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달성 도동서원

위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소개; 소수서원,옥산서원,병산서원,도산서원과 우리나라 5대 서원 중 하나인 도동 서원은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설립한 서원으로,

        1568년 유림에서 현풍면 비슬산 기슭에 사우를 지어 향사를 지내 오다가 1573년 쌍계 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1597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 그 후 1604~5년,2년간 에 걸처 지금의 자리로

        사우를 옮겨 짓고 서원 일곽을 재건(1605년,선조 38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창건되어 김굉필의

        위패를 모셨다)하여 보로동 서원으로 부르다가,

        1607년 '도동'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610년 사액 현판을 봉안 롼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78년(숙종 4)에 정구를 추가 배향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원내의 여러 행사 및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한 중정당,

        유생들이 기거하던 거인재·거의재 외에 수월루·환주문·내삼문·장판각·고직사 등이 있다.
        강당과 사당,그리고 담장이 보물제350호로 지정 되어 있고,서원 전역이 2007년에는 사적 제488호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특히 강학 공간 출입문인 환주문은 그 구성이 특이하며,담장은 아름다운 토담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도동 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없어지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이밖에 전라북도 부안군, 황해도 송화군, 충청남도 천안군에 각각 김구·조광조·이황·이이·주자.

        김일손 등을 모시던 같은 이름의 서원이 설립된 바 있으나 모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탐방일시; 2019.03.02.토요일,맑음

탐방시간; 30분

탐방코스; 주차장-은행나무-신도비-사적비-우월루-환주문-강당-내삼문-사당

가는 길;

   대구 성서 홈플러스-신천천대로-성서IC-남대구IC-옥포JC-북현풍 하이패스 TG-현풍-도동서원 주차장

  (네비;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31.5km,통행료 1.900원)

이미지 보기

 

 

 

△ 도동 서원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한훤당 김굉필(金宏弼,1454~1504)은 조선 전기의 문인으로써 교육자,성리학자로 호는 한훤당(寒暄堂)

    이다.깁종직의 제자로 김일손,김전,남곤,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소학의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성종 1480년에 생원시와 초시에 합격하고,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성종 25년.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에 의해 천거되어 사헌부 감찰,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연산군 때인 1498년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조광조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유배지인 희천군 시장에서 사형되었다.

     중종 반정 후 복권되어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우의정,1575년 영의정 추증되었다.

     그는 1484년,스승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된 뒤에도 훈구파에 대해 간하지 않자,

     이를 계기로 풍자시를 지었다가 김종직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 는 조광조,이장곤,주계정,이심원,김안국,이연경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김종직 사후 사림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김굉필의 문인들과 이들의 학통은 후대에 가서 조광조,백인걸의 학통과 함께 기호 사림파를 거쳐

     서인 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본관은 서흥이며,한성부 출신이다.

 

△ 다람재에서 본 도동서원

 

△ 다람재 입석

 

△ 다람재 정자

 

△ 정자 위에서 본 도동서원과 낙동강

 

△ 정자 위에서 본 도동 서원

 

△ 정자 위에서 북서쪽으로 본 풍경

 

△ 도동 서원 주차장

 

△ 도동 서원 주차장

 

△ 도동 서원 주차장에서 본 도동 서원 전경

 

 

△ 주차장에서 도동서원으로 가는길에 맨 먼저 만나는 400년 묵은 보호수

 

△ 보호수 설명판

 

△ '김굉필 나무' 라고 명명되어 보호하고 있으나,

    실제 심은 사람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으로 도동서원이 사액 된것을 기념하기 위해

    식수 한 것이라 전하고 있다.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남인 예학의 대가로 알려진 한강 선생은

    학문적으로 대선배이자 외증조부이기도 한 한훤당을 제향하는 서원 건립에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 우측으로 달성 도동서원 안내판과 배치도,그 뒤로 문화 관광 해설사의 집         

 

△ 안내판

 

△ 배치도

 

△ 안내판

 

△ 문화 관광 해설사의 집에서는 항상 해설자가 배치되어 도동 서원에 관한 설명을 들을수 있다.

 

△ 문화 관광해설사의 집 뒤에 위치한 도산 서원 경비실

 

△ 수월루 우측의 유물 전시관

 

 

△ 유물 전시관

 

△ 유물 전시관은 임금이 하사한 서책과 재기,경헌록 목판등이 소장되어 있다. 

 

△ 유물 전시관 앞에서 본 동재(거인재)로 가는 계단과 굳게 닫인 문

 

△  유물 전시관 앞에서 본 외상문과 수월루의 옆 모습

 

 

△ 수월루 앞에서 주차장 방향으로 뒤돌아 보면

    좌측으로 신도비와 은행나무 보호수,주차장이 보인다.

