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욱                    2019.12.27.금요일,맑음

김형욱은(생졸;1925년1월16일1-16) ~1979년10월7일,10-07)실종)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다.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그는 광복 후 월남하여 육군 사관학교에 8기생으로 입학하여

1949년에 졸업하였다.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여 국가 재건 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고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중앙 정보부장을 맡았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9년10월7일,유신 후반에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며 마찰을 빚다가 파리에서 실종

1984년10월8일에 정식으로 사망 신고 되었다.

1990년,서울 지방법원에서도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2005년에 미국에서 김형욱의 가묘가 발견되기도 했다.


1963년에 경희대 정치외교학과에서 학사 학위와 1967년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적극적이고 말없이 열심히 나서는 스타일이었는데 일찍이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박정희로

   부터 상당한 신뢰를 받았다.

   육사 동기인 김종필과 친밀했지만 군 복무 시절 특정조직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소신을 지키다가 박정희를 만나면서  박정희와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신뢰 관계를 구축

   하였다.

   육군 제6관구사령부 정보참모,작전참모 등을 지냈으나 진급이 늦었고

1960년5월에  김종필,길재호,오치성 등 육사 8기생 중령 8명을 비롯한 고급 장교들과 함께

   선배 장교들을 타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겨우 위기를 넘기고 1961년부터 박정희와 군사 정변을 기획하였다.

1961년,5.16 군사정변 때 중령으로 참여한 후 군사혁명 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고위원의 한사람이 된 뒤 내무분과 위원장과 운영기획 위원장을 지냈다.

   이어 5월 동지회 지도위원,부정축재 처리위원을 역임하였다.

   그 뒤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자 국가 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가,

1963년7월,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중앙 정보부장으로 김형욱을 임명하였다.

1963년10월13일을 기하여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10월15일,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일반 시민을 가장하여

   야당 후보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사퇴를 막았고, 이로써 야당을 분열시켜 야당후보의 난립

   으로 박정희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는 10만여 표 차이의 근소한 차이로 이기는 바람에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1964년8월,중앙 정보부를 시켜 인민 혁명당 사건을 수사, 발표하게 하였으며 이때 도예종을

   비롯한 혁신계 인사·언론인·교수·학생 등 41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무더기 구속 외에도 이들의 구속,처벌을 거절한 검사들에 대한 김형욱의 압력에

   의한 공안 검사의 사표 제출 문제와 고문 문제가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해 6월부터 한일 협정을 둘러싼 6·3사태와 국회비준 파동 때에도 그의 영향력은 크게

   작용했다.

   6·3사태를 전후하여 학생운동가들 및 재야인사들, 학원 동태를 수집, 파악하였으며 또한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움직여서 김종필에게 2차 외유를 권고하기도 했다.

   그는 인혁당 사건 조사의 정당성을 주장 '인민혁명당 사건은 바로 6·3사태 배후 인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회고록에 기록하였다.

   또한 한일협정 국회비준과정에서도 야당 의원들을 내사,회유,  협박을 하는 등의 압력을

   행사하였다.


1965년, 대한사격 연맹 제6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1967년, 운동권 단체인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를 적발하고 이적행위를 수사하였으며,

1967년 봄에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일명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수사, 7월 8일에 발표

   하면서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운동가들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하는 한편 이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한편 반정부운동에 대해 강하게 탄압하였다.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사건의 수사를 주관하였다.

1967년,제6대 대통령 선거,

1969년, 3선 개헌 때에도 활발히 활동하였으나, 국회의원 이만섭이 그의 해임건의안을

   박정희에게 전달했다 박정희는 이를 거절하였으나 야당과 주변의 반발이 심해지자,

1969년10월20일,결국 김형욱을 해임시킨다.

1971년5월25일,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민주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으나

1972년10월17일, 유신이 선포되어 국회가 해산되자 의원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후 그는 박정희에게 깊은 원망을 품게 된다.

1973년4월15일, 김형욱은 자신의 중앙정보부장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문학림과 같이 타이완

   으로 출국했고, 이후 미국 뉴욕 건너가 살았다.

   박정희는 김형욱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에 특사 형식으로 정부 고위급 인사를 파견하였다.

1973년4월,김형욱의 미국 망명 직후,박정희는 정일권,김종필,김동조, 오치성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을 미국으로 보내 김형욱의 귀국을 설득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1977년6월2일에는 '뉴욕 타임스'와 기자 회견을 갖고,박정희 정권의 내부 비리를 폭로했다.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불만을 품고 비리 폭로에 나선 이유는

1969년10월21일,정권 유지를 위한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자신을 중앙 정보부장에서 해임

   하고,1973년3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김형욱은 이에 따라 미국에서 '간첩 김대중 내란 범죄 체포 사건'을 비롯한 각종 박정희

   정권을 폄훼하는 나팔수가 됐다.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도 출석해 박정희를 강력히 비난하고,치부를 고발하는 회고록

   출간도 추진했다.

1977년,'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김형욱은 미국 연방 하원의 프레이져 청문회에 나가

    박겅희 정권의 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고,

    이어 일본으로 가서 김경재가 쓴 회고록의 출판회를 가졌다.

    이 책은 1980년대의 밀리언 셀러가 된다.

1979년,김형욱은 중앙 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인  유일균을 만나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말을

    들고 10월1일에  파리에 도착하였다.

1979년10월7일에 파리에서 주프랑스 공사인 이상일을 잠시 만난 후 헤어졌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김형욱의 사망설이 나돌자 1984년10월8일에 그의 가족들은 사망 신고를 하였다.

2009년5월 초순에 미국 뉴저지주의 한 공동묘지에서 김형욱의 묘가 발견되었다고 재미

   한국인 안치용이 2009년9월21일 밝혔다.

   묘비의 내용에 따르면 김형욱의 사망 날짜는 10 7일이다.

김형욱의 시신이 산산조각 났다는 진술이 있는 데다가,

묘비상의 사망일자는 실제로는 김형욱의 실종 일자로서 정확한 사망일자는 아니다.

더욱이 김경재 전 의원은 '김형욱의 아들 김정한이 2002년 가을 사망한 후 아들의 묘지 앞에 가족묘를 조성하기 위해 김형욱의 추모비 성격을 지닌 가묘를 조성한 것으로 안다'고 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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