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택(金春澤)                2019.07.23.화요일,맑음

김춘택;조선후기의 문신,외척,작가다

생졸 1670년-1717년

본관; 광산

가계도;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손자

증조부; 김만중 의 문하생

부; 인경왕후의 친정 오빠인 경헌공 진구(鎭龜)

모; 정경부인 한산 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


어려서부터 종조부인 김만중에게 문장을 배웠는데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여 김수항의 탄복을 받았다고 한다.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훈신과 적장자를 우대하는 전례에 따라 일찍이 음서로 출사하여 대호군에 제수되었다.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숙빈 최씨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가 후궁 최씨를 결박해 심하게 때린 후 거꾸로 세운 큰 독 안에 가둬 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왕비 장씨의 핍박을 받는 최씨로서는 서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김춘택은 인현황후의 친정과도 친밀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소론은 김일경의 옥사 당시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 하여 영조에게 충격을 주기도 한다.


인경황후의 친정 조카로 서인이었다가 노론이 되었다.

인현황후 민씨의 복위에 공을 세웠으나,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와 간통한 뒤 정보를 빼돌려 이때문에 소론과 남인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장희재를 제거하려는 과정에서 세자에게 위협을 가하려 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된다.

고종 때 복권 되어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로 추증되고 광령군에 추봉되었다. 

 

김춘택은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노론의 환국 모의를 주도했다.

장희재의 처를 통해 남인 내부의 중요 정보를 획득하여 결국 환국에는 성공했으나 그 방법이 옳지 못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귀양까지 가야 했다.

종조부 김만중의 문집을 한자로 번역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종조부 김만중과 가문의 당파인 서인이 실각하여 자신도 수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숙종의 첫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친정 조카인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여전히 궁 출입도 자유로웠다. 이러한 배경 조건과 재물을 이용해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 직전 인현왕후 복위를 은밀히 추진하여 갑술 환국과 폐비 민씨의 복위를 성공시켰다.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를 유혹하여 간통한 뒤 그로부터 남인측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고, 갑술옥사 이후 1701년의 무고의 옥으로 남인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서인들은 노론·소론 할 것 없이 정권 탈환에 부심 했다.

노론에서는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의 손자 김춘택이 환국 모의를 주도했고,

소론에서는 승지 한구의 아들 한중혁이 주도했다.

서인들은 ‘장다리(장씨)는 한철이고 미나리(민씨)는 사철이다’ 같은 동요를 만들어 퍼뜨렸다.

노론 김만중은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를 지어 왕비 장씨를 비난하고 폐비 민씨를 옹호했다.

'사씨남정기'는 명나라의 유현이 정실부인 사씨를 내쫓고 첩인 교씨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교씨의 간악함을 깨닫고 사씨를 정실로 맞이하고 교씨를 죽인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사씨가 폐비 민씨, 교씨가 왕비 장씨를 뜻하는 것인데 훗날 실제로 이 소설의 내용대로 전개된다.

'사씨남정기'를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은 이 소설 내용이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서인들의 염원이었다.


1695년(숙종 20년) 3월 23일 우의정 민암이 숙종에게 서인들이 불령한 무리들과 불법 정치자금을 모아

환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음모에 가담했던 함이완이란 인물을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위협해 폭로하게 한 것이었다.

남인 정승 민암의 고변으로 김춘택,한중혁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3월29일, 서인의 사주를 받은 유학 김인등이 맞고변했다.

우의정 민암과 병조판서 목창명,신천군수 윤희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김인의 고변 중에 왕비의 오빠 장희재가 김해성에게 돈을 주어 김해성의 장모로 하여금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김해성의 장모는 숙원 최씨의 숙모였다.

하지만 남인 정권 아래에서 남인들을 역모로 고변한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함이완의 고변은 사실로,김인의 고변은 무고로 정리돼 가고 있었다.


