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직과 김굉필        2014.10.15.수요일,맑음

1.김종직;

  생졸; 1431(세종)-1492(성종)

  출신; 경상남도 밀양 

  본관; 선산

  호; 점필재(佔畢齋).

  가계도;

    부;사예 김숙자

    모; 밀양 박씨로 사재감정 박홍신의 딸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계승하여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도학 정통의 중추적 역할을 한 그는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인하여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단종1년인 1453년.진사가 되고,세조5년 1459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1462년 승문원 박사 겸 예문관봉교에 임명되고 이듬해 감찰이 되고 이어서 경상도 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처 성종7년인 1476년엔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 제학,병조참판,홍문관 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486년에는 신종호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편차(編次)하여 문장가 다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훗날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하여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조,성종 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절의와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하였으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까지 전해져 이들 또한 절의를 높이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의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유자광,정문형,한치례,이극돈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연산군4년인 1498년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 일로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종직도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과 관련되어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길재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여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되었다.

김종직은 문장,사학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김종직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정여창,김일손,유호인,남효온,조위,이맹전,이종준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종직의 도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굉필은 조광조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켰다.
김종직의 도학이 조선시대 도통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김종직이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문장보다는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점이 높이 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유록''청구풍아''당후일기'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일선지''이존록''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어 김종직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고,밀양의 예림서원,선산의 금오서원,함양의 백연서원,김천의 경렴서원,개령의 덕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2.김굉필;

  생졸; 1454(단종)-1504(연산군)

  출생;

  본관;서흥

  호;·한훤당(寒暄堂)

  가계도;

    증조부; 수령과 청환을 역임한 김사곤

    조부; 의영고사 김소형

    부; 김뉴

    모; 청주 한씨 중추 부사 한승순의 딸

    계열; 김종직의 문인이다.

 

선조는 서흥의 토성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했는데,

증조부인 김사곤이 수령과 청환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으며,할아버지인 의영고사 김소형이 개국공신 조반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어,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김굉필을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쓰게 되었고.성남,미원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되며,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처가),성주의 가천( 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 때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을 섭렵하였다.

 

성종11년 1480년.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이 이학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로 천거해 남부 참봉에 제수

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 참봉·북부 주부 등을 거쳐,1496년 군자감 주부에 제수되었으며,

사헌부 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 부처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희천에서는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연산군 1504년. 갑자 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어

김굉필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신용개,김전 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도학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김굉필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김굉필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 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김굉필을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 건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575년 영의정 추증,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렸졌으며,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함께 오현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들 가운데에는 사장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으나,정여창과 함께 경학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인해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나,현실 상황에 적극적,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 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아가 유배지 교육 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 정치를 주도한 기호계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학'에 입각한 처신,복상,솔가 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으로 숭상되었다. 후학으로는 조광조,이장곤,김정국,이장길,이적,최충성,박한공,윤신 등이 있다.

아산의 인산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희천의 상현서원, 순천의 옥천서원, 현풍의 도동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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