 

 

 

 

 

 

△ 수월루 우측 신도비(국역)

                                                

△ 수월루 좌측의 사적비

 

△ 사적비에 새겨진 내용

 

△ 정면으로 본 외상문과 수월루

 

△ 수월루 앞에 도착한다.

    수월루는 도동서원의 정문격인 외상문과 일종의 여유 공간인 누각으로 

    정면3칸,측면2칸의 팔작 지붕 건물이다.

    유생들의 휴식처나 강독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누각에 올라서면 동북쪽에서 흘러오는 낙동강과 고령 개진면 일대의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도동서원이 처음 지어 졌을때는 없었는데 화재로 소실 되었다가 나중에 지어졌다 한다.
    너무 크게 지어져서 중정당에서 바라보는 전면 경관을 해친다고 한다.

 

△ 계단과 수월루,그리고 외상문

 

△ 수월루 아래의 외상문의 모습

 

△ 수월루 아래를 외상문을 지나면 중정당으로 가는 관문인 환주문에 도착한다.

 

환주문
    환주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은 가파르고 좁다.
    환주문 입구에 연꽃 모양의 정지석(붉은 원)이 있는데,   

    연꽃처럼 깨끗하고 학문에 정진할 "참 선비"만을 받아 들인다는 뜻이다.
   "환주"는 주인을 부른다는 뜻이며,
   "환주문"을 마음의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고 한다.

 

△ 환주문을 지나면 강당(중정문)에 다다른다.

    도동 서원의 강당인 중정당은 강학 공간으로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면 5칸,측면2칸의 주심포 기둥에 맞배 지붕으로 된 건물이다.

    좌.우 앞퇴가 있는 한 칸은 온돌방이고 가운데 3칸은 앞면을 개방한 대청이다.

    강단의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그리고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단의 갑석 바로 아랫단 면석 사이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4개가 설치 되어 있으며,

    다람쥐 모양의 길함을 나타내는 동물상과 상서로운 꽃 문양이 좌우 면석에 조각되어 있다.

 

△ 강당의 빨간 원을 그린 돌거북
    신도 끝에 있는 눈꼬리가 무섭게 생긴 돌거북 한마리가 엎드려 노려 보고 있다.
    이는 신성한 배움의 터로 들어왔으니 차분하고 정숙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화제나 도둑 등 나쁜 기운을 막아 내기 위해 두눈을 부릅 뜬 채 여기서 지킨다고 한다.

 

란 원의 눈이 큰 네 마리의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네마리의 용이 낙동강의 범람을 막아 도동 서원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하나는 용이 하늘로 오르듯 이곳에서 학문을 닦은 선비들이 거뜬히 과거에 급제하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한다.

 

노란 원 안의 동입서출
    다람쥐와 같은 작은 동물이 꽃송이 문양과 함께 조각돼 있다.
    다람쥐의 모습이 올라 가는 모습과 내려 오는 모습이 있는데
    이는 동쪽으로 들어 가고 서쪽으로 나오라는 동입 서출을 의미한다고 한다.
    좌우에 새겨져 있는 꽃무늬는 해와 달로 해석하면 음양의 조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 강당의 좌측에는 서재인 거의재가 있으며

 

△ 우측에는 동재인 거인재가 있다.


△ 강당인 중정당 앞에는 중정당,거인재,거의재.장판각 안내판이 있다.

 

△ 중정당
    디딤돌 일곱을 올라야 되는 어른 키 높이의 기단 위에 앉아 있는 중정당
    단청도 입지 않았다.
상 지
    중정당 6개의 기둥 윗부분에 각각 흰 창호지 띠지가 그려져있다.이 띠지가 "상지"이다.
    웃 어른을 모신 도동서원이라는 것을 먼 곳에서도 알아보고 예를 갖추도록 한 하나의  표시이다.
    조선 오현은 김굉필,정여창,이언적,조광조,이황 이다.

 

중정당에 걸린 편액(도동서원)은 두 개다.
    앞 처마에 있는 것은 이황의 글씨를 뽑아서 새긴 글씨이고
    지금 사진 속의 글씨는 선조의 사액 현판으로 경상도 도사 배대유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사액"은 임금이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을 공식 인정하여 해당 서원의 액호 (이름)을 정해 판에 새겨

   내려 주는 것이다.

 

 

 

 

 

 

 

△ 중정당 내부 천장 모습

 

△ 강당 우측 옆에서 본 모습

 

△ 강당 옆에서 본 모습

    뒤쪽에 보이는 곳이 사당이다.

    제사 지낼때 바칠 제물을 살피는 곳인 사각형 모양의 생단이 보인다.

     담장은 음양의 조화를 통해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장식 효과를 최대한 살린것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토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전국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중정당에서 바라본 앞 전경
    아마도 그 옛 선조께서 수월루를 창건 하였다면

    저 멀리 낙동강까지 바라 볼 수 있도록 가능한 조화를 깨뜨리지 않게 만들었을 것 같다.

