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權慄)     2015.8.17.월요일. 맑음

권율; 선조 시대의 문신·명장

생졸;1537(중종 32)∼1599(선조 32).63세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 어머니는 조승현의 딸이며,

이항복의 장인이다.

1582년 선조 15년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정자,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 도사·경성

관을 지냈다.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 되었으나,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 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서 서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했다.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극력 반대하였다.그러나 이광이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취해 대패하고 많은 장수들이 전사했다.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후사를 계획했다.

한편, 남원에서 1,000여 명의 의군을 모집해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의 부대를 맞아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이치에서 싸웠으나,황진이 총을 맞아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왜병을 격퇴 시켰다.이치싸움의 공으로 곧 전라감사에 승진하였다.

12월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와 함께 북진 길에 직산에 이르러,정철이 군량미 마련 등에 어려우니돌아가기를 원했으나,북상하라는 전갈을 받고 북진을 계속했다.바로 북상하는 것을 피하고, 수원 독성산성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는 후방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성에 주둔한 왜병을 진을 친 다음 독성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 했다.아군이 타격을 가하자 진영을 불사르고 도성으로 물러났다. 퇴각할 때 기병 1,000명을 풀어 왜병을 기습해 많은 왜병이 죽었다.그 뒤 명나라와 함께 도성을 수복 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 근교 행주산성을 택했다.

조경에게 2일 동안 목책을 설치하고 독성산성으로부터 행주산성으로 군사를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4,000명만 금천(지금의 시흥)에 주둔하게 하고 도성의 왜병을 견제하도록 하였다.행주산성에 포진한 총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총대장 우키타를 위시해서 3만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다.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패한 왜병은 시체를 모아 불을 질러고, 유기된 시체가 200구에 달했다.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이다.

권율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해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 파주산성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이빈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했다.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

1593년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했는데,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했으나 도어사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했다.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841년 행주에 기공사를 건립.그가 임진왜란 대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적이 '권원수실적( 權元

    帥實蹟)'이란 책명으로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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