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 개혁법 실시            2019.12.16.월요일,맑음

1950년3월에 제정되어 공포된 농지 개혁법은

1950년5월에 농지 개혁법이 실시되었다.


제헌 국회에서 제정하여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유상 분배 함으로써 자영농 육성과 농업

생산력 증진으로 인한 농민 생활의 향상 목적으로 제정된 대한민국의 법안이다.

농지개혁법에 의한 농지 매수.분배 사업은 미군정의 귀속 농지 매각 사업과 함께 대한민국 농지 개혁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 조정은 지방 지주 세력에 대한 통제가 약해져 소작료가 수확량의 절반을 넘게 된 상황을 개탄하곤 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소작료가 80%를 넘기는 경우까지 나타났다.

1945년11월,

해방 이후, 군정 법령이 공포되면서 일본인의 개인 재산 및 동양척식회사를 위시한 일본계 회사의 재산은 미군정 산하의 신한공사로 몰수 이관되어 관리되었다.

이때 신한공사는 소작료를 기존의 1/3 수준으로 부과하였다.

한편 미군정 당국은 귀속 농지 매각을 위해 1947년 대대적인 농업 조사를 실시하였다.

1948년3월,

미군정은 군정 법령인 '신한공사해산령'을 공포하면서 2정보 미만의 소유 상한을 두고 해당 귀속 농지의 신한공사 소작농에게 우선적으로 불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농지의 매각 가격은 1년 생산량의 3배로 산정하여 매년 소출의 20%를 15년간 현물로 납부하도록 하였으며,등기를 통해 소유권이 일본인에서 곧바로 한국인으로 이전되는 형태였다.

귀속 농지의 매각 사업은 신설된 미군정 산하의 중앙토지행정처에서 담당하였다.


당시 경제 구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고,농민 대다수가 소작농이었기에

농지개혁 문제는 농민들에게 있어서 관심이 높았었다.

미군정은 소작료 3분의 1로 낮추고 소작권 부활만 했을 뿐 구체적인 농지 및 근본적인 토지개혁에는 거의 지지부진 했을뿐만이 아니라 미군정은 현상 유지 하기만을 원하면서 농지

개혁에 소극적이었기에 미비했다.

1946년,

반면, 38선 이북에서는 일찍이 북조선임시 인민위원회에서  토지및 농지개혁이 토지 상한선 5정보로 무상 몰수,무상 분배되어 제도가 실시되어 대한민국에서의 늦은 농지및 토지개혁은 농민들에게 있어 불만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농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농지 개혁이었기에 

1949년,

제1공화국은 농지 개혁법을 제정하게 된다.

이 농지 개혁법이 처음 제정 되었을 당시, 지주 세력들이나 농민 세력들 양측 다 반발,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1950년,

3월의 농지개혁법 개정안 및 동법 시행령과 4월의 농지 개혁법 시행 규칙이 공포되면서

법적,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고, 5월에 농지 개혁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1950년6월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농지 개혁법의 전면 실시는 연기되었다.

1951년,

귀속 농지 특별 조치법이 시행되면서 1948년 분배된 귀속 농지도 농지 개혁법의 상환조건을 준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귀속 농지와 매수 농지의 분배 및 상환 업무를 별도로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1952년4월,

농림부 직제 개정을 통해 기존의 농지국(내국)과 귀속 농지 관리국(외국)을 통합하여

'농지관리국'을 설치하여 농지 개혁을 담당하게 하였다.

1953년,

본격적으로 시행하여 개인에 불하하도록 실시하였다.

1950년에서 1970년 까지 농지 개혁법에 의해 매수.분배된 농지는 34만 2,365정보로 전국 농지 230만여 정보의 약 15%에 해당한다.

1994년에,

 '농지법'이 제정됨으로써 농지 개혁법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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