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일대

소개;

  금일 산행코스는

  사육신의 한분인 취금헌 박팽년의 후손인 순천 박씨의 집성촌에 위치한

  조선 세조 2년(1456년),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숨진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육신사와

  박팽년의 11대손인 성수공이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유래한

  삼가헌(三可軒)을 탐방 후 강정보 녹색길 일부와  대구 근교산 산행으로 육신사 뒷산과 구봉산을 산행하기로

  하였다.

산행일시; 2020.12.27.일요일,맑음

산행코스;

   사육신 기념관 주차장-삼거리-삼가헌-낙빈서원-삼림욕장-육각정-고개 도로-구봉산-사육신 기념관 주차장

산행시간; 2시간40분

가는 길;

   대구 성서 홈플러스-신당네거리(계명대역)-강창교-다사-동곡 네거리 가기전 하빈 파출소-하빈교-육신사 방면

  -사육신 기념관 주차장

  (네비;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741-7번지-17km,40분 소요)

 

 

 

이미지 보기

▽ 육신사가 있는 묘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사찰의 일주문 처럼 생긴 '충절문'을 지나 1km 정도 들어가면

 

▽ 맨 먼저 만나는 '사육신 기념관 주차장'이다.

    이 곳에서 시작하는 문화지 탐방과 산행이 시작된다.

 

▽ 사육신 기념관 주차장은 대구시내 버스 '성서2번'의 종점이기도 하다. 

 

▽ 사육신 기념관 주차장을 빠져나와 '강정보 녹색길' 안내도와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 갈림길은

   

▽ 우측 직진하는 방향은 육신사와 박팽년의 후손의 집성촌과 사육신의 위패을 모신  육신사(0.1km)로 가는 길이며,

   

▽ 좌측은 강정보 녹색길인 삼가헌(0.5km)으로 가는 길이다.

    먼저 강정보 녹색길을 따라 삼가헌을 들린 후 육신사 뒷 산과 구봉산을 산행 후 육신사 탐방을 하기로 한다. 

 

▽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측 시멘트길을 따라 100여m 가면 이정표(삼가헌.차량진입금지)에 도착하여

    좌측 '삼가헌,차량진입 금지' 방향으로 시멘트길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 언덕을 오르다 뒤돌아 본 육신사 방향.

    삼가헌을 들린 후 보이는 육신사 뒷 산을 산행 할 예정이다.

 

▽ 시멘트길을 따라 대나무 숲길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이정표와 강정보 녹색길 안내도가 나온다.

 

▽ 강정보 녹색길 안내도에서

    우측 산림욕장 방향으로 하여 이정표를 만나 좌측 낙빈서원,삼가헌으로 가는 강정보 녹색길을

    반대로 삼가헌으로하여 낙빈서원,산림욕장 이정표 방향으로 간다.

 

▽ 길없음 방향으로 직진하여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 창고 옆을 지나 녹색 울타리 텃밭을 지나 산 아래 마을을 지나 시멘트길을 따라 가면

 

▽ 강정보 녹색길 안내도와 '박병규 선생 추모비'가 보이는 삼거리 갈림길 이정표를 만나

    우측 삼가헌 방향으로 들어 가면

 

□ 삼가헌

삼가헌 고택은 달성군 하빈면 묘골 묘골마을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고있는 파회 마을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묘골 마을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충정공 박팽년(1417∼1456) 후손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1769년,박팽년의 11대 손인 성수(聖洙)가 이 곳에 초가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서 '삼가헌'이라 하였다.

삼가(三加)란 중용에서 나오는 선비로써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벼슬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음"을 뜻한다.

1783년에 성수의 아들 광석(光錫)이 이웃 묘골에서 현재 위치로 분가한 다음 1826년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1874년에 광석의 손자인 규현이 원래있던 파산서당을 약간 앞으로 옮기고 누마루를 달아 별당채인 '하엽정'을

지금의 모습으로 지었다.

별당인 하엽정은 연꽃잎의 정자라는 뜻으로 1826년 집을 지을 당시 많은 흙을 파낸 자리에 박광석의 손자 규현이

1874년에 연못으로 꾸며 연을 심고 파산서당을 앞으로 옮겨 지으면서 하엽정이라 당호를 붙였다.

종전 문화재 명칭은 묘동 박엽씨 가옥이었으나,

사육신 박팽년의 12대손인 박광석이 이웃한 묘골에서 현재의 위치로 분가해 오면서 가옥을 건립하고 부친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이름하였음을 감안하여 2007년1월29일에 '달성 삼가헌'으로 변경하였다.

