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헌    2018.12.27.목요일,맑음

기자헌; 조선 중기의 문신

생졸; 1562(명종 17)∼1624(인조 2).63세.
본관; 행주

증조부; 응교 준,

조부;  한성부윤 대항

아버지; 응세

어머니; 우찬성 임백령의 딸.

 

1582년(선조 15) 성균관에 입학하여 8년 후 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하고 검열이 되었다.

1592년 병조,이조좌랑 등 여려 관료를 거처 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가 되었다.

1597년 호조참판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부제학,대사헌이 되었다.

1601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을 신원하고,

           당시 옥사를 다스린 서인을 탄핵해 실각시켰다.

1602년 왕세자 광해군의 우부빈객으로서 '맹자'를 강의하였다. 이어 병조,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604년 우의정이 되어 사임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이 때 선조가 세자(광해군)를 폐하고 계비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1606년 좌의정을 12번이나 사임한 끝에 판중추 부사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유영경 등의 소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자,이를 탄핵하고 광해군을 즉위

           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613년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한 대북파의 정온이 극형을 받게 되자,

           강력히 반대해 유배에 그치게 하였다.
1614년 영의정에 올랐으며,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옳지 못하다고 간언하다 홍원에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길주로 이배되었으며,풀려나와 강릉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620년 광해군의 특지로 덕평 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중추 부사가 되었으나 끝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이귀 등이 모의 가담을 요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또한 반정 후에 인조가 신하를 등용할 때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해 7월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중도부처(지정한 장소에 거처) 되었다.

           그 후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을 우려해 옥에 갇힌 사람 모두가 함께 처형되고,

           기자헌의 일족도 몰살당하였다.

1627년이원익,이귀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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