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자점 (金自點)      2019.01.22.화요일.맑음

김자점; 서인

생졸; 1588~1651,64세

 

1623년,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인조)을 추대한 인조반정의 1등 공신으로 책록된

서인 세력의 무장이다.

병자호란(1637) 당시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할 총책임을 맡고도 전투를 회피하여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관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초래케 했다.
그 시절 그는 탐관 오리의 중심에 서서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이 됐다.

그는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를 이간질 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시절,임경업 장군이 청의 남침로인
의주산성을 지키고 있어 범접을 못하게 하였는데,

김자점이 임장군을 남침 길목에서 백리나 떨어진 고지 자모 산성으로 이동시켜 청의 길을 열어주었다.

황해도에서도 방어군을 작동 시키지도 않고,피란 부터 서두르다 삼전도의 항복을 하게했다.
병자 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비난 속에
유배에 처해졌으나,

1640년(인조18) 1월 강화유수로,그해 2월에는 호위대장으로 재기용되었다.

그는 인조의 비호 속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1646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후 자신의 손자인 김세룡을 인조 소생인 효명옹주 결혼시킴으로써 인조와의 밀착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그 후에도 
청나라의 위세에 빌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혔고,반청적인 성향의 임경업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1649년,효종 즉위 이후 송시열,송준길 등 사림 세력들이 대거 조정에 등용되고,이들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 등을 통해 그 계획을 청나라에 누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간들의 극렬한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하다가 아들 김 익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를 “김자점의 역모 사건”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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