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       작성일자; 2010.05.09.일요일,맑음

 

금성대군;

생졸;1426(세종 8년)~1457년(세조 3)

금성대군은  단종의 숙부이며,이름은 유(瑜)이며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며,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양육은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가 맡았다.

1433년(세종 15년) 1월에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3년 후인 1436년(세종 18년) 4월에 친형 광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어 12살 때인 1437년(세종 19년) 2월 최사강의 딸과 혼인하여, 후에 아들 이맹한을 두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세종의 명으로  태조의 8남 의안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세종은 그를 총애하여 계속 그의 집에 거처하거나 이어하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년) 6월 경 한때 창진(瘡疹)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그의 병환이 나았고, 세종은 그를 치료한 의관들과 관련자들에게 크게 상을 내린다.

그는 불교 신자였고 사찰에 후원을 하기도 했다.

1452(문종 2년) 한때 문종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병환을 낫도록 사찰에 파견될 계획이 세워졌으나 중간에 취소되었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즉위한 단종에 의해 사정관으로 호출되었다.

이때 단종에게 친히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한명회,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안평대군을 숙청하고

단종의 보필대신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조카 단종이 즉위하면서 단종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것이 친형 수양대군(세조)의 반감을 샀다.

1455년(단종 2년) 1월에는 영의정 수양대군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왕족들이 그의 집에서 활쏘기 시합을 한 것을

구실삼아 탄핵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2월 고신을 박탈당하고 유배령이 내려졌으나, 무죄로 판결받고 고신을 되돌려받는다.

그러나 세조 즉위 후인 1455년(세조 1년)에 경상도 순흥(현재의 경북 영주시)에 안치되고,

그의 재산 및 노비는 모두 몰수당했다.

2년 후,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함께 비밀리에 단종복위를 위한 거병과 거사를 계획한다.

그러나 당시 순흥의 관노가 탈출하여 한성으로 달려가 세조에게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노산군(단종)의

복위를 꾀하고 있다.' 라는 보고를 올려 사사되고 말았다.

그 때가 1457년(세조 3년) 음력 10월 21일로,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이와 더불어 그의 자손들은 단종과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던 다른 세종의 왕자들(한남군,영풍군 등)의 자손들과 함께

종친록에서 모두 삭제되었다.

금성대군의 묘소를 찾던 순흥부의 주민들은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사사된 곳에서 그의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금성단이라 한다.

그 뒤 중종조에 와서 금성대군의 증손 이의가 왕에게 청을 올려, 금성대군의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이를 옳게 여긴 중종은 1519(중종 14년), 금성대군의 자손 3대에게 관작을 봉하고 승습의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아들 이맹한은 1519년(중종 14년)에 특명으로 함종군에 추증되고 손자 이연장은 동평군에 봉작되었다.

이후 금성대군의 관작이 숙종조에 들어 복구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 때에는 그의 자손들이 종친으로써 대접을 받아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현재도 금성대군을 기리는 여러 사적지에서 그에게 사사 명령이 내려진 음력 10월 21일을 기일로 보고,

봉사손들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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