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만중      2019.07.16.화요일,맑음

김만중;

생볼; 1637년(인조15년)~1692년(숙종18년)

본관; 광산

호; 서포(西浦)

증조부;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

부; 충렬공 김익겸의 유복자이다.

모;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이며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윤방의 증손녀이고 이조참판 윤지의 딸

제; 김만기의 아우

숙부; 숙종의 초비인 인경왕후


김만중은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김익겸은 일찍이 1637년(인조 15) 정축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까닭에,

형 김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며 살았다.

윤씨부인은 본래 가학이 있어 두 형제들이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항상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한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고 전해진다.

궁색한 살림 중에도 자식들에게 필요한 서책을 구입함에 값의 고하를 묻지 않았으며, 또 이웃에 사는 홍문관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내어 손수 등사하여 교본을 만들기도 하였다.

'소학''사략''당률' 등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연원 있는 부모의 가통과 어머니 윤씨의 희생적 가르침은 훗날 그의 생애와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650년(효종1년), 14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52년(효종3년), 16세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1665년(현종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1666년(현종7년), 정언

1667년(현종8년), 지평,수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현종9년), 경서교정관,교리가 되었다.

1671년(현종12년), 암행어사로 신정,이계,조위봉 등과 함께 경기 및 삼남 지방의 진정득실을 조사하기 위해

   분견된 뒤에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다.

1674년(현종15년) 까지 헌납,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675년(숙종1년), 동부승지로 있을 때에 인선대비의 상복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관작을 삭탈당했다.

   30대의 득의의 시절에서 고난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에 그의 형 김만기도 2품직에 올라 있었고 그의 질녀는 세자빈에 책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2차 예송이 남인의 승리로 돌아가자, 서인은 정치권에서 몰락되는 비운을 맛보게 된 것이다.

1679년(숙종5년), 예조참의로 관계에 복귀하였다

1675년 이후 5년 뒤인 1680년(숙종6년), 남인의 허적과 윤휴 등이 사사된 이른바 경신대출척에 의해 서인들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1683년(숙종9년), 공조판서로 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에 사헌부의 조지겸,오도일 등이 환수의 청이 있자 이를 비난하다가 체직(직무가 바뀜)되었다.

1686년(숙종12년), 대제학이 되었다.

1687년(숙종13년), 장숙의 일가를 둘러싼 언사의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추국(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1688년(숙종14년)11월, 배소에서 풀려 나왔다.

3개월 뒤인 1689년(숙종15년) 2월, 집의 박진규, 장령 이윤수 등의 논핵을 입어 극변에 안치되었다가 곧

   남해에 위리안치 되었다. 이같이 유배가게 된 것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와 관련된 앙화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어머니인 윤씨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로

1692년(숙종18년), 남해의 적소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98년(숙종24년) ,그의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706년(숙종32년), 효행에 대하여 정표가 내려졌다.


김만중의 사상과 문학은 이전의 여느 문인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년에 와서 불운한 유배생활로 일생을 끝마쳤다.

그러나 생애의 전반부와 중반부는 상당한 권력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득의의 시절을 보낸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총명한 재능을 타고났으며 가학을 통해 그의 상당한 경지의 학문적 성과도 성취하였다.

그가 종종 주희의 논리를 비판했다든지 아니면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든지 하는 점은 결코 위와 같은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만중의 사상의 진보성은 그의 뛰어난 문학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문학론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후대의 평가 속에서도,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예찬론’은 상당히 주목을 받는 논설이다. 그는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한문을 ‘타국지언’으로 보고 있는 까닭에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 등의 한글 가사를,

굴원의 '이소'에 견주었다.

저서로는 '구운몽''사씨남정기' 등과 같은 소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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