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과 엄홍도         작성일자; 2011.04.29.목요일,맑음

 

 

단종이 숨을 거둘 때의 정확한 날짜와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단종은 14571021(양력117) 자살하였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난 지 약 4개월 정도되었을 때이다.

 

여러 부서의 신하들이 단종과 금성대군 등의 처벌을 건의하였지만 세조는 답을 피하였다.

단종의 할아버지격인 양녕대군과 영의정 정인지 등의 상소도 소개하고 있다.

그들 역시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에 세조는 금성대군에게는 사약을 내려 죽도록 하고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는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단종이 이를 듣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을 하였다는 것이다.

 

즉,112일,114일,115일,116까지 단종이 자살 했음을 기록하기 바로 직전의 4일간이다.

그날도 포함 시킨다면 5일간 이다.

그 시기는 세조의 큰 아들이자 왕세자인 도원군이 죽어서 상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원군의 묘 자리를 찾기 위해 거의 모든 신하들이 동분서주하고 있었던 때이다.

단종이나 금성대군의 처벌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주로 왕의 종친들이었다.

세조는 자신의 자식이 숨을 거둔 어수선한 상황에서 단종을 미리 죽여 놓고 그가 자살 할 수밖에 없었다는 명분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방아쇠를 당겨준 인물이 바로 신숙주,정인지였다는 합리적 의심도 간다.

즉 ,유배 초기에 몇 번 언급되었던 단종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러다가 928일에 신숙주,정인지에 의해서 처벌하자는 내용으로 바뀌어서 등장한다.

그 이전에는 그런 내용의 말들이 오고 간적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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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죽음에 관한 단초를 제공하는 것은 야사이다.

단종의 죽음에 관한 것을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서 찾기란 어렵다.

단종의 죽음에 관련된 말들의 대다수는 야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야사인 '병자록'이 단종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병자록'에 의하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의 관풍헌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 때 나장이 시각이 제체 된다고 발을 굴렀다.

왕방연이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그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 때 단종을 항상 보살피던 통인 하나가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단종이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겨서 죽였다는 것이다.

이 일을 마친 왕방연이 다음과 같은 시로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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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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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죽음을 충절로 마무리한 사람이 엄홍도이다.

엄홍도는 영월의 하급관리였다.

그런 그가 영월에서 단종과 거의 동급으로 존중받는 이유는 충절의 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관풍헌에서 죽음을 맞은 단종은 시신도 수습되지 않고 동강에 버려졌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려졌기 때문에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동강에 나가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는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싣고 동을지산 오르다 노루가 잠자던 자리에 눈이 쌓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곳에 시신을

암매장했다고 한다.

그 곳이 현재의 장릉인 것이다.

이렇듯 단종의 비참한 죽음을 충절로 마무리한 사람이 엄홍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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