장희재의 처와 내연 관계를 갖고 그로 부터 정보를 일부 빼냈는데 남인들이 이를 눈치챘다.

김춘택은 수감되고 남인은 김춘택을 물고하려 했다.

4월1일 밤에 승정원으로 갑자기 내려진 숙종의 비망기가 전세를 뒤집었다.

“군부를 우롱하고 진신을 어육으로 만드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직을 삭탈해 문외출송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절도에 안치하라"

국청에 참여한 대신들을 모두 쫓아내라는 명으로서 정권을 다시 서인으로 갈아치우겠다는 뜻이었다.

남인들이 장악한 승정원에서는 급히 복역 장계를 작성했다.

임금의 잘못된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이 복역이었다.

그러나 막 작성한 초안을 올리려고 할 때 다시 숙종의 비망기가 내려왔다.

“비망기가 승정원에 내려진 지 이미 오래돼 경고가 반이나 지났는데 전지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그 머리를 모아 서로 상의하며 (대신들을) 반드시 구제하려는 정상이 극히 분통스럽고 놀랍다.

숙직 승지와 옥당(홍문관)을 모두 파직하라.

이번 복역 의논을 집에 있는 승지와 삼사라고 모를 리 없으니 마찬가지로 모두 파직하라

승지 전원과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킨 것이다.

또한 숙종은 입직한 오위장 황재명을 가승지로 삼아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등을 쫓아내고 남구만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병권 장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숙종은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각각 서인 서문중과 신여철로 갈아치웠다. 이조판서 이현일도 유상운으로 갈아치워 문관 인사권도 서인에게 주었다.

서인이 정권을 장학하면서 의금부에 감금되었던 그는 석방된다.

이때 그는 장희재의 처와 내연관계를 갖고 그로부터 정보를 일부 빼냈는데, 환국 유도 과정에서 그의 내연관계 역시 의금부와  사헌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시중에 유포되었다.

무고의 옥 직후 그는 노론으로부터 환국의 공로자로 칭송받았지만,

노론 일부와  소론으로부터는 음모를 이용한 파행적인 정치활동을 행하였다,

부도덕한 계략을 썼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소론과 남인은 그가 장희재의 처와 간통한 것을 끈질기게 물고늘어졌고,노론에서도 그의 행동이 부적절했다며 비난 여론이 일부 나타났다. 노론의 절대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탄핵을 받다가

1697년10월, 금천으로 유배되었고,

1701년 무고의 옥에 대한 수사 중에 갑술환국 전에 장희재의 처와 간통하여 간자로 삼았었다는 증언이 발고되어 다시 소론의 공격을 받고  전라부고 부안으로 정배되었다.

1706년에는 장희재의 처와 내통한 것은  장희재를 죽이려는 목적 때문만이 아니라 장차 세자(뒷날의 경종)를 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상소가 빗발쳤는데, 우의정 김창집의 강력한 보호에도 불구하고 끝내 김춘택은  제주도로 무기 유배되었다.

1710년, 제조 민진후가 숙종에게 감률 품지를 올려 육지로 이배되었다가 1701년에 방송되었다.

고종 때에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를 추증받았으며 광령군에 추봉되었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한다.

일설에는 숙빈 최씨와도 내연 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이 주장은  이인좌의 난 때 소론과 남인 인사들에게서 주로 채택되었다.

그에 의하면 영조는 그가 무수리인 숙빈 최씨와 사통한 뒤 숙종에게 보내졌다는 것이다.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도 그가  숙빈 최씨와 사통했다는 소문이 파다 했는데,

악형을 금지한  영조였지만  영조 때 이를 언급하는 자에게는 예외로 심한 형문을 가하였다.

사생활과 과격했던 정치활동 등으로 정적은 물론 노론 내부에서도 비난 받았지만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재주와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종조부 김만중의 언문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배포하였다.

저서로 '북헌집'과 글씨 '호판 김진귀 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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