘 모두 귀찮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나는 좀 쉬어야겠다.”

이런 말로 대소 사건의 처단을 모두 승지,사관,주서들에게 맡겨버리는 것이었다.

 

또, 어느 조관이 소대(임금 부름 받고 정사 관한 의견 올리는 )를 청할 때면 눈살을 찌푸리고 불러들여서 그의 아룀을 듣다가 지루한 생각이 날 때면

“그만 말해도 알아듣겠다. 그대로 나가서 기다려라.”

내어 보내고 하루 이틀 수일이 지나도 하등 비답이 없는 것이었다.

측근자들이 궁중 형편을 아뢰고 어찌할까를 청할 때도 경종은 그저 귀찮게만 생각하고

“너희들 생각대로 좋게 처리해서 거행하려무나.” 이러는 것이었다.

 

이쯤 되니 국정이 침체하고 혼탁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승지나 사관을 비롯하여 나인과 환관들은 이런 것을 기회 삼아서, 무슨 중대한 주청이나 상소가 들어오면

그대로 끼고 있다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또는 자기의 생색이 나도록 처결해서 내어보냈다.

그러니 나라 일은 국왕이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측근자들의 장중(掌中) 일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이듬해 신축년은 경종 원년이었다.

국정이 더욱 침체해지는 중에 경종의 환후도 가일층 침중하게 되니 국본을 내세우는 일이 급하다는 의논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해 8월20일에는 우의정 조태구 하나만을 제외하고 모든 노론파 대신들이 문무백관들을 거느리고 궐내에 들어와 합문밖에 엎드리며

“성상의 환후가 침중한 이때이오니 하루바삐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시와 국본을 튼튼케 하옵소서.”

하는 상소를 올리고 비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느 때이고 반대파는 있는 법이어서 화단은 다시 일어나 크나 큰 참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경종이 아직 동궁으로 있을 때에 그 세자빈 단의 심씨는 아깝게도 2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 어유구의 딸을 맞이해서 계빈을 삼았다.

계빈의 아버지 어유구는 외척의 이해득실을 밝히면서도 궁중 형편을 살펴서 자기의 진퇴 향배를 민첩하게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까닭에 노론 재상의 영수 김창집은 어유구의 모든 행동을 경계하고 그를 감시 할 양으로 은밀히 그의 집으로 밀정을 들여보냈으니 그 밀정은 바로 어유구의 매부 김순행이었다.

김순행은 김창집의 심복이 되어 가지고 어유구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친한 척하고 어유구의 동정을 살핀

결과 어유구가 딸 어비를 책동해서 경종이 아들을 낳을 가망이 없음을 기화로 소론들과 한패가 되어서 은근히 종친 중에서 적당한 아이를 데려다가 세자를 책봉하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지경이 되면 연잉군을 옹호해 오던 노론 당파는 여지없이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 와서 경종이 양자 문제를 일으켜서 새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어유구 일당의 음모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노론파에서는 마침내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이 이조판서 이의현, 호조판서 민진원, 병조판서 이만성, 형조판서 이관명, 공조판서겸훈련대장 이홍술, 한성판윤 이우항, 대사헌 홍계적, 대사간 홍석보, 도승지 조영복 등을 인솔하고 입궐해서 세제 동궁 책봉을 주청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다만 자기들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일로 했던 것이 아니고 이들의 선배요, 동지가 되는 이이명(이 일찍이 선왕으로부터 간곡한 유촉을 받았던 때문에 그 유촉을 받들겠다는 충의로써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면 이이명은 숙종으로부터 어떠한 유촉을 받았던가?

이야기는 잠깐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때는 숙종 사십삼 년 팔월 어느 날.

숙종은 환후가 침중해지자 그날은 평소부터 신임하던 우의정 이이명이 약방에 입적하게 되었다.

원래 국가의 규칙으로 말하면 평시든지 병환중이든지 군왕이 정승과 대할 때는 반드시 승지가 그 군신 사이의 범절을 살피고 사관이 군신 사이의 대화를 기록하는 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때는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고 소위 독대를 허락하였다.

임금은 이이명을 가까이 불러 세우고

“동궁이 병이 많으니 이번 기회에 용단을 내려 연잉군으로 동궁을 고쳐 세우고 싶소.”

이런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이명은 임금의 분부가 지당한 의견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정과 의리를 전혀 몰각할 수도 없어서 이이명은 임금의 표정을 살피며

“지금 하교하신바 동궁의 자리를 바꾸겠다 하시는 것은 신등이 아무리 무식하오나 감히 봉행치 못하겠사옵니다. 동궁이 아무리 건강치 못하오나 신 등이 힘을 합해서 보필하오면 대리청정쯤 못하실 바 없으니,

정 몸이 괴로우시면 동궁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이라도 내리시는 게 마땅한 줄 아룁니다.”

하고 아뢰었으므로 임금도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다음날로 세자 대리청정을 분부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우의정의 이 독대사건을 제각기 억측하며 이이명이 자기의 의견을 임금에게 고해서 세자의 대리청정을 억지로 하게 만들었다고 떠들어댔다. 독대라는 것도 깜짝 놀랄만한 변고인데다가 더욱이 그 독대의 자리에서 임금에게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것은 도저히 그대로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안산 고을에 은퇴해 있던 원임영중추부사 윤지완은 소론의 영수로서 당년 90십 노인이었으나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놀라 펄펄 뛰면서

“이런 목을 베어 죽일 놈이 있나. 주상께서 살아 계신데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라니, 그래 그런 역적놈을 그대로 둔단 말이냐? 내 아무리 90 노병이지마는 이 역적놈을 죽이고 올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승 명색으로 군왕께 아첨해서 밀실에서 사사로이 독대해 가면서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이놈을 그대로 두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하루 바삐 올라갈 터이나 노상에서 죽을지도 모르니 아주 관을 짜가지고 자비 뒤에 이끌고 가야겠다.”

이런 말을 외치고 즉시 관을 짜서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서울 올라와서 소론 당파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니 시골서 듣던 바와는 딴판이었다. 즉 원래 이이명이 독대하는 자리에서 임금이 자진 동궁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는 것을 이이명은 동궁의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을 핑계 삼아서 동궁의 자리를 연잉군으로써 대리청정을 시키시라고 아뢰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노론 이이명을 몹쓸 곳으로 몰아넣기 좋은 말이라 윤지완은 더욱 분기해서

“이이명이 왕위를 연잉군에게 옮기려는 전제의 행동이니 그대로 둘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여론을 일으키고 드디어 상소를 지어서 위에 올렸다.

  <명분이 일국의 정승으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되어 밀실에서 주상께 독대하고 그러는 중에도 주상 다음으로 받들어야 할 동궁을 까닭 없이 모해하고 임금의 권위를 세자에게 옮기십시오 하는 이런 무도 무엄한 말을 아뢰었다 하오니 이런 자는 곧 목을 베어서 국가의 기강을 세워놓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

 

이런 상소가 들어오자 임금은 윤지완에게

<동궁에게 대리청정을 시키자는 것은 나의 병세를 염려해서 내가 말한 바이며 이이명이 그와 같이 한 것이 아니고 또 동궁에게 기위 대리청정을 시킬 바에는 병약한 동궁보다는 튼튼한 연잉군을 동궁으로 봉하겠다고 하니까 이이명은 도리어 인정과 의리상으로 차마 큰 왕자를 버릴 수 없다고 도리어 동궁을 두호했던 바이다. 그리고 승지와 사관만 없었지 측근자들이 다 옆에 있었던 일인데 독대라는 말이 어디 당한 말이냐? 허무한 풍설을 듣고 구십 노병으로 관을 끌고 올라와서 이와 같이 세상의 이목을 소연케 하니 이런 경솔한 처사로 어찌 일국의 원로 체면을 보존할 것이랴. 너무 한심하도다.>

이렇게 비답을 내리고 그 상소를 일소에 붙였다.