 

▽ 삼가헌에 도착하여 우측 마을 중앙으로 낙빈서원(0.2km) 방향으로 간다.

    삼가헌(三可軒)은 민속자료 제104호로 1979년12월28일 지정되었으며,

   '삼가헌'이란 이름은 박팽년의 11대손인 박성수씨가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마을 중앙으로 들어가면

 

▽ 마을의 마즈막 집을 지나 시멘트길을 따라가면

 

▽ 낙빈 서원이 나온다.

    낙빈서원 가기 전 우측으로 산림욕장으로 가는 소나무 숲길이 나있다.

 

▽ 낙빈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792번지에 있는 낙빈서원 이 곳은

본래 충정공 박팽년의 위패를  봉안한 하빈사기 있어 후손들이 향사를 지내왔다.

그런데 어느해인가 공의 현손인 박계창이 사육신 여섯분이  함께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깨달은 바가 있어

다섯분의 신위를 더 설치해 함께 재향하게 되었다. 

1691년(숙종17년)에는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별묘와 강당을 건립하여 낙빈서원을 창건하였는데,

3년 후인 1694년(숙종20년)에 유생들의 소청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후 1866년(고종3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으나,

1924년,문중에서 원래 터보다 윗쪽인 현위치에 강당 건물만 중건하였는데,그 후로도 사당을 세우지 못해

서원이라기보다 문중의 제사와 유사한 모습이 되었다.

1874년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충효위인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묘골의 구 종가터 뒷산에 육신사가 건립되면서

그 곳으로 사육신의 위패를 옮겨 봉안하고 매년 춘추절에 향사를 지내게 되었다.

현재의 서원 건물은 정면4칸,측면1칸의 팔각지붕 토기와집으로 1982년에 복원 한 것이다.

 

 

▽  낙빈서원을 잠시 들린 후 되돌아 와 좌측 대나무 숲길로 간다.

 

▽ 대나무 숲길로 들어서면

   

▽  대나무 숲 사이 오르막길을 올라 이정표가 있는 안부에 올라서면 산림욕장이다.

 

▽ 산림욕장 이정표에서 육신사 방향으로 능선길로 오른다.

 

▽ 각종 쉼터 의자가 즐비한 산림욕장.

    산림욕장으로 내려가면 강정보 녹색길 안내도와 이정표 지점에 닿을 수있다.

 

▽ 목계단을 오르면 안부에 다시 올라

 

▽ 이정표에서 우측 등산로 방향 능선길로 가면

 

▽ 첫번째 쉼터 의자와

 

▽ 두번째 쉼터 의자를 지나면

 

▽ 봉우리를 내려서면

 

▽ 육각정 오거리에 도착한다.

 

▽ 육각정에 올라 보는 오거리의 이정표.

    육각정에 올라 오거리를 바라보면

     목계단은 왔던 길이며,

     우측 방향으로 흙길로 가면 삼가헌으로 가는 길이며,

     우측 시멘트길은 칠곡군 왜관읍 금남리로 하산하는 길이다.

     좌측으로 내려가는 시멘트길은 육신사로 가는 길이다.    

 

▽ 육각정 뒤로 가는 등산로 방향으로 간다.

 

▽ 육각정 뒷편으로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면

 

▽ 목계단을 올라

 

▽ 능선에 올라 우측으로

 

▽ 약간의 내림길을 내려서다 우측 나무가지 사이 아래를 처다보면 육신사 뒷편이라는 걸 알수있다.

 

▽ 쉼터의자를 지나 능선길로 계속가면

 

▽ 내림길을 내렸다 올라서면

 

▽ 잘 정리된 묘소 옆을 지나

 

▽ 오르막 능선을 오르면

 

▽ 묘소가 많은 지대를 지난다.

 

▽ 갈림길인 능선 삼거리에 도착하기 전 좌측으로 보면 묘소 앞에 '본 산소는 저희 조상님 산소입니다'라고하는

    안내판을 만나

 

▽ 마즈막 산소를 지나 안부에 올라서면

    좌측으로 직진하는 길과 우측으로 묘소 뒤로하여 내리막길이 나오는 삼거리에 도착한다.

 

▽ 삼거리 나무 가지에 '칠곡 군경계 산행단'이란 흰색의 리본이 걸려있다.

