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2019.11.14.목요일,맑음

1945년10월23일,'대한독립촉성 협의회'는 조선호텔에서 한국 민주당,한국 국민당,조선 공산당,건국동맹 등

각 정당 단체 200여 명이 모여 조직한 대한민국의 단체이다.

안재홍 제안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 칭하고 이승만이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되었다.

통일 문제 등에 이승만에 일임한다는 의견을 표하였다.

다만, 공산당,학병동맹,청년단체 대표자 등 4,5단체에서는 상당히 강경한 의견도 있어 인민공화국이 우리

나라의 총의에 가깝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945년11월2일,천도교 강당에서 이승만의 사회로 안재호.여운형,박헌영,이갑성 등 각 정당 단체들이 모여, 조선의 즉시 독립, 38도선 철거, 신탁 통치 절대반대를 선언하였다.


회장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좌.우익을 총괄하는 남한 내 유일한 정치 체계가 되어 자신이 민족 통일 전선의

최고 지도자로 부각되기를 의도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지를 내세우면서도 임정이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임정 귀국 전까지 독촉의 조직을 완성하고 좌익 세력을 독촉에 포섭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1945년11월23일,이승만은 임정 제1진의 서울 도착을 계기로 독촉의 중앙 집행위원회 구성을 서둘렀다.

1945년11월28일부터 시도된 중앙 집행위원회 구성은 전형위원 선출 방식에서 갈등을 드러냈다.

   여운형은 전형위원 7명 중 5명이 한국 민주당원이라면서 퇴장했다.

   조선 공산당 측 인사는 한 명도 없어 '인민당'과 '조선 공산당'은 전형위원회에 불참했다.

   임정 세력은 독자적인 활로를 꾀했다.

1945년12월13일, 자신이 지명한 전형위원들을 소집하여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전형위원회를 진행했지만

   좌파 세력은 독촉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임정 세력 역시 임정 인사들을 독촉에 참여시킨 후 임정을 해산한다는 이승만의 계획을 받아 들일 수

   없었고 특별 정치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조직화 방안을 모색했다.

   탁치 정국 하인 1946년1월15일, 독촉은 제2회 중앙 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임정 세력 중심의 비상정치

   회의를 흡수한다고 발표했다. 독촉을 주축으로 비상정치회의를 흡수해서 임정을 수립한다는 계획이었다.

1946년1월18일, 독촉은 비상 '국민회의'로 개칭하고 이승만에게 최고 위원 선출권을 일임했다.

   반탁 투쟁을 반소·반공과 연결시키면서 임정 세력을 흡수하고자 한 것이었다.

   독촉은 좌.우익 망라,임정 포섭 등 처음 계획에는 실패했지만 최고 지도자로서 이승만을 부각시킨다는

   데에는 부응했다.

  '대한 독립 촉성 협의회'는 1945년10월23일에 창설하여 1946년1월18일 해체된다.

조국의 완전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강력하면서도 영구적인 조직체를 만들 목적으로,

이승만 중심의 1946년1월18일 해체된'대한 독립 촉성 협의회'와 

김구 중심의 기존의 반탁 운동 기관인 '신탁통치 반대국민총동원 중앙위원회'가 통합하여

1946년2월8일에 '대한 독립 독촉국민회'(독촉 국민회)가 발족된다.


범국민적인 반탁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의 활동 반대,좌익 운동의 봉쇄 등이 행동 목표였으므로

좌익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우익 진영의 대표적 정치 단체였다. 

1946년6월, '민족 통일 총본부'로 개편되어 재발족하였다.

총재 이승만,부총재 김구.김규식,고문에 권동진,김창숙,함태영,조만식,오화영,회장에 오세창이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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