이런 주목이 있는 가운데 동궁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고,4년 후에는 동궁이 즉위하고, 즉위한 후에 다시 임금의 환후가 치중해지니 나라의 앞길을 근심하는 대신들이 예전 숙종이 연잉군을 부탁하던 그 유지를 좇아서 하루바삐 왕세제를 책봉하려는 것은 조금도 그릇된 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그 형당 소론파들은 이일을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도리어 환후 중에 있는 군왕의 지위를 엿보는 행동인즉 도저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들고 일어났다.

원래 영의정 김창집 이하 여러 신하들의 연좌건백 때에, 대신들 중에서 오직 우의정 조태구만이 빠져 있었다. 그 까닭은 이때 있으면 반드시 이 일을 반대해서 연좌건백에 방해가 될 것이므로 마침 그가 향제로 내려가 있는 동안을 택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조태구가 서울로 돌아와서 모든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소론들과 손을 맞잡고 세제 동궁 책봉 문제를 절대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번 연좌건백의 비답이

<상소한 뜻은 여러 가지로 더 생각해 본 후에 신중히 처단할 터이니 아직 기다리라.>

이런 뜻으로 보낸 것을 필시 불윤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부원군이 유구와 함께 왕비 어씨를 움직여서 임금에게 양자를 들여 동궁을 세우라고 권했다. 그러나 임금은 이런 말에는 도무지 대답을 안 하고 더욱이 왕대비 인원 김씨가 이 말을 듣고서

<효종, 태종 이래로 그 혈통이 계승되는 왕실이요. 또 임금의 춘추가 아직도 젊거늘 그 누가 양자를 의논하며, 만일 무슨 변고가 있다 하더라도 선왕의 혈통이 또 한분 있어 아주 혈통이 끊이지 않을 터인데 그 누가 망령된 짓을 한다는 말이냐?>

이러한 엄교가 내리게 되어서 드디어 형당들은 목을 움찔하고 물러나고, 왕대비의 주장대로 연잉군이 동궁에 책봉이 되었던 것이다.

 

그 해 10월12일에 조성복이 또 상소를 올리었다.

<상감께서 나날이 환후 침중하시고 나라의 일이 허다히 지체되고 있는 이때에 왕세제께서 국정을 대리청정케 하시는 일이 당연한 줄 아뢰는 바입니다. 바라옵건대 널리 통촉하여 처분하시옵소서.>

 

이 상소가 한번 오르자 세상은 또다시 소란하게 되었다.

조성복은 상소가 오르던 때는 한창 경종의 환세가 침중하게 된 때라 무슨 일이든지 그저 귀찮게만 생각하던 무렵이다. 이런 때에 이런 상소를 받으니 임금은 매우 반가워하였다. 더욱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종은 그 아우(연잉군)를 극진히 사랑하고 믿는 처지이므로 상소를 받은 즉시로 어떤 굳은 결심을 하고 다음날 정원에 전지를 내리었다.

<나의 병세가 한결같이 침중하여 회복될 가망이 없고, 나라의 일이 침체되어 하루가 바쁘니 왕세제에게 국정을 대리케 하여 만기를 처단케 하노라.>

이 전교가 한번 내리자 조정은 갑자기 슬렁거렸고, 더욱이 소론 재상들은 큰 변이나 일어난 듯이 청황망조했다. 이번 처분에 대해서는 노론 일당들도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금의 병세가 침중하여 국정을 세제(世弟)에게 맡긴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그 임금을 섬겨오던 처지로서 너무나 섭섭하고 송구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먼저 삼사(三司)에서 간지했으나 듣지 않았고, 다음에 사대신(김창섭, 조태채, 이건명, 이이명)이 연좌 합계로서

“연전에 선대왕 생존시에 동궁으로 계셔서 청정하던 그 정도로 보필만 시키실 뿐이지 만기(萬機)를 다 맡기신다 함은 너무도 황공 불안하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불윤하였을 뿐이다.

좌참찬 최석항은  “이번 전교는 만만부당하오니 곧 거두어 주옵소서.” 하고 끝까지 역설했으나 다만

“그만 물러 가거라.”

한 마디로 물리쳐 버리고 왕세제 대리청정을 고집하였다.


이 쯤 되고 보니 소론파의 양자 책립계획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노론파에서 옹호하던 세제 추대계획은 거의 이루어진 셈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소론들은 장차 노론의 압박을 받을 생각을 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조태구는 밤중에 갑자기 내전으로 들어가서 정원을 통해 소대를 청했다. 이때 입직승지는 밤중에 정승의 소대는 정원에서 아뢰어 올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조태구는 너무도 괘씸했다. 입직승지가 괘씸한 것이 아니라 노론파 정승은 마음대로 소대를 허락하고 소론 정승에게는 이와 같이 미리 방어진을 쳐둔 노론파의 행패가 괘씸했던 것이다.

그는 분기를 참다못해 무감을 시켜서 이 뜻을 곧 곤순전에 아뢰었다.

“시급한 국사로 밤을 가리지 않고 알현을 청했던 바인데, 정원의 입직승지가 알현을 허락치 않으오니 곧 전하를 뵙게 주선해 주소서.” 하고 간청했다.

 

조태구라 하면 왕비 어씨도 그가 부친의 동지인 것을 알고 있는 터라, 곧 어비는 임금의 침전으로 가서 임금에게

“지금 좌의정 조태구가 시급한 일로 양반인데도 불구하고 입궐을 했는데 건방진 입직승지가 들이지 않는다 하오니 군신지간을 이와 같이 막는 자를 치워버리시고 곧 좌의정을 인견하옵소서.” 이렇게 아뢰었다.

 

요즘 병세가 더욱 침중해짐에 따라 정신이 시시각각으로 변태를 일으키는 임금은 이 말을 듣고 노기를 띠며

“저런 죽일 놈이 있느냐. 어째서 대신의 고급하는 길을 막는단 말이냐. 곧 입직승지라는 놈을 불러들여라.” 하고 내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조금 후에 조태구가 들어왔다. 조태구는 밤이 깊도록 이번 왕세제 대리청정이 만만부당할 뿐 아니라 이렇게 하면 민심이 동요되고 불길한 일까지 일어날 기미가 있다, 하고 역설을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이러한 조태구의 말까지도 물리치고 듣지 않았다.

 

김일경은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족질로서 김만기가 부귀할 때에 그 집을 출입했다.

그는 문장과 변론이 뛰어나고 지략이 있는 인물로서 김만기의 후대를 받아 엄연히 노론과 선비로서 한 몫을 볼만하였다. 그런데 김만기가 얼마동안 지내면서 살펴보니 그의 본심이 흉악무도하므로 괄시를 하고 배척을 했다. 그러자 그는 김만기에게 감정을 품고 소론의 거두 이사상, 유봉휘 등을 찾아가서 아첨을 했다.

 

김일경이 영변부사로 있을 때 궁중 장번내시로 있는 박상검은 영변 출신으로 그 세력이 등등한 것을 알고 박상검의 일족을 잘 보살펴 주었다. 한번은 박상검이 고향에 왔다가 김일경이 자기 일족에게 고맙게 구는 것을 알고 손수 찾아가서 치사하며 이 은혜는 언제든지 꼭 갚겠노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그 후 김일경이 서울로 돌아와서 박상검의 집을 드나들게 되니 두 사람은 창자를 서로 맞대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박상검은 장희빈 득세 당시에 그의 신임을 받아서 남인과 소론들에게 충성을 바치며 지내온자였다. 이사상, 유봉휘를 사사하던 김일경은 그들을 통해서 소론들과 친했기 때문에 이 무렵에는 조태구와도 친한 교분을 갖고 있었다.

