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재 신채호          2019.10.31.목요일,맑음

단재 신채호(생졸; 1880.11.7-1936.2.21)는 충남 대덕군 도림 마을의 신채호가 8세되던 1887년 38세로

작고한 유생인 고령 신씨 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고,13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독파할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1897년 할아버지의 소개로 수구파 대신 신기선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신기선의 충남 목천 본가의 서책을 빌려 읽으면서 유학을 깊이 공부하였다.

1898년에는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뒤, '독립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 등 근대 신문들과 신서들을 탐독하며 개화자강 사상에

젖기 시작하였다.

친러 수구파 정부가 1898년11월5일, 독립 협회 지도자 17명을 체포하고 독립 협회를 강제 해산시켰을 때, 서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개최한 만민 공동회에 참가하여 내무부,문서부의 간부급으로 활약하였고

만민 공동회 참여를 전환점으로 개화 자강파로 전환하였다.

한 달여 뒤인 1898년12월25일, 고종과 정부가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를 강제 해산하고,

주동자 430여명을 체포할때 일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귀향하여 1901년 향리 부근인 청주군 낭성면 인차리의 문동 학원에 강사로 나가면서,

시대 변천과 한문 무용론을 주장하다가 유생들에게 배척당한 일도 있었다.

1904년, 정부가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승인해 주려 하자 조소앙 등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일제와 주모자 이하영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1905년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그해 상반기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논설 기자로 입사하였다.

   그러나 '황성신문'이 일제의 을사늑약을 폭로 비판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로 무기 정간

   당하자,

1905년 말 1906년 초 양기탁의 초청으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기자가 되었다.

   이때 그가 쓴 일제 침략 비판 논설은 애국심에 넘치는 내용과 웅장하고 박력있는 필치로 바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켰다.

   이후 국민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애국 계몽 운동가중 한 사람으로 부상하였다.

1907년4월, 양기탁,안창호,전덕기,이동녕 등을 중심으로 비밀 결사 신민회가 결성되자 가입하여 신민회

   이념을 논설에 잘 반영하여 국민을 계몽하였으며, 신민회의 비공식적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1907년10월, 량치차오(梁啓超)의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번역 간행하였다.

   이어서 한국 역사상의 삼걸로 을지문덕,이순신,최영을 뽑아 전기를 저술하였다.

1908년5월 '을지문덕'을 간행하였으며,'대한 매일신보'에 1908년 5월2일부터 8월18일까지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을 연재하였다.

1909년12월5일부터 1910년5월27일까지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연재하였다.

일반 민중과 부녀층을 위하여 순국문판 '을지문덕젼'을 1908년 7월 펴냈고,

순국문판 '리슌신젼'을 1908년 6월11일부터10월 24일까지 국문판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1908년 기호 흥학회에 가입하여 '기호흥학회월보'와 '대한협회월보'에 여러 편의 애국 계몽 논설을 발표

   하였다. 같은 해 부녀층 계몽을 위하여 주시경과 함께 순국문 잡지인 '가뎡잡지'를 편집 발간하였다.

1908년8월27일부터 12월13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사신론'을 연재하였다가 후에 책으로 간행하였다.

'독사신론'은 확고한 근대 민족주의 사관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설들을 다수 정립하여 한국

근대 민족주의 사학을 정립하였다.

그밖에 '동사천년사'를 저술하였으나 망명으로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1909년 신민회가 청년 학우회를 창립하자,'청년학우회 취지서'를 써서 적극 지원하였다.

1910년 3월 신민회가 일부 간부들을 국외에 망명시켜 독립군기 지 건설 사업을 담당하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참여하여 망명길에 올라 1910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병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1911년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최재형, 정재관, 이동휘, 이종호 등과 권업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윤세복, 이동휘, 이갑 등 동지들과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이되었다.

   회장은 윤세복,총무는 이동휘가 맡았다. 광복회에서 통고문과 고시문 등을 작성하였다.

1913년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신규식의 초청으로 중국 상하이로 가서 약 1년간 체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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