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춘택과 숙빈 최씨의 야사            2019.07.23.화요일,맑음

일부 야사에서는 영조가 김춘택의 아들이며,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영조의 외모가 숙종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조선 숙종때는 영조가 김춘택의 아들 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고,

소론과 남인 중에는 영조가 김춘택의 아들이라고 신봉하기도 하였다.

 이인좌의 난 당시 형장으로 간 소론 인사들이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영조의 면전에서 김춘택의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 왕조 실록에서 영조가 소론계 인사들을 심문 할 때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이유이다.


숙빈 최씨와 사랑을 나누던 김춘택이 임금의 씨가 아닌 자기 씨앗을 숙빈 최씨에게 잉태 시켜 태어난 것이 영조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유포 되었던 소문이었다.               

결국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왕실의 씨가 바뀌었다.'라는 내용으로

영조 집권 4년만인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다.

이인좌의 난은 보름만에 진압이 되지만 영조는 집권 내낸 190여 차례 괘서 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닌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다.

김천택은 '청구영언'을 만든 사람이며 한동안 그의 애첩이었던 영조의 어머니 최숙빈은 무수리 출신이어서

영조는 많은 가슴않이를 하였을것이라 한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중국에서는 진나라의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이지만 거상 여불위가 그의 애첩인 조희를 임신을 한 후

장양왕에게 진상을 하므로 실은 여불위의 아들이란  설이 있어 '여정'이라고 한다.

시황제의 이름은 정(政)이 되는데 지금의 정치(政治;정이 다스린다)라는 단어가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것

이라 한다.

그는 유생 460명을 생매장(갱유)했고 책들을 모아서 불태워(분서) '분서갱유'까지 하듯이

나라를 그의 마음대로 떡주무르듯이 하였다.

그는 왕이 된 후에 직위의 이름을 최고로 높은 것으로 지어(作名)야 하는데,

전설속의 삼황(3皇;천황,지황,태황(泰皇)과 오제(5帝;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당요,우순)에서 따온 황제라고 했는데,

진시황은 고유 명사가 아니고 보통 명사 인 '진나라의 최초의 황제'라는 뜻이다.


조선은 '고종 황제'라고 부르고

일본은 황제국 '일제'라고 부른다.

왕는 노란색 곤룡포를 입지만 황제는붉은색 도포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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