 

소론 일파는 드디어 김일경을 통해 박상검을 움직이고, 박상검은 그의 심복 내시 문유도를 통해 나인 석렬, 필정 등을 시켜 궁중 연락을 했다. 이러한 기구를 짜놓은 다음에 김일경은 이진유 등 여섯 사람의 동지와 함께 상소문을 올렸다.

 

<이번 사대신이 왕세제 대리청정을 간지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그 일을 일찍부터 권주하려 했던 일인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런 권주를 하려는 뜻은 틀림없이 왕세제를 추대해서 왕위를 엿보려는 흉계이오니 그 흉계를 사전에 밝혀서 다스리옵소서.>

이런 상소를 올린 후에 김일경은 다시 목호롱 같은 늙은 원로를 시켜 또 한번 사대신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사대신이 이번에 군왕에게 강박으로써 대리청정을 시켰다 하오니 이것은 역죄의 죄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노론 재상들은 갖은 음모로써 병중에 계신 상감의 신변을 살피면서 불칙한 흉계를 꾸미고 있습니다. 당장 처벌을 내려 주십시오.>


이런 묵호룡의 상소는 이진유의 상소를 더욱 힘 있게 밀어 주는 것이 되었다.

이 때 임금의 병세가 더욱 위중하여지자 박상검은 이 상소문을 나인 석렬을 시켜 왕비께 올리게 하였다. 왕비는 이 글을 보고 너무나 놀랍고 기가 막혀서 곧 신임하는 박상검을 불러 그 처리 방법을 물었다. 여기서 박상검은 왕비에게 자기의 의견을 낱낱이 다 아뢰었다.

왕비는 즉시 왕명을 칭탁하고 병석에 누운 임금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대신의 관직을 삭탈하고 하옥시키라는 전교를 내렸다.

날로 최석항이 위관이 되고 남인 심단이 금부당상이 되고 소론 이삼이 포도대장이 되어서 마음대로 혹독한 형벌로 사대신을 형살시키고 거기에 연결시켜서 노론과 한편이 되었던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내쫓고 하니, 그 수효가 실로 수백 명에 달했다. 이 일이 경종 원년 신축년서부터 그 이듬해 임인년까지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인 때문에 신임무옥 또는 사화라 한다.


이렇게 노론 조정이 쓰러진 후에는 조태구가 영의정이 되고 최규서가 좌의정이 되고 최석항이 우의정이 되고 이하 육조판서가 차례로 소론으로 돌아가니 세상은 갑자기 갑술년 장비 폐출 이전의 소론 시대로 돌아간 듯이 보였다. 이제 소론은 부귀영화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소론들이 오직 두려워하는 것은 왕세제의 존재였다.


언제든지 왕세제가 즉위하는 날이면 반드시 노론이 다시 일어날 것이므로 이번 기회에 아주 그 뿌리를 뽑아버리자고 덤비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목호룡과 김일경이었다. 목호룡과 김일경은 조태구와 최규서, 최석항의 주구가 되어서 다시 새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우선 임금 가까이 거행하고 있는 석렬과 필정을 시켜서 임금과 왕세제 사이를 이간시키게 하고 세제를 동궁 처소에 구금시킨 채 사후조차 드리지 못하게 했다.

왕세제는 너무도 갑갑하고 우울해서 하루는 미친 듯이 처소를 뛰쳐나와 형왕 침전으로 가서 친히 형왕에게

“내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렇게 구금하신단 말이요?”

하고 그 내막을 알아볼 양으로 침전 복도까지 갔을 때에 궁인 석렬이 깜짝 놀라면서

“지금 위독하신 때라 아무도 뵙지 못할 처지인데 더구나 처분을 기다리고 계신 동궁께서 어쩌자고 이렇게 야반에 뛰어 들어오십니까? 어서 돌아가십시오.”  앞을 막고 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세제는

“내가 내 형을 뵈러 왔는데 네가 무슨 참견이냐? 냉큼 길을 열어 놓아라.” 하고 호령을 하였다.

허나 석렬은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악착같이 그대로 버티고 서서

“이러시지 않더라도 동궁이 임금이 되실 터인데 왜 이리 벌써부터 왕위에 오르지 못해 야단이십니까?”

하고 사뭇 깔보는 말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 입직승지 김일경이 들어오고 별입시 환관 박상검이 나오더니 왕세제의 팔을 잡아끌면서 저마다 두 눈을 크게 부라리고

“이게 무슨 거조이십니까? 지금 야반에 처분을 기다리시는 세제의 몸으로서 될 뻔이나 하신 일입니까? 어서 곧 처소로 돌아가십시오.” 꾸짖듯 타이르듯 하는 것이었다.

 

이제 30살이 가까운 왕세제였다. 분한 생각으로 한다면 당장 그놈 그년들을 한 주먹으로 죽여 버리고도 싶었으나 왕실의 규례 법칙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왕세제는 환관이 되쫓는 감시를 받아가며 동궁 처소로 다시 돌아와서 그 분하고 야속함을 견디지 못해 단식으로 목숨을 끊고 이 더러운 세상을 잊으려고 했다.

“너무나 야속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처분을 내리시나.”

이렇게 형왕을 원망해 보다가도 그자들이 임금의 침전 뿐 아니라 대비전에도 못 가게 하는 것을 생각하고는 필시 그들이 사사로이 감금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에잇! 무도한 놈들, 이놈들을 어떻게 하면 한 칼에 다 죽여 버린단 말이냐.” 왕세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때 동궁 가까이 모시고 있던 설서 송인명이 충심으로 세제를 위로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가다가는 왕세제가 아사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간신들의 모해로 화를 입든지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송인명은 왕세제에게 여러 가지 말로 분발을 일으키게 하고 저녁식사를 든든히 들게 하고 밤 되기를 기다려서 몰래 동궁 처소를 빠져나가게 했다.

“아무쪼록 정신을 차리셔서 대비 처소에만 가시면 살아나실 게고 살아나시면 훗날에 반드시 왕위에 오르게 될 것이오니 그때에는 이 한심한 세상을 바로 잡아 주십시오.”

이런 말로 격려해 가면서 왕세제를 목마에 태워 담을 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왕세제는 대비 처소로 갈 수가 있었다. 대비라야 왕세제보다 일곱 해 위밖에 안 되지만 왕세제(연잉군)를 사랑하는 품은 퍽 지극한 바가 있었다. 왕세제는 대비를 대하자 눈물을 쏟으며 소리쳐 울었다. 대비도 역시 목이 메어 울었다.

대비는 왕세제를 보고

 “왕실과 국가가 아무리 망했기로니 이럴 수가 있느냐? 너무나 한심하고 참담하다. 그러나 아무쪼록 동궁이나 건강하게 있다가 때를 기다려서 국정을 쇄신시켜야 대대로 내려오는 왕가 혈통이 끊어지지 않고 국가 대세가 바로 잡힐 터이니, 마음을 활달하게 가지고 내 옆에 가까이 있어 몸을 보전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려라.” 이런 말로 달랬다.

 

왕세제는 이 말을 듣다 너무나 고맙고 황공해서 마음을 새로이 굳게 가지고 다음날의 국가를 위해 힘쓸 바를 생각하면서 대비를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을 알게 된 김일경과 그 일당들은 별별 구실을 다 내세워가며 왕세제가 빨리 동궁 처소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이때 대비는 들어내놓고 김일경과 박상검 등을 호령해 물리쳤다.

“너희들이 무슨 흉계로 동궁을 유폐해 놓고 내 처소에도 상감의 처소에도 가지 못하게 했느냐? 선대왕의 당년 일을 생각하든지 누대 혈통이 끊어지는 일을 생각하든지 너희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더란 말이냐.”

