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납치 사건                 2019.12.27.수요일,맑음

1973년8월8일,일본 도쿄에서 한국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납치되어 한·일간의 외교 문제로

까지 비화된 사건이다.

 
사건 발생 당시 김대중은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일본의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갔다가, 대기하고 있던 한국 정보기관 요원 5명에게 납치, 수장 직전 극적으로 구출되어 사건

발생 129시간 만인 8월13일 밤10시 집으로 돌려 보내졌다.

1971년,대통령 선거 이후 박정희 최대의 정적으로 등장한 김대중은 유신체제가 선포될 당시

   지병 치료차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중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을을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반체제 민주화

   운동을 벌이는 한편,

1973년7월6일, 재미 교포들의 반정부 단체인 한국민주 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 그 명예 회장이 되었으며, 일본에서도 8월 13일 도쿄 한민통을 결성할 예정이었다.

   김대중의 이러한 활동은 박정권의 비위를 거슬리기에 충분했고, 이 때문에 사건이 발생

   하자 국내외의 비난여론은 일제히 박정권에 집중되었다.

공권력 개입설을 완강히 거부하던 한국 정부는 일본 경시청이 사건 현장에서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 관련자의 출두를 한국에 요구하자,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이에 따라 일본내에서는 국권 침해에 대한 강력한 비난 여론이 대두, 한일정기 각료회의

연기, 대륙붕 석유 탐사를 위한 한일교섭 취소,경제 협력 중단 등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오던 한·일관계가 갑자기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후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간의 막후 절충을 통해 관계 정상화가 시도되어
등서기관의 해임,김대중의 해외체류중 언동에 대한 면책,김종필 총리의 진사방일 등에 합의, 사건 발생 86일 만에 김대중 사건은 정치적으로 결말 지어졌다.

무기 연기되었던 한일 각료 회의가 12월22일 열리고 중단된 차관 사업도 재개되었으나,

주권 침해·한국 중앙 정보부 관련설·범인 출두·김대중의 원상 회복 문제 등은 사건 진상과

더불어 세월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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