    우측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 내리막길을 따라 한동안 가면

 

▽ 철탑을 지나

 

▽ 삼거리 갈림길을 만나 직진한다.

 

▽ 산비탈길을 지나면

 

▽ 이정표 없는 삼거리 갈림길에 도착한다.

    나무 가지에 '백운회'라는 리본이 달려있다.

    뒷면으로 보이는 것을 앞으로 보이게 본인이 돌려놓았다.

    우측으로 하산하면

 

▽ 산비탈길을 따라 하산하면

 

▽ 구봉산이 보이는 묘소 옆을 지나면

 

▽ 좌측 하빈지로 넘어가는 도로에 도착한다.

    우측은 육신사로 가는 도로다.

    육신사 주차장에서 삼가헌-낙빈서원-삼림욕장-육각정-철탑-이 곳까지 1시간이 소요된 산행이었다.

 

▽ 하빈지로 넘어가는 방향으로 0.1km 도로를 따라 가면 고개에 올라서기 전

 

▽ 우측으로 구봉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온다.

 

▽ 안부에 올라 우측으로 능선을 타고 오른다.

 

▽ 입구 안부에서 가파른 능선길을  20여 분 오르면

 

▽ 안부에 오른다.

 

▽ 안부에서 능선길 20여분 오르면

 

▽ 정상석 없는 삼각점이 있는 구봉산 정상에 도착한다.

 

▽ 되돌아 본 정상(190.6m).

 

▽ 정상에서 내림길과 

 

▽ 오름길을 한두차례 지나면

 

▽ 처음으로 왼쪽으로 하빈면 현내리 하빈 면사무소 방향으로 조망된다.

 

▽  조망터를 지나면 이윽고 하산 할 봉우리 능선에 올라선다.

    이 지점에서

 

▽ 좌측으로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청석 바위 지점의 조망터가 나온다.

 

▽ 청석 바위에서 좌측으로 하빈면 현내리 하빈 면사무소 방향이 조망된다.

   청석 바위와 조망 지점에서 봉우리 능선으로 되돌아 간다.

  

▽ 봉우리 능선에서 우측으로 가면

 

▽ 좌측으로 나무 가지에 빈큰깡통이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우측으로 급경사길을 내려가면 묘소를 지나

 

▽ 또 다른 묘소를 만나

 

▽ 바라보면 중간 부분 육신사 입구가 조망된다.

 

▽ 묘소 우측을 지나면 급경사 내리막길을 만나

 

▽ 내려서면 농노에 내려선다.

    구봉산 산행은 고개에서 시작하여 이 곳까지 1시간30분 소요되었다.

 

▽ 좌측으로 농노길을 따라가면

 

▽ 녹색의 하우스 옆을 지나

 

▽ 산 아래 도로에 도착하여

 

▽   우측은 하빈지로 가는 길이므로 좌측 '행복한 도시 농부 놀이터' 입간판 방향으로 가서     

 

▽ 삼거리에서 우측 육신사 방향으로 시멘트길을 따라가면

 

▽ 사육신 기념관에 도착하여 종료하는 산행이다.

    구봉산을 산행 후 농노에서 이 곳까지 10분 정도 걸렸다.

    총 2시간40분 정도 걸린 시간이다.

    이 후 육신사 탐방에 나선다.

 

□  육신사 탐방 

조선조 6대 왕인 비운의 왕 단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6충신들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집현전 문과 출신,유응부-유일한 무과 출신으로 장군 출신),

 역사는 그들을 사육신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 사육신을 모신 사당을 육신사라고 하며                                                                       

                                                                            (육신사 외삼문)

                                                   

육신사가 위치한 장소는 560년 동안 이어온 사육신 백평년 후손 순천 박씨 충정공파 순천 박씨(묘골 박씨 라고도 함)가

사는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의 대구 달성의 묘골 마을이다.

묘골이 자리한 곳은 정남형으로 야트막한 산으로 가리워져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엣부터 살기 좋은 마을로 소문이 나있다.

묘골 마을이란 ?  

사육신의 사당을 모셔온 마을이라 하여 사당 묘(廟) 자를 써 묘골 마을이라고 하며,

560년 전, 이 마을이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이어온 유래가 묘하다고 하여 묘할 묘(妙) 자를 써 묘골 마을로,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이 앉아 있는 터가 묘하다하여 묘골 마을이라고도 하며,

사육신의 사당을 모셔온 마을이라 묘골이라고도 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땅이름 묘(竗)자를 사용하여 묘골 마을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대구시 달송군 하빈면 묘골 마을은 사육신의 한 분인 충정공 취금헌 박팽년의 후손들이 사는

순천 박씨의 집성촌이다.