 

이러던 중 경종의 병세는 점점 침중해져서 재위 사년 갑진 팔월 이십오일에 세상을 떠나니 드디어 왕세제가 왕위에 나아갔다. 이가 바로 영조이며, 때의 영조의 나이는 31세였다.






  이조 이십일대의 국왕 영조는 매사에 사려(思慮)가 깊은 임금이었다. 영조가 이제까지 뼈저리게 느껴온 바는 무엇보다도 당파의 쟁탈로 인해서 왕실과 조정이 모두 이 싸움에 휩쓸려 들어서 헤어나지를 못한다는 점이었다. 우선 왕실의 일만 보더라도 최근의 일로서 자기 친생모의 저 끔찍한 수난(受難)이 너무나 분하고 가엾게 생각되고 또 적모비(嫡母妃)되는 인경 김비와 인원 김비 두 분 왕비의 생전 사후 모든 일이 역시 황송하고 가엾게만 생각되었다.

  최근에 자기가 동궁의 처지로서 남도 모르게 비참한 생활을 하던 일을 생각할지라도 당색을 옹호하고 사리(私利)를 꾀하는 간신배들의 행위가 너무도 가증스러웠다.

  돌아보건대 남이장군(南怡將軍)을 모함해서 죽인 유자광(柳子光)의 작간이 있던 이후로 사화(士禍)라는 것이 생겨나고 마침내 당파가 생겨서 서로 죽이고 넘어뜨리고 자기의 고집만을 세우고 자기의 이익만을 도모하기 위해서 나라와 조정을 마음대로 이리 끌고 저리 끌고 하니 이런 무엄무도하고 한심 개탄할 일이 어디 있으랴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이런 때문에 영조는 즉위 초에 정사를 당쟁 조화주의(調和主義), 즉 당쟁을 조정해서 화등시키자는 주의로써 할 생각으로 탕평론(蕩平論)을 역설한 돈유(敦諭)를 정원과 원로대신들에게 내렸다.

  이렇게 하는 한편, 국정에 있어서도 즉위 당시 삼상 육경(三相六卿)이 모두 소론파였던 것을, 어느 한 당파에게 국정을 맡길 수가 없다는 뜻에서 노론의 홍교중(洪敎中)으로 영의정을 삼고, 소론의 조문명(趙文命)으로 우의정을 삼고, 남인 가운데서 좌의정을 뽑았다. 그리고 육경도 역시 이와 비슷 조화주의로 임명하였다.

  그런 다음에도 아무리 조그마한 일이라도 일일이 감시를 하며 혹시나 당색의 구별이 없는가를 살펴서 엄한 처분을 내리니 이제부터는 삼상육경이 제 아무리 조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한편 영조는 일생의 의혹으로 생각하던 신임무옥(辛壬誣獄) 사건을 다시 검안(檢案)할 생각으로 과거의 기록을 모두 들여오게 하였다. 벌써 수년이 지나간 옥사를 이제 또 새삼스럽게 바로잡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소론 일당들, 특히 전날 가장 추악한 것으로 수백 명의 생명을 빼앗은 김일경 일당들은 간이 콩알 만해져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면서도 김일경은 천연스럽게

  “과거의 옥사를 다시 추궁하실 필요는 없을 듯하오니 이 일만은 그쳐 주시옵소서.”

  이 거동을 유심히 살피던 영조는 즉시 김일경과 박상검, 문유도, 석렬, 필정 등을 전격적으로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추궁한 결과 모두가 임금을 속여 가며 거짓 전교로 충신과 열사(烈士)를 애매하게 죽인 일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영조는 이 일을 다 살피고는 너무도 통분하여 몸을 떨었다. 무엇보다도 충의 있는 국가의 주석지신(柱石之臣)을 한꺼번에 세 사람이나 죽여 버리게 된 일이 애석했던 것이다.

  영조는 이 간흉간학했던 김일경 일당을 처참히 해치우고 김일경의 여당이 되는 이인좌(李麟佐)의 도당까지 깨끗이 치워버리었다. 그러나 한번 원통한 원을 품고 참혹한 형벌을 입고 애매하게 세상을 떠나간 사대신의 모습은 다시 찾을 길이 망연했다.



  思 悼 世 子

  그늘에서 자란 龍

  제 이십대 임금 경종(景宗)은 임금 노릇도 겨우 사년밖에 못하고 삼십칠 세의 장년으로 슬하에 왕자도 못 둔 채 세상을 떠났다. 경종이 승하하기 전에 다음 임금을 이을 세자책립(世子冊立) 문제로 궁중과 조정에선 물의가 일어났다.

  이 때 숙종(肅宗)의 둘째 왕자 연잉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립되었다. 연잉군은 경종의 이복동생으로 생모(生母)가 천한 무수리였으므로 소론파가 끝까지 반대하여 임인사화(壬寅士禍=辛壬士禍)를 일으킨 참혹한 당파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연잉군의 생모는 궁녀도 아니고 궁녀의 심부름을 하던 최소녀(崔少女)였다. 숙종과 자리를 같이 한 후 열달만에 왕자가 태어났다. 최소녀는 농부의 딸로 얼굴은 못생겼으나 몸이 튼튼했으므로 태어난 왕자도 튼튼했다. 숙종은 왕자를 낳은 최소녀를 정이품(正二品)의 소의(昭儀)로 봉했다.

  영조는 생모가 천한 여자였기에 존재조차 없이 소년시절을 궁중에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그늘 속에서 자랐다. 이러한 선천적인 열등감은 성격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연잉군은 이복형 경종이 무후(無後)했고, 자기를 밀어 준 당파의 덕택으로 왕세제로서 동궁에 추대되었다가, 경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라서 영조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론에서는 즉위 후에도 실력으로 폐왕(廢王)시키려는 반란까지 일으켰던 것이다.

  경종 사년에 왕이 승하하고 영조 원년으로 임금이 바뀌자, 이에 임금자리를 바라던 왕족들과 소론 정객들은 뒤에서 영조를 쫓아낼 음모를 진행스키고 있었다.

  “궁녀가 부리던 천한 종의 몸에서 생긴 자가 지존한 왕위에 오르다니, 이런 해괴한 왕실 모욕이 어디 있느냐. 민가의 양반집에선 상상도 못할 패륜의 불상사가 왕실이라고 해서 그럴 수가 있느냐. 그것도 어엿한 왕족의 잘난 자제가 많은데.”

  연잉군이 왕세자로 책립되자마자 맨 먼저 경종에게 반대 상소를 올렸던 유봉휘(柳鳳輝)는 귀양을 갔다. 그러던 차에 경종의 건강이 약해지자 소론파의 조성복(趙聖復)이 동궁 연잉군에게 섭정을 시키라고 상소했고 이어 경종은 동궁에게 국정을 맡겼다. 그러나 좀 있다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최석항(崔錫恒)이 왕에게 상소를 올려 거사를 음모했다 하여 조성복을 진도(珍島)로 귀양 보냈다. 그러자 소론파에서 다시 들고 일어나 노론파의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趙泰采)등을 귀양 보내고 조성복을 불러들이게 했다.

  노론파 소론파가 서로 귀양살이를 번갈아 다닌다. 귀양 번복은 약과지만 피를 흘리고 말 당파 싸움의 징조다.

  연잉군이 임금이 되건 밀풍군(密豊君)이 임금이 되건 백성에겐 상관없지만, 노론파 정객이 연잉군을 밀고 소론파가 밀풍군을 미는 것은 모두 저희들이 세도를 부리기 위한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 싸움에 싫증이 난 백성들은 그들 쌍방을 모두 다 싫어했으나 세도에 눈이 어둔 당파들의 암투는 계속되었다.