 

 

△ 장판각은 강당의 좌측 옆에 위치하고 있다.

    장판각은 김굉필의 경헌록 목판본을 보관하는 곳이다.

 

△ 장판각을 지나 강당 뒷편으로 가면 사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다.

      

△ 사당으로 들어서기 위해 지나는 관문인 내삼문.

    내삼문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올라서면서 조심스레 자세히 보면 여러 문양의 조각을 만날 수 있다.
    다 그 이유들이 있다고 한다.
    수월루가 외삼문이면 이곳 사당 입구의 문이 내삼문이다.

    사당은 굳게 닫혀있다.

 

△ 사당으로 들어서기 위해 지나는 관문인 내삼문.

 

△ 내삼문 사이로 사진기를 내밀어 찍은 출입이 통제된 사당.

     사당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위패와 한강 정구 선생의 위패를 모신 제향 공간이다.

    정면3칸,측면3칸의 주심포 기둥에 맞배 지붕으로 된 건물로 

    정면3칸에는 칸 마다 밖여닫이 널문을 달았고  내부는 통간으로 틔웠다.

    정구 선생은 서원 건립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유품 정리 할때의 공헌을 인정해서

    1678년 추가 배향하였다.

    향사는 매년 음력2월과 8월에 중정일(中丁日)에 지내고 있다.

 

△ 한강 정구 선생(1543~1620.광해11년1월5일.78세)은

    동방 심학의 조종이자 조선 예학의 선도자인 정구 선생의 호는 한강이며,본관은 청주다.

    1543년 중종 38년,성주 사월리에서 출생하였고,1563년(21세)과 1566년(24세)에 각각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찾아뵙고,인과 의를 이아 받으며 영남 학파의 주요 일원이 되었다.

    또한, 미수 허목에게 학맥을 전함으로써 근기 실학의 연원이 되었다.

    선조13년인 1580년(38세),창녕 현감으로 시작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는데,

    내직으로는 대사헌 겸 세자 보양관에 이르렀고,외직으로는 안동대도호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전체대용으로 요약되는바 궁리및 치용을 종합적으로 성취하였다.

    인조1년인 1623년에는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고,

    효종8년,1657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성주의 회연서원과 대구의 도동서원 등 18곳에 제향되었다.

 

△ 사당 우측으로 통제된 증반소

 

△ 강당 우측 옆 중문

 

 

△ 중문을 들어서면 전사청과 곡간채가 있다.
    전사청은 서원 일을 돕는 사람들이 유생들의 학문에 증진 할수 있도록 음식,빨래,청소 등을 하면서

    살든 곳이다.지금은 관리인이 살고 있다.
    곡간채는 전사청 아래에 있다.

 

 

 

 

 

 

 

 

 

 

 

정료대
    옛 서원의 조명시설이다.
    제례같은 야간 행사때 돌판위에 관솔불을 피워 강당과 마당을 밝혔다.

 

 

 

환주문에서 바라보는 수월루...
    수월루 그 너머로 400년된 황금빛 은행나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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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달성 도동서원        2019.03.02.토요일,맑음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위치한  

소수서원,옥산서원,병산서원,도산서원과 우리나라 5대 서원 중 하나인 도동 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설립한 서원으로,

1568년 유림에서 현풍면 비슬산 기슭에 사우를 지어 향사를 지내 오다가

1573년 쌍계 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

1597년 임진 왜란으로 전소되었으나,

그 후 1604~5년,2년간 에 걸처 지금의 자리로 사우를 옮겨 짓고 서원 일곽을 재건

(1605년,선조 38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창건되어 김굉필의 위패를 모셨다)하여 보로동 서원으로 부르다가,

1607년 '도동'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610년 사액 현판을 봉안 롼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78년(숙종 4)에 정구(鄭逑)를 추가 배향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원내의 여러 행사 및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한 중정당,

유생들이 기거하던 거인재·거의재 외에 수월루·환주문·내삼문·장판각·고직사 등이 있다. 
강당과 사당,그리고 담장이 보물제350호로 지정 되어 있고,서원 전역이 2007년에는 사적 제488호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특히 강학 공간 출입문인 환주문은 그 구성이 특이하며,담장은 아름다운 토담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되었으며,도동 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없어지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이밖에 전라북도 부안군, 황해도 송화군, 충청남도 천안군에 각각 김구·조광조·이황·이이·주자.

        김일손 등을 모시던 같은 이름의 서원이 설립된 바 있으나 모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 대구 달성 도동서원        2019.03.02.토요일,맑음

 

⊙ 대구 달성 도동서원        2019.03.02.토요일,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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