                                                         (순천 박씨 집성촌인 묘골 마을 전경)

 

묘골 마을엔 충신을 모시고 있다는 의미로 3개의 정려각이 있는데,

그 하나는 마을 입구의  충절문인데 마을 입구의 문이라 하여 여문이라고도 하며,

또 하나는 기념관 뒷편의 삼충각으로 사육신 박팽년,아들 진사공 박순 ,손자 박일산 을 기념하고 기린다는

졍려각에서 파생된 유물의 일종이다.

마즈막으로 육신사 외삼문을 들어서며 만나는 홍살문인데 충신이 살던 집 대문 앞에 세워진 대문이라하여

정문이라고 한다.

                                                                             (충절문;여문)

                                                              (삼충각)

                                                            (홍살문;정문)

          

 

취금헌 영풍군 이전 (호)로 정립되어잇다

1452년 (문종2년), 아버지 문종이 정비를 두지않고 죽자 12세에 왕위에 오른 6대 왕 단종 곁에는

아버지 문종의 동생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권력을 빼앗고자 호시탐탐 노렸다.

그 당시 문종이 숭하 할 때 대비가 없어 수렴청정 제도가 있었으나 대비가 없어 그 마져도 용이치 않았다.

문종이 승하 할 때 신하 몇명에게 단종을 부탁하게 되었다.

1453년(단종1년), 수양대군은 김종서,황보인 등이 안평대군과 결탁해 반역하고자 한 것을 평정했다는 의미로 

계유정난을 통하여 반대편을 제거 후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12살짜리 단종은 왕위 보존이 위태롭게 되었다.

1456년(단종 즉위3년),단종 복위 운동 실패로 처참히 죽게되는데 그들을 우리는 사육신이라 칭한다.

충청감사 시절 박팽년은 충청감사 시절 신하 신(臣)자를 쓰지 않고 세조를 왕으로 모시지 않겠다고 했으며,

집현전 학자인 성상문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다고하여 세조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고 거사 당일 계획이 미뤄지고 김진의 배신으로 사육신및 반항 세력들은 극형에 처해지고

남은 가족들은 처형되거나 노비로 전략한다.

사육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데 남자 경우 멸족을 당하고

여자의 경우에는 공신,또는 관아의 노비로 전략 하다.

박팽년에게는 세아들 박헌,진사공 박순,박분이 죽임을 당하고 박팽년 선생의 아버지 이조판서 지낸 아버지 박중림 등

삼족이 멸한다는 혈벌을 받았으나 멸문의 화를 입고도 사육신 중 유일하게 혈손이 이어진 사람은 박팽년 뿐이었다.

백팽년의 둘째 아들 진사공 박순의 부인 성주이씨는 대구 관아의 노비로 오게되었다.

아기를 놓을때 쯤 성주 이씨 부인이 아들을 놓으면 죽이고 딸이면 키워서 노비로 서라고 세조는 명하였다.

친정집에서 성주 이씨 부인은 아들을 낳았고,

비슷한 시기에 여종이 딸을 낳아 바꿔 '박 비'라는 이름으로 종의 자식으로 살았는데

17년이 지나  박순의 동서인 이급균이 처가에 들렀다가 이실 직고하게 되자 박 비는 자수하게 되어

이름을 박일산으로  지어주었다.

사면을 받고 이마을에 돌아와 박일산공이 살던 이자리에 종택 99칸을 지었는데 사라지고 현재는 태고정인 정자만 남았다.

임진왜란 당시 묘골 전체가 불타게 되었으나 박팽년 사당만 남았다,

윤두수의 현판에 의하면 묘골은 불타고  박팽년 사당만 남았다고 서술하고있다.

1614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은 태고정은 조선 정기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

                                                                  (태고정)

 

충정공 취금헌 박선생(박팽년)만을  그 후손들이 모셔 제사를 지냈으나 선생의 현손인 박계창이 선생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남류한 형색으로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

이 곳이 숭정사로 사육신 6분을 모신 사당이다.

                                                                 ( 성인문)

                                                (성인문 안 숭정사)

 

숭정사 옆 돌게단을 오르면 충의사가 있는데

충의사는 사육신 처형 당시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박팽년의 아버지인 한석당 박중림 선생의 사당이다.

                                                              (충의사)

또한 교육기간으로 사용한 유형 문화재 제32호 도곡재에 도착한다.