  경종 이년에는 소론파의 승지(承旨) 김일경(金一鏡) 등이 궁중의 궁녀들과 궁녀를 감독하는 환자(宦者) 박상검(朴尙儉) 및 문유도(文有道) 등과 결탁하고 동궁을 직접 살해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소론파에서는 이 사건 배후에는 이미 귀양 보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李健命), 조태채까지 이 동궁 모살에 연좌했다고 몰아서 전부 사형에 처해 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임인사화(壬寅士禍)였다.

  경종 사년에 왕이 승하하고 동궁이 영조로 등극하자, 소론파에서도 이제는 왕에 대하여 반대는 하지 못했으나, 은근히 배후에서 지난 일을 가지고 들먹거렸다. 영조는 어려서부터 궁중과 조정에서 성행하는 당파싸움을 눈이 아프도록 보아 왔고 골치가 아프게 고민해 왔으므로 당파싸움을 엄금하는 탕평책(蕩平策)을 통감했다.

  “내가 임금이 된 이상 정치 부패의 고질인 당파싸움만은 엄금하겠다.”

  이런 생각은 영조의 가장 현명한 정책이었다. 그래서 신임무옥이 조작된 흉계였다는 여론에 따라서 영조가 친히 김일경, 목호룡, 이의연(李義淵)을 고문한 끝에 김일경은 사형에 처하고, 목호룡과 이의연도 전형(典刑)에 처했다. 그리고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한 소론파의 이천해(李天海), 윤취상(尹就尙)도 사형에 처하고 유봉휘, 이광좌(李光佐), 조태구(趙泰耈) 등도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신임사화로 사형에 처했던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을 복권시키고 관작을 추증(追贈)했다.

  이러한 영조의 당파싸움을 금하려는 탕평책으로 노론파의 원한은 어느 정도 풀어졌으나 소론파의 불평은 더욱 격화되었다.

  “탕평이 무슨 탕평이냐. 우리를 잡아 죽이는 것은 당화(黨禍)가 아니고 무엇이냐. 허울 좋은 가짜 탕평책이다.”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金寧海), 목호룡의 형 목시룡(睦時龍)과 그 일당의 아들과 손자들은 영조를 원망하고 반란 음모를 진행해 오다가 영조 사년에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들은 이유익(李有翼)과 조덕징(趙德徵), 또 그들이 성사 후에 임금으로 추대할 밀풍군을 암암리에 충동질했다. 조덕징은 밀풍군의 처질(妻姪)이었으므로 그와의 연락을 주로 맡아 했

다.

  조덕징은 한세홍(韓世弘)과 함께 청주로 내려가서 교묘한 거짓말로 이인좌(李麟佐)를 충동하여 반란군의 대원수(大元帥)로 추대하겠다고 권했다.

  “선왕 경종을 시역하고도 병사라고 세상을 속이는가 하면 소론파를 죄 없이 잡아 죽였소. 그래서 왕비께서도 천한 여자 소생인 임금 영조를 몰아내고, 어엿한 왕족의 혈통을 이어 받은 소현세자의 손주님 밀풍군을 임금으로 세우라는 밀령을 주셨소.”

  “그러면 서울에서 거사에 호응할 군력(軍力)은 어떻소. 거사에 실패하면 역적으로 몰려 죽을 테니까 계획이 소홀해선 안 되오.”

  “서울 군비는 되었소.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 장군과 금군대장(禁軍大將) 남태징(南泰徵)도 호응하기로 맹세했고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도 동지요. 김영해와 목시룡도 영남의 군사를 얻으려 내려갔으니, 권서봉(權瑞鳳)이 곧 군사와 무기를 이끌고 이곳으로 와서 장군과 행동을 같이 할 것이요. 그리고 서울에서는 이유익(李有翼)이 모사(謀事)의 책임을 맡고 만반 태세를 갖추고 있소. 이제는 이 장군이 의군(義軍)의 대원수로 행동만 개시하면 되오.”

  “좋소. 그럼 나는 여기서 영남 의군과 합쳐서 청주 군영을 점령하고 의군을 일으켜서 서울로 진격해 올라갈 테니 도중의 수령들을 내응케하고 서울에서 의거(義擧)의 풍문을 미리  퍼뜨려서 민심을 소란케 하시오.”

하고 이인좌는 반란군 대원수로 나설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반란사건의 정보를 미리 알게 된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맨 먼저 궁중으로 달려가서 왕에게 급변을 알리자 왕실과 조정에서는 깜짝 놀라서 반란군 진압에 대한 긴급대책을 세우는데 분망했다.

  한편 서울 장안에는 모의를 꾸미는 자들이 선동하는 말, 격문 등이 나돌고 유언비어가 인심을 흉흉케 했다.

  “지금 임금은 어미도 없는 가짜 임금이다. 왕대비 명령으로 가짜 임금을 몰아내고, 진짜 임금으로 남원군을 모시려는 의병이 일어난다.”

  “영조에게 억울하게 죽은 김일경 일파가 밀풍군을 업고 나서는 반란이 아닐까?”

  “반란군이 남쪽과 북쪽에서 쳐들어 와 서울에 잠복한 반란군과 합쳐 궁중을 점령한다지?”

  “난리가 나면 장안이 불바다가 될 테니 빨리 피난을 가야 한다.”

  이런 풍설은 모두 일부러 꾸며서 미리 퍼뜨린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그런 방문을 붙이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범인을 잡으려고 애썼으나 허탕만 쳤다. 그러던 차에 청주에서 반란의 불길이 올랐다.

  이인좌가 반란군의 대원수를 자칭하고 청주 병영을 점령했다. 이 정보에 접한 조정에서는 양성(陽城), 진위(振威), 안성(安城), 용인(龍仁)의 수령(守令)을모두 무관(武官)으로 갈고,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사로 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삼은후, 박찬신(朴纘新)을 중군(中軍)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청주에서 병영을 점령한 이인좌는 영남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합류한 권서봉과 함께 청주 병사 이봉상(李鳳祥)이 술에 취해서 기생과 동침 중에 있는 것을 잡아 죽이고 의기양양하게 서울을 향해서 진격했다. 관군은 안성에서 반란군을 맞아서 싸웠는데, 반란군 선봉장 박종원(朴宗元)을 잡아서 목을 베고, 대원수를 자칭하는 이인좌와 청주 목사를 자칭하던 권서봉까지 사로잡았으므로 이른바 이인좌 반란은 곧 진압되었다.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킬 때에 천하에 선언한 격문도 한 장의 허장성세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선왕 경종대왕께서는 성명(聖名)하신 상주(上主)였으나 흉악한 간신배들이 시역하였다. 그 뒤에 그 간신들이 즉위시킨 현재의 임금은 숙종대왕의 아드님도 아닌 신분 불명의 허수아비다. 우리 충의의 동지들은 왕대비 어씨(魚氏 - 경종의 왕비)의 밀조(密詔)를 받고 종사(宗社)의 정통을 바로 세우려는 의거(義擧)이다. 우리 의군은 억울하게 시역 된 선대왕 위패를 모시고 서울로 쳐들어간다. 모든 백성들은 우리 의군의 뜻을 양해하고 힘을 모아 성원하기 바란다.>

  그러나 이런 격문은 역적죄의 증거품이 되는데 그치고 말았다. 반란이 진압된 후에 이인좌를 비롯한 주모자 육십 여명은 참형을 당했고, 밀풍군도 엄중한 감시를 받다가 일년 만에 사약을 받았다. 한편 난리 중에 산승(山僧)과 협력해서 이인좌를 사로잡아 올린 농민 신길만(申吉萬)은 그 공으로 일약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감투를 썼다.

