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구 팔공산(八公山) 동봉

해발; 1.167m

위치; 대구시 동구 공산동

소개;

  중악인 팔공산은 삼국시대부터 부악(父岳), 중악(中岳), 공산(公山), 동수산(棟藪山) 등으로 불렸으나,

  왕건후백제의 견훤과 후삼국의 패권을 다투며 이곳에서 벌인 전투에서

  신숭겸을 비롯한 8명의 수를 잃게 되자 이를 기리기 위해 팔공산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팔공산은 1980년5월13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팔공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은 1960년 초반 군사 시설과 방송 통신 시설물로 일반인에게 통제 되어 왔으나,

  최근 40년만인 지난 2009.11.1자로 대구시가 1억 1800만원예산을 투입하여

  등산로 정비및 시설물의 정비로 개방 하게 되었다.

   ※신라5악(新羅五岳)이란?

    신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산악 숭배 사상을 가지고 산신에 대해서 제사를 지냈는데,

    삼국통일 이전 경주  평야를 중심으로 경주 주변의 오악을 숭배 했었으나 삼국을 통일하여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국토의 사방과 중앙에 해당하는 지역에 위치한 대표적인 산악을 지정하여 오악으로 삼았는데,

     동악(東岳)-토함산(吐含山), 서악(西岳)-계룡산(鷄龍山), 남악(南岳)-지리산(智異山), 북악(北岳)-태백산(太伯山),

     중악(中岳)- 팔공산이 그것이다. 

산행일시; 2014.01.03.금요일.맑음

산행코스; 집단 시설지구-깔딱 고개-빵재-낙타봉-동봉-원점 회귀 산행

산행시간; 중식포함 5시간

가는길;

  대구 성서 홈플러스- 신천대로-침산교 U턴-서변동-연경동-파군재-백안 삼거리-동화사 -통일 대불 방면  우회전

 -집단 시설 탐골 식당 

  (네비; 대구시 동구 용수동 14-7번지-35km,50분 소요,통행료 없음)

 

이미지 보기

 

▲ 동화사 후문 소공원에 위치한 탑골 등산로 입구인 탑골 식당에서 들머리를 잡는다. 

   탑골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좌측에 동화 캠핑이 나온다.이곳에서 깔딱 고개 입구 까지는 완만한  등산로다.

 

 

▲ 탑골 식당 왼쪽에 세워진 안내 표시목(관리사무소 150m←,동화사0.6km→,동봉3.4km↑,염불봉2.2km↑)

 

 

▲ 계류 사이 나무 테크와 스테인레스로 단장된 시멘트 등산로를 오른다.

 

 

▲ 왼쪽으로 난 등산로를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깔딱 고개에서 만난  대구 올레길 안내판.

 

 

▲ 깔딱고개엔 나무 계단을 설치하여 쉽게 오르도록 만들어 놓았다.

 

 

▲ 깔딱 고개를 오름다 보면 등산로 한 가운데 안내판이 놓여있다.

 

 

 

 

 

 

▲ 깔딱 고개를 지나 염불암 갈림길에는 통나무 계단을 설치해 놓았다.여기서 케이블카 능선(신림봉)

    방향 통나무 계단을 오른다.

    이정표(동화 집단 시설지구0.7km←,염불봉1.7km→,동봉2.7km→.신림봉↑) 

 

 

▲ 경사진 등산로를 오르면 쉼터 바위가 나온다.

 

 

 

 

▲ 경사진 곳을 오르면 커다란 암석 무리가 앞을 가로 막는다.

    우회하여 올라간다. 

 

 

 

 

▲ 가파른 목계단을 오르면 

 

 

▲ 로프 구간을 올라 

 

 

▲ 왼쪽 들머리가 관망되고 우측으로는 팔공산 자연 공원이 보인다. 

 

 

  시멘트 등산로를 따라 

 

 

▲ 마치 암석을 쌓아 놓은 듯한 바위가 보인다. 