도곡재는 박팽년의 후손이 사는 묘골 마을의 고택이다.

1778년,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이 지었으나 후에 도곡공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 되었다.

동방의 1인자로 병자호란때 죽었다.

 

 

이미지 보기

▽ 산행을 마친 후 사육신 기념관 주차장에서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육신사 방향으로 가면

 

▽ 맨 처음 만나는 충효당이다.

    충효당은 인조 22년 박팽년의 7대손 금산 군수 숭고가 별당으로 지은 건물이다.

 

▽ 충효당

 

▽ 충효당을 지나 마을 중앙으로 들어서면

 

▽ 이정표에서 삼성그룹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의 부인인 박두을 여사님의 생가를 보이며

 

▽ 다시 육신사 방향으로 오르면

    유형 문화재 제32호 도곡재에 도착한다.

    도곡재는 박팽년의 후손이 사는 묘골 마을의 고택이다.

    1778년,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이 지었으나 후에 도곡공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 되었다.

   동방의 1인자로 병자호란때 죽었다.

 

▽ 도곡재를 지나 '육신사’라는 현판이 걸린 외삼문에 도착한다.

    '충효위인유적 정비사업’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육신사’ 현판을 내렸다고하는 육신사 현판.

 

▽ 외상문 좌측에 문화해설사의 집(관광안내),안내문,아래 화장실이 있다.

    육신사는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 위패를 모신 곳이다.

 

▽ 외상문을 들어서면 계단 위 정면에 권위와 신성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화살이 꽂힌 문’이란 뜻인 홍살문이 보이고

 

▽ 좌측으로 충의사로 가는 언덕길이 보인다.

 

▽ 우측으로 쪽문으로 들어가 본다.

 

▽ 성인문 안 숭정사와 육각비.

    성인문 앞 육각비는 하단에 여섯 마리의 거북이 받쳐있고 상단에는 열 두 마리의 용들이 절의를 지킨 신하를

    호위하는 형상의 비석이며,

    성인문 안 숭정사는 삼촌에게 왕권을 빼앗긴 어린 왕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숨진 사육신인 조선 세조 때의 박팽년, 성삼문,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 성인문을 통하여 숭정사로 들어 갈수가 있으나 성인문이 닫혀있어 담 너머로 본 숭정사.

    6분을 모신 사당은 제일 상단에 박팽년, 무과 출신이며 유응부는 문과 출신

  충정(조정에서 사후 내래려 준 시호)이며, 취  영풍군 이 전  사위

 

▽ 육각비  우측 담벼락 아래 세 개의 비석이 보이는 데

    고 박정희 대통령 .고 최규하 대통령,고 박준규 국회의장 친필이적힌 비석이다.

 

▽ 태고정은 성종 10년(1479년),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건립한 정자다.

 

▽ 육각비를 지나 충의사로 오르는 돌게단 좌측으로 조그만 원형의 비석이 보이길래 가까이 가본다.

 

▽ 제13.14.15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박준규 국회의장의 생가터 표시석이다.

   육신사 현재 자리도 후손인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수 만평의 땅을 희사하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한다.

 

▽ 충의사로 들어선다.

 

▽ 충의사 앞에서 본 육신사 전경

 

▽ 육각비에서 본 홍살문 방향.

 

▽ 홍살문에서 본 안삼문인 절의묘(節義廟)’는

 

▽ 안삼문인 절의묘(節義廟)’는 원래 박팽년 후손이 제사 지내던 사육신 사당 현판을 대문 안쪽에 걸고  

 

 

▽ 고 박정희 대통령이 내렸다는 현판은 외삼문에 달았다고 한다.

 

▽ 육신사를 탐방 후 마을로 내려가다

 

▽ 뒤돌아 보면서 

    세조와 단종,그리고 사육신을 되돌아 보면서 . . . . . ..!

대구 달성 육신사~삼가헌~구봉산       산행일시; 2020.12.27.일요일,맑음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일대에 위치한 사육신의 한분인 취금헌 박팽년의 후손인 순천 박씨의 집성촌에 위치한

조선 세조 2년(1456년),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숨진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육신사와

박팽년의 11대손인 성수공이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유래한

삼가헌(三可軒)을 탐방 후 강정보 녹색길 일부와 대구 근교산 산행으로 육신사 뒷산과 구봉산 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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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 육신사~삼가헌~구봉산      산행일시; 2020.12.27.일요일,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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