  영조는 이번 반란의 원인이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서 생긴 것을 통탄했다. 그리고 이른바 탕평(蕩平)으로 양파 화해를 붙였다. 왕은 양파의 거두를 불러서 좌우에 앉히고 친히 두 손으로 양파 대표의 손을 잡았다.

  “이처럼 나라가 어지러워진 원인은 경들과 나와의 사이에 간격이 생겼기 때문이요. 경들과 경들의 동지는 오늘부터 분쟁을 말고 이처럼 모두 나와 손을 잡고 국사에 함께 힘써 주기 바라오. 나도 앞으로는 노론, 소론에 전연 구애하지 않고, 오직 인물의 능력과 충성만을 믿고 어진 사람을 쓰겠소.”

하고 친히 약속을 했다. 그러나 경종 때부터 원수가 된 노론과 소론의 간격은 영조의 악수극(握手劇)으로 간단히 화해되기에는 너무도 심각한 것이었다. 그들 대표자는 나가서 다시 상소하겠다는 말만 했다. 왕은 지금 당장 화해를 약속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든지 그들의 손을 놓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웃으면서

  “비록 부형(父兄)과 선배들이 원수로 지냈다 하더라도 대대로 원수가 되어서야 되겠소. 더구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을 먼저 한다면 사사로운 원한을 풀 수 있지 않소. 경들이 나라와 나를 도우려면 당장 화합해서 국사에 전념해 주어야 하겠소.”

라는 말을 반은 명령이요, 반은 애원으로 정적(政敵) 두 사람에게 당부했다.

  “신은 벼슬을 그만두고 산림에 은퇴해서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겠습니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는 국사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신도 전의 잘못을 책임지고 조정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파당의 해소와 협력을 거부했다. 그러나 왕의 분부는 끈덕져서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입을 모아서 일개월 동안만 조정에서 함께 일하면서 장래의 방침을 정하겠다는 말을 하고야 왕의 악수공세에서 해방되어 나왔다.

  그 후에도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오직 우의정 송인명(宋仁明)과 명어사(名御使)로서 이인좌 반란 때의 공으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진 박문수(朴文秀)만이 영조의 탕평론을 진심으로 지지했다.

  “노론과 소론은 물과 기름 같다. 그것을 합치려는 것은 어리석은 정책이다.”

하고 양파에서 모두 반대했다.

  “탕평 타령으로 탕평당(蕩平黨)이 한 개 더 생겼을 뿐이다. 그러나 탕평당원은 영조, 송인명, 박문수 세 명 밖에 없다.”

하고 양파에선 빈정댔다. 그뿐 아니라 무능한 팔방미인을 탕평당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고 탕평선(蕩平扇)이라는 비유로 야유하기도 했다. 그것은 종이와 대를 억지로 부착해서 만든 부채라는 뜻이었다. 그토록 당파간의 원한은 그들의 골수 속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昭寧陵의 福 향나무

  영조는 팔십삼 세의 장수를 하고, 임금노릇도 오십이 년간이나 해서 재위(在位)에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농민의 딸로서 궁녀의 하인 노릇을 하던 천한 여자를 빌어 숙종의 씨를 받고 탄생한 영조는 그 불행한 모계(母系)를 생각해서인지 성격도 이상해져서 일생 고난을 겪었다. 그러한 이상한 성격의 영향으로 만년에는 노망해서 냉대로 정신병자가 된 친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 속에 넣어서 참살한 해괴한 사건까지 일으켰다.

  그러나 영조의 유일한 공적은 당파싸움을 일생 동안 엄금한 고집이었고, 인간적 미덕은 천한 생모(生母)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었다. 생모가 천한 여자였기 때문에 왕위에서 몰아내려는 이인좌의 반란도 당했고, 그런 당파를 타파하려다가 당파의 반감을 사서 또다시 윤지(尹志)의 반란까지 당했다. 그래도 생모에 대한 효성은 지극했다. 생모가 죽은 지 오랜 후 왕이 늙은 뒤에야 구차한 표시를 묘전(墓前)에 했다. 일국 왕의 위력으로서도 신하들의 당파싸움은 막지 못했고 서족(庶族) 멸시의 철칙을 타파하지 못한 열등감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조의 생모 최씨는 천한 서민의 딸로서 생전에는 물론 빈(嬪)의 대우도 받지 못했다. 죽은 뒤에는 양주땅 고령산(楊洲高靈山) 기슭에 묻혔으나, 그것은 초라한 묘(墓)로서 대신들의 산소에 비해도 형편이 없었다. 궁중 예법에 따르는 능호(陵號)는 물론이요, 원호(園號)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최씨는 숙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숙종이 임금으로 있을 때도 그 묘는 원으로 봉하지 못했다. 영조가 임금이 된 후도 생모의 신분 때문에 반란까지 일어났으므로 영조는 환갑이 되도록 생모의 성묘(省墓)조차 못했다.

  “내가 임금으로서 죽기 전에 어머님 묘소를 능으로 봉하고 떳떳이 성묘라도 해야겠는데, 완고한 구법(舊法)과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인륜의 도리도 못한다.”

하고 영조는 늘 한탄했고 이 문제로 신하들과 여러 번 충돌까지 했다. 그러나 언제나 영조의 효성의 뜻은 꺾이고 말았다.

  “선대왕께서 원으로도 능으로도 봉하시지 않은 것은 궁중예법과 또 선대왕의 성려(聖慮)에서 그러하신 것입니다. 상감께서도 사정(私情)으로는 비록 능으로 봉하고 싶으시더라도 부왕께서 안하신 일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예법을 어기고 부왕의 뜻에도 어긋나는 봉능(封陵)은 모후(母后)에 대한 효성이 도리어 부왕에 대한 불효가 되기 때문에 될 수 없습니다.”

  신하들의 반대 이유는 이런 식이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신하들은 양반 집안에서도 서족은 조상 제사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한다는 범절을 은연중에 암시했으므로 왕은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타고 난 핏줄의 숙명은 어찌 할 수 없었다.

  “내 차라리 임금의 씨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모친 성묘쯤은 자유롭게 할 텐데, 임금이 됐기 때문에 성묘도 못하니 임금은 불효를 해도 좋단 말이냐?”

  이런 기묘한 신세 한탄까지 했지만 입으로는 누구에게 하소연하지 못할 가슴 속에서 썩는 고통이었다. 가난했던 농부 외조부도 세상을 떠났고 외삼촌 같은 외가의 친척도 없었다. 왕은 외가의 유족이라도 있으면 특명으로 벼슬을 시켜서 차차 양반의 지체로 끌어 올릴 생각이 있었으나 그럴 사정도 못되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름만 겨우 알아낸 외조부 최효일(崔孝一)에게 추증(追贈) 형식의 허위(虛位)의 벼슬이나 시킬 생각을 했다. 이런 문제까지도 대신들은 반대하고

  “국가에 공로도 없는 무명한 농민에게 무슨 명분으로 무슨 벼슬을 주층할 지 전례가 없어서 난처합니다.”

하는 핑계로 미룬 것이 영조가 임금이 된 이후 이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임금의 외조부에 대한 나라의 예우(禮遇)도 못한다면 나의 체면은 어찌 되느냐?”

  왕은 그런 호령이 당장 치밀었으나 왕의 생모를 천한 여자로 경멸하는 신하들에게 그런  말을하면 자기 얼굴에 스스로 침을 뱉는 것 같아서 감히 입 밖엔 내지 못했다.

  그 후 영조는 임금 노릇을 이십여 년이나 하고 이제는 노망의 고집을 밀고 나갈 배짱도 생겼으므로

  “내 체면으로도 죽기 전에 외가에 대해서 벼슬을 추증해야 되겠소. 경들도 모친과 외가에 대한 효도와 의리를 알고 있다면 나의 이런 충정(衷情)을 양해할 것이요.”