 

 

암반 위를 지나

 

 

▲ 계단을 오르면 조망점인 케이블카 정상이다.

 

 

▲ 장군상을 지나 

 

 

▲ 케이블카 상단역 식당에 도착하여

    바라 다 본 낙타봉과 비로봉,동봉이다. 

 

 

▲ 전망대에서 본 좌측으로 서봉-비로봉-동봉이 보인다. 

 

 

 

 

 

 

▲ 이정표에는 동봉까지 2.2km라고 알리고 있다.

 

 

▲ 눈 쌓인 돌계단을 올라간다. 

 

 

 

 

▲ 빵재 갈림길

   돌계단으로 만들어진 빵재는 동화사와 동봉,케이블카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 선돌인 낙타봉의 괴석들이다.

 

 

▲ 낙타봉에 서 있는 이정표.

 

 

▲ 낙타봉의 데크 전망대.

 

 

▲ 낙타봉에서 본 갓바위가 있는 인봉이 전망되고 뒷편으로 뽀족한 환성산.

 

 

▲ 낙타봉에서 본 케이블카 정상 

 

 

▲ 낙타봉을 지나면 가파른 너럭 바위 지대를 오른다.

 

 

 

▲ 철탑 삼거리 이정표에 도착한다.

     동봉까지는 0.8km 남았다고 표시하고 있다. 

 

 

난간과 바위를 지난다. 

 

 

▲ 비로봉이 있는 송신탑이 보이기 시작한다. 

 

 

▲ 비로봉 갈림길 이정표에 도착한다.

   동봉과 비로봉의 갈림길에 서 있는 이정표에는 비로봉 0.4km 거리에 있다고 알리고 있다. 

 

 

▲ 동봉에 올라 가기 전 헬기장과 함께 있는 석조여래 약사입상을 지나 우측으로 난 계단으로 간다.

 

 

▲ 아직 눈이 녹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 정상에 도착한다.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후삼국의 패권을 다투며 이곳에서 벌인 전투에서

신숭겸(申崇謙)을 비롯한 8명의 장수를 잃게 되자 이를 기리기 위해 팔공산(八公山)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후삼국 통일의 과정에서 벌어진 3대 전투로는

927년의 동수대전(대구 팔공산), 930년의 병산대전(안동),934년의 운주대전(충남 홍성)이 있다.

팔공산 공수전투에서는 왕건이 대패를 하였고, 3년 후 안동 병산전투에서는 반대로 견훤이 패배하였다.

그리고 운주전투에서도 후백제가 참패함으로써 고려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중 이곳 팔공산에서 있었던 동수대전(棟藪大戰)은

왕건이 30여년 동안에 치른 수많은 전투 중 거의 유일하게 참담한 패배를 맛본 전투이다.

 

당시 후백제군과 고려군의 이동 경로나 전투의 과정에 불분명한 부분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인 전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927년 9월, 후백제의 견훤은 근암성(문경)과 고울부(영천)를 함락시켰으며, 곧장 말머리를 서라벌로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왕건은 후백제군이 개경을 향하여 북진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훤이 갑자기 고려와 화친을 맺은 신라를 치기 위해 말머리를 돌린 것이다.

왕건은 견훤의 양동작전에 완전히 속은 것이다.

고울부가 함락 당하자 신라 경애왕은 왕건에게 급히 구원을 청하였다.

왕건은 시중 강공훤(康公萱)에게 군사 1만을 주어 후백제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견훤은 이미 서라벌에 입성하여 경애왕이 있는 왕성으로 내달렸다.

서라벌은 일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하고 말았다.

포석정에서 재를 올리며 신라의 무사 기원을 빌던 경애왕은 결국 자결을 선택 하였고,왕비는 견훤에게 능욕 당한다.

견훤에게 있어서 신라 경애왕은 눈에 가시처럼 미운 존재였다.