하고 강경히 말했다.

  “상감의 지극하신 효성에는 감복하오나......”

  “에잇! 죽은 그분들이 생전에 노론파였소? 소론파였소? 죽은 분들에게 추증하는데 어떤 대감의 벼슬을 갈아 치우는 거요? 경들의 그 인색은 오직 나를 괴롭히려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요!”

  왕은 주먹으로 상을 치면서 노했다.

  “황공하옵니다. 상감 생각대로 하십시오. 신들은 상감 분부대로 절차를 밟아 올리겠습니다.”

  왕의 무모한 강제 명령에 마지못해서 하지만 자기들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왕은 불쾌했지만 이제는 자기 뜻대로 강행하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추증 관직의 품위는 잘 감안하여 분부하시기를.”

  높은 벼슬은 삼가라는 주문이었다. 왕은 또 화가 났다. 그래서 기왕이면 최고의 영위(榮位)를 추증하려고

  “외조부 최효일(崔孝一)께는 영의정, 외증조부 최태일(崔泰逸)께는 좌찬성(左贊成), 외고조 최미정(崔未貞)께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게 하오.”

  대신들은 물론 처음 듣는 시골 상놈의 이름들이었다.

  “예.”

  마지못해서 대답한 대신들도 속으로는 대단히 못마땅했다.

  (상감이 또 노망하셨군.)

하면서도 왕의 명령대로 추증수속을 했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가 사대(四代)에 최고 벼슬을 추증을 한 뒤에 왕은 최후의 목표인 생모의 묘를 능으로 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봉능(封陵) 문제는 왕실의 예법과 선대왕 재위(在位) 때 없던 일이오라 사헌부(司憲府)에 물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신하들은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나 사헌부에서는 심중히 토의한 끝에, 아무리 임금의 사친(私親)이라도 이런 경우에는 봉능할 수 없다는 유권적(有權的) 판단을 내렸다.

  “전에 광해군(光海君)도 모친을 봉능한 예가 있었고, 연산군(燕山君)도 폐비(廢妃)를 봉능하지 않았는가?”

  영조는 대사헌(大司憲)을 불러서 노기 띤 음성으로 추궁했다.

  “황공하온 말씀이나 그런 무리를 한 뒤가 좋지 못하였습니다. 상감께서는 그런 불길한 예를 따르지 마십시오.”

  대사헌은 역시 강직한 간언(諫言)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친모를 초라한 묘소로 방치하면 내 생전에 무슨 얼굴로 성묘를 하겠는가.”

  노했던 왕도 대사헌의 유권적이고 불길한 징조라는 말에는 애원하다시피 통사정을 했다.

  “상감마마 생모로 생각하시면 민망스러우시지만 숙종대왕의 후궁이라는 점에서 생각하시면 사리가 명백하지 않습니까?”

  “왕실에는 그런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세자 책립도 하지 않소.”

  “세자에 적서를 구별 않는 것과 후궁 봉능과는 별개 문제입니다.”

하고 대사헌을 비롯한 소론파의 대신들은 끝내 반대했다. 왕은 궁중예법만 내세우는 명분론을 당파적인 반대라고 추궁할 수도 없었다.

  (이놈들 어디 두고 보자. 내가 죽기 전엔 모친 묘소를 능으로 봉하고 말겠다.)

하고 영조는 다음 기회를 벼르고 꾹 참았다. 그리고 은인자중하다가 몇 해 후에 다시 생모의 봉능을 요구했다. 이때도 대신들은 여전히 반대했다. 그러나 영조는 끝까지 고집을 부려서 반대하던 대신들의 주장을 꺾고 타협하는데 성공했다.

  “그럼 능은 지나친 특례니까 봉원으로 하십시오.”

  “능과 원이 얼마나 다르기에 그렇게 인색하오.”

  영조도 삼십년의 소원이 거의 이루어졌으므로 웃으면서 말했다.

  “능이나 원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신들이 선심이나 쓰듯이 대답하자 영조는 농담 비슷하게 덧붙였다.

  “그럼 아주 능으로 봉하지.”

  깜짝 놀란 대신들은 어이가 없었으나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려 넘겼다.

  “이만 해도 내가 비로소 성묘할 면목이 섰소.”

하고 소녕원(昭寧園)으로 승격시키고 곧 소녕원에 거동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서 묘문(墓門)과 정자각(丁字閣)도 세웠다. 원이라고 하지만 여느 능에도 못지않은 건물과 석물(石物)을 세우고, 참배 후에는 친히 비문을 써서 각자(刻字)한 큰 비석도 세웠다.

  생모의 묘소에 처음 참배한 영조는 묘전에서 통곡하고

  “제 생전에 능으로 봉해 올리겠으니 잠깐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모친의 영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능으로는 승격시키지 못했다. 영조는 생모가 생존할 때에도 궁중의 뒷방에서 숨어서 지내다시피 했고 사후에도 왕모(王母)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초라한 묘소에 묻혀 있던 어머니를 위해 효성으로 삼십년이나 신하들과 싸워서 겨우 원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아직도 능으로는 대우하지 않으려는 소론파의 완고한 반대에 대한 반발로서, 어떤 능보다도 치산(治山)을 잘하고, 능참봉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했다. 원소 부근의 산림 감독도 특별히 엄하게 했으므로 나무가 무성해서 소녕원의 경치가 좋아지고 명승지로서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능참봉을 비롯하여 모두를 원근처의 산림 도벌을 엄하게 단속했다.

  그래도 부근의 농민들은 원소의 나무를 몰래 베어다가 때고, 재목을 베어다 집도 짓고, 좋은 관상목(觀賞木)을 몰래 캐다가 서울로 갖다 정원수(庭園樹)로 팔았다.

  “소녕릉의 나무를 훔치는 자는 엄벌에 처하라.”

  영조의 명령을 받은 능참봉은 도벌하는 자를 잡으면 큰 죄인으로 다루었다. 그래도 근처의 가난한 농민들은 밤으로 능림(陵林)을 침범했다. 소녕원은 그 때문에 농민의 원망도 샀지만 영조의 엄명으로 울창하고 좋은 임상(林相)을 자랑할 수 있었다. 소녕원이라는 이름은 제도상의 명칭이긴 했지만 일반에게는 그런 까다롭고 무의미한 격식은 알지도 못하고 필요도 없었다. 어떤 능보다도 훌륭하고, 어떤 능참봉보다도 대우를 잘 받는 탓으로

  “소녕릉은 과연 금상(今上)의 생모 능인만큼 훌륭하다. 능 나무를 베면 그 대신 백성의 목이 달아난다.”

  그럴 정도로 소녕원은 입산금지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그 근처에 사는 박서방이라는 중년 빈농(貧農)은 그 엄금된 능림의 향나무를 캐서 서울에서 팔려다가 공교롭게도 미행(微行)하던 영조에게 발각되었다. 영조는 새문안에 있는 경희궁(慶熙宮)에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민간인의 옷을 입고 혼자 미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상감, 너무 자주 미행을 하시다가 무슨 변을 당하실지 모르오니 염려되옵니다.”

  측근자가 아뢰어도 영조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혼자 미행을 하면 마음대로 산책을 즐길 수도 있고, 백성의 실정을 잘 알게 돼서 정사에도 큰 도움이 된다.”

  “지당하신 말씀이오나......”

  이럴 정도로 영조의 미행은 측근자들도 말리지 못했다.

  영조는 어느 봄날, 아침 일찍이 홀로 궁을 나와서 서대문 밖을 산책하고 있었다. 마침 시골 농부가 지게에 지고 온 싱싱한 향나무를 내려놓고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조는 그 향나무를 사다가 궁중 정원에 심고 감상하고 싶어졌다.