경애왕은 신라의 무관 출신인 견훤(견훤은경북 문경시 가은읍 출신임)을,

모반을 일으켜 스스로 나라를 세운 역적으로 간주하여 노골적으로 비난하였으며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그를 제거해 줄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견훤은 경애왕의 이종 사촌인 김부(金傅)를 왕위(56대 경순왕)에 앉혔으며,

왕건을 신라로 끌어들이는데 앞장섰던 신라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을 잡아 죽였다.

서라벌을 무참하게 약탈한 후백제군은

경순왕의 동생 김효렴(金孝廉)과 재상 김영경(金英景)을 인질로 잡고 개선 길에 오른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5천 명의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퇴각하는 후백제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전한다.

신숭겸(申崇謙)을 좌장군, 김락(金樂)을 우장군으로 삼았으며 자신이 선봉에 섰다.

송악을 나선 군사들은 충주를 지나 문경 새재를 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상주와 구미를 지나치고 선산과 왜관을 지나 남으로 남으로 내달렸다.

지칠대로 지친 고려군이 멈춘 곳은 팔공산 동쪽 기슭 은해사(銀海寺) 입구였다.

귀환하는 후백제군을 기다리며 매복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왕건이 오히려 견훤의 매복에 걸려들고 마는 결과가 오고 말았다.

왕건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고 있던 견훤이 먼저 매복하여 왕건의 군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견훤의 군사는 맹수처럼 달려 들었다. 움직임은 민첩하고 정확했다.

그에 반해 계곡 아래에 포위당한 왕건의 군사는 우왕좌왕 허우적거리며 죽음을 맞이하였다.

신숭겸의 권유로 퇴각 명령을 내린 왕건은 적군의 포위망을 뚫고 팔공산 남쪽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우장군 김락(金樂)을 비롯한 장수들이 왕건을 엄호하며 혈로를 뚫었다. 하지만 견훤군의 추격은 집요하였다.

견훤의 책사 최승우(崔承祐)는 기필코 왕건의 목숨을 끊고자 부하들을 독려하였다.

결국 왕건은 지금의 지묘동(智妙洞) 일대까지 밀리게 되었다.

이때 상황의 긴박함을 느낀 신숭겸은 자신이 왕건의 갑옷으로 변복한 채 적진으로 달려 나갔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왕건은 왕산(王山)을 빠져 나와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대신하여 죽은 신숭겸을 생각하면 비통하고 한탄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신숭겸 외에도 김락(金樂), 전이갑(全以甲), 전의갑(全義甲 전이갑의 동생), 전락(全樂 전이갑의 사촌 동생),

 

호의(扈義 또는 扈元甫) 등 8명의 장수를 이 동수전투에서 잃었다.

 

왕이 비탄에 빠져있자 평소 신숭겸과 가까웠던 박술희(朴述熙)가 나섰다.

 

그는 왕명을 받아 기병 오백을 거느리고 공산(公山)으로 향하였다. 견훤군이 물러간 전쟁터는 처참하였다.

 

시신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박술희는 마침내 머리통이 잘려 나간 신숭겸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 동봉 정상부의 파도와 같이 생긴 바위 

 

 

▲ 정상에서 본 칼날능선 방향 

 

 

▲ 동봉에서 본 비로봉과 송신탑 

 

 

 

 

 

 

 

▲ 동구 동화사 집단시설지구에 위치한 탑골 지원센터(10:00)에서 시작한 팔공산 동봉 산행은

    깔딱고개(10;07)를 지나 염불암 삼거리(10;26),케이블카 정상(11;15),낙타봉,철탑 삼거리(12:50),

    동봉(13:30) 정상에 이르기 까지 3시간30분이 걸렸다.정상(14;10)에서 하산(16;00) 완료까지 

    2시간을 감안하면 총 5시간 30분이 소요된 팔공산 동봉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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