  “여보, 그 향나무 팔 거요?”

  영조는 농부에게 물었다. 농부는 오늘은 첫손님을 아침에 맞았으므로 재수가 좋으리라고 기뻐하면서

  “예. 첫손님이니 싸게 들여가십시오. 보시다시피 좋은 향나무입니다. 양주 고령산에서 난 유명한 향나무입니다. 생원님 댁 울안에 심으면 복을 받으실 겁니다.”

  물론 영조의 평복 미행인 줄은 꿈에도 모른 농부는 신수가 훤하게 생긴 상대자를 어떤 부잣집 노인으로 알고 생원님이라고 부르며 권했다. 영조는 양주 고령산에서 캐 온 향나무라는 말에 얼핏 생모의 소녕원 생각이 떠올랐다.

  “아, 양주 고령산에서 난 향나무요?”

  “예, 고령산은 명산입니다. 산 밑에는 유명한 소녕릉이 있지 않습니까? 그 명당이 있는 고령산입니다.”

  영조는 그 시골 백성들이 조정의 대신들이 까다롭게 따지는 소녕원을 당연하다는 듯이 소녕릉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선 반가웠다.

  “설마 그 능림에서 캐어 오지나 않았소?”

  영조는 문초하려는 생각에서가 아니고 무심코 물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겁을 집어 먹은 농부는

  “천만에요. 제가 아무리 무식하기로서니 어찌 감히 소녕릉의 나무를 캐오겠습니까. 나라의 영과 능참봉의 감독이 어찌 심한지 나쁜 심보를 가진 나무꾼도 능림 근처엔 얼씬도 못합니다.”

  “아암, 그렇겠지, 그런데 그 곳 사람들은 소녕원이라고 하지 않고 소녕능이라고 부르오?”

  “소녕원이라니요? 아니올시다. 그냥 소녕릉이라고 합니다.”

  농부는 소녕원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이름이라 소녕릉이라고 했다. 원과 능의 구별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생원님 복향나무를 들여가십시오.”

  영조는 그 복향나무보다도 농민이 소녕릉이라고 불러 준 것이 반가웠다. 그래서 농부가 부르는 대로 값을 주겠다고 선뜻 흥정을 했다.

  “그럼 우리 집으로 지고 갑시다.”

  “예, 생원님 댁이 어디신지요?”

  “나를 따라오시오.”

  영조는 향나무를 진 농부를 데리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경희궁으로 따라 들어가면서도, 어떤 대감댁이려니 했다. 그리고 그 생원은 이 대감집의 집사거나, 아니면 이 댁에 나무를 선사하려는 문객 정도로 짐작했다. 그러나 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황급히 나와서 공손히 생원을 맞아들이는데 좀 이상스러웠다.

  “이 나무를 받아 두고 나무장수는 행랑방에 기다리게 하라. 그리고 시골서 새벽에 떠나서 조반도 못했을 테니 주식 대접을 잘하라. 귀한 손님이다.”

  귀한 손님이라. 영조의 말에 이번엔 관원과 하인들이 놀랐다. 그들은 그 나무를 지고 온 농부를 행랑방이 아닌 나은 방으로 안내하고 좋은 반찬으로 아침상을 차려다 대접했다.

  “나으리, 이 댁이 어느 대감 댁입니까?”

  농부는 비로소 관복 입은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직도 모르오?”

  관원도 왕이 귀한 손님이라고 했으므로 당신이라고 공대하면서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아까 그 분은 누구십니까?”

  “여기는 경희궁이고, 아까 뵌 분이 상감이신데, 당신은 누구시오?”

  “앗, 상감님!”

  농부는 깜짝 놀라서 이젠 목이 달아났다고 벌벌 떨었다. 상감 어머니의 능림에서 캐다 팔려던 향나무를 지고 죽으러 들어온 것이로구나 싶었다.

  “나으리, 저는 소녕릉 근처에 사는 농부입니다. 그러나 저 향나무는 능림에서 캐어 온 것이 아니고 고령산 산 속에서 캐어 왔습니다. 상감께서 소녕릉에서 캐 온 줄 잘못 짐작하시고 저를 벌하러 끌고 오신 모양입니다마는 천지신명께 맹세하지만 백성이 어찌 감히 능나무에 손을 대겠습니까?”

  관원도 어리둥절했다. 상감께서는 귀한 손님이라 식사 대접을 잘하라 하셨는데, 이 귀한 손님은 자기의 죄를 변명하면서 애원하는 것이었다.

  “좌우간 기다려 보시오. 상감께서 무슨 분부가 계실 테니까.”

  “나으리, 제가 능나무를 캐다 파는 그런 죄인이 아니라고 상감께 잘 말씀해 주시오.”

  “글쎄, 벌을 주시든지 상을 주시든지 낸들 알겠소?”

  이런 수작을 하고 있을 때, 아까 생원이라고 부른 영조가 용포(龍袍)의 임금 모습으로 고관들을 거느리고 나와서 농부를 대했다. 농부는 마당으로 뛰어나가서 땅바닥에 엎드렸다.

  “아까는 상감을 못 알아 뵙고 생원님이라고까지 불경(不敬)한 말을 올렸습니다. 그 죄로는 죽어도 마땅하옵니다마는 저 향나무는 소녕릉 능림에서 캐 온 것이 아닙니다.”

  “오오, 알았다. 그런 걱정은 말고 향나무 값을 받아라.”

  “황공하옵니다. 향나무는 진상하겠으니 값을 그만 두십시오.”

  “아니다. 어려운 백성의 물건을 거저 받을 수야 있겠느냐?”

  영조는 시관이 준비해 왔던 묵직한 전대(錢袋)를 농부에게 내주었다. 나무값이 아니라 막대한 상금이었다. 농부는 자기가 <소녕릉>이라고 지방민들이 다 부르는 대로 말한 것을 기뻐한 왕의 상금인 줄은 모르고 사형 대신에 큰 상금이 내린 것을 꿈같이 생각했다.

  “보아 하니, 자네는 충성되고 정직한 인물 같다. 무슨 벼슬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라.”

  “상감마마 그 말씀이 정말이십니까?”

  순박한 농민은 생각대로 정직한 질문을 왕에게 했다.

  “허허, 임금이 백성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좌위의 고관들도 소리 없이 웃었다.

  “내가 자네 인물을 충성되게 보았으니, 무슨 벼슬을 시키고 싶어서 그런다.”

  “황공하옵니다. 무식한 백성이 땅이나 파먹고 살지 무슨 벼슬을 할 자격이 있습니까?”

  “음, 자네 생각이 충직해서 더욱 믿음직하다. 다행히 소녕릉 근처에 살아 그 지방 사정을 잘 알 테니 능에서 봉사할 생각은 없느냐?”

  “감사하옵니다. 그러면 능참봉 밑에서 청지기라고 시켜 주시면 충성껏 일하겠습니다.”

  “나도 그것을 바랐다. 그럼 소녕릉 참봉을 시키겠으니, 능을 잘 지켜서 충성을 다하라.”

  “네? 저에게 능참봉을! 그런 자격이 없으니 능 청지기를 시켜 주십시오.”

하고 농부는 사양했다. 그러나 <소녕릉>이라고 불러 준 말을 첫 번 들은 영조의 감격은 그 농부에게 능참봉이란 벼락감투를 씌웠다.

  (사람의 팔자 운수는 알 수 없구나. 만일 능참봉이나 능 청지기에게 향나무 캔 죄가 발각 되었으면 다리 하나쯤 부러졌을 텐데, 요행히 임금을 만났기 때문에 상금과 함께 벼슬까지 했구나!)

  농부는 농림을 범한 양심의 가책도 느꼈으나 자기를 위한 복향나무의 복을 못이기는 척하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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